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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7)

안동일 작

 흥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

토비 주교의  맥아더 원수에 대한 설득이 그토록 즉각 이루어 졌는지는 확인 되지 않았지만 피난민 승선에 관한 일은 12월 14일 부로 급진전을 보인다.  카트라이트가 스미스 소장과 함께 순양함 콜로라도호에 올랐던 그 시각, 알몬드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소집했다. 최초의 공식적인 회합이었다. 나중에 부산에서 다시 만난 현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12월14일 오후, “군단장이 소집하는 피난민과 관련한 회의가 열린다. 닥터도 참석하라”는 직속 상관 무어 대령의 연락을 받고 현봉학은 그와 함께 알몬드 군단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포니 대령, 헤이그 보좌관  등 많은 고급장교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 가운데는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민사 참모 박시창 대령 등 2명의 국군장교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인 김백일 장군도 지역 주민들의 피난을 위해 신명을 걸었던 군인이었다. 그는 “함흥 피난민들을 LST 에 승선시키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육로로 철수하겠다”고 까지 했었다.

회의에서 알몬드는 다음의 요점만을 말하고 곧 해산을 선언했다.  “함흥에서 흥남으로 운행되는 심야 기차에 약간의 여력이 있다. 4000~5000여 명의 함흥시민을 이곳 흥남으로 운송하도록 한다. 조속히 수배하도록! 상황은 한없이 나쁘지만, 최악은 아니다.”

어쨌든 낭보 였다.  현봉학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알몬드 사령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미군 수송선을 이용해 피란민을 남쪽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었다.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냉정하고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령관으로선 피란민보다 흥남부두로 몰려온 유엔군 약 10만 명과 많은 군수 물자를 후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현봉학은 물러나지 않고 피란민을 살려달라고 끈질기게 애원했다. 적지 흥남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에 의해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계속 설득했다.

현봉학이 군단장을 직접 장군을 만날 기회는 현실적으로 제한적이었다. 포니 대령 말고도 적극 도와준 이가 한명 더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도쿄의 맥아더 총사령관이 전선의 상황을 직접 보고하라고 파견했던 알렉산더 헤이그 육군 대위였다. 후일 국무장관까지 오른 이다.  현봉학의 간절함이 그에게도 전해졌고 차츰 알몬드 사령관이 마음을 열어 작전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할 즈음 연락장교 헤이그도 흥남부두에 모인 피란민  구출의 필요성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진지하게 보고했다.

아무튼 남한 정부에서 급히 임명한 함경도 도지사와 유명 목사 3명 정도만 승선 시킬 수 있다던 것에서 5천명 까지 늘어난 것은  꽉 막혔던 가슴을 금새  풀게 하는 일이었다.  그길로 현봉학은 16km 거리의 함흥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자신 고향식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군단장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거리고는 그길로 함흥시청과 도청으로 가서 모든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남부교회와 중앙교회, 성결교회, 운흥리교회에 들러 흥남부두로 가라고 했죠. 남부교회에 갔을 때 교인 40여명이 내일이면 함흥이 함락된다며 절망한 가운데 지하실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제가 전해 준 철수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며 감격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시 흥남 일대의 북한 주민들이 원자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말이 돌아 이 때문에 피난 보따리를 쌌다고 하는데 현에 의하면 이는 모르는 소리란다. 당시에도 원자탄이 터지면 어디로 가든 다 죽는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 원자탄이 터지면 만주 쪽이지 비교적 반도 안쪽인 개마고원 지역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가 많이 돌았다.  그보다는 기독교 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 지난 5년간의 북한 정권의 폭정과 종교 탄압이 더 큰 이유였다고 현봉학과  존리는 분석했고 카트라이트도 동의 했다.

며칠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부산 연남동 8군 사령부에서 다시 만난 존리와 닥터현은 카트라이트에게 북한 기독교 역사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분석과 판단 내용을 들려 주었다. 이 일은 카트라이트의 일생에 커다란 전기가 된다. 카트라이트는 군문을 나가면 로마에가서 공부를 더 하고 한국 선교에 나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특히 북한 천주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렸다.

해방 직후 북한을 통치한 소련 군정과 이를 등에 업은 김일성 정권은 북한 교회, 기독교에 대한 회유와 탄압에 나섰다. 평양을 위시한 평안도 지방과 원산 함흥을 거점으로 하는 함경도 지방의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60여 만 개신교 신도 가운데  75%가 평안도 등 서북 지방과 함흥 일대 북관 지역에 분포돼 있었다. 해방 당시에도 평양과 함흥은 조선 개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선교 본부를 함흥에 두고 있었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은 형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가 없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김일성은 기독교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고 이후 1946년에 시행된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에서 다수의 장로와 목사들은 토지와 재산을 잃고 몰락하게 된다.

천주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천주교는 전례에 따라 북한 정권에 우호와 환영의 제스쳐를 보냈다가 호되게 당한 꼴이었다. 조선 천주교는 정교 분리원칙이라는 명제아래 일제 초기부터 안중근의사를 파문 했고 신사참배를 허용 했고 태평양 전쟁을 옹호했던 전력이 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가장 먼저 환영 메시지를 전하고 집회를 열었던 쪽이 조선 천주교 였다. 하지만 곧 닭쫒던 개 꼴이 된다. 당시 공산정권의 탄압은 천주교의 ‘평양교구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치노선에 상반된 유신론 배격에 급급하여 종교를 아편으로 불렀고…국민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소년단, 민청 따위의 무서운 세포조직을 통하여 학우들의 반동 여부와 신자 학생들의 교회 활동을 탐지 보고토록 하며 일요일은 영화감상회, 야영대회, 운동회 등을 구실로 주일미사 참여를 방해하였다…그들은 교회학교를 몰수 또는 폐쇄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탄압은 원산교구의 참사, 풍비박산으로 정점을 찍게 되고 그제야 한국 천주교계는 북한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북한 내 종교 단체들에 가해지는 공산 정권의 압력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갔고 1946년 3월을 기점으로 북한의 개신교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해방 후 처음 맞는 3·1운동 기념행사를 평양 시민대회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지만, 공산정권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교회는 독자적으로 기념 예배를 강행했다. 교역자 다수는 인민위원회에 의해 체포됐다. 목사를 기도회 중간에 끌어내리기 까지 했다.  격분한 3천 여 명의 신도들이 태극기와 십자가를 앞세우고 평양에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는 이미 교회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갖고 있던 김일성 정권을 크게 자극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46년 태동한 선전용 어용단체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은 겉으로는 ‘기독교 발전을 위해 매진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북한 정권의 권력 장악을 돕는 하수 기관이었다.

“결국 북한 교회는 다음 3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바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한경직 목사처럼 월남하거나, 북한에 머물면서 교회를 지키다가 조만식 장로처럼 순교하거나, 강량욱 목사처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김일성을 지지하는 것이었지요.”   현봉학의 말이었다.  이 부분은 후일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6,25가 발발하고 미군이 진주해 오기 까지  함흥일원의 기독교인들은 숨죽이며 숨어서 신앙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낭보의 전달을 끝내고 현봉학이 함흥역에 나가 보았더니, 이미 5만을 넘는 인파가 역전 광장에 모여 있었다. 혹한기인데도 미군 헌병은 몰려드는 인파 정리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기차에 탑승한 것은 우익인사와 기독교도 등이었고, 나머지 인파는 흥남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놀란 미군 헌병이 길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되돌리지 못했다. 군용 차량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을 막는 수준에 그쳐야 했다. 끝없는 인파는 미군 헌병의 저지를 뿌리치고 길을 걸었다.

흥남항 부두는 피난민들로 흘러넘쳤다. 함흥 시민뿐 아니라 함경 남북도 사방에서 올라오고  내려온 피난민들이 가세해, 그 수는 대번에 10여 만 명에 달했다.  피난민들은 당연히 식량과 숙소 문제에 직면했다. 그 중에는 친지의 가정 및 학교 내에 숙박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태반은 난방도 식수도 취사시설도 없이 주먹밥과 모포만으로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견뎌내야 했다. 1군단 예민 참모 박시창 대령이 나서 부대가 남기고 간 군수품을 미군 헌병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구호품으로 나눠 줬지만 조족 지혈이었다. 눈 보라는 왜그리 자주,  심하게  몰아 치는지…그야말로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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