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영주님) 캐럴 –
안동일 작
찰스 캐럴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등 대륙회의 지도부 인사들에게 자신들 가톨릭을 인정하면 프랑스와 캐나다의 가톨릭을 독립전선에 끌어 들일 수 있다고 내세웠고 대륙회의 측은 이를 매우 매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의 첫 단추가 76년 봄,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한 캐나다 방문이었다.
1775년 봄부터 76년 독립 선언 직전까지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던 필라델피아는 그야말로 ‘거대한 용광로’였다.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 직후 75년 4월말 소집된 회의는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충성과 반역’ 사이의 위태로운 재소집이었던 것이다. 독립을 지지하는 급진파는 존 아담스와 사무엘 아담스가 주도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영국과의 화해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존 딕킨슨(펜실베이니아)가 수장이었다. 급진파는 이미 영국과의 결별을 결심했고, 대륙군 창설과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임명을 밀어 붙히고 있었다. 온건파들은 여전히 영국 국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조금만 더 협상하면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온건파가 주도해 낸 마지막 카드가 그 유명한 ‘올리브 가지 청원(Olive Branch Petition)’이었다.
찰스 캐럴의 위치는 메릴랜드 대표의 막후 실세로서 온건파의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영국의 변덕스러운 박해를 경험했고 또 독립만이 천주교의 입지를 마련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급진파의 편에 서서 주변을 온건하게 설득하는 입장이었다. 2차 대륙회의 때도 캐럴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아나폴과 필라를 오가면서 시티터반을 무대로 의원들을 대접하면서 친분을 쌓아 갔다. 이때 친분을 쌓아 동지의 연을 맺은 중요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76년 초가 되면서 회의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된다. 영국왕 조지 3세가 ‘올리브 가지 청원’을 거부하고 식민지를 ‘반역 상태’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독립의 기관차 존 아담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매일같이 연설하며 반대파를 몰아세웠고 존 딕킨슨는 “성급한 독립은 자살 행위”라며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그 목소리는 작아졌고 이미 여러 곳에서 총성이 빵빵 울리고 있었다.
이때 혁명의 불을 지핀 ‘떠돌이 지식인’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등장한다. 페인은 대륙회의의 엘리트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영국의 실패한 세관원이자 코르셋 제조공 출신으로, 1774년 벤지만 프랭클린의 추천장을 들고 무작정 아메리카로 건너온 신규 이민자였다. 페인은 1776년 1월 출간한 ‘상식’ (Common Sense) 이라는 소책자에서 “섬나라(영국)가 대륙(아메리카)을 다스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며, 국왕을 ‘왕관을 쓴 괴수’라고 조롱했다.
엘리트들이 라틴어와 법률 용어로 논쟁할 때, 그는 시장터의 언어로 “독립은 상식이다!” 고 외쳤던 것이다. 이 책은 1776년 봄 식민지 전역에 수십만 부가 팔리며 민심을 독립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찰스 캐럴과 프랭클린이 캐나다로 떠나기 직전, 필라델피아의 모든 광장과 선술집은 페인의 글로 들끓고 있었다.
캐럴이 2차 회의 부터 대륙회의에 합세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 케나다로 외교 여행을 떠난 것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신의 한수 였고 캐럴을 완연한 독립 투사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벤자민은 1차 회의 때는 영국에 머물고 있었기에 참여 할 수 없었다.
1706년 생으로 캐럴이며 아담스 보다 20여살 연상의 노장인 밴자민은 노련한 외교 능력과 해박한 지식, 실용적인 지혜로 이내 대륙회의의 실질적 좌장 역할을 했다. 그도 급진파의 손을 들어주는 축이었다.
2차 회의 시작 무렵 회의장인 펜주 의회 의사당 에서 캐럴을 만난 벤자민은 사무엘 아담스 만큼이나 캐럴을 반겼고 둘은 굳은 포옹으로 단박에 동지의 연을 맺었다. 벤자민은 캐럴이 스승으로 받들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티 터반에서의 정성스런 접대는 벤자민을 적잖이 감동 시켰고 벤자민은 캐럴의 열정과 그 막강한 재력이 독립전선의 최고 자산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으 면서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했다. 독립의 기관차 존 아담스의 강력한 천거도 한몫 했다.
대륙회의가 캐나다를 설득 하자면서 프랭클린에게 부탁 했을 때 그는 이를 수락 하면서 캐럴을 주저 없이 여정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대륙회의가 이 시점에 두 사람을 캐나다로 보낸 것은 일종의 ‘우회 전술’이었다. 내부에서 독립 찬반으로 싸울 때, 외부(캐나다)의 가톨릭 세력을 끌어들여 형세를 뒤집으려 했던 것이다. 찰스 캐럴의 언변과 종교적 배경은 ‘특수 임무를 띤 민간 외교관’으로 발탁 위촉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70세 고령, 외교의 대가와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하는 30대 중반의 가톨릭 명망가는 이 일에 환상적인 조합 이었다.
그때 캐나다에서는 대륙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한창 진행 된 후 교착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으로 시작된 독립 전쟁은 초기 몇 달간 예상을 뛰어넘는 급박한 전개 과정을 거쳤다. 콩코드 전투에서 영국군을 보스턴 시내로 몰아넣은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 외곽을 완전히 포위했다. 당시 영국군은 바다를 통해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고립된 상태에 빠졌고 민병대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5월 10일 에단 앨런과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민병대가 뉴욕주의 요충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기습 점령했다. 이곳에서 확보한 대포와 군수물자는 이후 보스턴 포위전의 결정적 무기가 된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위명이 이때 알려진다.
이에 고무된 대륙회의는 각자의 민병대를 정규군인 대륙군(Continental Army)으로 개편하기로 최종 결의했고 6월 15일,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은 이 회의에 정장 코트 밑에 낡은 군복을 입고 와 준비된 사령관임을 알렸다.
사흘 뒤인 6월 17일에 벌어진 벙커힐 전투는 초기 전쟁의 흐름을 바꾼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민병대가 보스턴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벙커 힐에 참호를 파자, 영국군이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은 진지를 탈환했지만, 전체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야 했다. 이때 “영국 정규군은 무적”이라는 신화가 깨졌고, 대륙군과 식민지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7월 3일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워싱턴은일단 대륙군인 된 민병대를 훈련시키고 규율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워싱턴은 영국군을 공격할 충분한 화력이 부족했기에 포위망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진작 부터 식민지 지도부는 영국군이 캐나다(퀘벡)를 병참 기지로 삼아 뉴욕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 캐나다인들이 14번째 주로 독립 전쟁에 동참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식민지의 기대 일 뿐이었다.
75년 가을이 되면서 방어에 머물지 말고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캐나다로 전선을 확장하는 공격적인 구상이 제기 됐다. 결국 대륙군은 영국군의 병참 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캐나다를 포섭하거나 점령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실행에 옮겼다.
대륙군은 캐나다의 중심지인 퀘벡(Quebec)을 함락시키기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누어 진격했다.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가 이끄는 부대는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츨발해 샴플레인 호수를 거챠 몬트리올로 진격 했다. 약 1,200명의 병력이 북상해 몬트리올 전방 세인트존스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2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요새를 함락시킨 후, 11월 13일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의 부대는 메인주의 켄네벡 강을 건너 황무지를 헤치고 퀘벡으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 이 경로는 “지옥의 행군”이라 불릴 만큼 가혹했다. 지도에도 없는 늪지대와 험한 산을 넘으며 식량이 떨어져 군화를 끓여 먹고 개를 잡아먹는 지경 이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출발 당시 2천여 명이었던 병력은 퀘벡에 도착했을 때 겨우 1천여 명만 남았다.
12월 초, 두 부대는 퀘벡 성벽 앞에서 합류했다. 하지만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매서운 겨울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12월 31일로 끝날 예정이라 두 부대 지휘관은 해가 가기 전 공격 명령을 내렸다.
눈보라 속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나, 견고한 성벽과 영국군의 화력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타이컨 부대 지휘관 리처드 몽고메리는 전사했고 베네딕트 아놀드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대륙군은 400명의 포로를 남겨야 했다.
전투 후에도 아놀드는 남은 병력으로 퀘벡을 포위하며 버티고 있다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자 몬트리올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벤자민과 캐럴이 그곳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1776년 3월 29일 캐나다로 떠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찰스 캐럴이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한 민중 연사가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을 한 손에 들고 독립을 역설 해 군중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는 모습을 목격 하면서 힘찬 박수를 치고 있는 마부에게 웃음을 던지며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글을 제대로 모르는 마부들까지 페인의 문장을 입에 담는 것을 보며, 캐럴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혁명의 파도가 시작 되었음을 직감하면서 희망에 가득찼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번 여정이 그토록 힘든 고난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찰스 캐럴은 몬트리올 천주교 청년들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진흙탕의 ‘몽 세뇌르’ 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뇌르는 불어로 영주라는 말이다. 몽은 나의(my) 라는 뜻을 가지면서 앞에 붇는 경칭.
벤자민 프랭클린의 캐나다 파견 팀에는 찰스 캐럴 이외에도 캐럴의 측근인 메릴랜드 출신 법률가이자 웅변가인 사무엘 체이스와 찰스 캐럴의 사촌이자 예수회 신부인 존 캐럴이 가세 해 있었다. 존은 지금은 친영파로 돌아섰다는 퀘벡 교구의 브리앙 주교와도 안면이 있었고 몬트리올에는 그와 동문 수학한 예수회 신부들이 여럿 있었기에 그의 합세는 천군 만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난 여정의 장도가 시작된 날짜는 3월 26일 . 1776년의 봄은 유난히 추웠고, 여정은 말한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3월 말이면 달력상으로는 봄의 길목이지만, 당시 북동부와 캐나다 접경 지역의 체감 기온은 ‘뼈를 파고드는 냉기’ 그 자체였다. 그 무렵 18세기는 이른바 ‘소빙기(Little Ice Age)’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평균 기온이 더 낮고 겨울이 길었다. 당시의 4월 역시 여전히 겨울의 꼬리가 길게 늘어진 시기였다.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지 호수(Lake George)와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를 건너는 루트였다. 얼음이 덜 녹은 호수를 배로 건너고, 진흙탕 길을 마차와 썰매로 이동해야 했다.
조지 호와 챔플레인 호 에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사절단이 탄 밑이 평평한 목선 바투(Batteau) 는 이 얼음을 피해 이리저리 저어가야 했고, 때로는 얼음이 배를 짓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떨어야했다.
육로도 마찬가지였다. 땅이 녹기 시작하면서 길은 깊은 진흙탕(Mud Season)이 되었고, 진흙탕 위로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리면 마차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70세의 고령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혹독한 추위의 험난한 여정 때문에 심한 통풍과 건강 악화를 겪어, 여정 동안 죽음을 예감하며 친지들에게 작별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이때 찰스 캐럴은 지극 정성으로 그를 간호해 두 사람 사이에 더욱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다. 프랭클린은 나중에 “찰스 캐럴이 없었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찰스 캐럴은 당시 심리적으로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꽤 많은 개신교측 인사들로 부터 “교황의 앞잡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이번 선발을 용인하면서도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냉소와 비협조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거봐라, 내가 뭐랬냐? 가톨릭은 안 된다니까” 하고 나설 것이 뻔 했다. 또 정황을 보면 퀘벡의 가톨릭 주교며 성직자들은 비 협조를 넘어 격렬한 반대를 하며 “반역자들과 손잡은 배교자”로 매도 할 공산이 컸다.
칠흑 같은 밤, 바토(Bateau) 위에서 얼음이 배를 긁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영국 국왕을 배신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신앙을 배신하는 것인가.’
‘안개 낀 얼음 호수 위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양쪽 기슭 영국과 혁명군, 혹은 개신교와 가톨릭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떠 있는 그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이 녹으면서 뿜어내는 습한 냉기와 밤마다 텐트 안으로 스며드는 서리는 사절단이 느꼈던 절박함 이기도 했다.
” 여러분들, 냉기는 우리를 얼리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제련하는 중입니다. 캐나다가 우리와 손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함대를 불러와 이 바다 전체를 뒤 흔들면 됩니다.”
일행의 극진한 간호에 어느정도 몸을 추스린 벤자민은 캐럴과 일행을 격려하는 호기로운 소리를 해서 침체된 분위를 바꾸려 애썼다.
찰스와 존 두 가톨릭 사촌 형제는 그럴수록 묵주를 굴리며 성모송을 암송했다.
이처럼 1776년의 퀘벡 여정은 찰스 캐럴에게 “차가운 얼음 호수를 건너는 고통스러운 순례”이자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영적인 시험대” 였던 것이다.
프랭클린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고, 캐럴은 원칙적 박애주의자였다. 이 여행에서 나눈 두 사람의 많은 대화와 영혼의 공감 교류는 는 ‘새로운 국가’의 청사진의 핵심이 된다. 이 여행은 독립투쟁 공간에서 벤자민이 찰스를 얻었고 찰스는 종교는 다르지만 벤자민을 확실한 스승으로 얻었던 것이다. 이 여행 이후 벤자민은 거의 개종했다고 할 정도로 친 가톨릭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역시 종교적 배경은 영국 성공회 였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날짜는 4월 29일. 꼬박 한달 하고도 사흘이 더 걸렸다.
몬트리올의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고 절망적이었다. 음산한 회색빛 도시에 들어서면서 부터 일행은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사절단이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미 대륙군의 패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것으로 보였다. 시내에 들어 서자 마자 여기 저기 널부러져 있는 대륙군의 시신과 엉망인 막사들을 목격 할 수 있었고 지나는 주민들의 표정도 ‘또 미국인들이 왔어?’ 하는 테가 결코 우호적이 아니었다.
“이럴수가, 박사님,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된것 같은데요.”
군 막사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데도 아무도 그곳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게 말 일세 아무튼 천연두라니 조심들 하게 “
일행은 시내에 들어서면서 부터 수건으로 입을 가려 묶고 있었다. 인근 부락에서 시내에 전영병이, 특히 군인들 막사에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어렵사리 물어 물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숙소 샤토 드 라메제(Château Ramezay) 에 당도 했다. 몬트리올의 부유한 상인 가문인 라메제 집안의 저택으로 대륙군이 징발해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베네딕트 아놀드가 퀘벡 전투 패배 이후 후퇴해 이곳에서 몬트리올 대륙군의 사령관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절뚝이는 다리로 현관 까지 나와 일행을 맞이했으나 그의 행색과 표정도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놀드는 즉각 현지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했다. 보급은 끊겼고, 군인들은 천연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캐나다인들의 민심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캐럴 일행이 빈손으로 온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 하고 언짢아 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상태였다. 현지 천주교 상황을 묻는 캐럴에게 대뜸 ” 종교가 무슨 소용이냐, 당장 보급품과 약품이 필요한 판국에…”하며 몰아세웠다. 캐럴은 정치가로서의 무력감과 신앙인으로서의 모멸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아무튼 이 당시 까지만 해도 베네딕트 아놀드는 퀘벡을 공격하다 부상당한 ‘불굴의 영웅’ 이었고 프랭클린과 캐럴은 그를 용감한 지휘관으로 신뢰했다. 그가 나중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작 냉대와 절망감은 도착 다음날 부터 날부터 실제적으로 엄습해 왔다. 캐럴과 일행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동안 연통하던 교계 지도자 들이며 유지들을 만나보고자 했지만 전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나같이 외면 했고 문전 박대 였다.
기장 큰 걸림돌은 이 지역 천주교 수장 장 올리비에 브리앙(Jean-Olivier Briand) 주교였다.
가톨릭계의 협력을 얻고 그들을 돌아서게 하려면 퀘벡의 그를 반드시 만나야 했지만 그의 코빼기도 볼수 없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캐럴 일행은 퀘벡에는 발도 들여 놓지 못했다. 퀘백과 몬트리올은 250KM 떨어진 꽤 먼 곳이기는 했다.
당시 몬트리올 까지 관장하는 퀘벡 천주 교구의 수장이었던 브리앙 주교는 확고한 친영파로 돌아서 있었다. 그는 영국 정부가 ‘퀘벡법’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인정한 것에 감읍하면서 미국 대륙군에 협력하는 신자는 성사를 거부(파문)하라는 엄명을 내렸단다.
몬트리올의 신부들은 브리앙 주교의 명령에 따라 미국 사절단을 ‘영혼을 사냥하러 온 이단자’로 취급했다.
존 캐럴 신부는 도착 이튿날 새벽 부터 동료 사제들을 만나려 했으나, 몬트리올의 사제들은 그가 ‘반역자들과 함께 왔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
심지어 캐럴 일행이 미사를 드리러 몬트리올의 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곳 현지 신부들은 성당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온 젊은 신부 한 사람이 몬트리올의 대리 교구장인 플로리몽 르페브르 드 벨푀유(Florimond Lefebvre de Bellefeuille) 신부가 존 캐럴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역자들과 동행한 사제에게는 제단을 내줄 수 없다”며 미사 집전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을 뿐 아니라 사제로 인정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존 캐럴 선생, 당신이 이곳에서 로만칼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불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잘 봐줘도 20대 초반을 넘지 않았을 젊은 신부는 존 캐롤에게 이런 모욕을 던져 줬다.
찰스 캐럴은 동생 신부가 젊은 사제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깊은 당혹감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잘못 돌아 가고 있는 것은 직감 했지만 이정도 일것 이라고는 상상도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형제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완전히 틀렸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천주님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싶었다.
찰스 캐럴은 도착 이틀째 였던 이날 저녁 처참해진 군대의 현실을 목격하고 대륙회의에 비관적인 보고서를 써 보냈다. 전염병 퇴치가 급선무이며 전면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내쳐 함께 쓴 부친 (아나폴리스 캐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심경을 토로했다. 보고서에는 차마 쓸수 없었던 하소연이었다.
” 아버지, 군대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신용은 바닥났으며, 주민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륙군은 종이돈을 강요해 민심을 잃었다.)
“이곳의 사제들은 영국 국왕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우리의 대의를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개신교 보다 못하다합니다. 신앙이 오히려 우리를 막는 장벽이 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
“ 그런데 아버지, 대륙군을 가장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영국군의 총칼보다 무서운 천연두였습니다. 병사들의 절반 쯤이나 감염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지혜를 주십시오. ”
편지를 쓰던 중 잉크가 얼어붙을 만큼 추운 방 안에서, 그는 자신이 메릴랜드에서 가졌던 부와 명예가 이곳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부친의 지혜를 기다리리기로 했고 묵주를 돌렸다.
다음날 부터 캐럴은 가장 화급한 일인 천연두와의 싸움을 시작 했다.
몬트리올 근처 대륙군 병영은 거대한 시체 안치소와 같았다. 너무도 딱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대륙군 병사 모두가 케럴 등 에게는 아들 같고 조카 같은 청년들 이었지만 유독 신경이 쓰이는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불어를 사용하는 천주교 신자 캐나다 민병대 청년들 이었다.
그때 대륙군에는 몬트리올 출신인 연대 규모의 캐나다인 민병대가 배속 돼 있었다.
영국 국왕이 아무리 사탕발림으로 유혹했어도, 주교가 엄명을 내렸어도 영국군 치하에는 살 수 없다면서 총을 든 천주교 청년들이었다. (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