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
안동일 작
혁명의 광풍 속에서 ‘망명자(Émigré)’ 명단에 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던 보마르세가 1796년 3월, 삐걱거리는 마차를 타고 고향 파리로 돌아왔을 때의 그 쓸쓸하고도 처량한 순간은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는 기지를 발휘 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척집에서 눈치밥 먹으며 기거 하고 있던 부인 탕레드(Thérèse)와 금쪽같은 딸 외제니(Eugénie)를 먼저 찾아 눈물의 해후를 한 후 그들을 태우고 혁명위원회로 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지레 겁을 먹고 움추렸을 법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갈데가 없으니 옛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통보 했고 혁명위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져 딱한 듯 그러라고 했다. 기실 보마르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혁명위 초급 간부로 일하고 있는 청년 안드레 들라뤼가 진작부터 그의 편에서서 많은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한 옛 집은 그가 혁명 직전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지었던 바스티일 광장 맞난 편, 생탕투안 대로(Boulevard Saint-Antoine)에 있던 그의 전설적인 대저택, ‘비야 보마르세(Villa Beaumarchais)’였다.
그의 이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기괴한 명물이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정원사들을 고용해 만든 웅장한 신고전주의 풍 저택이었고, 정원에는 인공 폭포, 비밀 동굴, 중국식 정자까지 갖추어 파리 귀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곳이다.
하지만 1796년, 백발이 성성하고 가는 귀까지 먹은 64세의 보마르세가 아내와 19세 방년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 때, 그 저택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궁궐이 아니었다.
그가 망명한 사이 혁명 정부는 이 저택을 국가 자산으로 압류했고, 성난 군중들이 들어와 가구와 벽을 부수고 값나가는 모든 것을 약탈해 간 상태였다. 저택의 그 아름답던 창문들은 다 깨져서 쓸쓸한 바람만 통과하고 있었고, 거울과 벽지마저 뜯겨 나가 내부가 뼈대처럼 앙상했다.
세 가족은 창문도 제대로 없고 가구도 다 부서진 차가운 저택의 구석 방을 치우고 들어 가 다시금 서로를 껴안고 살아 돌아왔음에 눈물을 흘렸다. 비야 보마르세의 헛간으로 쓰이던 오두막 이었다.
보마르세가 미국 대륙의회에 “제발 내 무기 값을 돌려달라”고 마지막 피맺힌 탄원서를 보낸 곳이 바로 이 헛간 오두막 이었다. 비가새는 오두막 이었지만 부인과 딸이 큰 힘 이었다. 보마르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아내인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는 그가 망명지에서 고생하는 동안 파리에 홀로 남겨져 혁명 재판소에 체포당하고 사형 직전까지 가는 감옥 고초를 겪었다. 딸 외제니 역시 아버지가 남긴 부채 때문에 빚더미 속에 사기꾼, 빈혁명분자의 딸 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가족 세 사람의 우애는 남 달랐다.
보마르세는 귀가 먹어 대화가 힘들었지만, 이튿날 아침 딸 외제니의 손을 잡고 폐허가 된 정원을 거닐며 “내 전 재산과 명예는 다 날아갔지만, 너희들만 곁에 있다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특유의 낙천성으로 딸과 부인을 위로했다.
보마르세는 부서진 저택을 눈물겹게 조금씩 수리해 갔으며 한편으로 딸 외제니를 번듯하게 결혼시키기 위해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냈다.
다행히 외제니의 결혼은 성사 시켰지만 결국 그는 명예회복과 배상을 이루지 못한 채, 3년 뒤인 1799년 5월 18일, 이 오두막 낡은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이 전설적인 저택과 정원은 1818년, 파리 시가 생마르텡 운하(Canal Saint-Martin)를 확장하고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보마르세 대로(Boulevard Beaumarchais)가 시원하게 뚫려 있고, 인근 마레 지구에 그의 이름을 딴 호텔이나 동상만이 옛 주인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화려한 궁정 음악가 얐으며 최고의 극작가이자 대담한 무기 밀수업자였던 보마르세가, 인생의 황혼기에 부서진 저택에서 아내와 딸을 껴안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장면은 애잔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도 그 시기 보마르세가 매운 잘한 일이 있었다. 바로 외제니를 건실한 청년 앙드레 들라뤼와 결혼 시킨일이다.
무남독녀 외제니와 사위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 1768~1863)의 결혼은 보마르셰가 말년에 행한 가장 평온하고도 훌륭한 선택 중 하나였다.
앙드레 투생 들라뤼는 보마르셰보다 36살 연하였고, 외제니보다는 9살 연상이었다. 그는 혁명 정부에서 금융 관계 행정 관료(정부 금고의 행정관 등)로 일하던 전도유망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도 루이 르 그란 출신이었다.
당시 혁명 정부의 ‘망명자 명단(Émigré list)’에 올라 재산을 압류당하고 전전긍긍하던 보마르셰 가문에게, 정부 내부 사정에 밝고 청렴한 행정가였던 들라뤼는 가문을 구원해 줄 가장 이상적인 신랑감이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 후 보마르셰의 복잡한 재정 문제와 사후 유산 분쟁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결혼을 둘러싼 에피소드에도 역시 보마르세의 글이 갑의 자리에 있다. 바로 함부르크 망명지에서 보낸 ‘눈물의 편지’다.
1794 년 무렵, 보마르셰는 독일 함부르크 에서 비참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남겨진 아내와 딸 외제니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풀려나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이때 외제니를 지켜보며 호의를 베풀었던 청년이 바로 들라뤼였다. 보마르세 희곡의 팬 이었기에 보마르세를 흠모 하던 들라뤼는 계속해서 외제니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고, 외제니도 고맙게 받아 들이며 두 청춘 남녀는 사랑에 빠진다. 이 사정을 알게 된 보마르셰는 함부르크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파리의 들라뤼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게 남은 유일한 보물인 딸을 자네에게 맡기네. 지금은 비록 내가 알거지 신세라 딸에게 지참금 한 푼 줄 수 없지만, 자네가 내 딸의 손을 잡아준다면 훗날 내 명예와 권리를 되찾아 반드시 보답하겠네.”
들라뤼는 보마르셰 가문의 몰락이나 위험에 개의치 않고, 외제니에 대한 사랑과 보마르셰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 청혼을 받아들였다.
1796년 초, 보마르셰가 망명자 명단에서 조건부로 제외되어 파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저간에는 사위가 될 들라뤼의 막후 노력도 큰 작용을 했다. 들라뤼는 정부 내 자신의 인맥과 행정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장인의 귀국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보마르셰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추진 했고 1796년 6월 5일 마침내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당시 보마르셰는 경제사정도 그렇고 여전히 감시를 받던 처지였기에, 결혼식은 가족과 측근들만 모인 가운데 조용하지만 매우 감격스럽게 치러졌다.
보마르셰는 결혼식 당시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 사위에게 제대로 된 지참금을 주지 못했다. 대신 그는 들라뤼에게 ‘미국 정부의 거액 채권(로데리크 오르탈레즈 회사의 대금)’ 서류를 넘겨주었다.
당시로서는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한 유령 채권에 가까웠지만, 행정가였던 사위 들라뤼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한대로 보마르셰가 사망한 이후에도 들라뤼와 외제니 부부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법정 투쟁과 외교적 교섭, 청원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보마르셰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1835년, 미국 의회로부터 80만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장인이 준 ‘종이조각’ 같던 지참금을 사위가 마침내 황금으로 바꿔낸 셈이다.
보마르셰는 사위를 얻고 난 후인 1797년,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네는 내 딸에게는 최고의 남편이고, 나에게는 가장 충실한 아들이라네. 내 말년에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네일세.”
실제로 들라뤼는 장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으며, 사후에는 보마르셰의 방대한 저작권과 가문의 명예를 완벽하게 지켜냈다. 들라뤼는 1863년, 95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마르셰의 사위’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전호에 언급 한 대로 그들의 후손은 오늘날까지 보마르셰의 혈통을 자랑스레 이어오고 있다.
말년의 보마르셰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파리에서 이 정직하고 유능한 청년을 사위로 맞이한 것은, 그의 희곡 대본 속 피가로의 기지 못지않은 최고의 신의 한 수였던 것 이다.

지금 부터 189년 전인 1835년 3월 2일, 워싱턴 캐피털 힐 (지금의 노스 윙) 미 연방 의사당서는 행정부와 의회가 반세기 동안 부려온 억지와 ‘국가적 수치’를 입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결짓는 법안 통과를 위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법안 제안자 중 한사람인 에드워드 에버릿(Edward Everett, 1794~1865)의원이 단상에 올랐다.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인 그는 당대 미국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다. 훗날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기 바로 직전, 단상에서 2시간 동안 장엄한 서두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의원 여러분! 우리가 50년 전 맨발로 눈 위를 걸으며 영국군과 싸울 때, 우리 가슴에 따뜻한 군복을 입히고 손에 화약을 쥐여준 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파리의 시계공이자 극작가였던 보마르세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3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재무부는 ‘프랑스 왕이 준 선물’이라는 주불 공사 아서 리의 낡은 보고서 한 장을 방패 삼아 채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국의 수치이자,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가 다져놓은 대서양 외교의 신의를 우리 스스로 깨부수는 짓입니다!”
그때 반대파 의원 한사람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국왕에게 받은 100만 리브르(프랑의 옛 단위)의 영수증이 버젓이 존재하지 않소! 그 돈은 미국을 위해 쓰여져야 했던 돈 이었소!”
에버릿 의원의 명징한 답변이 이어졌다.
“그 100만 리브르는 보마르세가 제 목숨을 걸고 정보망을 가동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로부터 받아낸 ‘작전 자금’이었음을 프랑스 외무부가 공식 보증했습니다. 게다가 그 돈은 바로 로마 교황청 의심의 눈을 피해 존 캐럴 신부를 미국의 초대 주교로 세울 수 있었던 막후의 자금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려분. 이제 이 지루하고 부끄러운 거부의 역사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가 법안을 통과 시키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서명하는 순간, 미국은 비로소 구체제의 빚을 털어내고 도덕적 공화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대륙의 자유와 평등은 한낱 사기꾼들의 슬로건으로 전락할 것 입니다. ”
에버릿의 웅변은 의원들의 양심을 거세게 흔들었고 압도적인 표차로 법안을 통과 시키게 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 었지만 존 캐럴 대주교(선종 당시)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 형제와 각별한 교분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미국 천주교의 발흥에 보마르세의 역할이 지대 했음을 굳이 거론 했다. 3년전 세상을 떠난 독립의 마지막 원로 찰스 캐럴의 유지를 상기 시키기 위해서 였다.
이날 통과된 법안의 정확한 공식 법안명은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세 유족 구제를 위한 법안> (An Act for the relief of the heirs of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미국 연방 법률(Statutes at Large) 아카이브, 제4권 793항 (4 Stat. 793) 제23대 하원 (23rd Congress) 세션>이었다.
미 의회가 특정 개인 ,그것도 외국인의 이름을 명확히 거명하면서 채택한 초유의 법안이다.
에버릿 의원의 연설 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에는 정부와 의회 내에서 유족들의 편에 서서 “미국이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외친 당대 미국의 쟁쟁한 양심 정객, 행정가, 독립 원로, 종교계 인사 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당시 국무장관 에드워드 리빙스턴이 의회에 보낸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가 ‘마지막 스트로’ 처럼 큰 몫을 했다. 리빙스턴은 과거 진작 부터 보마르세의 주장을 옹호했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계열의 법률적 시각을 이어받고 있었다.
“계약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큰 돈을 선물로 제공할 만큼 당시 프랑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또 더욱이 당시의 미국 재무부가 프랑스 국왕의 100만 리브르를 공제(상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억지”라는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를 의회에 제출했던 것이다.
상대적 소수였지만 반대파 의원들은 계속 “선물이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여전히 사라진 100만 리브르의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며 돈을 줘서는 안된다고 버텼다. 그러나 찬성파 의원들은 “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의 장부와 프랑스 베르젠 백작의 외교적 상호 확약이 있음에도 미국이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신생 공화국의 대외적 신용과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점”이라며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
토론 끝에 구제 법안은 하원과 상원을 차례로 통과했고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자 최초의 흙수저 군인 출신 정치가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며칠 뒤 이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
당시 수십 년간의 소송 비용으로 고초를 겪던 보마르세의 사위 들라뤼와 외손자들이 이 ‘눈물의 삭감안’을 수용했고 실무 정산을 거쳐 1837년 최종 지급이 완료됐다.
이 법안이 기념비 적이라는 것은 미국 의회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한 최초의 법안 이라는 점이었다. 19세기 미국 연방의회에는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결의안이 ‘단 한 건’도 없었다.
당시 미국의 국가적 분위기와 법적 구조가 ‘사죄’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기독교적 예정론에 입각한 선민론이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북미 대륙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는 것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임무라는 믿음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전쟁(미-멕시코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은 ‘과오’가 아니라 ‘문명의 진보’이자 ‘신의 뜻’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 한것이야 말로 ‘언덕 위의 하얀집’을 지으라는 신의 뜻이 었다고 믿었다.
이처럼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게 믿는 오만한 성장기 국가였기에, 과거사를 ‘반성’한다는 개념 자체가 의회 내부에서 싹틀 수 없는 토양 이었다.
흑인 노예제와 관련해서도 19세기에 ‘사죄’는 없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수정헌법 제13조)될 때도, 의회의 기류는 “과거의 잘못을 사죄한다”가 아니라, “전쟁의 결과로 제도를 폐지한다”였다. 전쟁 전후로 링컨 대통령과 의회가 고려했던 것은 ‘노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를 잃어버린 남부 백인 지주들에게 국가가 돈을 물려주는 보상(Compensated Emancipation)’이었다. 국가가 인간을 재산으로 인정했던 법적 모순 때문에 생긴 일이었는데, 19세기 미국 의회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재산권 침해를 더 고민했다.
법적인 이유도 컸다. 영미법계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The King can do no wrong)”, 즉 주권면책(Sovereign Immunity) 특권이다. 국가(정부)는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법정에서 기소되거나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19세기 미국 정부는 의회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잘못했다”고 선언(사죄)하는 순간, 그것이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수많은 소송과 천문학적인 재정적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까 봐 극도로 몸을 사렸다.
결국 미국의 과거사 결의안들이 20세기 후반(특히 1980년대이후)에야 쏟아져 나온 것은, 미국이 양심적인 국가로 갑자기 변해서라기보다는 ‘흑인 민권 운동(1960년대)’을 거치며 인권의 기준이 통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민권 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원주민, 흑인, 아시아계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표밭(정치적 영향력)이 되었고, 의원들도 그제야 표를 얻기 위해, 혹은 달라진 국제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결의안을 내놓기 시작한 것.
19세기의 침묵은 ‘성장과 팽창’에 눈이 멀었던 제국주의 시절 미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좌다.
1835, 3, 2, ‘4 Stat. 793’이라는 메마른 법률 번호 뒤에는 미국 독립의 물질적 기초를 닦아준 한 천재 극작가에 대한 신생 미국의 뒤늦은, 그러나 전무후무한 ‘법적 굴복’이 숨어 있었지만 이 법안도 유쾌하게, 속 시원하게 통과된 것이 아니었다.
“줄 돈은 주되, 끝까지 미국이 잘못했다는 문구는 넣지 않겠다”는 미국의 자존심과 “이 지루한 외교적 분쟁을 끝내야 한다”는 실리주의가 맞선 끝에 나온 ‘정치적 타협’이 법 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의회는 80만 프랑(당시 미국 달러로 약 14만 4천 달러~15만 달러 선)을 예산으로 배정하면서 법안에 아주 냉혹한 독소 조항을 삽입했다. 받거나 말거나 (“Take-it-or-leave-it” 받든가 말든가) 라는 조항이 서두에 있었다. 그러면서 “이 돈을 수령하는 즉시, 보마르세 유족은 미국 정부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추가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이를 최종 정산으로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보마르세 배상 결의(Beaumarchais claim)는 독립 전쟁 이후 건국 초기 시기의 중대한 도덕적. ·재정적 매듭이었고 ‘언덕 위의 하얀집’ 건설을 이심전심으로 목표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일이다. .
언급한 대로 미 연방의회는 후일 원주민(인디언) 탄압, 흑인 노예제 및 차별, 그리고 전시(戰時) 인권 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결의안들을 통과시켰다. 모두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국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한 대표적인 연방의회 결의안들을 간략 하게 나마 정리해 본다. 언덕위의 하얀집 모토와 관련이 많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먼저 원주민(인디언) 학살 및 강제 이주에 대한 사죄다. 미국 영토 확장기 동안 자행된 원주민 탄압은 미국의 가장 깊은 원죄 중 하나로 얘기된다. 하지만 2009년이 되서야 미국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죄 결의안 (Native American Apology Resolution)이 채택된다.
연방정부와 의회가 과거 원주민 부족들에게 저지른 폭력, 학살, 강제 이주(눈물의 길 등), 그리고 문화적 말살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내용이다. 당시 국방법안(Defense Appropriations Act)의 부속 조항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어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
더욱이 공식 사과를 하긴 했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적 배상 소송의 근거로 쓰이지 못하도록 “이 결의안이 법적 배상 요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면책 조항을 넣는 비겁한 타협이 있어 논쟁이 됐었다.
다음이 흑인 노예제 및 인종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사죄다. 이 사죄 역시 세기를 넘겨 21세기인 2008년 하원, 2009년 상원의 결의안으로 채택 된다.
미국 경제 성장의 어두운 기반이었던 노예제와 그 이후의 합법적 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의회의 반성인데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노예화하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 년간 분리주의 법률(Jim Crow laws)로 흑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며 린치 등을 방관했던 과거를 공식 사죄했다. 미 의회 역사상 ‘노예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첫 결의안이었다. 상·하원이 각각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역사적 과오를 인정했다. 역시 배상은 없다는 것을 명문화 했다.
기실 노예 무역은 미국만의 잘못과 과오는 아니다. 가톨릭교회만 해도 과거 역사 속에서 자행된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대해 교황청 차원의 제도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특히 근자에 교황에 오른 레오 14세는 지난 5월 자신이 새로 반포한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통해 과거 교황청이 유럽 군주들의 요청에 응해 비기독교인을 노예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역사를 전면 인정하고 진심 어린 용서를 구했다.
회칙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와 주교들에게 전하는 최고 권위의 사목 교서로, 다른 교황 문헌인 교서·권고·담화·연설 등과 비교해 구속력이 가장 강하다.
교황은 “노예제가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음을 교회가 완전히 인식하는 데 수 세기가 걸렸다”고 지적하며 “기독교 기억 속의 상처”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교회 이름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며 노예로 고통받은 이들의 고난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3년 바티칸 공식 성명을 통해 식민지 시대 노예제와 토지 강탈을 정당화했던 교황 문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교황청 역사상 가장 명확한 문서적 거부 선언으로 평가되지만, 교황청 자체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오 14세는 교황청이 직접 노예화 승인 칙령을 내려 정당성을 부여했던 구조적 본질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교황청의 제도적 책임을 가장 명확히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교황은 레오 14세가 처음이다.
다시 미 의회의 과거사 반성 문제로 돌아오면 20세기 말에 이루진 1988년의 전시(戰時) 인권 침해 및 강제 수용에 대한 반성을 먼저 들게 되는데 이는 유일하게 배상이 이루어진 법안이다. 이 시민자유법 (Civil Liberties Act of 1988 ,일본계 시민 수용소 사죄)의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권자를 포함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몰아 강제 수용소에 격리한 것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면서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단순한 ‘말뿐인 결의안’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배상(Reparation)까지 이루어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과거사 청산 사례다. 배상 받는 당사자인 일본의 힘이 작용 헸다는 얘기다. ‘언덕위의 하얀집’을 여러차례 강조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했다.
1993년에는 하와이 왕국 전복에 대한 사죄 결의안 (Apology Resolution)이 있었다. 1893년 미국인 설탕 밀농장주들과 미 해병대가 공모하여 하와이 왕국의 리리우오칼라니 여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하와이를 불법 병합한 사건에 대해, 100년이 지난 1993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가 공식 사죄한 결의안이다. 타국의 주권을 불법으로 침탈하고 전복했던 ‘제국주의적 침공’ 행위를 미국 스스로 인정한 보기 드문 사례다.
2011년 상원 그리고 2012년 하원은 중국인 배제법 사죄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용은 1882년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잔뜩 부려 먹은 뒤, 정작 이들의 이민과 시민권 취득을 원천 봉쇄했던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에 대해 의회가 뒤늦게 공식 유감을 표명하고 사과한 결의안이다. 역시 배상은 없었다.
보마르세 배상 결의가 미국이 국가 형성기에 진 ‘도덕적·신용적 부채’를 갚은 사건이라면, 후대의 결의안들은 미국이 스스로 내세운 “자유와 인권”이라는 헌법 가치를 스스로 배신했던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과오를 뒤늦게 수습해 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수습이 됐고 여전히 ‘언덕위의 하얀집 모토는 이 미국땅에서 유효 할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