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광복 당일 생전 처음으로 아들 볼에 뽀뽀까지
대한 독립이 이루어졌던 45년 8월 15일, 박희도는 너무도 기뻐 했단다. 그때 모처럼 집에 있었는데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소년 이었던 셋째 아들 승두를 번쩍 안아 올려 생전 처음으로 볼에 뽀뽀까지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행형 생활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허리 통증이 심해 아들을 안는 일도 절대 안했던 그가 그랬다는 것이다. 알려진 것과는 너무도 다른 얘기다.
해방 후 박희도는 반민특위에 불려갔다.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조사관의 출두요청을 받고 이튿날 특위에 출두해 하루종일 취조를 받았고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몇차례 더 조사를 받았으나 재판에 까지 회부되지 않았다.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이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인데 실상은 반민특위가 중도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 됐기 때문이다.
이 반민특위 출두 문제에 있어서도 세간의 오해와 곡해는 상당하다. 언급 했듯이 박희도는 총독부로 부터 작위를 받았다 던지 토지와 현금을 받은 사실이 없다. 당시 제정된 특위법은 무엇보다 친일의 반대급부에 주목해서 죄의 경중을 따졌다. 그 때문에 최린도 정춘수도 이광수도 최남선도 체포되어 구금돼 특위가 해체되는 날까지 갇혀 있어야 했지만 박희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그의 출두사실, 취조사실을 다른 이 보다 더 크게 다뤘고 박희도의 죄상이라 하여 특집기사까지 실었다.
49년 당시 혁신계로 분류되던 연합매일신문 2월27일자를 보면 이런 사실이 두드러진다.
<“독립선언에 서명까지 하고” / 변절한 박희도/ 반미특위서 불구속 취조>
1면 3단크기로 이같은 세줄의 큰 제목을 뽑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민족의 성전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사람인 박희도(62)가 반민 피의자로 22일 부터 ‘특위’에서 불구속으로 문초를 받고 있다. 즉 지난 21일 하오에 열린 특위 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시내 신설동 에 거주하는 박희도를 반민피의자로 문초하게 되었는데 6시경 동인의 집을 찾은 김계선 조사관은 위원회의 결의의 시달과 22일 특위에 출두할 것을 면령 하였든 바 22일 상오 9시반 경 특위에 출두하여 조사관의 문초를 받었다고 한다. 한편 알려져 있는 그의 죄상은 절조가 굳어야 할 민족 영도자의 한사람으로서 3.1정신을 저버리고 일제에 부응하야 민족의 갈 바를 어지럽힌 그의 언동은 다른 변절자와 더부러 엄격한 민족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3면에 박희도의 변절 친일 행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34년 11월 친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조직한 시중회(時中會)의 발기인 및 이사로 1937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인 1939년 1월 《동양지광》창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향했다. 1936년 11월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요망’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선인에 대한 징별제를 촉구하였으며, 이후 1942년 5월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환영하고 감격해하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조선총독, 조선군 사령관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938년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동양지광사>는 내선일체실현을 목적으로 창설된 단체로 기관지인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이 기관지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많은 친일 논설을 게재한 것은 물론, 최린, 윤치호, 장덕수 등 친일 인사들을 동원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 협력을 주장하는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잡지에 실린 친일 논설들은 매우 노골적인 것들로, 박희도는 〈총후 국민의 급선무〉(1941년),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1942년), 징병제 실시에 대한 공개 감사장(1942년), 〈진심을 헌납하라〉(1943년), 〈결전 비상의 때 – 궐기하라 반도 청년〉(1944년) 등을 직접 집필했다. 잡지사 전속으로 극단 협동예술좌를 창단하여 친일 연극의 순회 공연도 주선했다.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평의원(1939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으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고, 전시 체제 확보를 위한 친일 언론인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또한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참여로 활동하였다. > (문책 필자)>
이는 후일 그대로 친일 인명사전등에 원용 된다. 이며 말한 대로 다른 친일 인사들과는 달리 총독부로 부터 입은 승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특위 조사위원회도 감찰위원회도 처리 곤란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희도는 경찰이 주동이 된 반민 특위 난입사건에 오히려 크게 분개 했으며 특위의 와해는 민족과 국가의 슬픈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이다. 반민특위 재판까지 진행됐던 최린의 경우 자신은 해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모르고 그랬다면서 일벌 백계로 자신을 “광화문 네거리에 네 마리의 소에 매달아 죽여 달라”고 했고, 이광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는 유명한 사실과 맞물려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반민특위가 총독부가 제공한 친일 반대급부에 대해 유독 신경을 썼던 관련 법적 이유를 위시해 특위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들은 역시 후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동안 1949년 9월 특위 해체 이후 박희도의 행적은 그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들 승두도 “무언가 바쁜일이 있는지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일찍 나가 늦게 돌아 오시곤 했다.” 고 증언할 뿐 이다. 박희도는 한국 전쟁 기간 중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일자를 두고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우선 그의 제적등본에는 1952년 9월 25일로 돼 있다. 그러나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소 묘비에는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로 기록돼 있다. 가족들은 묘비에 있는 51년이 맞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묘비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큰 자료이기도 하다.
당연히 현경도 이 묘비를 몇번이나 찾았다. 그때 마다 비석에 손을 대고 고인의 명복과 사필귀정을 염원 했는데 비석는 웅웅 대며 무언가 그녀의 손바닥에 이야기를 간넸다고 했다.
언급한 대로 비석 건립일자와 주체는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으로 돼 있다.
다시 확인하면 “고(故)선생은 단기 4222년(1889) 6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 이렇게 돼있다.
그를 추적한 적지 않은 이들이 박희도 최후반부 인생의 공백을 메우는 단서가 바로 고인의 비석에 나타난 육군정훈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학교의 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문의한 바, 비석이 세워진 1958년 당시의 이 학교 교장은 윤태호 준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교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근자에 까지 알려진 바였다.
그러다 한 자유 기고가( 김명식 62년생, 중대 일문과 졸업)가 2008년도에 신동아 잡지에 연재하던 ‘망우리 별곡’이라는 시리즈 가운데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편을 쓰면서 만난,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당시 준장 예편)에게서 박희도가 사망 전까지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했다는 확실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상규는 3.1운동때 경성의전 학생 대표로 박희도와 여러차례 만나 거사를 논의했던 동지 아닌가. 그 동지가 바로 옆애 묻혀 있다가 그의 아들을 통해 많은 이의 의문과 한을 풀어 줬다는 얘기다. 언급했듯이 도산과 유상규는 망우리 묘지에 나란히 묻혀 었었다. 그래서 망우리 별곡에서도 함께 다뤄졌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