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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4)

안동일 작

“기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주변 경치는 참으로 아름다왔다. 햇살이 내리 쪼이고 있었고 나무들은 푸르렀으며  꽃들은 아름다왔다. 새들도 창공을 날며 지저귀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책 한권씩 만을 들고 휘적 휘적 걸어가고 있는데 관검 자신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등에 진 봇짐 때문이었다. 무겁기는 왜그리 무거운지. 아무리 빨리 따라 잡으려 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등에서 진땀이 났다. 발걸음은 떼지지 않았기에  소리를 질러야 했다.
“형님들 같이 갑시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하지만 소리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꿈이 깼다. 꿈에서 깬 항검은 무슨 뜻 일까 곰곰히 한참을 생각했다.  그랬다 자신이 지고 있었던 것은 금은 보화 이거나 엽전 꾸러미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 보다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 하는 것이 쉽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항검은 소작인들에게 더 후하게 대했다. 도지세를 4할인 것에서 3할만 받기로 했다. 집안에서 일하는 아랫 사람들에게도 더욱 따뜻하게 대했다.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고 명망과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다른 양반들이나 부호들과 달리 종복과 소작인들로부터 진심어린  존경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흐뭇했다.

그런데 이듬해와 몇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도지세를 3할만 받았어도 4할 때보다 그의 소득은 더 높아졌다. 수확이 늘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자신의 할당량이 늘자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1784년 이승훈으로 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기 전 부터 그는 이처럼  나눔의 기쁨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무렵 이벽을 비롯해 꽤 많은 이들이 이른바 불같은 성령을 체험 했다고 자랑하는데 자신은 그때까지 그런 뜨거운 불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 했지만 세례는 마다하지 않았다.

“형님이 받는다면 저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때 아우구스티노가 직암 프란치스코에게 한 말이다.

“자네의 성령은 그때 봇짐 꿈 이었던 게야”

직암이 계속 그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성령은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찾아온다는 것이 직암의 생각이었다.

그의 커다란 부는 그가 본격적으로 발심해 교단 설립에 적극 참여한 이후 전주 지방 뿐 아니라 전국 천주교 교단의 천군 만마가 됐다.
공소의 설치며 윤유일의 중국 왕래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 등 교단 대소사는 그의 기부와 희사가 없었다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주문모 신부가 첫 미사를 집전한 최인길의 가회동 기와집도 그가 절반을 대서 구입한 집이었다. 이처럼 항검의 통 큰 기부는 전역의 공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압권이  공찬을 정례화 한 일이었다. 그는 전주지역 뿐 아니라 전국의 공소 공찬에서 식비를 아끼지 말라며 상당한 돈을 돌렸다. 전에 언급한대로 생전 못 먹던 이밥의 소고기국을 윗전 들이 ‘형제님’ ‘자매님’ 하며 날라 줄 때 참석자들은 눈물을 쏟았고 만민평등의 천국이 바로 이곳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변혁할 진리의 길이 천주학에 있음을 깨달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봉헌의 삶을 살고자 원을 세우고  부자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하느님께 대한 보은 행위로 여겼고, 평소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에게도 때가 되면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당부했다.

1786년 가을에  가성직자단(暇聖職者團)의 신부로 임명된 그는 평소처럼  밤낮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던 가운데,  88년 무렵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사 집전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무지 때문에 저지른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부당한 행위임을 명백히 알고도 계속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하루 빨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밀사를 파견하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글쎄 잘된 일인지 아닌지 역시 하늘의 뜻일 수밖에 없다.

최창현(崔昌顯)은 1759년생으로 호는 관천(冠泉), 세례명은 요한이다. 한성부에서 중인 가정에서 태어난 역관 출신으로 천주서적 번역, 성직자 영입에 앞장서 신자들을 대표하는 총회장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이 나라 가톨릭 초대 신도회장인 셈이다.
그가 천주 강학에는 처음 올때는 김범우와 마찬 가지로 이벽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신자로 만든것은 역시 직암이다.
직암은 그에게 부조리한 세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변혁 할수 있는 길이 천주학에 있음을 누누히 설명했고 한문에 능하고 언문 문장이 유려했던 그에게 많은 책을 읽도록 권했다.
그는 그 책들 속에서 길을 발견했고 통번역을 업으로 하는 역관답게 한문으로 된 천주 서적을 한글,언문으로 번역하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세례운동이 시작되고 초기 교단이 꾸려지던 1784년에 즉각 한글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이 출간 될수 있었다. 성경직해광익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디아스 신부가 1636년에 청나라 베이징에서 간행한 주일복음 해설서인 성경직해(聖經直解), 역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이야 신부가 1740년에 간행한 주일복음 묵상서인 성경광익(聖經廣益)의 구절들을 통합·발췌하여 언문으로 번역한 책이다.
「성경직해」는 미사 중에 봉독되는 4복음서의 30%에 해당하는 분량이 수록돼 있어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천주교 신앙과 복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 책이 없었다면 일반 하층 출신 신자들에게 초기 천주교는 그저 예수 마리아라는 주문만을 외우는 몽매의 종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농부와 무지한 시골 아낙네라 하더라도 그 책을 언문으로 베껴 신명(神明)처럼 받들면서 혹은 일을 그만두고서는 외우고 익혀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데 이르렀습니다.”(「승정원일기」 87권 655쪽)

1791년에 일어난 진산 사건, 신해박해로  직암 사백력이 희생되고 이를 계기로 양반 신자들이 대거 이탈한 이후에도 최창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공동체를 지켰다. 또 표면적으로는 은둔 하고 있었던 유항검의 도움으로 윤유일 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 결과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 최창현은 신자들을 대표하는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 정식 사제가 인정한 최초의 사목 회장인 셈이다.

다블뤼 주교는 “최창현은 평상시의 근면함으로 조선에 들어온 모든 천주교 서적들을 베껴 썼는데, 이 일은 그가 항상 몰두하는 일이어서 천주교인들은 서적을 구하려면 큰 상점에 문의하듯이 그에게 말만 하면 될 정도였다”고 전한다.(「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09쪽)
황사영 백서에 기록된 최창현은 겸손하고 신자들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실천형 지도자였다.
“그는 몸가짐이 평화롭고 언행이 공정하며 정의롭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분명해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도 없지만,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과정에서 의금부는 교단의 핵심 인사였던 최창현을 최우선 체포 대상으로 지목했고 체포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최창현은 1801년 4월 8일에 동료신자들과 함께 한성부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당하면서 순교하게 된다.
최창현은 의금부에서 진행된 신문에서 자신이 조선 천주교회의 회장임을 인정하면서 천주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것이다.
의금부로 압송된 최창현(요한)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의금부 추관((推官)의 서슬 퍼런 추문(推問)과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매질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최창현이 뭔가를 숨기는 듯 하거나 대답을 우물쭈물하면 어김없이 매질이 시작됐다. 육모방망이의 각진 곳이 어깨와 등짝을 강타할 때마다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 정신을 잃었다.

의금부는 그를 통해 천주학을 뿌리뽑을 작정이었다.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천주 화상(畵像, 비단 등에 그린 성화)이 최창현의 집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초가 이어졌다.
“정약종에게 보낸 비단 휘장은 어디에 쓰던 물건인가?”
“천주께 첨례(瞻禮)하는 날에 휘장을 설치하고 천주상을 건 다음 무릎을 꿇고 서적을 외우면서 천주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네가 사학에 빠진 것이 꽤 오래되었고, 도당이 아주 많으니 소굴과 교주를 모를 리 없다. 소굴 주인을 진실로 모르냐?”
“모릅니다.”
추관은 최창현에 대한 추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의견을 첨부했다.
“죄인 최창현은 실로 이 옥사의 핵심입니다. 천주 화상, 비단 장막과 도구들은 그의 집에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소굴과 맥락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반은 숨기고 반은 말하니 실로 극히 악랄합니다. 청컨대 다시 엄벌하시어 사실을 얻어내도록 하소서.”

그가 또 어떤 추국, 엄벌을 당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순조실록과 벽위편에 남아 있는 기록은 그가 그해 4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장렬히 순교의 칼을 받았음을 전해준다.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죄인 최창현은 사학 서적에 고혹되어 정약종ㆍ권철신 등을 대부로 존중하고…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결안을 써서 바쳤으므로, 요사한 말과 요사한 글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대중을 미혹시켰다는 사실을 자복 받아 정법(사형)하였다.”(「순조실록」 권2, 2월 26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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