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줄 아는 ‘진짜 부자’ 김경재 전 동국대 미주 동창회장 <3>
“잘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체를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부인이 와서도 처음에는 홈워크를 함께 했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실밥을 따는 등 온가족이 매달렸기에 수입은 짭잘 했다. 그런데 하청을 주던 봉제업소에서 자신의 업소를 인수 하라고 떠 맡겼던 것이다. 덜컥 인수를 했지만 그때 까지 재봉틀만 돌렸지 다른 봉제일은 알지 못했다. 그때는 부인이 정말 고생했단다. 남의집에 가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고 밤새워 연습하고… 그래도 계속 여기저기 하자는 발생하고, 제품은 반품으로 돌아오고 , 그나마 있던 기술자들은 몽니를 부리고… 주문은 떨어지고 수입은 끊기고… 몇번이고 때려 치우자고 했단다.
고비를 넘게 한 사람들이 바로 동국대학 후배 들
그때 그 고비를 넘게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동국대학교 후배 들이었다. 한사람은 기술자였고 한사람은 경영기획과 세일즈의 귀재 였다. 후배들의 가세로 위기를 극복하자 그의 업체 4 Power, Inc 는 성장을 거듭했고 미싱사만 6백여명 두고 있는 대형 업체가 됐다.
후일 코요테 골프장 구입 때 이런저런 뜬 소문이 났을때 지역 언론은 ‘김경재 씨는 다운타운에서 봉제업을 시작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봉제업은 일부 한인들에게 부를 안겨 주는 수단중 하나였다. 김경재씨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그후 사업 다각화와 코리아 타운 내 건물 매입 등을 추진하면서 타운 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보도 했다. 그러면서 ‘김경재씨가 상당한 재력을 쌓으며 알려지자, 그와 친분이 있는 한인들은 동국 대학교 출신인 것과 전남 해남 출신인 것을 알고 남가주 동국대학교 동문회장과 남가주 호남 향우회 회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고, 흔쾌히 이를 수락한 김경재씨는 본격적으로 타운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LA한인회 수석부회장 및 민주평통 자문회의 부회장 직도 역임했다’ 고 썼다. 백프로 다 맞는것은 아니지만 맥락은 같다고 한다.
흔히들 사람이 부지런 하면 먹고는 살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말한다. 김 회장의 경우도 그랬다. 그가 홈워크에 만족 했다면 오늘의 부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 또 한번의 계기가 찾아오는데 90년대 중반 운영하던 봉제 업소를 자신의 브랜드를 가진 메뉴팩쳐로 발전시킨 것이 그것이다. 남의 옷을 만들어주던 하청 봉제업자에서 자신이 디자인 해 자신의 레이블을 붙혀 파는 메뉴펙쳐로 변신한 것이다. 그의 브랜드가 바로 ‘조이’ (JOY) 였다. 이때 그는 공장에서 24시간 먹고 자며 일에 매달렸다. 때 마침 중남미에 LA 산 의류 붐이 일었다.
“한주 동안 조이라는 로고가 떡 붙어있는 제품을 신나게 생산하면 매주 월요일에 중남미 바이어들이 싹쓸이 하다시피 제품을 사가는 식이었어요. 원피스 티셔츠 투피스 바지 가리지 않고 매번 완판 이었죠. 고되지만 보람된 시기였습니다.”
이때가 갈쿠리로 돈을 긁어 집으로 가져 갔던 시기 였던 모양이다.
그 무렵 맥시코 국경도시를 방문했는데 한두 명이 아닌 절반 가까운 그곳 젊은 여성들이 자신 회사 ‘조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신나 그곳 선술집 바에서 골든벨을 울리기도 했단다. 바텐더도 웨이트레스도 그랬고 또 손님 가운데도 ‘조이’를 입은 이들이 그렇게 많았단다.
부동산을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해
김회장에게는 더 큰 부를 이루게 하는 또 한번의 변신이 찾아 오는데 바로 부동산에 눈을 떴던 시기가 그때 였다. 이 역시 부동산업을 하던 후배의 권유였다. 또 동국대 후배였다. 부동산을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해 처음 그를 부동산 쪽에 끌어 들였던 그 후배를 넘어 선지 벌써 오래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가 불어 나듯 그의 부는 계속 축적 됐다. 그러면서 그는 쓰기 시작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부의 양이 어느정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대개의 부자들이 그렇듯 자신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거나 대외비 일 터였다. 언급했듯이 김회장은 자신의 부에 대해 무척이나 겸손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 절약이 몸에 베어 있는 사람이다. 아무튼 베일에 쌓인 그의 재력은 알려진 것 보다는 더 알차다는 것이 주위의 전언이다. 코요테힐 골프장만 해도 그가 인수한 이래 발전을 거듭해 못해도 예닐곱 배 이상의 가치 상승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곳의 결혼식등 방케 서비스는 일대 최고로 꼽힌단다.
(코요테 힐 스에서의 즐거운 시간들, 이번 여행에 참가한 모든 동문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위 사진) 왼쪽 부터 임경호, 차경훈, 배시영, 구영범, 안동일 ,김우영, 김경재, 김영재, 김치열, 이금재, 강신상, 신창균 동문,
아래 사진은 사진사겸 취재 기자로 특별 호출된 안지영 기자와 김회장이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은 꼽사리(?) 안동일 동문)
골프장을 인수하고 쇼핑몰을 인수하고 물류센터와 쇼핑센터를 운영하는 등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동국대 학교 동문들과 교류를 더 폭넓게 시작한 김 회장은 90년대 중반 북미주 전역에 분포되어 있던 동문들과 뜻을 모아 ‘동국대 북미주 동창회’를 창설했고 이민희, 배시영 회장에 이어 3대 회장을 맡았다. 입학에 이은 모교와의 두 번째 본격적 인연의 시작이었고 그때 시작한 후배들에 대한 장학 사업, 미 전역 동문들에 대한 초청 여행 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에게도 이런저런 고비와 구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사리손으로 재봉한 물건들의 실밥을 뜯어 부모를 돕던 막내 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먼저 떠나는 가족사의 아픔을 겪기도 했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모토에 따라 어렵사리 두 여동생 가족을 미국으로 불러 들여 자신의 봉제공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얼마 못가 예의 김경재식 ‘빡샌’ 노동을 못견디겠다면서 반기를 들고 나가버린 일이 지금도 가슴쓰리단다. 하지만 두 여동생과 매제들은 그 후 역시 봉제업으로 기반을 닦아 지금 여유롭게 잘 지내고 있단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의 일관된 모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고향과 동문을 누구보다 끔찍하게 여기는 그는 본국 정치권 풍향에 따라 이런 저런 구설수와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동국대는 세칭 스카이 대학 만큼의 명문으로는 꼽히지 않는다. 하지만 정재계, 특히 정계 에서의 활약은 매우 활발한 편이다. 조금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조선일보의 지난 2010년 보도에 따르면 1948년 제헌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역대 국회의원 중 학부 중심으로 서울대(경성제대 포함)가 1040명으로 최다 국회의원을 배출했고, 2위인 고려대가 357명, 3위는 육사(239명), 4위는 연세대(205명), 5위는 동국대(91명)였다.
동국대는 최근의 21대 국회에도 홍영표, 김석기 의원을 비롯해 대학원 포함 21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동국대가 다른 대학을 제치고 국회의원 배출에 강점을 보인 이유는 뭘까. 당시 조선일보 보도는 동국대 출신 역대 국회의원 중엔 최재구 의원(당시 공화당), 황명수, 최형우, 김동영 전 통일민주당(당시 신한국당) 의원, 권노갑 의원(당시 국민회의)이 있다면서 이들은 동국대 출신이란 것 외에도 ‘최정상 권력자의 측근’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이 영향이 크다고 썼다.
이들이 잘 나갈 때는 마음만 먹으면 국회의원 자리 한두 개 확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동국대 동창회는 회원 20만 명에 전국 1200개 지부와 12개의 해외 지부를 두고 있다. 북미주 동창회도 그중 하나다. 동창회 관계자는 “고려대 못지않은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말했단다. 또 당시 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 최재성 의원은 “의리와 투박함 등 교풍이 고대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이덕화 이경규씨 같은 많은 연예인 동문이 동문 선거운동에도 열성적이라는 점도 꼽았다.
‘동국대 총동창회’가 정권의 향방에 따라 최적의 회장을 배치해왔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 때는 최재구,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선 정재철 전 민정당 의원, 김영삼 정부 때는 황명수, 김대중 정부 때는 권노갑씨가 동국대 총동창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와는 무관한 기업인 출신이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송석환 회장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총동창회 바로 직전 회장인 송석환 회장은 전세계의 스타벅스 매장에 친환경 컵을 납품하는 업체, 동진기업을 이끌고 있는 잘 나가는 동국 기업인. 김경재 회장의 같은 과 1년 선배로 매우 절친 한데 이번 여행 때, 라스베가스 일정이 우연히 겹쳐 오랫만에 모두들 회포를 풀기도 했다. 동문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 최근 없어서 기업인 회장이 된 것 아니냐는 당시 취재 기자의 물음에 동문회 측은 “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경제의 시대 아니냐”고 했단다. 어쩐지 기자의 귀에는 경제의 시대가 경재의 시대로 들린다.
위사진은 뉴욕의 좌장 배시영 회장과 포즈를 취한 김경재 회장, 오른쪽은 LA 중앙 문화 센터의 여성 동국대 동문. 아래 사진은 송석환 총동창회 직전 회장 부부와 안동일 기자. 우연히도 일정이 겹쳐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송회장 부부는 뉴욕 동문들에게 멋진 저녁을 한턱 쏘았다. (촬영 안지영기자)
김경재 회장도 동문 정치인 들과 연계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2003년 코요테 골프 장을 인수 할때 그 자금이 당시의 실세 권노갑 의원의 돈 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돌기도 했고 DJ 정권말기 3홍(홍일 홍업 홍걸 3형제) 스캔들이 일었을 때 막내 홍걸씨에게 부촌 팔로스 버디에 저택을 구입해준 사람이 김회장 이었다고 보도 되기도 했다. 권노갑씨의 경우에는 동문에 동향(권씨의 고향은 목포) 이기 때문에 더 그럴싸하게 퍼져 나갔지만 후일 두건 다 사실무근으로 밝혀 졌다. 공연히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풍설이었던 것이다.
45년 을유생인 그는 현재 77세다. 하지만 그는 아직 청춘이라고 자부 한다. 그만큼 정열적이고 활달하다. 실제 그의 외모는 결코 여든을 바라보는 노장이 아니다. 건강의 비결은 걷는 것이다. 매일 두시간 이상씩 걷는다고 한다.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돈을 잘 쓰는 꿈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돈을 잘 쓰는 꿈이다. 알찬 장학재단과 의료복지지원 재단을 만드는 것이 그의 소망.
김 회장은 먼저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북미주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부활시키고 힘이 닿는 한 계속 지원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모교 동국대학교는 나에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교가 잘 되고 후배들이 잘돼야, 나도 잘되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지구촌 동국 사랑 1호인이라는 칭호를 내려도 좋을 듯 하다. 이럴때 동국은 그 에게는 고향이고 고국이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김회장은 서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뉴욕 동문들이 SNS 를 통해 감사의 뜻을 다시 한번 전하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사랑하는 미주 동문 (뉴욕 워싱턴) 여러분, 마음을 다해 정성껏 한다고 했습니다만 혹여 부족한 점 있더라도 대 동국에 맘으로 이해 하시고 선배님 후배님 모두들 건강 하시길 기도합니다~~~’
김 회장은 늘 후배들에게 “잘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세계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잘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 나눔을 실천 하는 사람,’ 멋진 말 아닌가. 잘나기 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려하는 그는 지금도 어떤 나눔을 실천 할까 구상하면서 그림자 이금재 아우와 함께 오렌지 카운티 호젓한 길을 산책 하듯 걷고 있을 게다.
진정한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글을 맺는다. (안지영 기자)
위 아래 두 사진은 멋진 코요테 힐스와 벨라지오 호텔의 경관. 김영재 김우영 신창균 그리고 구영범 동문의 멋진 모습이 보이다. 내년을 또 기약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