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2>
안 동일 작
부흥이 한때 강성했거나 찬란했던 과거가 다시 일떠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캐럴 형제가 미국 가톨릭에 끼친 공헌은 발흥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였음에도 독립대열에 앞장섰고 대륙군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신자 찰스 캐롤의 종교적 영지 라고도 할 수 있었던 메릴랜드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혁명 대의에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캐럴과 교분을 맺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 등 혁명의 지도자들이 나서 이들의 동참을 장려했다.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 등지의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세력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이들 가톨릭 신자들은 민병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륙군에서 복무했다. 그들은 혁명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 으로써 영향력과 발언권을 증대 시켰던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1775년 당시 만연했던 반가톨릭 축제인 ‘가이 포크스 데이’를 군대내에서 엄격 금지하며 가톨릭 신자들을 혁명군으로 포용했다. .
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독립 대열에 뛰어든 큰 이유는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과 함께 영국 본국과 식민지 정부들의 억압적인 종교 정책에서 벗어나는 종교적 자유를 바랐던 측면이 강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의 바람은 희생과 헌신으로 뜻을 이루게 된다.
독립전쟁이 승리로 귀결된 직 후 존 캐롤이 미국 최초의 토착 가톨릭 주교가 되어 미국 가톨릭 교회의 쳬계적 토대가 마련된다. 그무렵 제정된 미국 헌법에 따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면서, 가톨릭은 개신교 위주의 미국 사회에서 제도적 종교 자유를 인정받게 된다.
미국 독립 전쟁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국의 피지배자’라는 위치에서 ‘새로운 민주 공화국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가톨릭의 발흥 중심에 캐럴 가문이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미국 최초의 주교이자 대주교가 된 존 캐럴의 인생 여정은 신앙과 교육, 그리고 남다른 , 애국 애민 정신의 결합이었다.
그는 1735년 메릴랜드주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술한대로 당시 메릴랜드 식민지는 가톨릭 교육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부친은 그를 유럽으로 건너가 가톨릭 교육을 받게 했다. 찰스 캐럴도 마찬가지다.
존 캐럴과 그의 사촌 찰스 캐럴이 루이-르-그랑(Louis-le-Grand)에 입학하기 전, 프랑스 북부에서 라틴어와 기초 학문을 닦았던 곳은 바로 생토메르(St. Omer)다. 그곳에서 그들이 다녔던 학교는 영국 예수회가 설립한 생토메르 콜라쥬(College of St. Omer)다. 존 캐럴과 찰스 캐럴이 이 학교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5~6년 정도다.
기록에 따르면 1748년 존 캐럴이 13세 때, 찰스 캐럴이 11세때 함께 메릴랜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 지방의 생토메르에 도착해 그해 가을에 이 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생토메르 콜라쥬는 당시 영국계 가톨릭 엘리트들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위치가 그랬고 교수진이 그랬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예수회 교육 시스템 아래서 라틴어 수사학, 고전 문학, 그리고 가톨릭 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1753년 존 캐럴은 생토메르에서의 과정을 마치고 더 높은 수준의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파리의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이태 뒤 찰스 캐럴도 뒤 따른다. 이곳에서 이들은 예수회 교육의 정수를 체득하고 운명의 벗 피에르 보마르세를 만난다. 이곳에서 특히 존은 한단계 높은 신학적 믿음과 철학적 사유와 논리학을 익히며 사제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된다.
존 캐럴은 1761년 벨기에의 세인트 오메르로 떠나 신학교로 진학해 예수회 수사가 되었고, 1769년 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존 은 벨기에의 와튼(Watten)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하며 본격적인 수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반면, 사촌 찰스 캐럴은 파리에 계속 머무르다 몇년 뒤 영국으로 가 법학과 정치학 등을 공부하며 훗날 정치인이 될 준비를 하게 된다.
존이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결심에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감을 넘어, “자유로운 국가에서의 가톨릭”이라는 비전이 자신 내에서 싹텄던 것도 큰 몫을 했다.
존 캐럴은 예수회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앙의 제도화’를 꿈꿨던 지성인이었다.
보마르세는 같은 교육을 받았으나 이를 ‘정치적 수완과 예술’로 승화시켜 왕실의 심장부까지 파고든 풍운아의 길을 걸었다.
세 사람이 공유했던 ‘예수회 철학’은 논리적 사고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강조했기에, 한 명은 사제로, 한명은 정치인으로 한 명은 책략가이자 극작가로 각기 다른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존 캐럴과 찰스 캐럴의 두 4촌의 이야기는 파도파도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보마르세까지 가세하면 그 깊이가 더 해진다.
엄밀히 따지면 존의 아버지와 찰스의 아버지는 6촌(Second Cousins) 관계다. 하지만 당시 캐럴 가문의 유대감이 워낙 강했고, 유난히 두 집안이 절친 했기에 대부분 ‘사촌’으로 이해 하고 있고 그렇게 통용 된다.
존 캐럴의 아버지 대니얼 캐럴 (Daniel Carroll I, 1696–1751)은 아일랜드에서 메릴랜드로 이주했던 캐럴 가문의 방계 혈통이다. 찰스 캐럴의 아버지’아나폴리스의 찰스 캐럴’ (Charles Carroll of Annapolis, 1702–1782)이 우리로 말하면 나이는 몇살 어렸지만 가문의 장손 이었다. 종가 집인 찰스의 직계를 ‘도허래건(Dohoregan)’ 가문으로 지칭하는데 알다시피 메릴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가톨릭 집안이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들이 형제 관계였기에, 존과 찰스는 항렬상으로는 8촌(Third Cousins)이 되지만, 실제로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함께 유학을 떠났고 평생을 함께한 사이다.
존의 아버지인 대니얼 캐럴은 찰스의 집안처럼 거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성공한 상인’이자 신망받는 가톨릭 신사’였다. 그는 어퍼 말보로(Upper Marlboro) 지역에서 큰 상점을 운영하며 부를 쌓았다. 당시 가톨릭 신자로서 정치적 제약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상거래를 통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공직에 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자식들이 신앙과 교육을 통해 극복하기를 원했다. 존과 그의 형 대니얼(훗날 미국 헌법 제정 위원)을 어린 나이에 유럽으로 유학 보낸 결단력을 발휘 했다.
가톨릭 박해 속에서도 집안에서 은밀히 미사를 드리고 신앙을 지켰던 독실한 인물이었다. 존 캐럴이 훗날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1751년 사망), 그가 심어준 신앙적 뿌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용적이고 성실한 중산층 가톨릭’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찰스의 아버지 ‘아나폴리스의 찰스’와 대비되어 존은 아버지로부터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과 겸손함’을, 찰스는 아버지로부터 ‘가문과 신앙을을 지켜야 한다’는 수완과 정치적 야망’을 물려 받았다고 얘기된다.
잠깐 이름이 언급 됐는데 여기서 또한 명의 걸출한 캐럴이 등장 한다. 바로 존 캐럴의 친형 대니얼 캐럴(Daniel Carroll II, 1730–1796)이다.
그 역시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데 그래서 대니얼은 ‘록 크리크의 대니얼(Daniel Carroll of Rock Creek)’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존 캐럴이 종교계의 거물이 라면 대니얼은 세속 정치계의 거물로서 아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대니얼 역시 동생 존보다 앞서 생토메르 콜라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742년부터 1748년까지 생토메르에서 공부했다. 동생 존 캐럴과 사촌 찰스 캐럴이 생토메르에 막 도착했을 때, 대니얼은 공부를 마치고 막 메릴랜드로 돌아가려던 시기였다. 다니엘은 더 이상의 천주교 스쿨 유학을 하지 않았고 귀국했다.
대니얼 캐럴 그는 미국 건국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문서인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과 미국 헌법(U.S. Constitution) 모두에 서명한 단 5명 중 한 명 으로 건국 주역 (Founding Father)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가톨릭 신자로서 공직 진출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온건한 성품 덕분에 메릴랜드 대표로 제1차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다. 동생 존 캐럴이 종교적 자유를 위해 싸울 때, 그는 법적·정치적 테두리 안에서 가톨릭교도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애썼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대니얼은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아 번창시켰고, 동생 존 캐럴이 사제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정치적 뒷배가 되어주었고 역시 4촌으로 통용 되는 동생 찰스를 위해서도 다.
찰스 캐럴이 뜨거운 열정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찰스가 뜨거운 열정과 친화력을 지닌 가진 혁명가라면, 형 대니얼은 차분하고 치밀한 설계자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수도 워싱턴 D.C. 탄생의 주역이기도 하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 수도(District of Columbia) 건설을 담당하는 3인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워싱턴 D.C.의 많은 부지가 당시 캐럴 가문의 소유이기도 했다. 존 캐럴이 루이-르-그랑에서 철학적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이미 메릴랜드에서 가문의 사업과 정치를 챙기던 형 대니얼로부터 오는 편지속의 조언들은 그를 키운 자양분 이었다.
찰스 캐럴이 변호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집안 전체가 법률가 집단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대니얼 캐럴의 공식적인 이력은 변호사보다는 ‘정치인(Statesman)’이자 ‘사업가(Merchant)’에 가깝다.
그는 생토메르 유학 시절에 인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가문의 거대한 상업 제국과 토지를 관리하는 상인(Merchant)이자 지주(Planter)로서의 삶에 먼저 집중했다.
찰스는 런던의 ‘이너 템플(Inner Temple)’에서 본격적인 법률 공부를 한 법률 전문가였다. 또한, 캐럴 가문 중에 변호사로 활동한 동명이인들이 많아 기록이 섞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대니얼은 헌법 제정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의 위원이었고, 법을 만들고 심의하는 입법가로서 평생을 살았기에 법률적 지식은 당대 어느 변호사 못지않게 해박했다. 그는 변호사라는 자격증 이상의 ‘법적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법을 배운 상인 출신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는 상업을 통해 다진 실리적인 감각과 역시 예수회 교육으로 다진 논리력을 갖춘 인물. 찰스가 원칙에 충실한 법률가라면, 대니얼은 정치적 타협과 중재에 능한 노련한 조력자의 모습이었다.
대니얼 역시 “가톨릭은 공직에 나갈 수 없다”는 당시의 법적 금기를 몸소 겪으며 그 벽을 허물기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존, 네가 하느님의 법을 수호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새로 써서 우리 가문과 신앙이 숨 쉴 땅을 만들겠다.”
언젠가 언급 했는데 캐럴가에 정식 변호사가 있기는 하다.
바로 ‘배리스터 찰스 캐럴’ (Charles Carroll, Barrister, 1723–1783)이다.
그는 캐럴 가문의 방계이자 아주 독특한 선택을 한 인물.
같은 이름의 찰스 캐럴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택한 주인공 이라면 그는 ‘세속적 성공을 위해 개종을 택한 인물’이다.
배리스터 찰스의 아버지인 닥터 찰스 캐럴(Dr. Charles Carroll) (그 집안 사람들 찰스라는 이름 너무 좋아 한다.)이 먼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로 개종했다.
언급한 대로 가톨릭교도는 땅은 가질 수 있었지만, 법을 집행하거나 공직에 나갈 수 없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가문의 사회적 상승을 위해 개종을 결심했고,(이 과정에서 4촌 형제들인 찰스와 다니엘과 상의 했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아들 찰스는 영국 이튼(Eton)과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런던의 ‘미들 템플(Middle Temple)’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정식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당시 메릴랜드에 ‘찰스 캐럴’이라는 이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다른 친척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 뒤에 항상 ‘배리스터(Barrister)’를 붙였습니다. 배리스터(Barrister)는 법정 변호사를 뜻한다.
주인공 찰스 캐럴과의 와는 먼 친척 사이였다. 배리스터 찰스는 주인공 찰스보다 14살이 많았고, 주인공이 유럽에서 귀국했을 때 이미 메릴랜드 정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배리스터 찰스는 개종 덕분에 의회 의원이 될 수 있었지만, 주인공인 ‘캐럴턴의 찰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남으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받아 ‘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이라는 필명으로 활약 할때 그이 은근한 뒷배가 되어 줬다.
그는 훗날 메릴랜드의 첫 번째 주 헌법을 기초하는 데 참여할 정도로 법률적 실력이 뛰어났다. 신앙을 버린 대가로 얻은 ‘법률적 권력’을 그는 사제인 친척 존 캐럴과 독립운동가인 찰스 캐럴을 은밀히 돕는 신의 도구로 활용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과 확실한 승리와 독립을 보지 못한채 83년 세상을 떠났다. 베리스타 찰스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회 신자였지만 그역시 가톨릭 특히 예수회의 신앙을 높이 평가 하면서 존 캐럴의 목회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말 한대로 존과 찰스가 대서양을 건너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불길에 뛰어든 것은, 단순한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그들이 체득한 예수회적 사유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회 적 사유의 핵심은 ‘세상 속의 관상가 (Contemplative in Action)’라는 표현에 함축돼 있다.
수도원 안에 숨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존 캐럴에게 독립 전쟁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가 억압받는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길(Ad Maiorem Dei Gloriam, AMDG)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존은 성체 조배를 하며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압제 소식이 귓전을 맴돌았고 그것을 ‘세속의 소음’이 아닌 ‘응답해야 할 부르심’으로 느꼈던 것이다.
성신 수련의 핵심인 ‘식별’ (Discernment)을 통해서도 그는 선한 영의 인도라는 것을 확신했다. 식별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무엇이 선한 영의 인도인지 분별하는 과정이다. 신이 부여한 양심의 자유다.
찰스 캐럴 역시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조차 없던 메릴랜드의 현실이 예수회 교육을 통해 배운 ‘양심의 우위’에 입각한 식별로 단연코 신의 뜻에도 위배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잃을 위험(반역죄)을 무릅쓰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만 든 동력을 거기에서 찾았다.
그만큼 루이 르 그랑의 가르침은 이들에게 일생을 관통하는 신앙적 철학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루이-르-그랑의 지적 토양은 한마디로’인문주의적 가톨릭’이라는 말로 집약 된다.
그곳에서 그들 찰스 존 그리고 보마르세는 라틴어와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며 ‘폭정에 저항할 권리’를 가르친 토마스 아퀴나스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상을 접했다.
보마르세와의 접점: 보마르세의 자유분방함과 존 캐럴의 경건함은 극단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기존 체제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는 뿌리는 같다. 보마르세가 연극을 통해 구체제를 풍자했다면, 존 캐럴은 교회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셈이다.
그들이 “왜 편안한 귀족의 삶이나 평온한 사제의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자네는 하느님이 성당의 제대 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분은 지금 보스턴 앞바다의 차가운 물결 속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식민지 청년의 거친 숨결 속에도 계신다네.”
젊은 시절 존이 보마르세에게 한 말이다.
보마르세레 대해 잠깐 알아보자.
피에르 보마르세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는 시계공의 아들에서 국왕의 최측근이자 혁명가로 변신한 드라마틱한 삶의 인물이다.
그는 1732년 파리의 시계공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뛰어난 손재주로 시계의 ‘탈진기(Escapement)’를 발명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루이-르-그랑에서 존 캐럴과 같은 시기에 교육을 받으며 상류 사회의 언어와 철학, 그리고 권력의 생리를 배웠다. 이는 훗날 그가 극작가로서 사회를 풍자하는 밑거름이 됐다.
궁정 입성과 루이 15세의 총애: 시계 발명으로 국왕의 눈에 띄어 궁정에 출입하게 되었고, 뛰어난 하프 연주 실력으로 국왕의 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입지를 굳혔다.
루이 16세가 등극하자 비밀 회계 관리인이자 정보원으로 하면서 국왕의 전퍽적인 신뢰를 얻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그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 왕실의 의중을 읽고 ‘로드리그 오르탈레스 공사’라는 유령 회사를 세워 미국에 무기를 공급하는 막후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루이 16세의 실질적인 대미 정책 자문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