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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34 )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우리 민족 성쇠의 실로암  3.1 혁명

 물론 실로암을 열창하고 절도 있는 동작을 펼치는 것에서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해서  저들 젊은 훈련병들이 모두 기독교를 신봉하게 됐다고는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형식은 내용을 규제 하는 법.   성가를 부르면서 느끼는 희열이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고 신앙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적어도 긍정적인 영향은 끼치게 마련 아닐까. 

 오늘날 젊은이들이 종교를 멀리 하고 있다해서 종교가 필요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고 그 의미가 없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온 종교는 결코 소멸 되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또 아주 하찮은 이유로 삶 전체를 바꾸게 되는 경험을 한다.   아무도 내일을 확신할 수는 없는 볍이다. 

 누차 얘기 했지만 이 소설은 종교를 미화하고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이글이 종교, 특히 천주교를 전적으로 옹호하고 이를 선전 선교하기 위해 쓰이는 글이 아니라는 얘기는 진작 했다. 종교가 힘을 잃으면 힘을 잃는 대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한 그대로 서술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임무다.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에 종교 특히 천주교를 필두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고 앞날은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실록 형식으로 따져 보는 글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런점 에서 자칫 의기소침해 질 뻔 했던 작가가 이번에 실로암으로 활력을 얻은 것은 큰 행운이다.  지금도 작가는 실로암을 흥얼거리고 있다. 

“실로암 내게 주심을…”

 다른 복음 성가들도 많은데 유독 이렇게 실로암이 젊은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던져주고 있고  이제는 지친 작가에게 활력을 주는 것을 보면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기운이 있는  좋은 노래 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노래는 80년대 초 육군 6사단 군목으로 있었던 신상근 목사라는 분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6사단에서 먼저 불려 지다가 연무대로 옮겨 갔으리라 짐작된다. 

 노래에도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이토록 사랑받는 실로암은 운이 좋은 노래다. 운명과 운은 엄밀히 따지면 다르게 쓰이고 있지만  광의로는 함께 보아도 틀리지 않을 듯 싶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칠기삼”은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데 있어 운이 70%를 차지하고, 재주나 노력이 30%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노력을 많이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말이 삼당사락(세시간 자면 붙고 네시간 이면 떨어진다) 이나  버탐 파실(버디를 탐하면 파를 잃는다) 처럼 후대의 한국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엉터리 사자성어라고 생각 했는데 의외로 탄탄한 연원이 있었다. 청나라 시대의 문인 포송령이라는 이가 지은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소설에 나온 이야기란다.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다. 과거시험에 합격해 출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 학문을 갈고 닦았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 죽게 됐다. 저승에 간 선비는 자신보다 못한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는데 자신만이 낙방을 거듭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해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선비의 이야기를 듣은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을 불렀다. 옥황상제는 두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며 “정의의 신이 이긴다면 너의 분노가 옳지만 운명의 신이 이긴다면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것이니 그만 인정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내기의 결과는 일곱 잔의 술을 마신 운명의 신의 승리. 정의의 신은 석 잔의 술을 마시는 데 그쳤다. 이를 두고 옥황상제는 “이처럼 세상의 일은 3할의 이치와 7할의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았느냐 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있었을 리 만무한 이 술 내기 사건이 바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다. 

 이야기 속의 선비와 같이 주로 원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한 이들에게 “네 노력이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운이 나빴던 것뿐”이라며 위로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정말 그게 운칠기삼의 진정한 의미일까?

  스스로 할 몫을 다했음에도 실패했다면 운이 따르지 않았음을 아쉬워할 뿐 자책하지 말고 다시 도전을 하거나 자신의 역량을 활용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이뤘다면 자만하지 말고 일곱 잔의 운에 감사하며 그동안 쌓아 올린 기를 널리 이롭게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운칠기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어차피 세상일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운이라는 말을 싫어할법 하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을 선호 할 것 같다. 개중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았을 테고 확신이 서지 않아 이런 표현을 쓴다. 아무튼  나는 아직 개인에게는 운명이 나라에는 국운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민족에게도 운명, 운이 있다고 했을 때 늘 내 뇌리에 떠나지 않는 얘기가 있다.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려조 묘청의 서경 천도론에 대해 우리 역사 천년래의 대 사건이라고 했던 얘기다.

 반도로 위축되고 자꾸 아래로 쪼그라드는 우리 민족이 다시 북방 대륙으로 진출하는 터전을 만들 수 있던 기회라고 보셨던 모양인데 결과는 우리 민족을 굴레로 떨어 뜨렸다는 것이 단재의 진단이다.  그의 웅변을 일부분 옮겨 본다. 특히 이 소설에는 사사하는 바가 크다. 

 <민족의 성쇠는 항상 사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가에 달린 것이며 그 방향성은 매번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학술⋅정치⋅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것은 어떤 사건이 원인일까? … 어떤 사건이 앞서 서술한 종교⋅학술⋅정치⋅풍속 등의 방면에 노예성을 낳게 하였는가? 나는 한마디로 고려 인종 13년(1135) 서경 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의 난이 김부식(金富軾, 1075~1151)에게 패한 데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서경 전역 때 양쪽 병력이 각기 수만에 불과하고 전란의 시작과 끝이 불과 2년에 그쳤지만, 그 전란의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서경 전역 이전 고구려의 후예로서 북방의 대국으로 자리 잡았던 발해 멸망보다도, 서경 전역 이후 고려와 몽고 간의 60년 전쟁보다도 몇 배나 중요하였다. 대개 고려에서 조선까지 1000여 년 동안 서경 전역보다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 전역 전역을 역대 역사가들은 다만 국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친 전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낭불 양가(郎佛兩家)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었다.

 묘청(妙淸, ?~1135)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역사는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굴복되고 말았다.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다면 조선사는 독립적⋅진취적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000년 동안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않겠는가?>

  단재의 웅변을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역사는 원래 낭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나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교도인 묘청이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 그 거동이 지나치게 이치에 맞지 않음으로써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그 뒤 몽골의 난을 지나면서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고, 조선의 창업이 유가의 사대주의로 이루어지자 낭가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3.1운동이야 말로 조선  천년래의 대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선 역사에서 단재가 말하는 낭가가 다시 나타난 것이 3.1운동, 3.1혁명이다. 

3.1혁명 하면 생소하게 느껴지리라 생각 된다.

이번 8.15 광복절, 이재명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정말 멋진 말을 했다. 광복절이었는데 3.1절에 어울리는 경축사를 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는 ‘빛의 혁명’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빼앗긴 빛을 되찾고, 그 빛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3·1혁명의 위대한 정신이 임시정부로 이어지고, 한반도 삼천리 방방곡곡을 넘어, 온 세계에서 독립투쟁의 불길로 번지며 마침내 우리는 다시 빛을 찾았습니다.”

광복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다 보니 그리된 모양이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12·3 내란사태를 극복한 ‘빛의 혁명’에 이르는 한반도 ‘주권 투쟁’의 역사를 1919년으로 거슬러 올려 언급하면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호명했던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3·1혁명 정신’을 언급한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현직 대통령으로서 공식 국가행사에서 이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이 대통령은 왜 광복 80년 기념식에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호명했을까.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를 것인지는 ‘정명’, 즉 역사적 사건에 바른 이름을 붙여주는 문제로 역사학계의 오랜 화두였고 정치권도 이에 큰 관심을  갖곤 했었다.    2018년에도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당시  국무총리가 ‘3·1혁명으로 부르자’고 제안을 했으나 흐지부지된 바 있다.

 그때 만이 아니다. 3·1운동의 ‘정명’은 제헌의 순간부터 끝없이 논쟁이 돼 왔다.    연구에 따르면 대한민국  헌법 초안 전문은 당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을 계승하여”로 문을 열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도 1943년 3·1절 기념사에서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3.1 운동을 대 혁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는 ‘혁명은 국내적 일이므로 조선이 일본에 항쟁한 것은 혁명이 아니다’라는 논리 등에 가로막혀 결국 헌법 전문에는  3·1혁명 대신 3·1운동 으로 명시해 넣었다.

  3.1 혁명론을  주창하는 학계의 주류는  “3·1혁명은 단지 외세로부터의 독립만을 요구했던 사건이 아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 온 국민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증명한 사건이다”라며 “이제라도 3·1혁명이 제 이름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2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어둡고 낡은 옛 집에서 뛰쳐나와 자유롭고 평등한 새 세상을 이루려고 싸우다 죽고, 다치고, 붙잡혔다”는 것이다.

  ‘국민주권정부’를 내세운 이 대통령 역시 이런 대목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임기 내 개헌’을 약속한 이 대통령이 개헌 과정에서 전문의 3·1운동을 3·1혁명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진영 간 소모적 논쟁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문제다.

 아다시피 혁명은 기존의 관습, 제도, 질서 등을  깨뜨리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학에서는 사회 계급, 정부, 민족, 종교 구조 등의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혁명은 기존의 질서를 단번에 뒤엎는 변화를 의미하며, 점진적인 변화와는 구별된다.  단순한 표면적인 변화를 넘어 사회 구조, 제도, 가치관 등 근본적인 부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혁명이다. 

 3.1 혁명이 없었으면 이 민족의 오늘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희생이 없었다면 3.1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지론이며 이글을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히 내 소설의 주인공 직암 권일신 선생은 자신이 형조의 옥에 찾아가 모진 고문을 묵묵히 받아 들이며 그때 자신이 목숨을 희생 해야만  민족의 정혁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기에 순명 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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