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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6)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위더스푼

벤자민노인이 의외의 말을 던졌다.
“위더스푼 목사가 68년에 이 땅에 온 것이야 말로 당신들 말대로 신의 안배였다고 나는 생각 한다네, 자네들 얼마전에 위더스푼이 발표한 설교 문건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세 사람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곧이어 말을 이었다.
“이번 선언서의 시작을 단도 직입적으로 인간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신에 의해 창조 됐다고 쓴 것도 그 글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글이 바로 유명한 설교 〈인간의 노여움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 (1776년 5월)였다.
독립선언 직전인 그때 그가 행한 이 설교는 식민 13개 주 전체에 인쇄되어 읽혔다. 각지의 독립노선 신문들이 나섰던 것이다.
위더스푼은 그 글(설교)에서 “영국의 압제에 맞서는 식민지의 투쟁은 단순한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 안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거룩한 사명”이라고 역설 했다.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성서의 사례들을 원용하면서 매우 논리적으로 이를 논증해 대중과 교회의 불안감을 씻어내고 독립의 명분을 강력히 제공했던 것이다. 그때 대륙회의 내부와 식민 전 지역은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 아니다 아직은 영국왕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를 놓고 들긇고 있었다. .시편 76편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분노와 열정을 통제하여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내용이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영국의 압제에 맞서는 정의로운 투쟁과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며,
당시 성공회를 비롯해 장로교 감리교 보수적 교단에서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영국 왕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위더스푼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왕이 국민의 자연권을 침해하고 폭정을 휘두른다면, 그 정권은 이미 하나님의 정통성을 상실한 것이므로 “폭정에 대한 저항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 이라고 했다.
존 위더스푼 목사가 이처럼 열렬한 독립운동가가 된 것은 스코틀랜드 시절부터 체화된 종교적·시민적 자유 수호 의식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영국 왕실은 스코틀랜드에서도 성공회(Episcopacy) 권한을 강화하고 교회·지역 자치 사안에 간섭하고 탄압했다. 위더스푼은 이를 신앙과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거기다 그무렵 스코트랜드에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고를 꿈꾸는 자코바이트(제이콥을 따르는 이들)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위더스푼은 이들과도 갈등 관계에 있어 한때 납치를 당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부터 종교적 자유와 시민 자치를 지키기 위해 맞섰던 경험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와서 보니 영국 왕실에 저항하는 과정과 이유가 일맥상통한다고 보았고 성직자이자 교육자인 자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
시민적 자유를 잃고 종교적 자유를 온전히 보전 한 역사는 없다는 신념 아래, 그는 교회와 강단을 잠시 뒤로 하고 1774년 뉴저지 혁명 위원회에 합류했고, 아는대로 1776년 역사적인 독립선언서 서명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혁신 지도자가 되었다.
“자네들 위더스푼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나서 일을 성사 시켰다는 사실 알고 있나? “
어젠가 위더스푼을 프린스턴 총장으로 추천한 사람 가운데 자신도 들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좌중에게 금시초문이었다.
당초 조지 휫필드의 추천을 받고도 위더스푼은 망설여야 했다. 향리에서 할일이 더 많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휫필드는 자신을 따르던 휘하 인물 가운데 리처드 스턱톤을 에딘버러로 보내 위더스푼을 설득하게 한다.
“스톡턴 변호사가 그때 런던에 있던 나를 찾아왔지, 내가 위더스푼을 설득할 비책을 일러줬지 않은가, 그래서 일이 성사됐던 게야.”
그무렵 벤자민은 런던에 주로 거주 하고 있었다. 향리인 펠실베이니아 뿐 아니라 버지니아 메사츄세스 뉴저지 까지도 자신들의 이익을 런던에 대변하는 주재관 역할을 맡아 달라고 부탁 해 왔기 때문이다. 75년 여름 까지 그일을 계속 했다.

리처드 스톡턴 (Richard Stockton)은 변호사이자 판사를 역임한 인물로 뉴저지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장로교 평신도 리더이자 프린스턴 이사였다. 스코틀랜드를 직접 방문해 위더스푼을 총장으로 초빙한 당사자로, 대륙회의 내에서 위더스푼 목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종교적 동지였다. 전쟁이 치열해 졌을때 영국구 포로가 되아 갖은 고생을 다했으나 끝까지 신념을 지킨 투사다.
“두 사람이 유난히 붙어 다니 더군요.”
“이번에도 다른 의원들이 뭐라 나서려 할때 두 사람이 제지 하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 했습니다.”
“그나저나 그 비책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공화주의를 실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라고 설득하라는 것이 나의 조언 이었다네’
“젊은 시절에 잠깐 만났다면서 어떻게 공화 주의자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
“자네들도 잘 아는 필라델피아의 의사 밴자민 러시가 전해준 말이야. 그가 에딘버러 와 세인트 엔드류에서 유학할 때 위더스푼괴 친했다고 하더군.”
여기서 또 한사람 위더스푼과 빈자민을 연결 하는 인물이 등장 한다.
벤자민 러시 (Benjamin Rush – 펜실베이니아 대표, 독립선언서 서명자) 프린스턴 출신의 저명한 의사이자 의회 내 핵심 인물이다. 에든버러 유학 시절 위더스푼과 절친하게 지넸고 평생 위더스푼의 기독교적 공화주의와 ‘스코틀랜드 상식학파’ 철학에 깊은 영감을 받아 이를 신념으로 여겨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영국(런던)에 머물렀던 시기는 크게 청년기 1회 와 외교관· 식민지 사절 시기를 합쳐 총 3차례였다. 1차 체류는 1724년 12월 ~ 1726년 7월 약 1년 6개월 젊은 시절 견습 인쇄공 신분으로 런던에 건너와 인쇄소에서 일하며 견문을 넓혔다.
2차 체류는 1757년 7월 에서 약 5년여 동안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의회의 대표 자격으로 영국 정부 및 펜 가문과의 세금·자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어 머물렀다.
3차 체류가 가장 길었는데 1764년 부터 75년 까지 10년 이상의 기간을 펜실베이니아뿐만 아니라 조지아, 뉴저지, 매사추세츠 등 여러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재 외교관 역할을 했다. 물론 자주 식민지로 돌아와 일을 처리하고 강연을 다녔다. 그는 식민지 통합 우체국장의 직분을 맡고 있기도 했다.
전에 언급한 대로 독립 전쟁 직전 양측의 긴장을 완화하려 애썼으나 결렬된 후 미국으로 급히 귀국해 대륙회의에 합류했다.
그동안 그의 영국 런던 [36번지 Craven Street] 꽤 컸다는 전셋집은 런던을 찾은 식민지 주요인사, 유학생, 정치 지망생 괸리지망생 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위더스푼은 1723년 스코트랜드 주도인 에딘버러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특했던 그는 모친의 도움으로 4살 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으며, 13세에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라틴어, 헬라어, 불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애든버러를 거쳐 그곳 명문인 세인트엔드류 신학교를 졸업한 뒤, 174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영적으로 냉랭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온건파(Moderates)’와, 전통적인 칼뱅주의와 뜨거운 신앙을 강조하는 ‘복음파/민중파(Popular Party)’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스승인 휫필드 목사의 영향으로 장로교내에 있는 온건파(Moderates Party) 에 맞서 싸우는 강경파(Popular Party)로 분류돼 활약했다. 온건파를 상식파로도 불렀고 강경파는 부훙파 복음파로도 불렸다.
그는 복음파 신학을 받아들여 온건파의 세속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엘리트로 성장 하면서 신학적으로 대각성 운동의 핵심 가치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위더스푼은 휫필드나 테넌트처럼 감정적으로 울부짖는 과격한 형태의 부흥(열광주의)에는 다소 신중했다. 위더스푼이 명성 있는 복음파 목사로 성장했을 때,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스승 조지 휫필드가 그를 프린스턴 대학교(당시 뉴저지 대학) 총장으로 강력히 추천하여 초빙했다.
1766년 5대 총장 새뮤얼 핀리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프린스턴 대학의 전신인 뉴져지 대학의 총장의 후임의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1768년에 45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 부인과 다섯명의 자녀를 데리고 도착 했고, 일주일 후, 프린스턴의 낫소 홀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 제목은 ‘경건과 학문의 일치’였다. 고린도전서 3장 5-7절의 말씀으로는 ‘복음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부터’라는 제목으로 만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열심으로 기도하게 된다라는 적용으로 마무리 하였다.
시민의 자유없이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당시로서는 퍄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프린스턴대학교를 끌어갈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위더스푼 신학의 핵심은 캘빈주의(장로교 신학)와 스코틀랜드 상식 상식론(Scottish Common Sense Realism)의 결합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정치제도 설계에 이식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부패 가능성을 철저히 믿었다. 따라서 “아무리 선한 지도자라도 권력을 독점하면 반드시 부패한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훗날 미국 헌법의 핵심 원리인 삼권분립과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장로교의 의회식 대의제를 국가화 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교인들이 대표(장로)를 뽑아 노회와 총회를 구성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이 방식은 미국 공화제(Republic)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다. 대륙회의에서 그는 중앙정부의 폭정을 막으면서도 각 주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의제 공화국 구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으로 대각성 운동의 ‘거듭남과 복음 신앙’을 확고히 고수하면서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학문과 합리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시각 덕분에 그는 신앙에만 갇히지 않고 사회 정치적 문제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가 총장으로 임직 후 프린스톤의 졸업생은 목회자 지망보다는 다른 세속적 직업으로 더 많이 몰리게 되었다. 13명의 대학 총장, 23명의 판사, 3명의 대법관, 21명의 상원의원, 29명의 하원의원, 12명의 주지사, 1명의 부통령(애런 버), 1명의 대통령(제임스 매디슨)을 배출하였다.
위더스푼의 영향력은 그가 키워낸 제자들을 통해 미국 건국 문서(독립선언서, 연방헌법, 권리장전) 곳곳에 체화되었다. 특히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위더스푼 밑에서 연장 학업까지 하며 그의 도덕철학과 정치학을 깊이 흡수했다. 그의 유명한 명구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 없을 것이다(If men were angels, no government would be necessary)”라는 구절은 위더스푼이 가르친 인간관의 직접적인 투영이다.
위더스푼은 종교적 신념과 계몽주의적 이성을 조화시켜, 식민지 민중에게는 “독립을 위한 신앙적 명분”을, 정치인들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견고한 공화제 틀”을 제공한 미국 건국의 핵심 사상가였다.

“위더 스푼을 보면 조지 휫필드 목사가 생각 난다네, 요즘 그의 활약을 보면,,,”
“자랑스러워 히실 겁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는 존 위더스푼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기 전인 1770년에 서거했기 때문에, 제자의 독립선언서 서명(1776년)이나 직접적인 독립운동 행보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휫필드의 사상은 위더스푼이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휫필드 없이 위더 스푼은 탄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여기에도 벤자민 플랭클린은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목사의 인연은 18세기 대서양 양안을 통틀어 가장 지적이면서도 묘한 인간적 울림을 주는 우정 중 하나로 꼽힌다. .
이 두 사람의 본격 만남은 1739년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프랭클린은 33세의 왕성한 출판업자였고, 큰 뜻, 큰 소명을 안고 영국에서 식민지로 건너온 선교목사 휫필드는 불과 24세의 청년이 였다.
휫필드가 필라델피아에 막 와서 숙소를 찾지 못하자, 프랭클린은 선뜻 자신의 집을 숙소로 내줬다. 런던에서 스치듯 잠깐 만나 인연 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그러면서 프랭클린은 그의 설교문과 저서, 일기 등을 독점 출판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 잘생긴 거구의 설교자가 북미 대륙을 흔들 것을 내다 본 혜안이었다.
이성주의자이자 이신론(Deism) 성향을 지닌 프랭클린과, 감성적이고 정열적인 복음주의 설교가 휫필드는 사상적으로 극과 극이었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직관이 두 사람을 먼저 엮었다.
휫필드는 기존 전통 교회의 반발로 설교 단상을 얻지 못하자 야외 설교로 나섰는데, 자신의 설교와 신학적 메시지를 13개 식민지 전역으로 널리 퍼뜨려 줄 미디어가 필요했다. 프랭클린이 바로 그 역할을 해낸 훌륭한 창구였다.
휫필드는 이내 뛰어난 웅변술, 심금을 울리는성경 해석과 박학한 지식으로 그야말로 신성(Superstar)으로 떠올랐다. 전역에서 엄청난 인파를 모았고 휫필드의 이런 돌풍은 프랭클린의 인쇄소와 신문사, 팬실바니아 가제트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프랭클린은 휫필드의 신학적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웅변술과 인간적 매력에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프랭클린은 자서전에 휫필드의 설교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휫필드가 조지아주에 고아원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할 때였다. 프랭클린은 조지아가 너무 멀고 필라델피아에 짓는 게 낫다고 생각해, ‘절대 헌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설교장에 갔다.
“주머니 속에 동전(동), 은화, 금화가 있었다. 그의 설교가 진행되면서 나는 마음이 약해져 동전을 내기로 했다.”
“설교가 더 진행되자 동전으로는 부족하다 느껴져 은화를 내기로 마음을 바꿨다.”
“설교가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설복되어 주머니에 있던 금화까지 포함해 모든 돈을 바구니에 털어 넣고 말았다.”
또 실험정신이 강했던 프랭클린은 휫필드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들리는지 직접 측정하기 위해 설교 중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재기도 했습니다. 프랭클린의 계산에 따르면 휫필드의 성량은 야외에서 무려 3만 명 이상에게 전달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휫필드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왕이나 특정 제도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위에 있음을 설교했고, 이는 식민지인들에게 영국 왕실에 저항할 수 있는 심리적·사상적 자양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신앙과 철학을 두고 평생 동안 끊임없이 대화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휫필드는 프랭클린의 영혼을 깊이 아꼈고, 끊임없이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개종을 설득했다.
휫필드는 편지에서 프랭클린의 정직함과 사회적 기여를 칭찬하면서도 늘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는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혜와 학식도 결국 아무 의미가 없네.”
프랭클린은 ‘실제 삶에서의 도덕적 행위와 선행’을 종교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휫필드가 “사람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으며 본성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고 주장할 때, 프랭클린은 인간의 자발적 도덕성과 이성의 힘을 변호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토론은 절대로 감정적인 비난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지적 능력과 진실성을 깊이 존중했기 때문이다.
교단과 정통파 신학자들이 휫필드를 “광신도”라며 비난할 때도 프랭클린은 끝까지 그를 언론과 출판으로 보호했고, 휫필드가 1770년 세상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편지를 교환하며 뜨거운 우정을 유지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조지 휫필드는 계몽주의의 이성과 대각성 운동의 신앙이라는, 18세기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두 시대 정신이 한 공간에서 만나 교유한 최고의 사례였고 사상적 타협은 없었지만, 서로의 진정성을 알아본 두 사람의 교류는 이후 미국인들의 정체성—이성적 실용주의와 열정적 신앙의 공존—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프랭클린과 휫필드가 ‘이성 vs 부흥’이라는 양극단에서 우정을 나눴다면, 위더스푼은 그 두 가지를 한 몸에 결합한 인물이었다.
위더스푼은 프랭클린의 도움으로 휫필드가 다져놓은 영적 자유의 토대 위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유(독립)가 필수적이다”라는 논리로 식민지인들을 독려하며 개신교 장로교 독립운동의 정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위더스푼의 가세로 장로교는 청교도 회중교회와 함께 독립전선의 쌍두마차가 된다. 물론 당시 장로교단 내에도 왕당파(Loyalists)나 독립 불가(중립)를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뉴잉글랜드나 중부 식민지(뉴저지, 펜실베이니아)의 장로교인들은 독립에 열렬히 앞장선 반면, 노스캐롤라이나와 이라크 등 남부 해안가 및 오지에 정착한 일부 스코틀랜드 이민자 장로교인들 중에는 영국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왕당파가 많았다.
목회자와 성도 중 일부는 언급힌 대로 성경 구절(로마서 13장 등 ‘위정자에게 복종하라’)에 근거해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깨는 것에 종교적·도덕적 거부감을 가졌다. 이들은 무력 충돌보다는 영국 의회와의 ‘평화적 타협과 화해’를 원했던 독립 불가파였다.
독립전쟁이 본격화 하면서 장로교 내의 독립파(Patriots)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이 전쟁을 ‘장로교인의 반란(Presbyterian Rebellion)’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독립전쟁 당시 장로교회와 교인들은 영국군의 최우선 표적이 된다. 왕당파는 장로교를 혁명의 핵심 선동자로 여겨 ‘검은 장로교당(Black Regiment)’이라 부르며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뉴저지와 뉴욕 일대의 장로교 예배당 수십 곳이 영국군에 의해 불타거나 군마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개조되었다.
프린스턴 출신의 장로교 목사 존 로스버러는 민병대 군종목사로 참전했다가, 1777년 트렌턴 전투 직후 영국군 대원들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위더스푼의 동료 스톤턴이 독립을 보지 못하고 81년 세상을 떠난 것도 영국군의 잔인한 고문 때문이었다.
위더스푼의 프린스턴 대학(뉴저지 대학)은 영국군의 최우선 공격 목표가 되어 대포 공격을 받았다 본관 건물이 군영으로 징발당하기도 했다.
당시 장로교는 영국의 폭정에 맞서 독자적인 자치와 자유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종파였으며, 대륙회의 내 에서도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대표들이 위더스푼의 연설과 사상에 가장 열렬히 호응했다.
뉴저지의 스턱톤과 펜실베이니아의 러시 말고도 펜실베이니아의 제임스 윌슨, 찰스 캐럴의 동료인 메릴랜드의 위리엄 페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제임스 윌슨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장로교 전통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위더스푼과 정치적·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며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윌리엄 패카는 메릴랜드 대표,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장로교적 배경과 신앙적 유대를 지닌 인물로, 의회 내 장로교 세력의 독립 기류를 형성하는 데 동참했다.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인 격변기 이후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계몽주의의 큰 물결에 직면했던 때였다. 목회자들이 회개와 중생의 체험 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세워야 할, 독립과 연관된 사고들이 급물살을 탈 때, 위더스푼은 그 흐름에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 정치적 참여를 한 보기드문 성직자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않았다. 그의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도입은 코튼 매더와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칼뱅주의의 가르침에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자 비판자들은 위더스푼의 무비판적인 공화주의와 법의 적용이 기독교의 세속화를 불러들였다고 주장한다. 위더스푼 이후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세속과 성경을 섞인 혼합적인 기독교인으로 변질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위더스푼이 이성을 성경의 계시와 동등한 위상을 갖도록 평가했고, 이것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단지 선택사항으로 분류되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했다.
비판자들은 위더스푼이 정통 칼빈주의의 얼굴(겉표면, facade)는 유지하면서, 근본적인 내용은 버렸다고 주장했다. 초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묘사된 임의의 신성은 부인하고, “순수한 칼빈주의”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유다. 하지만 위더스푼이 전혀 타협하지 않는(full-blooded) 칼빈주의자처럼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더 많다.

미국 개신교를 부흥시킨 비조에는 휫필드 말고도 회중교회 조나선 애드워드, 감리교 존 웨슬리,  장로교 길버트 태넌트가 있지만 웨슬리는 독립운동을 격렬할 정도로 반대 했고 에드워드 목사와  테넌트 목사는  독립운동 국면 전인  1758년 과 1765년에 각기 세상을 떠났고 둘은  위더스푼 같은 후계자를 키워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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