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5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76회

안동일 작

에필로그,  그리고 저자 후기

늦은 장마비가 개어 산뜻한 자태를 찾은 경복궁과  그 뒤편의 푸르는 북악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유리창 너머 하늘 위로 대창하와 장수왕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 구름처럼 펼쳐졌다.

“아진, 나는 너의 무엇이었더냐?”  장수왕의 물기어린 물음이었다.
“대왕께서는 제가 평생 뒤따라야 했던 큰 뜻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아진이 진심을 담아 답했다.
“나는 네게  군림하는 왕은 아니었더냐?”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강요로 제게 등을 따라오라 이르신 적이 없으십니다. 제가 원해 그리 했지요.”

“내가 그럴 만한 왕이었더냐?”

“물론입니다, 마마.  사는게 중요한 것을 일러준 것은 아비였으나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쳐주신 것은 마마이십니다. 같은 땅의 인간 모두가 한형제요, 한백성이라는 대왕의 가르침이 저 대창하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는 인생이 그저 태어나 먹고 죽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이 가볍지 않은 눈빛을 가득 담아 신하의 손을 쓸었다.

“그래, 그래. 네가 있어 나도 복된 삶을 살았구나. 내 생각을 잘 이해하고 받들어 주는 너 같은 형제가 있었기에 나도 기뻤고 더 열심일 수 있었다.?비록 지금 눈 앞에서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던 세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생각이란 이어지지 않겠느냐? 너와 내가 못 이룬 꿈은 생각으로 남아 백성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에게 이 전승이야 말로 다물이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그만 쉬거라 나의 형제 아진아.”

대창하 구름이 만족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신이 서려있는 미소였다.

그렇기에 저토록 화사하게 퍼져 나갈수 있음이었다. 자신의 대씨 문중이 이 땅에 남아 사해동포, 홍익인간이란 고구려의 기개를 다시금 떨칠 것이고, 자신이 신명으로 좇았던 장수왕의 치적과 철학은 천년을 넘어 회자되어 칭송되게 될 것을…

2000년 대 중반 어느 늦 여름, 서울 광화문에 나타난 장수왕과 대창하의 모습은 북악의 햇살을 받으며 선비의 정신을 다시금 이르면서 새로운 시작을 일깨우고 있었다.  (대미)

 

저자후기 

세상일에는 우연이 의외로 많다. 일어 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네 인생을 놀라게도 하고 또 살찌우게도 하는데… 그러나 그 우연들은 따지고 보면 숨겨져 있었건 드러나 있었건 씨앗이 있었고 그 씨앗이 발아하는 그런 순환의 과정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니르아이신, 대창하(大昌河)장군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의 연속이었고, 그 우연들은 나를 들뜨게도 했고 때로는 능력 없음을 한탄하게 하는 실의에 빠지게도 했지만 이렇게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곰곰히 씹어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씨앗이 군데군데 뿌려져 있었다. 이 이야기는 누루하치에서 시작해서 빙빙 맴돌다가 중국의 동북공정 공세 속에 터져 나온 고구려 역사 지키기 물결, 또 내 자신의 고구려 문화 연대(사)의 참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탄력을 받아 10여 년 전 어렵사리 이루어 냈던 북한 취재, 몇 해 전 하와이에서의 김연주씨를 통한 김학준 선생의 유고와의 만남 등 시공을 거슬러 올라갔다 돌아오면서 이제 그 조각의 편린들이 깨어진 도자기가 성능 좋은 접착제로 이어져 투박하지만 어떤 일정한 모습을 되찾은 것과 같은 그런 순서를 밟고 있다고 하겠다. 긴 이야기를 간추려 말하면 이렇다.

알다시피 청나라를 세운 고조가 누루하치다. 그는 인구 5백도 채 되지 않는 압록강가의 작은 여진 부락에서 태어나 입지전적 노력에 행운이 겹치면서 천하를 제패했던 지략과 용력을 겸비한 동북아 최고 영걸의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우연히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에 관한 글을 써 보리라 생각했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자료 수집이며 글 구상에 골몰하곤 했었다. 자연히 만주족, 말갈, 여진, 숙신, 물길이라고 다양하게 불리었던 그 민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 관심의 초점은 누루하치의 발흥에 우리 한민족, 당시의 조선 사람들의 역할이 지대했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장사의 길에 나서 큰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바탕으로 병력을 모아 독특한 방식으로 운용하고 성장시켜 중원을 제패했다. 그런데 그의 부축적 과정에 가장 큰 도움을 준 후원자가 조선 사람이었고 그의 가슴에 웅지와 지략 그리고 학문적 소양을 심어준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도 청나라 건국의 당당한 주역이었다는 얘기다.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네 인생사에 있어서 지난날 일에 대한 가정이 큰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광해군이 친명 사대주의 세력에 의해 축출되지 않았거나 강홍립 장군이 조선으로 귀국해 모멸과 질시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지 않고 청에 계속 남았더라면 우리의 역사, 동북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누루하치를 연구하다 보니 만주족, 여진족이 고대로부터 우리와 끈끈한 인연 속에 애증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의 4촌쯤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실은 광해군 시대 말고도 여진 숙신과 관련한 우리 역사의 고비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런 기저 위에 마침 년 전부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동북아의 평화연대’라는 명제가 시대를 선도하는 담론으로 떠올라 있다. (계속)

Related posts

<장편 연재 소설> ‘구루의 물길’ -제 33회

안동일 기자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81회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4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