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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7)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5>

 안동일 작 

1778년 5월 6일, 날씨도 유난히 화창했던 봄날의 밸리포지 대연병장. 1만 2천 대륙군의 보무도 당당한 사열 분열이 거행되고 있었다. 불과 6개월 전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우왕좌왕 숲속에 엉키던 군대가 프로이센 정규군처럼 오와 열을 맞추며 행진했다. 군악대의 취주악 연주에 맞춰 번쩍이는 총검(베요넷)을 착검한 머스킷을 메고, 병사들은 사열대 위 마상의 총사령관을 향해 총검 경례를 올렸다.

일사불란했던 분열 행진이 끝나고 이어서 기념 축포 사격이 벌어졌다. 선발된 3천여 병력이 포병대의 13발 축포(13개 주 상징) 신호에 맞춰 2열 횡대로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펼쳤다.

‘사격의 파도(Running Fire)’가 이어졌다. 우익의 첫 번째 머스킷총이 발사되면 바로 옆 병사가 쏘고, 그다음 병사가 쏘며 수천 정의 총성이 2열 횡대를 따라 뱀이 지나가듯 끊김 없이 촤르르륵 번져나가는 고난도의 연속 사격이었다.

첫 번째 줄 끝까지 사격이 도달하면 즉각 두 번째 줄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거꾸로 총성이 파도처럼 흘러갔다. 단 한 번의 불발이나 끊김 없이 완벽한 리듬으로 성공하자 장교들과 병사들은 전율했다.

포병대의 대포 발사와 머스킷 연속 사격이 세 차례 끝날 때마다, 병사들은 모자를 공중에 집어던지며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1차 사격 후에는 “프랑스 국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King of France!)”를 외쳤고, 2차 사격 후에는 “유럽의 우호적인 열강들 만세!(Long live the friendly European Powers!)”를 외쳤다. 그리고 3차 사격 후에는 “미국 연방 만세!(To the American States!)”를 외쳤다.

모국 프랑스의 백합 문장(부르봉) 깃발과 새로 제정된 원형 성좌의 성조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대륙군 병사들이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향해 “비브 르 루아(Vive le Roi)!”를 외치는 광경을 보며 라파예트는 눈물을 글썽였다.

워싱턴은 프랑스식 예복을 갖춰 입은 라파예트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후작, 그대의 조국과 그대의 헌신이 이 나라를 구하게 되었소”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마사 워싱턴, 너새니얼 그린의 부인 캐서린(키티) 그린, 헨리 녹스의 부인 루시 녹스 등 사령부 숙소에 머물며 겨울을 함께 견뎌낸 여인들이 사열대 단상에서 양산을 받쳐 들고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

대륙회의 군사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밸리포지 현장에 머물며 보급 개혁을 이끌던 찰스 캐럴은, 몇 달 전 얼어 죽어가던 누더기 병사들이 어엿한 전사들로 거듭난 광경을 바라보며 품속의 묵주를 쥐었다. 파리 유학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프랑스와 신대륙의 결합’,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던 천주교도들의 기도가 현실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날 밸리포지에서 열린 프랑스-미국 동맹 비준 기념 열병식은 단순한 축하연을 넘어, 오합지졸 난민군에 불과했던 대륙군이 ‘유럽식 정규군’으로 재탄생했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독립전쟁 최고의 대전환점이었다.

이 행사는 공식 용어로 ‘푀 드 조아(Feu de Joie, 환희의 불꽃 / 축포의 연쇄 사격)’라고 불렀다. 프랑스어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1778년 2월 6일 파리에서 체결된 ‘프랑스-미국 동맹조약(Treaty of Alliance)’ 문서가 5월 2일경 대서양을 건너 요크의 대륙회의에 도착했다. 대륙회의는 4일 이를 만장일치로 비준했고, 이튿날 밸리포지 사령부에 공식 전달되었다.

워싱턴은 즉각 이튿날인 5월 6일을 전군의 축일로 지정하면서, 오전 9시 전군이 각 여단별로 군목의 주도 아래 감사의 예배와 기도를 올리고, 오전 11시 30분 그랜드 퍼레이드(Grand Parade) 연병장으로 집결하라는 상세한 훈령을 하달했다.

‘연쇄 파도 사격(Feu de Joie)’은 이날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로, 슈토이벤 남작이 2월 하순부터 밸리포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지휘를 마친 훈련 교관 슈토이벤 남작과 드칼브 남작이 분열 사격 시범을 성공리에 마친 뒤 우수 부대 기수들을 이끌고 워싱턴 총사령관 앞으로 행진해 왔다. 프로이센식 제식 훈련을 완성한 슈토이벤과 유럽 정규군 베테랑인 드칼브가 각 여단 가운데 가장 자세가 흐트러짐 없고 사격 속도가 빨랐던 최우수 연대의 기수들을 인솔해 사령관석 앞으로 행진해 온 것이다.

군기 깃봉에 표창 리본(수술, Cravat/Streamer)을 묶어 달아주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깃봉 끝(창날 바로 아래)에 공로나 명예를 기리는 수술 달린 비단 띠를 매어주는 것은 유럽 군대(특히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최고 영예 의식이었다.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그리고 라파예트의 ‘경보병 특공 여단(Light Infantry Corps)’이 영예를 안은 부대였다. 기수들이 총사령관 워싱턴을 향해 깃발을 45도로 깊이 숙여 경례(Dipping the Colors)를 바쳤고, 워싱턴이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흡족한 표정으로 직접 푸른색과 붉은색 비단 리본을 깃봉 끝에 결연히 묶어주었다.

버지니아 전열부대(Virginia Line)는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공격 태세를 갖춘 치명적인 방울뱀(Rattlesnake)이 그려져 있는 컬페퍼 미닛맨 기(The Culpeper Flag)를 들었고, 라파예트의 특공 부대는 짙은 청색 바탕에 월계관을 문 수탉(골루아의 닭), 그리고 그 아래 “CUR NON”이라는 금색 자수가 새겨진 도안의 새로운 깃발을 들었다.

라파예트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이 라틴어 구호는 “CUR NON?(왜 안 되겠는가? / Why Not?)”이라는 가문의 모토로, 청년 라파예트의 불꽃같은 모험심과 결기를 상징했다. 실제로 라파예트는 자기 사비를 털어 부하 장교들에게 프랑스산 명품 사벨(군도)과 짧은 망토를 선물했는데, 이때 망토와 단검 손잡이에도 자신의 가문 문양과 독립군의 상징을 결합해 새겨 넣었다.

버지니아 깃발 상단에는 패트릭 헨리의 명언인 “LIBERTY OR DEATH(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방울뱀 아래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풍자에서 유래한 “DONT TREAD ON ME(나를 밟지 마라)”가 적혀 있었다. 워싱턴의 고향 부대이자 숲속 저격병들(사냥 셔츠를 입은 셔츠맨)의 상징으로 영국군에게 가장 공포를 주었던 깃발이다.

밸리포지 대연병장 사열대에 프랑스 귀족 가문의 푸른 비단 문양이 바람에 번뜩이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깃봉에 수술을 매단 깃발이 다시 봄바람 속에 펄럭이자, 총사령관 워싱턴의 눈길이 자연스레 뒤편의 성조기와 그 옆에 나란히 꽂힌 총사령관기, 그리고 그 밖의 사단·여단기들을 번갈아 훑었다.

기수들은 돌아갔고 슈토이벤과 드칼브는 지휘석에 합류했다. 워싱턴이 감회에 젖은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과 2년 전, 보스턴 프로스펙트 힐에서 우리가 처음 내걸었던 ‘그랜드 유니언 기’를 기억하는가? 그땐 붉고 흰 열세 줄무늬 구석에 아직 영국의 유니언 잭이 버젓이 박혀 있었지. 국왕에게 충성하면서도 의회의 폭정에 맞선다는 어정쩡한 저항이었으니까… 그때 영국 놈들은 우리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줄 알았다더군.”

곁에 서 있던 참모 너새니얼 그린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작년 여름 필라델피아 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그 굴레를 영원히 찢어발겼지요. 영국의 십자가를 뜯어내고 푸른 하늘과 새로운 성좌(星座)를 상징하는 열세 개의 백색 별을 박아 넣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비록 보급이 턱없이 달려 아직 전군에 똑같은 성조기를 쥐여주진 못했지만… 저 바래고 찢긴 컬페퍼의 방울뱀 기와 버지니아의 깃발들이야말로 밸리포지의 혹한을 버텨낸 우리 대륙군의 진짜 얼굴이 아니겠소.”

“새로 만든 길버트(라파예트의 본명) 장군의 프랑스기 역시 제일 멋집니다.” 누군가 한마디를 보탰다.

5월 6일 그랜드 퍼레이드 광장에는 규격화된 성조기들이 일렬로 나부낀 것이 아니라, 총사령관 본부의 푸른색 워싱턴 기, 각 주 연대들이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며 간직해 온 낡고 바랜 고유 연대기들, 그리고 당시 막 제작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 형태의 13개 별 성조기가 섞여서 휘날렸다. 프랑스 동맹을 기념하는 날이었던 만큼, 프랑스 국왕을 상징하는 백색 백합 문양(Fleur-de-lis) 깃발이 상징적으로 함께 배치되었다.

전군(全軍)을 하나로 아우르는 단일한 육군 군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군은 각 주(State)와 의용대 단위로 급조된 군대였기 때문에, 연대와 대대마다 고유한 연대기(Regimental Colors)를 자체 제작해 들고 다녔다.

펜실베이니아 연대는 방울뱀과 “Don’t Tread on Me”가 그려진 깃발을 썼고, 매사추세츠 연대들은 자유의 나무나 솔나무(Pine Tree) 문양 깃발을 휘날렸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초승달 모양의 몰트리 기(Moultrie Flag)를 사용했다. 워싱턴의 상징기는 푸른 비단 바탕에 13개의 백색 6각 별(Star)이 수놓인 사령관기였다. 워싱턴이 머무는 지휘소 텐트와 막사 앞에는 늘 이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1777년 6월 성조기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군수품과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던 대륙군 육군에 성조기가 즉각 지급되지는 못했다. 초기 성조기는 해군 군함 식별용으로 먼저 쓰였다.

사열이 끝난 뒤, 워싱턴은 사령부 인근 연병장 야외에 대형 천막(마퀴 텐트)을 치고 장교들과 민간 외빈들을 위해 수백 석 규모의 오찬 연회를 열었다.

찬란한 5월의 햇살 아래, 대형 야외 테이블에는 밸리포지 인근 농가에서 구한 신선한 양고기와 쇠고기 바비큐, 갓 구운 빵, 그리고 로버트 모리스와 캐럴의 보급망을 통해 조달된 프랑스산 적포도주와 럼주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워싱턴은 병사들을 잊지 않았다. 모든 일반 사병들에게도 1인당 1질(Gill, 약 반 컵/120ml)의 럼주 또는 위스키와 칠면조 고기 등의 특별 배급이 실시되어 전군이 축배를 들었다.

연회가 끝난 뒤 워싱턴과 참모들이 말을 타고 천막을 나설 때, 길가에 늘어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워싱턴 장군 만세!”를 연호하자 워싱턴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병사들을 향해 여러 차례 머리를 숙였다.

위스키와 럼주를 배급받아 각 연대 막사나 모닥불 가에서 축제를 벌이던 오후와 저녁 뒤풀이 시간에, 병사들은 피리를 불며 ‘양키 두들’을 경쟁하듯 돌림노래로 목청껏 떼창했다. 부대마다 부르는 가사가 조금씩 달랐지만 후렴구만은 한목소리였다.

Yankee Doodle keep it up, (양키 두들아, 계속해라,)

Yankee Doodle dandy, (멋쟁이 양키 녀석아,)

Mind the music and the step, (음악에 맞춰 발을 맞추고,)

And with the girls be handy! (아가씨들에게도 싹싹하게 굴어라!)

양키 두들(Yankee Doodle)은 당시 사실상 독립군의 비공식 국가이자 대표 군가였다. 짓궂은 가사 때문인지 공식 열병식 대열에서 다 같이 합창하지는 않았지만, 그 멜로디는 군악대의 피리와 북으로 늘 연주되었다. 원래 영국군이 식민지 촌뜨기들을 조롱하려고 만든 노래였으나,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래 대륙군이 역으로 승리의 상징으로 삼아 불렀다. 처음엔 매사추세츠 등 뉴잉글랜드 지역 군대들이 주로 불렀으나 이내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이날 공식 행사가 끝난 뒤 열린 장교 만찬이나, 병사들에게 럼주가 배급되어 환호하던 뒤풀이 자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가락이었다.

열병 분열 사격 시범 때는 혹독한 제식 훈련의 성과를 증명하는 엄숙한 자리였기에 잡담이나 제멋대로의 노래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침묵과 정적 속에서 군악대의 건조하고 날카로운 피리(Fife)와 북(Snare Drum) 소리만이 비장하게 울려 퍼졌지만, 저녁의 분방한 합창 경쟁은 이와 대비되는 또 다른 청춘들의 건강하고 뜨거운 함성이었다.

이날 열병식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이는 찰스 캐럴이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찍히던 눈밭 위에 푸른 새싹과 야생화가 만개하고, 그 위로 프로이센식 제식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반짝이는 총검을 세우고 도열한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부터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고 눈가에는 물기가 어렸다.

오른쪽 끝 연대에서 시작된 소총 발사가 좌측 끝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한 바퀴 돌아 나가는 총성과, 대포 13발의 묵직한 굉음 직후 1만여 명의 거친 목소리가 일제히 터뜨리는 “허자!(Huzza!)”의 메아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드는 광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고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개별적인 총성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대열을 타고 굽이쳐 흐르는 연속 사격의 음향과 매캐한 화약 냄새는 대륙군이 마침내 하나의 ‘조직된 정규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승리의 내음이었다.

“프랑스 국왕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질 때, 단상 아래서 말을 탄 라파예트가 감격의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마사 워싱턴 곁에 서 있던 찰스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지난겨울 랭커스터 여관 난롯가에서 맞잡았던 묵주와 성 미카엘 기도가 기적의 응답으로 돌아왔음을 눈빛으로 확인했다.

이날의 기적 같은 독립군의 부활은 누가 뭐래도 찰스 캐럴의 지대한 공헌 덕분이었다.

그는 태반의 병사들이 전염병에 신음하던 병영에 인두 접종을 결단하게 하여 저들을 다시 일어서게 한 일등 공신이었고, 병사들의 군복을 그나마 사람 꼴을 갖추게 만든 보급망을 뚫어낸 수훈 갑이었다. 풍전등화 같았던 총사령관 워싱턴의 지휘권을 의회의 음모로부터 확고하게 지켜낸 공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인두 접종을 결정하던 날의 광경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찰스는 결연한 눈빛으로 워싱턴과 군의관들을 돌아보았다.

“장군, 몬트리올의 참극을 여기서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에게 즉각 인두 접종(Variolation)을 명하십시오. 두려워 떨며 피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병마를 통제해야 합니다.”

군의관들이 접종 후 찾아올 고열로 병사들이 쓰러질 것이라며 웅성거리자, 찰스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열병을 다스릴 방도는 내가 압니다. 파리 예수회 학당 시절, 페루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예수회 나무(Jesuit Bark)’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 껍질 가루에 고열을 내리고 기력을 돋울 레몬과 꿀을 타서 큰 솥에 달여내 병사들에게 마시게 하십시오. 요크와 랭커스터의 약재상에 있는 기나수 껍질과 레몬은 내 은화로 모조리 사들일 것입니다. 병사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도허레건 장원의 꿀벌통을 다 털어서라도 밸리포지로 실어 나르겠습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신임 병참총감을 설득하던 날의 진지함도 다시금 떠올랐다.

너새니얼이 병참총감(Quartermaster General) 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고 의회의 승인을 관철시킨 일은, 찰스 캐럴이 밸리포지에서 이뤄낸 가장 결정적이고 빛나는 정치·행정적 업적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었다.

당시 병참총감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기피 1순위의 독이 든 성배였다. 너새니얼 그린은 워싱턴 휘하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다. 전장에서 군대를 이끌고 무공을 세워 영광을 누려야 할 장군에게, 곡식 자루를 세고 마차 바퀴를 수리하며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는 병참감 자리는 군인으로서 사형 선고와 같았다.

“역사는 병참장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명예가 묻히는 무덤입니다.”

완강히 고사하는 그린에게 찰스는 대승적 설득을 펼쳤다. 지금 군대를 살려내지 못하면 봄날의 전투도, 조국의 독립도 없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했다. 동시에 그린의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전투가 벌어지면 주력의 우익 지휘권을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야전 투입 조건을 약속했다.

당시 의회(게이츠 일파)는 보급 실패의 책임을 워싱턴에게 뒤집어씌우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워싱턴의 심복인 그린이 병참총감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찰스 캐럴은 군사조사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와 자신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 1778년 3월 초 의회가 그린의 임명을 전격 승인하도록 관철시켰다.

그린은 취임하자마자 찰스가 제공한 은화와 모리스의 신용망을 지렛대 삼아,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 일대에 체계적인 병참 거점 시스템을 구축했다. 마차 징발 체계를 뜯어고치고 강을 통한 수운을 개척해, 불과 몇 주 만에 밸리포지에 식량과 가죽, 의복이 정기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찰스의 곁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마사 워싱턴 여사와 장군 부인들의 헌신도 큰 몫을 했다. 거기에 1778년 4월 올버니에서 돌아온 라파예트와 드칼브의 귀환은 밸리포지 봄날의 화룡점정이었다.

올버니에서 밸리포지로 공수해 온 무기와 양질의 화약, 군복용 모직과 면직 보급품은 라파예트의 명성과 재력만큼이나 막대한 양이었다. 백전노장 드칼브 역시 슈토이벤보다도 한층 노련한 군사 훈련의 대가였다.

오네이디족 전사들까지 이끌고 밸리포지로 귀환한 라파예트에게 워싱턴은 다시금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워싱턴은 청년 장군을 기존 버지니아 사단에 묶어두는 대신, 전군에서 가장 날랜 정예병 2천 2백 명을 차출해 총사령관 직속의 ‘독립 기동 군단’ 지휘봉을 맡겼다.

대륙군 전군에서 가장 기동력이 뛰어나고 사격술이 정묘한 정예병 2,200명(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의 경보병 및 모건 라이플 연대 일부)과 야포 5문, 그리고 라파예트가 올버니에서 데려온 오네이디족 인디언 척후병 47명이 배속되었다. 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훗날 5월 배런힐의 포위망을 기적처럼 탈출하고 6월 몬머스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대륙군 지휘부의 미묘한 사정과 워싱턴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다. 라파예트가 요크와 올버니로 떠나며 사단장 자리를 비운 사이, 원래 그 사단에 속해 있던 윌리엄 우드퍼드(William Woodford) 준장과 찰스 스콧(Charles Scott) 준장이 각자 여단 병력을 수습해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

이미 대륙회의로부터 ‘소장(Major General)’ 계급을 받은 라파예트에게, 이미 부사령관급 준장들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버지니아 편제를 다시 쪼개어 돌려주는 것은 군내 위계상 불필요한 마찰을 낳을 수 있었다.

워싱턴은 개인적 총애에 앞서 라파예트의 대담한 공격성과 빠른 기동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정된 방어선을 지키는 일반 사단보다, 사령관 직속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해 척후와 선봉 타격을 도맡는 기동 부대의 지휘봉을 쥐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라파예트는 열병 행사 직후인 5월 18일, 2,200명의 정찰 부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영국군 1만 6천 명의 3면 포위망에 갇혔으나, 침착하게 기만술을 펼치며 병력 손실 없이 전군을 탈출시켜(배런힐 전투) 다시 한번 워싱턴과 전군의 찬사를 받았다. 이 기동 지휘력을 인정받았기에 6월 말 몬머스 전투에서도 워싱턴은 찰스 리 장군에게 전군 선봉을 맡기기 전, 원래 라파예트에게 4천여 명의 선봉 공격 부대를 맡기려 했던 것이다.

그사이 계절은 6월로 접어들었고, 프랑스 해군의 입항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마침내 밸리포지에 낭보가 당도했다. 프랑스 함대가 델라웨어만 해상을 봉쇄할 것을 두려워한 영국군 신임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이 6월 18일 새벽 3시, 1만 5천 병력과 1,500대의 마차를 이끌고 필라델피아를 비운 채 델라웨어강을 건너 뉴저지를 거쳐 뉴욕으로 육로 퇴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 수복의 기쁨에 취해 개선식을 여는 대신, “도망치는 영국군 후미를 쳐서 결단을 낸다”며 곧바로 뉴저지 추격전을 결단했다.

영국군이 빠져나가자마자 필라델피아로 무혈 입성한 주인공은 워싱턴이나 대륙군 본대가 아니라, 사라토가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야전 지휘가 불가능했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과 그가 이끄는 소규모 소총 분견대였다.

워싱턴은 아놀드를 필라델피아 군정사령관(Commandant)으로 임명해 시내 치안과 왕당파 잔당 청산, 군수 물자 회수를 맡겼다. (이곳에서 아놀드는 왕당파 명문가의 18세 미녀 페기 쉬펀을 만나 결혼하고, 사치와 부패 혐의로 의회와 갈등을 빚다 결국 배신자로 전락하는 비극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대륙군이 6개월 동안 눈물과 굶주림으로 지켰던 밸리포지 목책을 비우고 떠난 날은 1778년 6월 19일이었다.

폭우가 쏟아져 온통 진흙탕이 된 길을 뚫고 워싱턴과 대륙군 본대 1만 2천여 명은 비를 맞으며 환호하는 주민들의 배웅 속에 오두막 야영지를 뒤로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6개월 전 피 묻은 맨발로 절룩거리며 들어왔던 그 패잔병 같던 군대가, 반년 만에 프로이센식 보폭으로 흙탕물을 튀기며 당당하게 캠프를 나서는 모습은 주민들은 물론 병사들 자신에게도 가슴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다.

스쿨킬강을 건너 불과 8~10마일 떨어진 노리턴(Norriton, 현 노리스타운 Norristown 근교)에 첫 텐트를 쳤다. 워싱턴은 현지 의사였던 섀넌 박사(Dr. Shannon)의 저택에 본부를 차렸다. 찰스 리 소장 휘하의 6개 여단 선발대가 먼저 델라웨어강 도하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진발했다.

6월 20일부터 23일까지는 코리엘스 페리 도하 작전이 이어졌다. 버킹엄(Buckingham)을 지나 델라웨어강 북쪽 도하 지점인 코리엘스 페리(Coryell’s Ferry, 현 펜실베이니아 뉴호프와 뉴저지 램버트빌 사이)에 당도했다.

필라델피아 하류는 영국 해군의 위협이 있었기에 상류인 코리엘스 페리를 건넜다. 나룻배와 평저선들을 징발해 나흘 동안 1만여 병력과 말, 대포를 뉴저지 땅으로 실어 날랐다.

6월 24일과 25일, 프린스턴 북서쪽 호프웰(Hopewell)에 진을 친 워싱턴은 최고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영국군 포로 생활에서 막 풀려나 복귀한 찰스 리(Charles Lee)는 “세계 최강 영국 정규군을 야전에서 건드리지 말고 뉴욕으로 그냥 보내주자”며 결전을 완강히 반대했다.

반면 라파예트, 앤서니 웨인, 너새니얼 그린, 존 로렌스 등 청년 장교들은 “슈토이벤 밑에서 피땀 흘려 훈련한 우리 군대를 시험할 절호의 기회다. 클린턴의 후미를 쳐부숴야 한다”고 격렬히 주장했다.

워싱턴은 라파예트의 손을 들어주며, 그에게 약 4,000명의 정예 선발대 지휘권을 맡겨 영국군을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라파예트는 크랜베리(Cranbury)를 거쳐 몬머스 결전의 전진기지인 잉글리시타운(Englishtown)에 도착해 마을 여관(Village Inn)에 사령부를 차렸다. 이때 물러서 있던 찰스 리가 “선발대 규모가 커졌으니 서열상 내가 지휘해야 한다”며 억지를 부려 라파예트의 지휘권을 가로채는 군사적 갈등이 폭발했다. 라파예트는 분통이 터졌지만 군율을 존중해 불평 없이 선봉부대의 2인자 자리를 받아들였다.

6월 28일 드디어 불을 뿜은 몬머스 전투(Battle of Monmouth)는 필라델피아를 버리고 뉴욕으로 퇴각하는 영국군을 추격해 벌인 대회전이었다. 대륙군의 추격을 눈치챈 영국군은 교묘한 반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라파예트의 선봉대는 적의 단순한 후미가 아니라, 양쪽으로 전열을 펼친 영국 정예 본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기온이 38도(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밸리포지에서 단련된 대륙군은 영국 정규군 척탄병들과 총검 백병전을 벌이며 전열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는 역사적인 전투를 치러냈다.

사열식에서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메릴랜드의 노련한 고참병들과 라파예트의 특공여단 사수들이 펼친 사격 시범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곧 닥쳐올 영국군과의 진검승부를 대비한 실전 리허설이었던 셈이다.

찰스 리 장군의 배신에 가까운 무단 후퇴 명령으로 전선이 완전히 붕괴될 뻔했으나, 워싱턴이 직접 전선으로 달려와 리 장군을 격노하여 질타하고 전열을 수습했다. 이때 라파예트는 슈토이벤과 함께 흔들리는 전선을 사수하며 전략적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대륙군의 뜻밖의 저력에 질린 영국군은 어둠을 틈타 뉴욕으로 퇴각을 서둘렀다.

몬머스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뚫고 영국군을 뉴욕으로 몰아넣은 뒤에도, 워싱턴은 환호하는 옛 수도 필라델피아로 개선하지 않았다. 아놀드 장군에게 필라델피아의 치안을 맡긴 총사령관의 시선은 오직 북쪽, 영국군 본진이 웅크린 뉴욕만을 겨누고 있었다. 군대는 허드슨강을 건너 화이트 플레인스에 포위망을 쳤고, 그해 겨울엔 뉴저지 미들브룩의 험준한 산자락 아래 통나무 막사를 지어 대륙의 혹한을 다시 견뎌냈다.

몬머스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륙군은 6월 28일의 격전을 치른 뒤 지친 군대를 이끌고 뉴저지 중부 뉴브런즈윅으로 이동해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며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

7월 중순,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시켜 킹스 페리(King’s Ferry)를 통해 허드슨강을 건넜고, 7월 말부터 늦가을까지 뉴욕 북부 화이트 플레인스(White Plains)에 거대한 진지를 구축했다. 2년 전(1776년) 쫓겨나듯 후퇴했던 바로 그곳에 다시 진을 치고, 뉴욕 맨해튼에 갇힌 영국군 클린턴 본대를 압박·감시한 것이다.

밸리포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낸 대륙군이 그다음 겨울(1778년 12월 ~ 1779년 6월)을 보낸 공식 동계 숙영지는 바로 뉴저지주 서머싯 카운티의 미들브룩(Middlebrook, 현 바운드 브룩 및 서머빌 일대)이었다. 와충 산맥(Watchung Mountains) 바로 아래 자리 잡아 영국군이 기습하기 어렵고, 산꼭대기 관측소(워싱턴 록)에서 뉴욕과 뉴저지 평야의 영국군 동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조지 워싱턴은 서머빌의 월리스 하우스(Wallace House)를 본부로 사용했고, 슈토이벤 남작은 사우스 바운드 브룩의 스타츠 하우스(Staats House)에 자리를 잡았다. 헨리 녹스 장군은 플러커민(Pluckemin)에 사령부를 두고 미국 최초의 포병 사관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전투하는 병참감’ 너새니얼 그린은 판 벡텐 하우스(Van Veghten House)에 여장을 풀었다.

밸리포지에서 워낙 호되게 고생한 데다 병참감으로 너새니얼 그린이 자리를 잡고 슈토이벤의 군정이 확립되어, 미들브룩 겨울 숙영지는 대륙군 역사상 가장 덜 굶주리고 보급과 위생이 훌륭했던 ‘모범적인 겨울’로 기록되어 있다.

워싱턴은 몬머스 전투가 끝난 뒤 반년이 지난 1778년 12월 말이 되어서야 군대를 미들브룩 동계 막사에 안정적으로 배치해 두고, 군정 보고 및 1779년 작전 예산 협의를 위해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던 필라델피아를 라파예트와 소수 참모만을 대동하고 단독 방문했다.

그때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대륙회의 의원들과 만찬을 갖고, 찰스 캐럴이나 헨리 로런스 등 지도자들과 전후 재정과 프랑스 해군 연합 작전을 논의했다. 그렇게 서둘러 논의해야 할 절박한 까닭이 있었다.

7월 말 마침내 도착한 프랑스 함대와의 연합 작전에서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돕기는커녕 오히려 양국 간의 분규만 깊어졌다.

그사이 치른 주요 전투가 바로 로드아일랜드 전투(1778년 8월)였는데, 프랑스 해군의 파행과 에스탱(d’Estaing) 제독과의 갈등이 정점에 달한 전투였다.

몬머스 이후 첫 대규모 미·불 연합 작전으로 기획된 곳이 영국군 점령지인 로드아일랜드 뉴포트(Newport)였다. 그러나 첫 연합 작전은 문화적 차이, 불신,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해 파국으로 치달았다.

프랑스 해군 전열함 12척과 4,000명의 해병대를 태운 에스탱 백작 제독이 뉴포트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들을 맞은 미국 측 지휘관은 다혈질의 존 설리번(John Sullivan) 장군과 너새니얼 그린, 그리고 라파예트였다.

 

에스탱은 프랑스 해군 중장(Lieutenant Général)이자 유서 깊은 귀족 출신으로, 식민지 민병대 지휘관들에 불과한 미국 장군들을 애초부터 깔보았다. 미국의 설리번 장군 역시 독단적이어서 프랑스군과의 약속 날짜보다 하루 일찍 독자적으로 상륙 작전을 개시해 버렸고, 이에 에스탱은 “프랑스 왕실 군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격노했다.

8월 10일 영국 함대가 나타나 해전이 벌어지려는 찰나, 양측을 집어삼킨 거대한 허리케인급 폭풍이 불어닥쳤다. 함선들이 대파되자 에스탱은 육상 지원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수리를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보스턴 항으로 일방 철수해 버렸다.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갯벌 위에서, 안개 낀 바다 저편으로 매정하게 돛을 올리고 사라지는 에스탱 제독의 함대를 바라보며 라파예트는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었다. 그간 프랑스 수병들의 “촌뜨기 식민지인들”이라는 멸시를 참아왔던 미국 장교들과 병사들은 “프랑스 놈들이 등을 돌렸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설리번 장군은 명령서에 “프랑스인들은 가장 비열한 순간에 동맹을 버렸다”며 격렬한 비난문을 실었고, 보스턴 거리에서는 미군 장병·시민들과 프랑스 수병들 사이에 유혈 패싸움까지 일어났다. 고립된 대륙군은 8월 29일 버츠힐(Butts Hill)에서 영국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격퇴한 뒤 뉴포트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가장 피눈물을 흘린 사람이 바로 라파예트였다.

설리번과 미국 장교들은 “프랑스 놈들이 배신했다”고 소리치고 있고, 에스탱 제독은 “야만스러운 식민지 놈들이 감히 국왕 폐하의 군대를 모욕한다”며 길길이 뛰고 있는 상황에서 라파예트는 모국에 대한 모욕에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온 미국 혁명의 동맹이 깨어질까 봐 밤잠을 설쳤다.

어설픈 해군 지원이나 겉핥기식 동맹으로는 대영제국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다. 이 신대륙의 땅바닥에서 워싱턴과 함께 뒹굴며 피를 나눌 프랑스 정규 육군 대군, 그리고 국왕의 막대한 금화가 직접 건너와야만 했다.

라파예트는 말을 갈아타며 하룻밤 만에 70마일을 내달려 보스턴의 에스탱을 찾아가 무릎 꿇듯 설득했고, 설리번 장군을 찾아가서는 “프랑스 모욕 발언을 취소하라”며 결투까지 불사하겠다는 서슬 퍼런 중재를 펼쳐야 했다.

라파예트는 뼈저리게 절감했다.

“말로만 하는 동맹이 아닌 진짜 군대가 필요하다. 해군 함대나 몇천 명의 불안정한 해병 지원 따위로는 안 된다. 미국 장군들과 대등하게 손을 잡고, 워싱턴 각하의 지휘를 기꺼이 받들며 헌신할 프랑스 국왕의 정규 육군 대군(Expeditionary Army)과 막대한 현금 차관이 직접 신대륙 땅을 밟아야만 한다!”

라파예트는 자신이 직접 베르사유 궁정으로 가 루이 16세와 내각을 설득해 프랑스 정규 육군 파병과 대규모 재정·물자 지원을 얻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워싱턴을 따라 필라델피아로 상경해 워싱턴과 찰스 캐럴을 설득했고, 대륙회의의 정식 승인과 추천서를 받아 1779년 1월 프랑스 프리깃함 얼라이언스(Alliance)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1779년 초 라파예트의 파리 일시 귀환은 한 편의 정치 드라마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외교적 분수령이었다. 밀항하듯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쳤던 탈영병 신분에서, 전 프랑스인의 열광을 받는 국민적 영웅이자 막후 전권 외교관으로 위상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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