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 센터 대표)
팬데믹의 충격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는 러시아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번진 지정학적 대충돌 속으로 빠져들었다. 치솟는 물가와 불안한 고용 시장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며 숨 가쁜 하루를 버텨내느라 눈앞의 현실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실리콘밸리와 디지털 가상 공간에서는 인류 역사의 판도를 바꿀 전대미문의 ‘신문명’ 개척 작업이 소리 없이,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
인공일반지능(AGI)으로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겠다는 닉 랜드와 같은 ‘효과적 가속주의자(e/acc)’들과, 국경과 정부를 초월해 코드(Code)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발라지 스리니바산 같은 ‘네트워크 국가’의 설계자들은 이미 천문학적인 자본과 기술 권력을 그들의 손에 쥐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은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인가. 그리고 그 안에서도 소수계 중의 소수계인 ‘미주 한인’들은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테크 엘리트들이 외치는 신문명은 질병과 빈곤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냉정하게 보면 평범한 시민들에게 극단적인 ‘소외와 양극화’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은 투표를 통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주체였다. 하지만 국가의 규제를 우회하고 알고리즘과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초국가적 기술 문명이 도래하면, 일반 시민들의 표 한 장은 의미가 없다.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 엘리트가 룰(Rule)을 정하고, 대다수 시민은 그들이 만든 플랫폼의 단순 소비자로 전락하는 ‘디지털 봉건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무차별적 기술 가속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를 막론하고 기존의 노동 시장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국가라는 울타리가 느슨해진 자리에 각자도생의 무한 경쟁이 들어설 때, 그 충격은 하루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평범한 시민들의 몫이 될 것이다.
신문명의 축이 ‘영토와 제도’에서 ‘기술과 자금력, 그리고 디지털 네트워크’로 이동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도 소수계인 한인 사회는 국경을 초월한 디지털 문명권 안에서도 여전히 소외된 ‘방관자’로 남을 수 있다.
당장 미국 내 이민 단속이 강화되고 경제적 통상 압박이 거세지는 현실적 위기 대응에 급급해, 저 멀리서 밀려오는 거대한 쓰나미를 보지 못한다면 차세대 한인들의 미래는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이 격변의 시기, 미주 한인 사회는 넋을 놓고 있을 여유가 없다. 신문명의 파도 위에서 침몰하지 않고 돛을 올리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 고민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인 사회의 주류 업종인 자영업과 전문직 역시 AI와 디지털 전환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제 기술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생존의 무기다. 커뮤니티 차원에서 차세대 기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물론, 기성세대 역시 AI와 블록체인 등 신문명의 핵심 동력을 이해하고 비즈니스에 접목하는 ‘기술의 자산화’에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다.
둘째, 미래의 힘은 영토가 아닌 ‘연결’에서 나온다. 미주 한인은 고국인 한국과 긴밀히 연결된 독보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뛰어난 IT 기반과 문화적 자산, 그리고 미국 내 한인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유기적으로 엮어내어 국경을 초월한 강력한 ‘한인 네트워크 커뮤니티’를 만든다면 거대 테크 세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테크 엘리트들이 효율성과 가속을 외칠 때, 우리는 ‘공동체와 인간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던져야 한다. 비탈릭 부테린이 제창한 ‘방어적 가속주의(d/acc)’처럼, 기술의 인간 소외를 감시하고, 소수 독점을 막는 오픈소스적 공공재 운동에 한인 차세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신문명 시대의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만, 신문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다.
문명의 전환기는 불안하지만, 반대로 기존의 공고했던 계급과 판도가 뒤바뀌는 유일한 기회의 창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변화는 단순히 미국 안에서의 생존을 넘어, ‘인류가 어떤 세상에서 살 것인가’를 묻는 거대한 질문이다.
현실의 고단함에 넋을 잃고 테크 엘리트들이 설계한 매트릭스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노력으로 신문명의 새로운 축을 담당할 것인가. 우리 안에 축적된 ‘통합의 힘’과 개척자 정신을 다시 깨워야 할 때다.(동찬 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