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임시 탁덕(鐸德)규합, 간난의 길, 순명의 길 ”
그날 직암과 동섬은 번암을 찾아 단도직입으로 천주학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냐고 물어 매우 고무적인 답변을 들었다.
직암과 동섬 등이 초막 울타리를 넘어 들어설 때 부터 번암은 저들이 천주학 때문에 왔다고 짐작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들 오시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이리 반겨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내가 천주학을 어떻게 생각 하는지 물어보러 이렇게들 행차 하신것 아닌가? 나를 천주학도로 끌어 들이려는 소위 전도라는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닐테니 말일세” 전도 까지는 어림없다는 첫마디였다.
“어찌 그걸 알고 계십니까?”
“내가 누군가? 허허 실은 며칠전에 정조가 다녀 갔네, 자네들 걱정이 크더 구먼”
정조는 이가환을 말했다.
“가환이 걱정을 했다고 하셨습니까?”
“자네들이 천주학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고 나라의 살길이 그곳에 있다고 보고 매진 하고 있지만 그 길이 순탄치 만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였네”
“그나저나 대감 께서는 우리 천주학을 어찌 생각하고 계십니까?”
“몇 가지 책을 주마간산 격으로 읽어 보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이렇다할 단안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네, 칠극의 가르침은 중용과 맥을 닿는 것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명덕과 성, 또는 태극 이라는 유학 긍국의 가치를 천주라는 실체로 의인화 한 것 아닌가?”
나름 탁월한 해석이었다. 직암등이 고개를 끄덕이자 번암이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우리 실학과의 접합점을 찾는 노력에는 반대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들어 내놓고 천주학 공동체를 민들겠다고 나선다면 아직은 시기 상조가 아닐까 싶은데…”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 아닌가. 아직은 시기 상조인 측면이 있다는 애기일세, 천주학이 지니고 있는 몇가지 맹점이라고 할까, 그런 빌미가 있기도 하고…”
번암의 설명은 이랬다.
“천주강생 처녀잉태, 야소부활은 같은 대목이 그렇지, 나로서는 문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서양 종교 특유의 상징적 서사로 그 상징성을 인정한다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걸 그렇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군주와 부모의 권위를 매우 축소한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일세, 무부 무군의 가르침으로 오헤와 곡해를 받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지…”
그러면서 천주학 집단이 음모 집단화 해서는 안된다. 특히 성균관 유생들을 잘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자네 장인 어른이신 순암 선생과 같이 사심없이 진정으로 자네들을 걱정하는 어른들을 비롯해 남인 내 인사들의 반발도 각별히 염두해야 할 것일세, 홍낙안 군과 이기경의 전의가 대단하더구먼.”
홍낙안 이기경의 이름이 여기서도 또 나왔다. 홍낙안은 번암의 외가 쪽 먼 인척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감 께서는 정승으로 복귀 하셨을 때 주상이나 조정에서 천주학을 탄압하라는 명이 내려왔을 때 어찌 하시렵니까?’”
““이 사람들아,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이름을 놓고 다툴 형국을 벌이고 있구먼., 일단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할테고, 그런 상황이 왔다는 것은 자네들이 무슨 빌미를 제공했다는 얘기일 터인데 , 그렇다면 들어 내놓고 비호하고 엄호하지는 못할듯 하이. 제발 그런 빌미 만들지 않도록들 하시게나.”
솔직한 답변이었다.
번암과의 만남은 이렇게 솔직하고 고무적으로 끝났고 일동은 더 신명을 내서 임시 탁덕 모집에 나섰다.
몇 년 뒤인 후일 탄압 박해의 과정에서 채제공 그는 서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서학의 잘못은 정학인 유학이 바로서면 바로 잡혀 진다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회유하여 배교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시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날 직암에게 한 말대로 깊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고 해결 책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 그가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진산사건은 그 빌미를 천주교 공동체 측에서 제공했고 체제공과 정조는 정황상 최소의 희생으로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는대로 그와 주상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변 했고 엄청난 박해로 이어져 희생이 뒤 따라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와 정조가 조금더 살았다면 , 그들의 생존이 더 길었다면, 천주학의 행보도 전혀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과정은 이소설의 중요 부분이기에 추후 자세히 다루게 된다.
이에 반해 이기경과 홍낙안은 뼈에 사무치는 이름이다. 이들은 을사 추조 사건 때 부터 틈만 나면 천주학에 대한 철학적 반감을 토대로 주변 천주학도들을 음해 하고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났던 인물 들이다.
이 두사람은 모두 정약용과 같이 성균관에 적을 두고 있는 유생들이었다. 이기경은 56년생, 홍낙안은 52년 생으로 정약용 보다 나이는 훨씬 위 였지만 당시 성균관 내에서는몇 안되는 남인이라는 동류 의식 때문에 거의 벗 수준으로 격의 없아 사귀었단다.
이기경은 이름으로 보면 이기양과 인척인 것 같고 홍낙안은 홍낙민과 그런 것으로 보이지만 이씨 두 사람과 홍씨 두 사람은 이름만 비슷할 뿐 인척관계가 아니다. 이기경은 전주 이씨, 이기양은 광주 이씨다. 홍씨는 둘다 풍산 홍씨 이기는 하지만 인척은 아니다.
아무튼 세 사람은 성균관을 함께 다녔는데 처음에는 절친하게 지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둘이 짬짜미로 정약용을 그토록 질시했던 모양이다. 정조의 다산에 대한 각별한 총애가 이들의 질투와 질시를 유발 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험만 보면 장원을 해서 왕의 이쁨을 독차지 하는 그가 눈엣 가시엿던 게다.
1785년 을사 추조 사건때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와 사발통문을 주도 한 사람은 사서에는 노론계 이용서와 정서 라는 유생의 이름이 나온다. 성균관 입소 연도로 보아 홍낙안과 이기경은 안정복과 체제공을 찾아가 이를 침소 봉대 하는 등의 역할을 했지 상소문 연통에는 큰 역할을 못했던 모양이다. .
이들이 준동한 것은 후일 자세히 살펴볼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다.
이사건은 홍낙안이 1787년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의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다는 것을 이기경 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들을 침소봉대해 고발한 사건이다.
그때 정약용은 가성직 사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였다. 반촌 모임은 임시 사제단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체제공과 정조의 비호로 오히려 홍낙안과 이기경이 무고죄로 큰 처벌은 아니었지만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홍낙안은 다음번 사건인 진산 위패 분주 사건에는 집요한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 한다.
1791년 신해년 봄, 정약용의 외사촌이자 권일신의 이종사촌이 되는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 권씨의 상장(喪葬)에 예를 지키지 않았으며,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는 소문은 이런저런 경로로 퍼져 있었다. 그런데 몇개월이 지나 이를 사건화 한 것이 홍낙안이었다. 그는 유생들을 동원해 연명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죄인의 체포와 가택수색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당시 좌의정 채제공게는 사학의 무리를 섬멸하라고 재촉하는 사신을 개속 보내 일을 키웠다.
사건의 확산을 바라지 않았던 채제공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단서가 없는데도 홍낙안이 모함할 마음에 사건을 과장했다고 정조에게 간했디.
이에 홍낙안은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당시 벼슬인 내시부 가주서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직후 권일신, 이승훈 두사람을 천주교 두목이라고 지적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결국 두사람이 신문을 받게 했다. 아는대로 다른 동지들의 고초를 막기위해 의금부를 찾아가 자수한 직암은 신문의 여파로 유명을 달라해야 했다. 이 소설의 한 크라이막스이기도 하다. 그때 이승훈은 그의 고발이 모함이라고 극력 주장해 석방되었으나, 평택현감의 관직에서는 삭탈되어야 했다. 직암 권일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이 바로 홍낙안 인 것이다.
이기경의 경우 진산사건에서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일어난 신유박해 국면에서는 고발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한다. 특히 정약용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보였다.
다산 정약용은 후일 자신의 저작에서 벗을 고르는 일이 바르지 못했다는 자성의 술회를 하는데 그 잘못 만난 친구들이 바로 이기경과 홍낙안이었다고 적었다. 정약용이 친구를 잘못 사귄 대가는 엄청났다. 한때 절친 이었던 이기경은 약용을 해코지하는 중심에 서 있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절친의 배신과 보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은 부지 했지만 벼슬길은 거기서 그쳐야 했다.
하지만 세상사 새옹지마 라는 말이 맞는다. 믿는 사람들은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지만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변해 복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인생을 통해 자주 경험 한다. 운칠기삼, 세상은 우연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다산 정약용도 유베생활이 없었다면 자신의 그 방대한 저술은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 얘기를 했다. 이기경과 홍낙안의 말로도 비참 했다.
길고긴 유배 생활동안 다산에게는 풀려날 기회가 몇 번 찾아왔는데도 모두 악연인 지인들, 특히 당시에는 한줌밖에 남아있지 얺았던 남인 공서파의 방해공작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정치적 동지였던 남인 공서파가 이토록 집요하게 못살게 굴었던 데 비해 정작 정약용을 도와준 사람은 오히려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이었다. 다산은 어느 글에서 심환지와 장일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인생의 묘함을 얘기했다. 심환지는 정조보다 22살 많은 노론 벽파의 수장. 정약용이 가까스로 해배되어 돌아왔을 때 다시 중용해 달라고 정조에게 간곡하게 건의했던 이가 심환지다. 이는 신유년 전의 일이다. 같은 노론의 정일환은 신유년에 정약용 구하기에 적극 나선 인물이다. 황해도 관찰사를 마치고 돌아온 정일환은 곡산 부사 시절 선정을 베푼 공로가 큰 정약용을 사형시키면 백성들의 비방과 원망을 막을 수 없게 된다면서 사형 반대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때는 정조 승하 이후 였기에 정순왕후가 실권을 쥐고 있을 때였다.
나와 가깝다고 생각되는 부모형제, 친구들이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위기의 순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한 사람이 아니라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약한 유대의 강함’이다. 정약용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우리네 삶의 법칙이다. 잠깐 살펴보면 ‘약한 유대의 강함’은 현대 사회학의 한 이론.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끈끈한 관계의 강한 유대의 성원 보다는 그저 알고 지냈던 약한 유대의 사람들이 더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조사를 바탕으로 정립된 이론이다. 인간의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것이며 , 자신이 철석같이 견지하고있는 상식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 하늘의 뜻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 없냐는 것을 깨닫게 한다. 희대의 천재 정약용의 걍한 유대의 질곡과 약한 유대의 힘에 대한 회고와 소회는 추후 살펴본다.
아무튼 가까운 남인들을 잘 다독이라는 번암의 경고를 제대로 새겨듣지 않고 실행하지 못햇던 후과는 너무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무렵 1786년 탁덕 모집의 항로는 그런대로 원만하게 순항했다.
직암과 만천이 다름으로 접촉한 인물은 최인길과 최창현 이었다.
최인길은 1765년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최창현은 1759년에 역시 역관의 아들로 태어난 중인들이다.
두 사람을 한번에 거론 하는 것은 두 사람이 돈독한 인척 관계의 동지이자 도반이었기 때문이다. 둘다 해주 최씨로 나이는 창현이 위 였지만 항렬은 인길이 위로 창현은 꼭 인길을 ‘당숙’이라 불렀고 예우했다. 역관 김범우의 안내로 천진암 강학에 먼저 온 사람이 인길이었다.
두사람 다 중국어에 능통했고 한학의 소양이 깊었다. 한마디로 천주학 공동체의 중인 동량이었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놓여 있어 사회적인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개들 서울 중앙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