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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1)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메릴랜드 400 용사 (2)

안동일 작

1776년 8월 2일, 이날은 미국 독립과 관련 역사적인 날이었다.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 의사당(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그해 7월 4일 독립선언 전후의 상황을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7월 4일의 신화(The Myth of the Fourth of July)’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7월 4일에 모든 대표가 모여 엄숙하게 원문에 서명했다’는 모습은 사실 후대에 각색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7월 4일에 통과된 것은 우리가 박물관(정확히는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보는 화려한 필체로 서명된 그 문서가 아니었다. 7월 4일 그날은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잡고 대륙회의가 수정한 텍스트(문구)가  승인된 날이다. 이날 실제 서명한 사람은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John Hancock)과 서기인 찰스 톰슨(Charles Thomson) 단 두 명뿐이었다.
그날 최종 문구가 승인되자 선언문은 인쇄소 ‘던랩 브로드사이드’로 보내져 밤새 약 200장의 전단지(Broadside) 형태로 인쇄되었다. 여기에는 서명자 명단 없이 핸콕과 톰슨의 이름만 박혀 각 주의 의회며 워싱턴 사령관이 주둔하고 있던 뉴욕의 대륙군 병영등 주요 기관으로 우송되었다.

공식적으로 양피지에 정식 필사(Engrossing) 하자는 결정이 떨어진 것은 7월 19일이었다. 대륙회의 서기처의 명필  티모시 매틀랙(Timothy Matlack)이 작업을 마친 후, 8월 2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표들이 모여 필사본에 서명하는 서명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독립선언이 마침내 공식화 되는 순간이었다.

서명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축제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 한다는 것은 영국 왕실에 대한 명백한 ‘반역’ 이었다. 당시의 법대로라면 전 재산 몰수는 물론 교수형에 처해질 목숨을 건 서명이었다.

그날, 8월2일 오전. 얼마전 대륙회의 정식 의원이 된 찰스 캐럴은 회의장으로 쓰이고 있던 펜실바니아 식민의회 건물 복도끝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이미 회의장으로 들어 가 있었지만 회의 개회 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관사에서 올리던 기도를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서 였다.

그때 찰스 캐럴은 세인트 메리 가톨릭 성당 사제관에 머물고 있었다. 터반의 숙박비며 식비등 경비를 절약 해 메릴랜드 민병대의 군자금으로 쓰기 위해서 였다. 아직도 총독과 영국 왕실의 눈치를 보면서 독립운동에 지갑을 열지 않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이자 압력이기도 했다.

찰스 캐럴이 몬트리올에서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때는 1776년 6월 12일 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가 그때 부터 필라에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를 했고 7월 4일 독립선언서 표결과 발표에 주역으로 나선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실제와 달랐다. 그는 필라에 도착해서 엿새 쯤 머물다 급히 향리로 달려 가야 했다. 그리고는 한달을 그곳에서 바쁘게 뛰어 상황을 정리 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메릴랜드의 정세는 대단히 복잡했다. 1776년 봄과 초여름까지만 해도 메릴랜드 의회는 “영국과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며 독립 선언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륙회의에 파견된 체이스, 파카등  대표들에게도 “독립에 함부로 찬성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상태였다. 또 민병대 보강도 재정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 였다.

이럴 때 찰스 캐럴은 아나폴리스로 가서 뛰어난 논설과 막후 정치력으로 메릴랜드 여론과 의원들의 망설임을 돌려놓았다. 결국 6월 28일, 메릴랜드 의회는 독립 반대 지침을 철회하고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면서 의원들은 이번에는 캐럴이 대륙회의의 정식 대표로 자리 할것을 요청했고 캐럴도 이를 받아들여 메릴랜드 주 의회는 7월 4일 회의에서 그를 정식 대표로 위촉, 임명한다.

따라서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문을 승인한 그날 캐럴은 필라델피아 회의장에 없었다. 독립선언 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날 표결은 큰 의미가 없었다. 주지하는 대로 당시 대륙회의는 1개 주당 딱 1표(One vote per colony)만 행사할 수 있었다. 즉, 뉴욕주에 대의원이 5명이 있든 8명이 있든 뉴욕주의 이름으로 던질 수 있는 표는 오직 한 표뿐이었다. 메릴랜드도 마찬가지,  메릴랜드 대표는 3명이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토론과 투표는 이미 이틀 전인 7월 2일에 끝난 상태였다. 당시 찬성 12, 기권 1 (뉴욕) 으로 독립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7월 4일에는 무엇을 토론했을까? 바로 토마스 제퍼슨이 쓴 ‘독립선언서의 문구’를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는 최종 수정 토론이 있었던 것이다.
대표들은 문장 내용과 표현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며 제퍼슨이 쓴 원안의 약 5분의 1 가량을  편집하고 지워버렸다. 특히 남부 주들의 반발로 노예 무역을 비판하는 구절이 통째로 삭제되었고, 영국 국왕과 국민들 까지도 강하게 비난했던 감정적인 표현들도 대폭 순화되었다. 제퍼슨은 자기 글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며 회의장 구석에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수정 작업을 마치고 최종 문안을 확정해 받아들인 행위가 바로 7월 4일의 ‘독립선언서 채택’이다. 당일 회의장에 있었던 인원은 45명 정도였다. 뉴욕주 대표단(8명)은  “아직 찬성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아 7월 4일 투표 당시 기권한 상태로 앉아 있었고, 일부 대표들은 개인 사정이나 질병으로 결석했다.

한편 찰스 캐럴은 캐럴은 정식 대표로 위촉된 뒤에도  메릴랜드 민병대를 뉴욕의 워싱턴 장군에게 보내는 일에 정열과 시간을 쏟아야 했고 7월 18일이 돼서야 필라델피아로 와서 공식적으로 대표단에 합류했다. 이제 정식 대의원 생활이 보름째로 접어드는 셈이었다.

그날 8월 2일, 찰스는 자신이 믿는 천주의 뜻이며 역사의 부름에 따라 기꺼이 펜을 들어 그 무거운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관사에서 조금 떨어진 대륙회의장으로 아침 일찍 서둘러 걸어 왔다. 각오와 상념 속에서….
사제 관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아침마다 주임신부의 집전 으로 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미사에서는 영성체 전후에 개인 기도의 시간이 있다. 이날 아침 미사에서 올린 기도는 특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륙회의장 복도 에서의 기도는 아침부터 계속된, 어쩌면 걸어 오면서도 계속 됐던 기도의 마무리 이기도 했다.

자신이 오늘 행할 일이 천주의 뜻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천주에게 다시한번 확인하고 자신을 가다듬기 위한 기도였다. 그가 올리는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안위를 넘어 “주님의 뜻 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 땅에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소외된 신앙인들이 숨 쉴 수 있는 제단을 허락하소서”라는 절박한 참회와 간구였다.

그러면서 그의 기도는 관상 기도로 흘렸다. 본문은 구약 열왕기 4권의 다윗과 골리잇의 전투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 다윗의 전투 이야기는 사무엘서 아닌가하고 갸웃 할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천주교 성경은 개신교와 책 이름이 약간 달랐다. 개신교의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를 가톨릭은 ‘열왕기 제1, 2, 3, 4권(1~4 Kings)’으로 묶어 불렀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캐럴의 성서에는  ‘열왕기 제1권(1 Kings) 17장’이었다.
18세기 후반(미국 독립 혁명기) 찰스 캐럴과 사촌 존 캐럴 신부등 천주교인들이 읽었던 영어 성경은 <두에-랭스 성경(Douay-Rheims Bible)>이 유일했다. 개신교에 <킹제임스 성경(KJV)>이 있다면, 가톨릭에는 박해를 피해 프랑스 두에(Douai)와 랭스(Rheims)로 망명한 영국 가톨릭 학자들이 번역한 <두에-랭스 성경>이 있었다.
당시 미국 식민지에는 천주교 인쇄소가 없었기 때문에 캐럴 가문 같은 부유한 귀족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유학길에 이 <두에-랭스 성경>을 고급 가죽 제본으로 들여와 가문 전래의 보물로 삼았다.

그럼에도 찰스 캐럴은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 개신교(또는 이신론) 배경의 건국 아버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와 철학을 논했기에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혹은 공공 문서의 뉘앙스를 맞추기 위해 개신교 성경의 표현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거부감 없이 참고했다. 퍼스트 시티즌 때도 그랬다.

그날 아침 관상기도를 올리는 그의 눈앞에 엘라 골짜기가 펼쳐 졌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필리스티아군은 저쪽 산 위에, 이스라엘 군은 이쪽 산 위에 맞서고 있었는데 회전을 앞두고 양군은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마주 선 형국 이었다. 찰스는 이스라엘 군 맨 앞쪽에 서 있었다. 마침내 7척 거구의 골리앗이 나섰다.
“너희는 어쩌자고 나와서 전열을 갖추고 있느냐?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 아니냐? 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 전열을 모욕하였으니, 나와 맞붙어 싸울 자를 하나 내보내 봐라.”
그러자 다윗이 나섰다.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겨우 막대기 하나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소리 쳤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러자 다윗이 맞대꾸 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찰스가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려 하는데 소년 다윗의 모습이 스트래트의 모습으로 또 오브라이언의 모습으로 변했다. 골리앗의 모습은 초상화에서 보던 조지 3세 왕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군요 주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에 나설 군인 용사 들. 우리들의 자삭들인 소년병,  이땅 다윗들의 안위 였군요’  찰스는  다시금 깨달아 주님께 고했다.

예수회 관상기도는 존 캐럴 신부의 기도 때도 설명 했듯이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바탕을 둔 기도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성경의 장면에 직접 참여하여 하느님과 교감하는 것이 핵심. 성경 속 사건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당시의 풍경, 냄새, 온도, 소리, 인물들의 표정까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이다.

아침의 상상기도는 그 순간 복사 소년들이 종을 울리는 바람에 거기서 그쳐야 했다.

찰스는 의사당으로 걸어 오면서도 줄곳 지금 뉴욕에 있는 메릴랜드 민병대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 영지의 청년들 이었다. 더욱이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세례 때 대부로 나섰던 청년 이었다.  찰스의 극성으로 그 똘망한 오브라이언 과 그들은 지금 워싱턴 장군의 직속 부대로 편입돼 있었다. 캐럴은 6월 말, 자신이 전적으로 비용이며 장비를 지원해 메릴랜드 민병대를 뉴욕으로 전격 파병시켰다. 당시 워싱턴은 영국 해군의 거대한 함대가 밀려오는 뉴욕(맨해튼과 롱아일랜드)을 방어하기 위해 피를 말리는 고독한 싸움, 승산없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캐럴은 워싱턴에게 “메릴랜드의 가장 용맹한 아들들을 보냈으니, 부디 전선을 지켜내 주십시오”라는 요지의 서한을 함께 보냈다.

이 메릴랜드 연대,  윌리엄 스몰우드 대령이 이끈 부대는 앞서 언급한대로 화려하고 근사한 유니폼을 입어 ‘젠틀맨 연대’로 불렸다. 이들이 보무도 당당히 맨해튼에 입성할 때, 사기가 떨어져 가던 워싱턴의 대륙군과 뉴욕 시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1776년 7월 6일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은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후, 뉴욕에 있던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서한과 함께 독립선언서 인쇄본을 보냈다. 선언서를 건네받은 워싱턴 장군은 매우 흡족해 하며 이를 군대와 뉴욕 시  전체에 알리기로 했다.
워싱턴 장군은 7월 9일 저녁 6시, 뉴욕시 (베터리 파크) 에 집결한 대륙군 병사들과 시민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공식적으로 낭독하도록 했다. 사기가 떨어져 있던 병사들에게 우리가 왜 영국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 명확한 명분과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군대와 군중은 열광하며 환호했다. 특히 왜 영국왕 조지3세가 타도 돼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그랬다. 선언서의 낭독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큰 자신감과 결속력을 주었다.  거기에는 찰스 캐럴의 메릴랜드 연대도 포함돼 있었다.

“주여 저들에게 마침내 양깃이 도달하였나이다.”

찰스는 대륙군과 민병대원 모두에게 다윗의 힘과 지혜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 회의장으로 갔다.
위더스푼 목사가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환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캐럴 선생 기도 하시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뉴저지 대표인 그는 50명 대표 가운데 유일한 목사 성직자였다.

이윽고 서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이 선언했다.
“ 서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고 호명 되는 의원들은 지역별로 함께 나와 서명 하십시오”
당시  방을 가득 채웠던 분위기는 ‘엄숙함’과 ‘긴장감’ 이었다. 그리고 ‘비장함’이었다.
선언서의 서명은 무작위로 한 것이 아니라, 지리적 원칙(남쪽에서 북쪽 순)에 따라 구획을 나누어 진행되었다. .
가장 먼저  의장 핸콕이 서명했다.
그는 서명하면서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는지 “영국 국왕(조지 3세)이 안경을 쓰지 않고도 내 이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서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을 두 배로 올리게 만들어 주겠소!”라고 외치면서  정중앙에 크고 화려한 글씨로 이름을 남겼다.
오늘날 미국에서 그의 이름 “John Hancock”은 ‘친필 서명’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핸콕의 서명 아래로, 의원들은 서기의 호명에 따라 가장 남쪽에 있는 식민지 조지아 부터 왼쪽에 서명을 시작했다. 단상 앞 테이블에는  당시 구 할 수 있는 가장 고급의 깃펜과 잉크가 놓여져 있었다. .
윗줄 가장 왼쪽에 조지아의 대표들이 서명했고 그 옆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들의 서명이 끝나고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차례가 되었다.
당시 의사당 내부에는 잠깐 헨콕의 현상금 얘기에 작은 웃음소리가 나왔지만 그 후 계속 팽팽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무겁고 두려운 침묵(pensive and awful silence)”의 시간 이었다. (서명자 중 한 명인 벤자민 러시의 회고)

그때 메릴랜드에 이어 서명하려 바로 뒤에 줄을 서던 뚱뚱한 체격의 버지니아 대표 벤저민 해리슨이 아직 앉아있던 깡마른 뉴햄프셔의 동료 엘브리지 게리를 돌아보며  농담을 던졌다.
“게리, 자네보다 내가 유리하겠군. 교수형이 집행될 때 내 몸무게 덕에 나는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자네는 가벼워서 죽을 때까지 공중에서 몇 시간 동안 바둥거려야 할 걸세.”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결코 박장대소는 아니었다.

이윽고 메릴랜드 차례가 되었다. 캐럴은 새뮤얼 체이스, 윌리엄 파카, 토머스 스톤에 이어 네번째로 맨 밑에 서명했다.
그가 서명대에서 ‘Charles Carroll’이라고 이름을 적자, 곁에 있던 다른 의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체이스 의원으로 짐작 된다.
“메릴랜드 식민지에 찰스 캐럴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자네는 영국 왕이 와도 누군지 몰라 무사하겠군.”
이 말을 들은 캐럴은 씩 웃으며 즉시 펜을 다시 들어 이름 뒤에 ‘오브 캐럴턴(of Carrollton)’이라는 자신의 영지 이름을 덧붙였다. ‘영국 왕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하겠다’는 도발이자, 자신의 엄청난 재산과 목숨을 모두 걸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수백만 달러가 날아가는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많은 이들이 달러라는 표현을 들어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가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데 당시 달러가 쓰여지고 있기는 했었다.
대륙회의가 최초로 달러(Dollar) 단위를 도입해 공식 종이 화폐인 ‘대륙 화폐(Continental Currency)’ 발행을 승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해인 1775년 6월 22일 이었다. 당시 혁명 전쟁 비용(군대 조직, 장비 구입 등)을 조달할 재원이 부족했던 대륙회의는 통화를 찍어내기로 결정했고, 동년 7월 29일에 첫 번째 인쇄 및 발행을 구체적으로 승인했고 가치는 크게 인정 받고 있지는 못했지만 쓰여지고는 있었다.

캐럴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음직 하다.  ‘그래, 작년 6월에 우리가 승인했던 그 보잘것없는 대륙 화폐 단위를 비웃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걸은 것은 진짜 내 전 재산과 내 목숨이다. ‘
버지니아에 이어 펜실바니아 대표단이 서명 했고 뉴저지 뉴욕 코네티컷 순으로 이어졌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서명하러 나가면서 찰스 캐럴의 어깨를 두드려 친근함을 표시했다.

8월 2일 당일 필라델피아에 없었거나,  새로 임명되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의원들이 제법 있었다. 대륙회의는 이를 위해 정치적·지리적 구획에 맞춰 의도적으로 공간(여백)을 비워두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에 도착한 의원들은 자기 고향 식민지 대표단이 받아둔 그 ‘공란’을 찾아가서 이름을 채워 넣었다. 우리가 보는 독립선언서에는 총 56명의 서명이 들어있지만  8월 2일 당일 서명한 인물은 50명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라 당일 서명자를 49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나머지 6~7명의 의원들은 비워둔 공란’에 수개월에 걸쳐 나누어 서명했다. 7월 4일 독립 결의안 투표에는 참여했으나 끝까지 독립선언서 서명을 거부하고 떠난 존 디킨슨(John Dickinson) 같은 인물도 있어서, 그가 나간 자리는 공란으로 남지 않고 다음 사람으로 채워졌다.

독립선언서에 최종 서명한 총 56명의 대의원 중 가장 많은 대표가 서명한 주는 펜실베이니아주(9명)였고 가장 적은 대표가 서명한 주는 로드아일랜드주와 뉴햄프셔주(각각 2명)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는 독립선언서가 채택되고 서명식이 열린 장소인 필라델피아(독립기념관)가 속한 주답게 벤자민 프랭클린, 로버트 모리스 등을 포함해 가장 많은 9명이 서명했다.  버지니아주는: 독립선언서의 핵심 기초자이자 훗날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을 비롯하여 총 7명이 흔적을 남겼다. 메사스세츠주는 대륙회의 의장이자 가장 크고 화려한 서명으로 유명한 존 핸콕과  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아담스를 포함해 5명이 참여했다.

독립선언서 서명이 끝난 후, 조약 체결식 같은 화려한 폐회식이나 축하 행사는 전혀 없었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의장 존 핸콕은 회의를 끝내지 않고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당시 가장 큰 현안인 군대에 대한 보급, 재정 확보, 캐나다 전선 보고 등 긴급한 국방 업무를 논의한 뒤 저녁 무렵에야 평소처럼 하루 회의를 마쳤다.
이날 특기할 일은 찰스 캐럴이 군사 보급을 총괄하는 대륙회의 전쟁위원회(Board of War) 위원으로 위촉된 일이다.
캐럴이 메릴랜드 민병대와 혁명군 대륙군에 본격적으로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대기 시작한 기점은 1774년 말, 독립 민병대들이 결성되던 시기부터 였다. 가장 집중적으로 자금이 소요되고 그의 영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캐나다 사절단 활동 및 메릴랜드 연대가 전선으로 이동하던 1776년 봄~여름이었다. 이미 그는 군자금의 보루였었지만  지금 까지 후원자 독지가의 입장 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당사자, 담당자가 되었다는 얘기다.

캐럴이 독립 선언으로 대륙군과 민병대의 안위가 큰 현실적 문제로 대두 됐기에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천주 앞에  다시금 다졌다고 한다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사항은 독립 선언서에 어떻게 반영 되었을까? 혹시 불만은 없었을까?

독립선언서 자체는 통치 체제를 규정하는 헌법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라는 명시적 조항은 없다. 대신 제퍼슨은 특정 종교(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 ‘자연법과 자연의 신(Laws of Nature and of Nature’s God)’이라는 보편적 표현을 사용해 모든 인간에게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있음을  천명했다.
제퍼슨이 쓴 최초의 초안에는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신성하고 부정할 수 없다(sacred & undeniable)는 것을 믿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다분히 종교적인 어조였다.
하지만 초안을 검토하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 문구를 보고 붉은 펜을 들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랭클린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신성한’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새로 적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장이 그 유명한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self-evident)고 믿는다” 라는 문장아다.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당연히 알 수 있는 진리라는 뜻으로 바꾼 것이다. 초졸 현명옹의 심모와 혜안이었다.

제퍼슨은 평생 자신이 이룬 수많은 업적 중 무덤 비석에 딱 세 가지만 적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중 두 개가 바로 ‘독립선언서의 저자’와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저자’였다. 그만큼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동등한 가치로 보았던 인물이다.

제퍼슨은 당시 영국의 국교(성공회) 강요와 종교적 박해를 영국의 폭정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특정 종교가 국가의 권력을 잡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이신론자’ 였다. 이 때문에 독립선언서에는 ‘예수’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첫 문장에 ‘신’은 등장한다.  자연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제퍼슨이 초안에 쓰고 결국 채택된  ‘자연의 신(Nature’s God)’이라는 표현에 대해, 독립 선언 당시 기독교 목사들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히 긍정적이었으며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현대 시각에서는 ‘기독교적이지 않은 이성주의적 표현’으로 보이지만, 당시 미국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목사들은 이 문구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목사들은 강단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권리(생명, 자유)를 침해하는 폭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설교하곤 했다.

‘자연의 신’이라는 표현은 목사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정당한 정치·신학적 수사로 받아들여졌다. 또 이 표현이야 말로 기독교의 교파 간 갈등을 묶어줄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제퍼슨이 특정 교파의 색채가 묻어나는 ‘원죄’ ‘삼위일체’ ‘구원’ 같은 단어를 썼다면, 도리어 교파 간의 교리 논쟁이 촉발되어 독립 대열이 분열되었을 것 이라는 견해다.
목사들은 이 ‘자연의 신’과 ‘창조주(Creator)’라는 보편적인 표현이 모든 기독교인을 하나로 통합하고 신앙적 거부감 없이 독립 의지를 다지게 만드는 훌륭한 문구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후,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기독교 식민지 정부는 “모든 교회는 일요일 예배 시간에 이 선언서를 신도들 앞에서 낭독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목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강단에서 ‘자연의 신이 부여한 자유’를 낭독했고, 예배 후에는 독립을 위한 축도와 기도를 올렸다.

이 기저에 찰스 캐럴의 영향이 지대 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거나 간과 하고 있다. .
시티 터반에서 제퍼슨과 캐럴이 종교적 자유에 대해 교감을 나누었다는 앞선 서사는 전한 바 있다. 예의 ‘자연의 신’은 찰스의 아이디어 였다.

6월 중순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찰스가  고향 메릴랜드의 ‘독립 반대’ 여론을 돌리러 아나폴리스로 긴급히 내려가기 전, 필라델피아에 며칠 머물렀던 그 시간이 6월 12일~18일 사이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 집필위원으로 임명돼  하숙방 문을 걸어 잠그고 막 첫 문장을 고민하던 바로 그 칩거 초반이다.
제퍼슨이 필라델피아 시장가(Market Street)와 7번가 모퉁이에 있던 3층짜리 벽돌집(그라프 하우스, Graff House)의 2층 방을 빌려 칩거하며 초안을 작성한 정확한 기간은 1776년 6월 11일부터 6월 28일까지 약 17일간이다.

그 때  찰스 캐럴은 서기처  직원을 통해 토마스 제퍼슨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일등 시민이신 찰스 선생님, 수고스럽지만 제 하숙방으로 잠깐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나갈 수는 없고 선생의 그 해박한 유럽 법률 식견과 종교적 고뇌가 이번 선언서에 꼭 필요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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