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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5)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3>

안동일 작

대륙회의는 1777년 7월 31일 결의안을 통해 라파예트에게 소장(Major General) 계급을 부여했다. 열아홉 살의 외국인 청년이 실전 경험도 없이 곧바로 최고위 장성 계급을 거머쥔 것은, 당시 대륙회의와 미군 지휘부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과 거센 반발을 부른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단, 초기에는 직접 지휘할 사단이나 연대가 없는 순수한 ‘명예직(Honorary)’ 소장이었다.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의 최고 참모진(Aide-de-Camp) 곁에 머물며 지휘를 참관하고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실제 이는 군사적 역량에 따른 정상적인 임관이라기보다, 프랑스의 공식 참전과 막대한 차관을 이끌어내기 위한 대륙회의의 고도의 정치적·외교적 타협이었다.

라파예트가 필라델피아에 입성했을 때, 대륙회의는 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추천서를 남발해 건너온 유럽 용병 장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파리 밀사로 파견되어 있던 딘은 프랑스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 군사 원조를 성사시키기 위해, 지원자들에게 프랑스군 계급의 서너 단계 위를 보장하는 서면 계약서를 마구잡이로 써주었다. 라파예트에게도 “미국에 가면 소장 계급을 준다”는 증서를 내주었다. 당시 라파예트는 프랑스군 근위대 대위였고, 함께 온 슈토이벤이나 드 칼브는 영관급 내지 베테랑 장교들이었다.

밑바닥 흙탕물에서 피 흘려 싸워온 대륙군의 미국인 야전 장교들은 “실전 경험도 없는 프랑스 애송이 도련님에게 장성 계급장을 달아준다면 즉각 군복을 벗겠다”며 거세게 항의했고, 의원들 역시 라파예트의 임관을 극히 탐탁지 않아 했다. 저들의 기세가 워낙 완강했기에 총사령관 워싱턴도, 막강한 재력가 찰스 캐럴도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한 라파예트는 오기를 부리는 대신, 대륙회의에 두 가지 파격적인 조건을 담은 각서 형식의 서한을 스스로 제출했다.

“나는 어떠한 보수(봉급)도 받지 않고 자비로 복무하겠다.”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야전 지휘관이 아니라, 단순한 자원봉사자(Volunteer)로 백의종군하겠다.”

이 청년의 결기 어린 서한을 쥐고 찰스 캐럴이 전면에 나섰다. 워싱턴 총사령관 역시 힘을 실었다. 재정 파탄에 직면해 있던 대륙회의 입장에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은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프랑스 궁정의 최고 명문가인 노아이유 공작 가문의 사위이자 막대한 부를 지닌 유력 귀족이라는 사실이 의원들의 계산기를 두드리게 했다.

캐럴과 워싱턴은 재정 총책 로버트 모리스를 통해, 이 청년의 참전을 극진히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프랑스 왕실의 정규군 파병과 차관을 얻어낼 유일한 징검다리임을 설득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대륙군에게 프랑스의 참전만이 살길이라는 묵직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마침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임관 후 라파예트는 워싱턴 사령부에 상근하며 직속 부관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최고사령관 관저 겸 군사본부로 징발해 쓴 곳은 마켓 스트리트 남쪽 5번가와 6번가 사이(524-30 Market Street)에 자리한 ‘마스터스-펜 저택(Masters-Penn House)’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개척자 윌리엄 펜의 손자이자 전 부지사였던 리처드 펜의 대저택으로, 당대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웅장하고 호화로운 3층 붉은 벽돌 저택이었다.

얼마 후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가 접수해 군정(軍政) 사령부를 차린 곳이며, 1778년 5월 부임한 헨리 클린턴 역시 이곳을 집무실로 물려받아 퇴각 작전을 기획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훗날 1790년부터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가 미국의 임시 수도였을 때는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 대통령의 공식 대통령 관저(President’s House)로 사용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사령부 건물은 웅장하고 화려했으나, 대륙군의 속사정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급이 최대의 복병이었다. 당시 대륙군은 각 식민지 주(State)별로 연대와 사단을 편성해 유지하고 있었기에 중앙 의회보다 지방 정부의 역량에 휘둘렸다. 지역별 편차가 극심했고, 굶주림과 피로를 견디지 못한 탈영이 우후죽순처럼 번졌다. 병력은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가 가장 많았고 보급 사정은 펜실베이니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나, 도리어 이탈자 역시 펜실베이니아 출신에서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다.

8월 초 대륙회의 임관 직후부터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 이르는 한 달 남짓은, 라파예트라는 청년의 진면목이 워싱턴 사령부 내부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던 결정적 시기였다. 마켓가 펜 저택에서 무임소 부관으로 일하던 이 시기, 라파예트는 주변의 뼈아픈 시기와 냉대를 겸손과 친화력으로 이겨내며 대륙군 장병들의 마음을 훔쳤다.

마켓가 펜 저택 사령부 2층 복도.

차가운 복도 한구석에서 장교들이 영어가 서툰 라파예트를 곁눈질하며 “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낚아챈 또 한 마리의 비단 파리”라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때, 영민한 눈빛의 알렉산더 해밀턴 중령이 깃펜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와 완벽한 파리식 불어로 악수를 청했다.

“후작, 저들의 질투 어린 쑥덕거림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총사령관 각하와 제 펜은 온전히 후작의 편입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거구의 지장 내서니엘 그린 장군이 투박한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껄껄 웃었다.

“후작, 워싱턴 각하의 눈에 든 사내라면 내게도 형제요. 저 친구들의 텃세는 전장에서 적탄 서너 발만 함께 맞고 나면 눈 녹듯 사라질 테니 조금도 괘념치 마시오.”

해밀턴이 그 투박한 영어를 유려한 불어로 즉각 통역해 주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해밀턴은 1777년 3월 워싱턴의 최고 선임 부관으로 발탁되어 사령부의 모든 기밀문서와 작전을 총괄하고 있었다. 서인도제도 네비스섬 출신으로 어머니에게서 불어를 모국어처럼 배운 해밀턴은 참모진 중 라파예트와 유일하게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지적 동반자였다.

로드아일랜드 퀘이커 출신의 명장 그린 장군 역시 파벌 싸움이나 맹목적인 외국인 혐오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그릇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대인이었다. 대륙군 토박이 장군들이 “장난감 장군이 왔다”며 수군댈 때, 그린은 워싱턴의 복심을 읽고 라파예트에게 야전 지형과 편제를 자상하게 가르쳐준 든든한 멘토였다.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펜 저택 관사에 머물게 하고 싶었으나, 군내의 질시를 우려해 고심했다. 이때 찰스 캐럴이 사령부에서 불과 서너 블록 떨어진 정갈한 가톨릭 교우의 저택 별채를 하숙집으로 마련해 주어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필라델피아 북쪽 캠프로 야전 기동 훈련을 나갔을 때, 라파예트는 장교용  천막을 마다하고 병사들과 똑같이 거적을 깔고 진흙투성이 텐트에서 뒹굴며 딱딱한 옥수수빵을 씹었다. 비웃던 장교들은 혀를 내둘렀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함께 구르는 이 앳된 프랑스 귀족을 보며 사병들은 “진짜가 나타났다”며 열광했다.  그때 라파예트는 서툰 영어로 분대 단위 였지만 자신 휘하의 병사들에게 드칼브에게 배웠던 전투시 방향전환과 엄호 요령을 함께 시전 연습 했다.

1777년 8월 중순,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체서피크만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며 필라델피아는 공포에 휩싸였다.

8월 15일, 워싱턴은 군대를 필라델피아 외곽 네샤미니 캠프로 집결시켜 전열을 가다듬는 긴급 열병식을 거행했다.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자신의 말 곁에 세우고 함께 사열대를 지켜보았다.

당시 대륙군 1만 1천 명의 행렬은 처참했다. 정규 군복은커녕 누더기 사냥옷이나 해진 셔츠를 걸쳤고, 신발이 없어 맨발에 헝겊을 감은 병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절뚝거렸다. 총기조차 제각각인 낡은 머스킷을 쥔 채 오와 열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사유 궁정의 번쩍이는 근위대와 화려한 정규군만 보고 자란 열아홉 소년의 눈에,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니라 거렁뱅이 피난민의 행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때, 말 위에 앉은 거구의 워싱턴이 라파예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깊은 비통함이 밴 목소리로 나직하게 털어놓았다.

“후작, 막 화려한 프랑스 군대를 떠나온 장교에게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군대를 보여주게 되어 실로 부끄럽소(embarrassed). 이게 우리 현실이요”

총사령관으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솔직하고 아픈 고백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라파예트의 심장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제 발밑의 병사들이 굶어 죽든 말든 은식기에 송로버섯과 부르고뉴 와인을 즐기며 패배를 감추기 위해 비단과 화약 연기로 분칠하던 베르사유의 귀족 장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더기 병사들의 초라함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그 고통을 자신의 수치로 오롯이 짊어질 줄 아는 신대륙의 거인.

라파예트는 모자를 벗어 가슴에 얹으며 주저 없이 답했다.

“각하, 부끄러워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뽐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각하와 이 용감한 장병들로부터 인내를 배우고, 이들이 겪는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을 뿐입니다.”

워싱턴의 엄숙한 얼굴에 깊은 감동의 미소가 번졌다.  라파예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평생 보아온 비단옷의 장군들을 뒤로하고, 누더기를 짊어진 참된 지도자에게 자신의 칼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룩한 항복의 충성 선언이었다.

이 사령관이 사내들의 마음을 얻는 법은 일찍이 입증된 바 있었다. 나서니엘 그린과 알렉스 헤밀턴이 열정적으로 들려준 ‘크로스윅스(Crosswicks) 트렌턴 야영지 연설’ 일화는 라파예트의 마음을 뭉클하게 흔들면서 이같은 충성을 맹세하게 한 기저였다.  실은 라파예트 뿐 아니라 독립전쟁사를 통털어 워싱턴의 풍모를 제대로 보여준 일화로 꼽혀 대대손손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극적인 실화다.

1776년 12월 말, 얼어붙은 델라웨어강을 건너 트렌턴을 기습 격파했으나 병사들의 복무 만료일인 12월 31일이 닥쳤을 때였다. 콘월리스의 영국군 대군이 복수를 위해 몰려오는 판에 병사들은 짐을 싸고 귀향하려 했다.

워싱턴은 자신과 밥 모리스가 사재를 털어 1인당 10달러의 보너스를 약속하며 자원 연장을 호소했으나,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단 한 명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군대가 와해되려던 찰나, 워싱턴은 말을 몰아 돌아선 병사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용감한 전우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이미 치렀소.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결코 탓하지 않겠소.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오. 그대들이 단 한 달만 더 머물러 준다면, 우리는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소. 지금 이 순간, 조국의 운명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오직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그리고 워싱턴은 말 위에서 누더기를 걸친 사병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눈물 방울이 눈덮인 장화로 떨어졌다.

총사령관이 명령이 아닌 눈물의 간청으로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병사들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북소리가 다시 울리자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기랄, 저 양반을 두고 어떻게 발길을 돌린단 말인가.” 그 진심으로 묶인 군대가 사흘 뒤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며 기적처럼 혁명을 되살려냈다. 진심과 진실은 끝내 어디서나 통하기 마련이다.

교파는 달랐으나, 라파예트는 매일 새벽 무릎으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밤을 닫던 조지 워싱턴의 뒷모습 에서 깊은 경외를 느꼈다. 프랑스 가톨릭 귀족 청년의 눈에 비친 총사령관의 신앙은 형식적인 종교를 넘어선 엄숙한 순명이었다.

언젠가 한 이신론자가 ‘영국군도 똑같이 승리를 기도할 텐데, 하늘은 대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겠습니까?’ 하고 묻자, 워싱턴은 조용히 답했다.

‘문제는 하늘이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늘의 정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이네.’

무모한 돌격을 자제하며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리고자 고뇌했던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수많은 피를 부를 뻔했던 이 독립전쟁에서, 대륙군은 불필요한 살상을 줄이며 기적처럼 주요 전쟁사에서 가장 적은 피아 전사자를 내면서  끝내 자유의 새 시대를 열어 젖혔던 것이다. 워싱턴은 이를 섭리라고 했다.

마침내 1777년 8월 25일, 신대륙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국 대함대가 메릴랜드주 북단 체서피크만 가장 깊숙한 포켓인 ‘헤드 오브 엘크(Head of Elk, 현 엘크턴)’에 닻을 내렸다.

육로 진격이 워싱턴의 지연전에 막히자 윌리엄 하우 장군은 뉴욕 샌디훅에서 전열함과 대형 수송선 280여 척에 정예군과 악명 높은 헤센 용병대 1만 8천 명, 수천 필의 군마와 거대한 야포를 싣고 바다를 하얗게 뒤덮으며 우회 상륙한 것이다.

영국군이 메릴랜드 땅에 발을 딛고 필라델피아를 향해 북동진하자,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 접경의 브랜디와인강(Brandywine Creek)에 방어선을 쳤다.

9월 11일, 안개가 자욱한 새벽.
워싱턴은 영국군이 브랜디와인의 주 여울목인 채즈 포드(Chadds Ford)로 도하할 것이라 판단하고 중앙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책이었다. 하우와 콘월리스는 8천 주력을 이끌고 북쪽 상류 여울목을 멀리 우회해 대륙군의 오른쪽 옆구리(우익)를 기습했다.

버밍엄 예배당 능선을 지키던 설리번 장군의 우익 사단 위로 영국군 정예 경보병대의 일제사격과 포탄이 쏟아졌다. 당시 대륙군은 집단 기동 전술 훈련을 거치지 못한 탓에, 숲속에서 전열을 바꾸려다 자기들끼리 엉켜 극심한 혼란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익이 붕괴하면 퇴로가 끊겨 전군이 몰살당할 위기였다. 본영에서 급보를 접한 워싱턴은 말에 올랐다.

“내가 직접 가야 한다! 전열을 수습하지 못하면 오늘로 공화국은 끝이다!”

워싱턴은 현지 농부의 길 안내를 받으며 버밍엄 숲길을 뚫고 내달렸다. 전선을 수습하느라 호위대마저 뒤처진 채, 백마를 탄 총사령관의 거구가 단신으로 능선 사각지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욱한 화약 연기 속 참나무 숲 덤불 뒤편.
세계 최초의 후장식 소총을 개발한 영국군 최고의 명사수, 실험 소총대 지휘관 패트릭 퍼거슨(Patrick Ferguson) 대위가 바위 뒤에 엎드려 있었다. 퍼거슨의 총구 안으로 무방비 상태의 백마 탄 거구 장군이 완벽하게 들어왔다.

단 한 발로 전쟁을 끝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찰나였다.
그러나 퍼거슨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훗날 그가 일기에 남겼듯, 장군이 등을 돌려 부하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비무장 상태로 등을 보인 고결한 장교의 등 뒤를 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unknightly)”는 기사도적 망설임이 그의 손가락을 멈추게 한 것이다.

“ 화려한 후사르(기병) 복장을 한 프랑스풍 장교를 뒤쪽에 대동하고 백마를 탄 거구의 미국 장교가 유유히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바위 뒤에 엎드려 조준을 마쳤으나, 상대가 말을 돌려 천천히 뒷편의 부하들 쪽으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비무장 상태로 등을 보인 장교의 등 뒤를 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unknightly)”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워싱턴의 뒤를 맹렬히 쫓아오던 자원 부관 라파예트의 푸른 눈에 덤불 속에서 번뜩이는 총검과 적탄의 궤적이 포착되었다.

“총사령관 각하가 위험하다! 전열을 돌려라!”

서툰 영어였으나 계곡을 뒤흔든 결사의 사자후였다. 퍼거슨이 망설이는 사이 다른 영국 척후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고, 워싱턴을 향해 쏟아지는 탄환의 궤적을 향해 라파예트가 말을 꺾어 자신의 몸을 던졌다.

탕!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라파예트의 왼쪽 종아리가 찢겨 나가며 붉은 피가 부츠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장엄한 희생을 목도한 대륙군 병사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숲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오와 열을 맞춰 한쪽이 적진을 향해 사격하고 물러서면 뒤쪽 다시 서는 요령이었다. 찰스턴 연병장의 연습이 주효 했던 것이다.  척후병들이 숫적 열세를 자각해 물러서고 아군의 퇴각로가 온전히 확보될 때까지, 청년은 부츠 속으로 피가 흥건히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칼을 휘두르며 후퇴 대열을 지휘했다.

포성이 잦아들고 전선이 간신히 안정되자, 말에서 내린 워싱턴이 피투성이가 된 라파예트에게 다가왔다. 장화가 피로 물든 채 총사령관의 무사를 확인하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스무 살 청년의 얼굴. 말로만 자유와 용맹을  떠들던 유럽의 용병들과 달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붉은 피를 쏟아낸 소년의 모습은 거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쐐기로 박혔다.

워싱턴은 급히 달려온 군의관 존 코크런의 손을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이 청년을 마치 내 친아들처럼 정성껏 치료해 주시오(Treat him as if he were my own son).”

부상당한 라파예트는 필라델피아 북쪽의 평화로운 마을, 베들레헴의 모라비안 공동체 요양소로 후송되었다. 9월 21일부터 약 6주 동안 모라비안 교도인 프레더릭 뵈클의 집에 머물며 요양했다. 평화주의와 금욕을 실천하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 이방인 청년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라파예트는 침상에서 프랑스의 임신한 아내 아드리엔에게 안심시키는 편지를 썼다.

“내 사랑, 걱정하지 마시오. 다리에 살짝 흠집이 난 정도일 뿐이오. 탄환은 뼈를 건드리지 않고 살만 꿰뚫고 지나갔소. 나는 지금 더없이 선량한 이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히 쉬고 있소.”

다리가 회복되는 동안 라파예트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10월 초, 워싱턴이 짙은 안개 속에서 감행한 저먼타운 기습 작전이 아쉬운 패배로 끝났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 청년은 침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각하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하고 가슴을 쳤다.

 

1777년 10월 14일, 라파예트는 베들레헴 침상에서 깃펜을 들었다.
평소 해밀턴이나 로렌스 같은 불어가 통하는 부관들을 거치던 관례를 깨고, 스무 살 청년이 오직 총사령관 워싱턴 한 사람을 위해 밤새 사전과 씨름하며 손수 영어로 눌러쓴 역사적인 ‘첫 영어 편지’였다.

“각하, 제 부족하고 거친 영어로 감히 편지를 올리는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아직 제 영어가 서툴러 가슴속의 진심을 다 담아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총사령관 각하께 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다른 이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서툴더라도 제 손으로 직접 쓴 영어로 충정을 고백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먼타운에서 각하께서 보여주신 대담한 결단의 전말을 들었습니다. 비록 안개와 불운으로 뜻대로 끝나지 못했으나, 각하의 용기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승리는 머지않아 반드시 각하의 깃발 아래 찾아올 것입니다.

각하와 형제 같은 장병들이 진흙탕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계실 때, 저 홀로 이 따뜻한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제 살을 에는 듯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있습니다. 각하의 군대에서 단 한 명의 병사라도 통솔할 영광을 허락해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그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각하의 영광과 이 대륙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워싱턴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참모들 앞에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철자도 틀리고 프랑스식 어순이 섞인 투박한 문장이었지만, 쉰여섯 살의 과묵한 거인은 스무 살 이방인 청년이 밤마다 촛불 아래서 영단어를 고쳐 쓰며 쏟아부었을 그 지극한 정성과 결기를 단박에 읽어냈다.

워싱턴은 베들레헴으로 따뜻한 답장을 보냈다.

“후작,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결코 무리하여 말을 타지 마시오. 그대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곧 나와 이 군대를 돕는 길이오. 그대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는 날, 그대에게 걸맞은 명예로운 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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