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4>
안동일 작
1777년 9월,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에서 약 두 달간 치료와 요양을 받은 라파예트는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11월 초 전선에 복귀했다.
그때 워싱턴 대륙군은 저먼타운 패전 직후 필라델피아 바로 북쪽 외곽의 요충지였던 화이트마시(Whitemarsh)에 진지를 구축하고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화이트마시 언덕 위 엠런 하우스(Emlen House)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워싱턴은 다리를 절며 복귀한 아들 같은 청년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아들여 종전처럼 총사령관 참모부에서 복무하도록 배려했다.
당시 화이트마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얼어붙은 전선과 굶주림의 서막’이었다.
아직 밸리 포지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이미 11월의 펜실베이니아는 매서운 서리와 찬바람이 몰아쳤다. 병사들은 신발이 없어 피 묻은 맨발로 낙엽을 밟았고, 식량과 텐트가 턱없이 부족해 모닥불 주위에 웅크려 덜덜 떨며 밤을 지새웠다. 밸리 포지의 고난이 이미 이곳 화이트마시에서 예행연습처럼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돌아온 고마운 프랑스 청년을 와락 힘차게 끌어안기는 했지만, 군내의 복잡한 정치적 시선 때문에 아직 정식 야전 지휘권을 쥐여주지는 못한 상태였다.
바로 이때, 청년 라파예트의 군사적 진가가 폭발하는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11월 하순,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영국군이 병력을 양분하여 콘월리스 산하의 군대가 뉴저지 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워싱턴은 내서니엘 그린 장군의 부대를 경계 겸 차단 임무로 급파했다. 이때 라파예트는 자신이 선봉 정찰대를 이끌겠다고 자원했다.
11월 25일, 뉴저지 글로스터 인근 분지에서 라파예트는 불과 350명 남짓한 대륙군 소총병(모건 라이플 연대 일부)과 민병대를 이끌고, 정예 독일계 헤센 엽병(Jäger) 600여 명을 상대로 대담한 기습을 감행했다.
라파예트는 최전선에서 교차 사격을 지휘하며 헤센 용병대를 매섭게 패퇴시켰다. 아군 사상자는 단 1명에 불과한 반면, 적군 60여 명을 사상 및 포로로 잡는 눈부신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승전보는 패배감에 찌들어 있던 화이트마시 사령부에 거대한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워싱턴은 즉각 임시 수도 요크의 대륙회의에 격찬이 담긴 편지를 띄워 “이 젊은 후작의 용기와 군사적 재능은 정식 사단을 지휘하기에 차고 넘친다”고 강력히 천거했다. 앞선 브랜디와인에서 보여준 담력과 헌신 그리고 용병술도 빠짐없이 덧붙였다.
12월 1일, 대륙회의는 마침내 라파예트에게 굴욕적인 명예직 꼬리표를 떼고 버지니아 사단의 정식 사단장(소장) 지휘권을 부여했다. 절뚝거리며 복귀한 라파예트가 글로스터로 뛰어나가 승전보를 워싱턴의 품에 안겨줌으로써, 총사령관의 어깨를 펴게 해주고 진짜 야전 지휘관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대륙회의로부터 날아든 버지니아 사단 지휘권 승인 서한을 쥔 라파예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석 달 전 필라델피아에서 의원들이 마지못해 던져주었던 차가운 명예직 증서가 아니었다. 브랜디와인의 핏자국과 글로스터 눈밭의 화약 연기를 뚫고 제 손으로 당당히 쟁취해 낸 진짜 야전 지휘관의 깃발이었다.
“나의 사단장, 자네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소.”
엠런 저택 사령부 집무실에서 워싱턴이 건넨 묵직한 한마디에, 라파예트는 가슴속 성패를 쥐며 다시 한번 순명의 눈물을 삼켰다.
라파예트가 맡은 부대는 버지니아 병력 전체가 아니라, 2개 여단으로 구성된 한 개 정규 사단이었다.병력 수 대륙 최강인 버지니아는 3개 사단을 운용 하고 있었다. 라파예트가 정예 1 사단의 지휘권을 넘겨받게 된 이면에는 전임 사단장의 음주 및 군법회의 파면이라는 뼈아픈 전말이 얽혀 있었다.
원래 버지니아 1사단의 지휘관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백전노장 아담 스티븐(Adam Stephen) 소장이었다. 7년 전쟁 때부터 워싱턴과 함께 싸웠던 전우였으나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다. 10월 초 저먼타운 전투 당시, 짙은 안개와 연기 속에서 스티븐 소장의 부대는 같은 대륙군인 앤서니 웨인 장군의 부대를 영국군으로 오인해 등 뒤에서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이 뼈아픈 오인 사격으로 인해 승기를 잡아가던 기습 작전이 대혼란에 빠지며 패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전투 중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음주 혐의와 아군 오인 사격의 책임을 물어 스티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777년 11월 20일 불명예 파면되었다. 사단장 공석 사태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글로스터 전공 직후 스티븐이 맡고 있던 사단을 라파예트에게 통째로 넘기기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라파예트가 인수한 1 사단에는 정예 2개 여단(Brigade)이 속해 있었다. 윌리엄 우드퍼드(William Woodford) 준장의 제3 버지니아 여단과 찰스 스콧(Charles Scott) 준장의 제4 버지니아 여단이었다. 두 여단 모두 혁혁한 전공을 자랑하는 정예들이었다. 그레이트브리지 전투의 영웅 우드퍼드 준장은 브랜디와인에서 라파예트와 함께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렸던 전우였고, 스콧 준장의 장병들 역시 저먼타운의 사선을 뚫고 생환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워싱턴이 굳이 자신의 고향 군대인 버지니아 사단을 라파예트에게 맡긴 데에는 세심한 계산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버지니아 연대들은 워싱턴의 직계 부대이자 가장 끈끈한 고향 부대였다. 워싱턴은 스무 살 이방인에게 텃세와 파벌이 극심한 다른 지역(뉴잉글랜드나 펜실베이니아 등) 군대를 맡기면 또다시 반발과 하극상이 일어날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자신의 고향 군대를 소년에게 내어줌으로써, “이 청년은 내 분신이며, 이 청년을 거역하는 것은 곧 나 조지 워싱턴을 거역하는 것이다”라는 무언의 선언을 전군에 공표한 셈이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사병들의 반응이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오만했던 늙은 주정뱅이 대신 소년 천사가 나타났다”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전임 스티븐은 거칠고 독선적이며 병사들에게 군림하던 구시대 유럽풍 인물이었다. 반면 새로 부임한 스무 살 라파예트는 정반대였다.
그는 장교용 천막을 마다하고 흙바닥 텐트에서 병사들과 똑같이 거적을 깔고 지냈으며, 신발도 옷도 없는 버지니아 장병들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두꺼운 셔츠와 외투를 사 왔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매일 아침 진지를 돌며 병사들의 안부를 묻는 이 다정한 프랑스 귀족 청년에게, 거칠기로 소문난 버지니아 촌놈 포수들과 민병 출신 사병들은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이후 밸리 포지의 참혹한 겨울 동안 라파예트의 버지니아 사단은 워싱턴을 지키는 가장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물론, 훗날 독립전쟁의 마지막 결전인 요크타운 전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총사령관의 가장 든든한 친위대를 등에 업음으로써, 라파예트는 그 어떤 파벌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군사적 방패를 쥐게 되었다. 만약 라파예트가 여전히 군대 없는 명예직 도련님에 불과했다면, 얼마 뒤 게이츠와 콘웨이가 ‘캐나다 원정군 사령관’ 완장을 던져주었을 때 꼼짝없이 이용당하거나 휘둘렸을 것이다. 이미 자신을 목숨 바쳐 따르는 버지니아의 억센 병사들과 정식 사단을 거느린 사령관이었기에, 청년은 저 거대한 정치적 음모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선의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병참 보급의 붕괴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은 불과 13마일 거리에 주둔한 워싱턴의 숨통을 끊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12월 초에는 실제로 영국군 1만여 명이 화이트마시로 쳐들어와 치열한 전초전(화이트마시 전투)이 벌어지기도 했다. 열악한 무기의 대륙군은 가까스로 적을 물리쳤으나, 엄동설한의 진지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워싱턴은 조금 더 북서쪽의 천연 요새 지대인 밸리 포지(Valley Forge)로 병영을 옮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사이 북부에서 게이츠가 사라토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때 환호가 일었으나, 이는 엉뚱한 정치적 재앙으로 번졌다. 대륙회의, 특히 군사위원회 안팎에서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도 뺏기고 저먼타운에서도 패배한 무능한 장군”이라며 게이츠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의 독버섯(‘콘웨이 음모’ 편지 사건)이 본격적으로 싹텄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밖으로는 영국군의 압박, 안으로는 비열한 정치적 배신에 둘러싸여 가장 고독하고 비통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12월 11일, 화이트마시 진지를 정리한 대륙군은 마침내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겨울 숙영지인 밸리 포지를 향해 피 묻은 눈길 행군을 시작했다. 라파예트의 버지니아 사단은 워싱턴의 지근거리에서 행군했고, 밸리 포지에서도 총사령부와 가장 가까운 명당에 캠프를 차려 사령관을 그림자처럼 호위했다.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가며 통나무 병영 건설에 안간힘을 쏟고 있던 1778년 1월 22일경, 라파예트와 워싱턴은 군사위원회로부터 뜻밖의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의회 군사위원회를 장악하고 기세등등하던 호레이쇼 게이츠가 라파예트를 ‘북부 캐나다 침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제 막 전군과 병사들의 신망을 얻어 자리를 잡아가던 라파예트를 워싱턴에게서 떼어놓아, 총사령관의 날개를 꺾어버리려는 교활한 수작이었다.
라파예트는 워싱턴과 긴밀히 상의한 끝에, 의회의 진짜 의도와 전모를 파악하고 결판을 내기 위해 1월 말(28~30일경) 밸리 포지를 떠나 의회가 있는 임시 수도 요크(York)로 말을 달렸다. 워싱턴은 백전노장 요한 드 칼브를 소년의 곁에 동행하도록 붙여주었다.
한편, 찰스 캐럴은 당시 대륙회의의 ‘군사조사위원회(Committee of Conference)’ 위원으로 임명되어, 혹한의 참상을 조사하고 군제를 개혁하기 위해 요크를 떠나 밸리 포지로 동진(東進)하고 있었다.
요크에서 밸리 포지를 오가는 유일한 통로는 랭커스터(Lancaster)를 경유하는 ‘그레이트 왜건 로드(Great Wagon Road)’였다. 랭커스터는 밸리 포지와 요크를 잇는 중간 길목이자 펜실베이니아 내륙 최대의 교통 요충지였다. 물류의 거점이자 의원들과 장교들이 반드시 말을 갈아타고 묵어가던 중심 도시로, 대륙회의 역시 필라델피아를 탈출해 요크로 가기 전인 1777년 9월 27일 이곳에서 하루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랭커스터에서 요크까지는 서스쿼해나강을 건너 약 25마일, 밸리 포지까지는 동쪽으로 약 45마일 거리였다.
1778년 1월 말, 살을 에는 북서풍이 몰아치던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어스름한 저녁.
밸리 포지로 향하던 찰스 캐럴은 말의 피로를 풀고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길목의 유명한 역참 주막인 ‘화이트 호스 여관(White Horse Tavern)’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찰스는 동료 의원들과 함께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거친 출입문 종소리가 울리며 서쪽 요크를 향해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라파예트가 꽁꽁 얼어붙은 털외투를 털며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난롯가에서 차를 마시던 기품 있는 중년 신사와, 얼음 부스러기를 털어내던 청년 장교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숨을 삼켰다.
“캐럴 의원님! 이런 눈길에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라파예트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모국어인 프랑스어였다.
“후작이야말로 이 험한 눈보라 속에 어쩐 일이오?”
두 사람은 와락 부둥켜안았다. 라파예트는 프랑스식으로 자신의 차가운 뺨을 캐럴의 양 볼에 비벼댔고, 캐럴 역시 청년의 어깨를 힘껏 끌어당기며 온몸으로 꼭 안아주었다. 편지는 몇차례 오갔으나 얼굴을 마주한 것은 저먼타운 전투 직전 이후 거의 반년 만이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피와 시련이 스쳐 지나갔던가.
기적 같은 조우의 인사와 동행자 소개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작은 방의 등불 아래 마주 앉았다. 라파예트가 억누를 길 없는 분노로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캐럴 각하, 의회의 늙은 여우들과 게이츠 일당이 저를 흔들고 있습니다. 제게 ‘북부 캐나다 원정군 총사령관’ 완장을 던져주며 워싱턴 각하의 곁을 떠나라 합니다. 조국 프랑스의 옛 땅 퀘벡을 되찾으라는 이 화려한 멍에를 씌워 나를 장군님의 곁에서 떼어놓으려는 수작입니다. 거절하자니 명령 불복종이고, 수락하자니 장군님의 등을 찌르는 칼이 되는 것 같아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저는 지금 요크로 가 그 음흉한 임명장을 의원들 면전에 패대기칠 작정입니다!”
“진정하시오, 길베르.”
군사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내막을 이미 꿰뚫고 있던 찰스 캐럴이 유창하고 나지막한 프랑스어로, 그러나 쇠붙이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청년의 등을 두드렸다.
“적이 판 함정에 스스로 발을 빼는 것은 하책(下策)이오. 의회의 임명을 거절하면 저들은 ‘어린 프랑스 귀족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거나 ‘대륙회의의 권위를 능멸했다’며 후작과 워싱턴 장군을 항명죄로 엮어 한 묶음으로 몰아세울 것이오. 피하지 말고 가시오, 후작. 요크로 정면으로 쳐들어가시오!”
캐럴은 라파예트의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고, 난롯가 의자에 깊숙이 앉히며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와인 한 잔을 쥐여주었다.
“요크에 가시거든 거절하지 마시고 그 자리를 당당히 수락하시오. 다만, 단 하나의 조건을 결의안에 못 박으시오. ‘나의 직속 상관은 오직 조지 워싱턴 장군 한 사람뿐이며, 원정군의 모든 작전 보고는 오직 총사령관 각하께만 올린다.’ 그리고 부사령관으로는 저들이 붙여주려는 토머스 콘웨이를 단칼에 거부하고, 저기 함께 온 든든한 드 칼브 장군을 지명하시오. 저들이 호랑이를 꾀어내려 파놓은 함정에, 거꾸로 저들의 발목을 묶어버리는 족쇄를 채우는 겁니다.”
찰스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에 북부의 캐나다 침공군은 결코 온전히 꾸려질 수 없소. 저들이 후작의 조국애를 미끼로 덫을 놓았다면, 후작은 베르사유의 기사도가 무엇인지 그 촌뜨기 모리배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면 되는 것이오. 가서 받으시오! 단, ‘워싱턴 총사령관의 휘하로서만 군대를 지휘하겠다’는 쐐기를 그들의 목구멍에 처박아 넣고 오시오. 내일 아침 나 역시 의회 조사관의 자격으로 밸리 포지로 들어가 그들을 압박할 터이니, 뒤는 걱정 말고 후작 자네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잔을 드시오!”
결론은 섰으나 세부적인 정세와 대책을 논의하느라 두 사람의 은밀한 밀담은 자정을 훌쩍 넘겨 이어졌다.
새벽녘, 작별을 앞두고 찰스 캐럴이 품속에서 손때 묻은 묵주를 꺼내 들었다. 라파예트 역시 존 캐럴 신부에게 받았던 묵주를 꺼내 들었고, 두 사람의 거친 손이 십자가 위에서 포개졌다. 이 정치적 담판이 단순한 세속의 암투를 넘어 ‘천주교도들의 순명과 기도가 일궈낸 보이지 않는 섭리의 승리’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길베르, 칼과 혀로 싸우기 전에 먼저 무릎으로 싸워야 합니다. 지금 도허레건의 경당에서는 존 형님과 아버님께서, 그리고 베르사유의 저택에서는 당신의 아내 아드리엔이 눈물로 성모의 전구를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간계와 분열의 영이 저 오만한 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우리의 이 걸음이 공명심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의(義)와 핍박받는 백성을 위한 순명이 되게 해달라고 청합시다.”
두 사내의 나직한 라틴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눈보라 치는 여관방의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와 섞여 하늘로 피어올랐다. 이날 기도의 마지막은 ‘성 미카엘 대천사의 기도’였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간청하오니 그를 굴복시키소서. 천상 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하느님의 힘으로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기도를 마쳤을 때, 청년 후작의 눈빛에서는 격한 분노가 씻은 듯 걷히고 차분하고 단단한 영적 평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스쿠킬강과 내륙의 들판 위로 붉은 서리 안개가 피어오를 때, 라파예트가 요크로 향하는 말에 올라탔다. 찰스는 말안장을 고쳐 매는 라파예트의 외투 주머니에 스페인 8레알 은화 한 닢을 쥐여주었다.
“이건 장군을 향한 자네의 변치 않을 맹세의 징표요. 요크의 회합에서 심장이 떨리거든 주머니 속 이 차가운 은화를 쥐어보시오. 후작의 뒤에 조지 워싱턴과 나 찰스 캐럴, 그리고 하느님의 공의가 버티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라파예트는 은화를 가슴 깊이 품고 찰스에게 단단한 기마 경례를 올린 뒤, 드 칼브와 함께 눈 덮인 펜실베이니아의 가도를 질주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워싱턴을 구하기 위해 성모의 안배 아래 이루어진 긴급 막후 밀담이었다. 찰스는 은화와 보급을 싣고 굶주린 밸리 포지로 들어가 실질적인 군대를 살려내고, 라파예트는 서스쿼해나강을 건너 요크로 진격해 정치적 음모를 정면 돌파하는 ‘외교와 보급의 완벽한 양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778년 2월 3일 밤, 대륙회의 임시 수도 요크에 마련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공관 저택.
사라토가 전투의 영웅을 자처하는 게이츠, 워싱턴을 비난하며 군사위원회를 장악한 토머스 콘웨이, 그리고 워싱턴을 불신하는 북부 출신 의원들이 길게 늘어선 만찬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은촛대와 고급 와인이 차려진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스무 살의 라파예트가 당당한 기마 장교의 보폭으로 걸어 들어왔다. 게이츠가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들고 맞이했다.
“오, 우리의 영웅 라파예트 후작! 마침내 대륙회의의 부름에 응해 주셨구려. 프랑스 왕실의 옛 영광을 되찾을 캐나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당신보다 적임자는 없소!”
콘웨이와 의원들이 번갈아 일어나며 잔을 부딪쳤다.
“사라토가의 진정한 구원자, 게이츠 장군을 위하여!”
“새로운 군사위원회의 영광을 위하여!”
“독립을 이끌 대륙회의를 위하여!”
수 차례의 건배가 오가는 동안, 누구의 입에서도 현재 밸리 포지의 진흙 구덩이에서 피를 말리고 있는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이름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노골적인 지우기이자 참담한 모욕이었다.
위선적인 웃음과 탐욕의 술잔들이 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라파예트는 옷섶 안쪽에 닿아 있는 은빛 기적의 성패와 찰스가 건네준 차가운 은화를 손가락 끝으로 꾹 쥐었다.
‘천상의 모후이시여, 연약한 당신의 기사에게 다윗의 용기를 주소서. 밸리 포지의 얼어붙은 눈밭에서 피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당신의 의인을 조롱하는 저들의 간계를 꺾을 힘을 제 혀끝에 실어주소서.’
짧은 화살기도가 청년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일말의 두려움조차 씻은 듯 사라졌다.
라파예트는 천천히 와인잔을 채우더니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만찬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는 청년의 모습에 시끌벅적하던 웃음소리가 일순간 멎었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청년이 잔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을 때, 그 자리에 선 것은 혈기 넘치는 스무 살 귀족이 아니라 악의 무리를 향해 미카엘의 검을 겨눈 하느님의 기사였다.
라파예트는 좌중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하고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억양은 다소 어색했지만 서슬 퍼런 영어였다.
“제너럴 게이츠, 그리고 의원 여러분. 오늘 밤 수많은 영광을 기리는 건배가 오갔으나, 정작 이 나라의 명운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저 혹한의 천막에서 떨고 계신 단 한 분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게이츠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고, 콘웨이의 술잔을 쥔 손이 굳어버렸다. 라파예트는 흔들리는 그들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사자후를 토했다.
“대륙군의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을 위하여!(To General Washington, Commander-in-Chief of the American Army!)”
만찬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감히 총사령관에 대한 건배를 거부했다간 명령 불복종과 반역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외통수였다. 게이츠와 콘웨이는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며, 독약을 들이켜듯 억지로 잔을 입술에 대고 삼켰다.
라파예트는 잔을 단숨에 비워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찰스 캐럴이 일러준 조건문—’워싱턴 총사령관 휘하의 독립 사단이어야 하며, 부사령관은 드 칼브 장군이어야 한다’는 서류를 테이블 한가운데 던져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만찬장을 걸어 나갔다.
그 길로 연회는 파장이었다.
찰스 캐럴이 눈 덮인 밸리 포지에 도착해 굶주린 병사들에게 은화와 식량을 풀고 숙소에서 홀로 묵주알을 굴리며 간구하던 바로 그 시각, 요크의 만찬장을 초토화시킨 라파예트 역시 숙소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의 성호를 긋고 있었다.
세속의 눈에는 젊은 귀족의 대담한 배짱 하나가 뒤흔든 사건처럼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메릴랜드의 흙바닥과 베르사유의 제단,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의 눈길 위에서 바쳐진 이름 없는 천주교도들의 눈물겨운 기도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예트는 1778년 2월 5일, 드 칼브와 함께 요크를 떠나 캐나다 침공 집결지였던 뉴욕주 북부 올바니(Albany)로 올라갔다. 게이츠와 군사위원회는 “올바니에 가면 2,500명의 정예병과 썰매, 설상화, 방한복, 대포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2월 17일, 라파예트와 드 칼브가 도착했을 때 눈앞에 있던 병력은 1,200명도 채 안 되었고, 그마저도 반쯤 헐벗은 채 동상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썰매나 방한 장비, 보급품은 전무했다. 게이츠 파벌이 꾸며낸 원정 계획이 순전한 기만극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라파예트는 현지 지휘관 필립 스카일러(Philip Schuyler) 장군의 보고를 받고 기가 막혀 즉각 워싱턴에게 편지를 띄웠다.
“각하, 염려하셨던 대로 저는 완전히 함정에 빠졌습니다. 저들은 있지도 않은 군대를 미끼로 저를 이곳 얼음 구덩이에 처박았습니다. 이 상태로 눈 덮인 캐나다로 진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이자 광기입니다. 아무리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이는 따를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밸리 포지로 급히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결코 빈손으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라파예트는 자신의 말대로 3월 한 달 동안 결코 빈손으로 넋 놓고 있지 않았다.
올바니 서쪽 존스타운(Johnstown)에서 열린 이로쿼이 6개 부족 회담에 참석해 프랑스 가톨릭계 원주민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네이디족은 앳된 프랑스 장군에게 매료되어 그를 ‘카예울라(Kayewla, 두려움을 모르는 기수)’라 부르며 동맹을 맹세했고, 인디언 전사 47명이 훗날 밸리 포지로 향할 때 호위를 자임하며 동행했다.
또한 라파예트는 캐럴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신용장과 찰스 캐럴이 지원한 은화를 동원해 올바니 밀매상들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다량의 프랑스제 샤를빌 머스킷총과 두꺼운 모직 방한복 들을 사들였다.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올바니는 네덜란드계 거상들과 북부 밀수업자, 프랑스령 캐나다와의 접경 밀매상들이 암약하던 물류의 암시장이었던 것이다.
한편 대륙회의는 현지 밸리 포지에서 펼친 찰스 캐럴의 끈질긴 설득과 위상을 회복한 워싱턴의 격노 어린 서한에 밀려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3월 13일 공식적으로 캐나다 원정을 취소했다.
라파예트는 3월 하순 올바니를 떠나, 4월 초 밸리 포지의 워싱턴 품으로 귀환했다.
1778년 4월 초 라파예트의 밸리 포지 귀환은 단순한 ‘원정 실패자의 복귀’가 아니었다. 게이츠의 음모를 뚫고 막대한 무기 보급품과 용맹한 인디언 동맹군을 안고 돌아온 위풍당당한 개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혹한의 고통을 딛고, 새 생명이 움트는 밸리 포지의 봄을 워싱턴, 찰스 캐럴과 함께 마주하게 되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