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포기하고 ‘핵 동결’로 목표 재조정하나
비핵화 묻는 질문에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 “북한은 이미 57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처음으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해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 그동안 북한을 ‘핵강국’(Nuclear Power)이라 부르면서도 ‘비핵화’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해 온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밝힌 수치는 미국 관리들과 군비 전문가들이 추정해 온 50~60개 범위 안에 있지만, 정확성은 검증되지 않았다. 다만 한·미가 북한의 핵 개발 현황 관련 정보를 기밀로 관리하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취임일인 지난해 1월20일 북한을 처음으로 ‘핵강국’이라 지칭한 후 여러 차례 비슷한 표현을 써왔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을 핵강국으로 지칭했으며,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해 4월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핵 무장한 북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실제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핵무기 생산 능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해왔으며, 현재 상당한 규모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북한과의 대화 재개 목표가 여전히 비핵화인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그간 한국 언론의 관련 질의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는 불변”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발언은 대북 접근법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로도 읽힐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김정은을 아주 잘 아는데, 똑똑한 대통령이 있는 한 그는 괜찮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북핵 위협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완전한 비핵화보다는 핵 동결·군축과 같은 현실적 해법에 무게를 둘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이 지난 2월 9차 당대회에서 헌법상 핵보유국 지위 인정과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대미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제시한 만큼, 미국이 비핵화를 대화의 전제로 내세울 경우 북한이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이날 워싱턴포스트 기고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절대 보유해선 안 된다는 절대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협상을 통해 위협을 줄이고 핵무기를 관리하는 실용적이고 타협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초기 단계였고 핵 시설 위치가 알려져 선제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북한은 이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불가능한 단계”라면서 “핵 재앙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상황에서 절대주의적 길과 실용주의적 길은 결국 하나로 합쳐지게 마련”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동결하고 추가 핵실험을 막는 대신 대북 제재를 일부 완화하는 식의 단계적 타협이 검토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같은 접근은 ‘선 비핵화’보다 핵·미사일 동결을 거쳐 감축과 비핵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재명 정부의 단계적 구상과 일부 맞닿는 측면도 있다. 다만 북미 대화의 문턱을 낮추는 과정에서 한·미 연합연습 등 대북 억제 조치까지 축소될 경우 한국의 안보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축소와 맞물려 미국의 확장억제 제공 등 동맹 방어에 대한 신뢰도가 흔들릴 수 있다.
관건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어느 수준까지 양보할 의향이 있느냐다. 미·이란 전쟁에서 승리가 요원한 상황에서 외교적 성과가 간절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협상을 돌파구로 삼을 가능성은 있지만 북한의 요구를 어디까지 수용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재 완화는 협상을 끌어내기 위한 카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경주 APEC을 계기로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추진하던 당시 북한에 제시할 방안을 묻는 질문에 “우리에게는 제재가 있다”며 “거래를 유도하기 위한 유인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는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쉽게 넘기 어려운 선이 될 수 있다. 미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레이철 민영 리 선임연구원은 “김정은과의 회담을 간절히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조차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조건”이라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