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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23회

안동일 작

/홍콩에서 보내온 원단 셈플들을 보는 유진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이 한물간 인프린트를 어떻게 팔아먹지?”
“왜 내가 보기엔 아주 화려 하고 좋은데…”
빌리가 대꾸했다.
“야, 이건 벌써 5년 전에 유행이 끝난거야, 지금 누가 이런 원색 무늬옷을 입고 다니냐? 다 검은색이나 흰색같은 솔리드한 단색 일색인데…”
“어쨌든 우리의 처음 일이니까 뛰어 보자구, 하기도 전에 겁먹을 필요 없잖아?”
“그래, 운 좋은 우등생 녀석, 사회 첫 경험 어떻게 풀리나 한번 보자.”
윤호가 호기롭게 말했다./

 

도도하게 흐르는 운명의 물줄기를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것 처럼 윌리는 어차피 그 길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고교시절 싸움판에 끼게 된 사건이며, 가장 친한 친구 최윤호가 카지노 딜러가 되어야 했던 것, 또 카니를 만나고 이가영을 알게 되고 왕상문을 만나게 된것이 그의 운명을 가늠 짓는 만남들 이었던 것이다.
인생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사람과 사건과의 만남 그리고 사람과 사물과의 만남, 만남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은 어차피 자신의 몫이다.
빌리가 그냥 법률회사에 있었더라면 미국에서 그럭저럭 성공한 교포 1.5세의 하나로 인정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꿈대로 법률회사의 경력을 발판으로 미국 정치에 입문 하던지 관계로 진출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수민족 이민자에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길인지 또 얼마나 성공 확률이 낮은지 그간의 숱한 경험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또 빌리에게 그런 종류의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빌리는 자신의 우연처럼 찾아든 운명적 만남 속에서 그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빌리가 법률 회사를 과감하게 때려치고 나와 시작한 사업은 의류업이었다. 의류업 가운데서도 원단 장사에 제일 먼저 착수 했다. 왕노사가 그무렵 떠 안게 된 홍콩의 원단 공장에 질 좋은 실크가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윤호가 자기 집에서 봉제업을 했었기에 그 방면에 대해서 아는게 많았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빌리는 회사 설립을 구상하면서 윤호를 아틀랜틱 시티에서 뉴욕으로 끌어 올렸다. 빌리의 제의에 윤호가 대뜸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음은 물론이다.
윤호를 차이나 타운의 도박 클럽 책임자로 앉히려 했던 이가영,브루스가 다소 섭섭하게 생각 했지만 그건 곧 회복 될 수 있었던 아주 사소한 불만일 뿐이었다.
빌리와 윤호가 맨해턴 36번가 허름한 빌딩 꼭대기에 사무실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축하해 준 사람이 브루스였고 사무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호화로운 응접 세트를 선물한 사람도 바로 브루스였다.
브루스는 처음부터 거창하게 나가지 이렇게 초라하게 시작 하느냐고 성화 였다. 그러나 빌리와 윤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공연히 허세만 부리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우스운 꼴 보다는 새로 시작한다는 자세로 될 수 있으면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사업을 일으켜 보자고 다짐 했던 것이다.
사무실을 호화롭게 꾸미는 것 쯤이야 두사람의 저축을 털어 붇거나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 해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 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일날 처음 만난 이래 홍콩의 왕노인은 빌리를 친손자 처럼 대해 주면서 뉴욕에 오면 꼭 찾곤 했고 어떤 도움이라도 말만 하면 해주겠다고 했지만 빌리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이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나이의 꿈이라는 노사의 깨우침, 그것 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큰 도움입니다. 돈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꿈이 있으면 돈이 따르게 되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개업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 노인의 도움 제의를 다시 사양 하면서 빌리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창고에 쌓여 있는 원단을 저가의 외상으로 밀어 주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뉴욕 가멘트 업게는 최악의 불황 국면이었다.
빌리는 이런 불황일 수록 일어설 구멍이 많다는 점에 착안했고 그의 착안은 그대로 맞아 떨어 졌다.
빌리와 윤호는 자신들의 회사 이름을 ‘ 씨엔씨 크레이이티브 엔터프라이즈’로 지었다. 윌리엄과 유진 두사람의 성이 모두 씨로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빌리로만 부르라고 했다. 후일 ‘빌리 더 저지먼트’라는 별명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 빌리는 자신의 성을 CHENG로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미국에 유학 왓던 1950년대 초반 한국 외무부 직원의 실수로 정씨의 스펠 가운데 O자 하나를 빠뜨린 여권을 내줬고 그 이후 아버지 테드 정이며 자신도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가다 사람들은 빌리의 성을 쳉이라고 부르면서 중국인으로 오해 하기도 했다.

홍콩에서 보내온 원단 셈플들을 보는 유진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이 한물간 인프린트를 어떻게 팔아먹지?”
“왜 내가 보기엔 아주 화려 하고 좋은데…”
빌리가 대꾸했다.
“야 이건 벌써 5년 전에 유행이 끝난거야, 지금 누가 이런 원색 무늬옷을 입고 다니냐? 다 검은색이나 흰색같은 솔리드한 단색 일색인데…”
“어쨌든 우리의 처음 일이니까 뛰어 보자구, 하기도 전에 겁먹을 필요 없잖아?”
“그래, 운 좋은 우등생 녀석, 사회 첫 경험 어떻게 풀리나 한번 보자.”
윤호가 호기롭게 말했다.
사무실에는 자동 응답기만 걸어 두고 두사람은 샘플 스와치를 옆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빌리는 무작정 사무실을 뛰어 나온것은 아니었다. 나름 대로는 지난 며칠 동안 치밀한 조사를 끝낸 뒤 였다.
빌리는 맨해턴 38가의 패션센터 빌딩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은 메뉴펙쳐라 불리우는 의류 생산 업자들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빌리와 같이 직물 원단을 수입해 팔아야 하는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 메뉴펙쳐들 이었다. 메뉴펙쳐는 자체 공장을 가지고 있거나 하청 공장인 컨트랙터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어 바이어들의 주문에 따라 옷을 만들어 냈다. 칼빈 클라인이나 조지오 알마니, 메이시 백화점 같은 곳이 가멘트 업계의 대형 바이어 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바이어 쪽을 뚫는게 더 큰 규모이고 중요할 수 있었으나 빌리네와 같이 처음 시작 하는 소규모 원단 중계업체의 경우에는 그쪽과 선이 닿지 않았다. 메뉴퍀쳐들도 웬만해서는 대형 바이어 들과 직접 선이 닿지 않고 디스트리뷰터라 불리우는 고급 중계업자를 통해 그들로 부터 일감을 받아 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자니 이런 가멘트 업계의 먹이 사슬 구조에서 가장 죽어 나는 것은 마지막 노동을 담당하는 소규모 봉제업체인 컨트렉터 들이었다.그들은 중간 과정에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면서도 일감을 따내기 위해 이런 저런 눈치를 봐야 했다.
어쨌든 메뉴펙쳐들에게 디자인이며 천의 재질을 결정 하는 일차적 권한이 있었기에 그들을 공략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빌리는 경쾌한 걸음으로 1480 건물에 들어 섰다. 웬지 예감도 좋았고 기분이 상쾌했다. 패션센터라 불리우는 건물 이었다. 16층 대형 건물 전체가 패션업과 관련된 업소들이 사용하고 있는 그야 말로 뉴욕 패션계의 메카였다.
빌리는 로비 벽면 한쪽에 촘촘히 적혀 있는 사무실 안내판과 자신의 수첩을 대조 했고, 반사되는 대리석 벽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처음 찾은 곳은 16층에 있는 ‘카트라이트 슬랙스’사 였다.
바지 전문 업체로 출발해 셔츠며 자켓 에서도 성공을 거둔 큰 업체였다. 문을 열고 들어 가자 20대 초반의 금발 리셉셔니스트가 앉아 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무엇을 도울까 물어 왔다.빌리의 말쑥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 모양이다.
“씨엔씨 크리에이션의 윌리엄 입니다. 구매 담당 매니저를 만나고 싶은데요.”
“마가렛이요 약속이 되셨습니까?”
빌리는 이 회사 구매 담당자가 여성이며 이름이 마가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속은 안 됐지만, 아주 좋은일이 있어서…”
“잠깐만이요.”
그녀가 인터폰을 들어 마가렛과 통화를 하더니 빌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용건 이냐고 하는데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비단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빌리가 비단장사 라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잠시 샐쭉 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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