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1 –
안동일 작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프랭클린 부자의 갈등과 비극적인 파경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높고도 깊게 충격과 반향을 던진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벤자민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지, 당시에도 또 지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벤자민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편에 서서 얼마나 고통 스러웠겠냐고 자식농사 처럼 힘든게 어디 있냐며 그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네 ‘청문회 문화’로는 당장 낙마감인데도 그렇다.
두 사람의 파경은 개인적인 성향과 이념, 성격의 차이, 그리고 종교의 차이를 넘어, 한 가정이 국가적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으로 평가받고 있다.
딩초 읠리엄은 벤자민의 자랑거리인 맏 아들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은 출생 부터 사연이 있었다. 바로 혼외자, 사생아 였던 것이다. 벤자민은 처음부터 윌리엄을 외면하지 않았다. 윌리엄이 벤자민의 친자(Biological son)라는 사실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과정’은 공식적인 법적 절차보다는 실질적인 양육과 사회적 인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윌리엄은 1730년 (혹은 1731년 초)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당시 부인 데보라 리드(Deborah Read)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하기 직전, 혹은 직후에 ‘혼외자’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윌리엄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역사적 수수께끼다. 하녀였다는 설, 거리의 여인이었다는 설 등 분분하지만 벤자민은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1730년 9월, 데보라 리드와 결합하면서 벤자민은 갓 태어난 윌리엄을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키울 것을 제안했다. 데보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프랭클린 가문의 일원이 됐다.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혼외자를 자신의 집에서 직접 키우고 이름을 물려주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친자 인정의 행위였다.
기록에 따르면 윌리엄은 체격이 좋고 지적인 면모 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단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 우리네 옛말이 18세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그대로 통용됐던 셈이다. 윌리엄은 외모부터 기질까지 아버지 벤자민을 쏙 빼닮아, 혈액 검사는 물론 유전자 검사는 생각도 못했던 그 시절 당대 사람들도 그가 벤자민의 친자임을 의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자신과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고 아들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 성장 했다. 1740년대 후반, 윌리엄은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고 이후 아버지가 전기 실험을 할 때(그 유명한 연 날리기 실험, 위 삽화) 곁에서 돕는 가장 신뢰받는 조수 이기도 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인쇄기를 직접 돌릴 정도로 어깨가 벌어지고 힘이 좋은 체격이었다. 윌리엄은 그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키는 아버지보다 더 컸다고 전해진다.
벤자민이 특유의 유머와 친화력으로 필라는 물론 파리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윌리엄 또한 런던 상류사회에서 ‘매력적인 신사’로 통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상당했다.
외모는 닮았지만, 그 외모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벤자민은 소박한 갈색 코트를 입고 시민으로서의 실용적인 모습을 고수했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물려준 외모에 화려한 영국식 정장과 가발을 더해 ‘영국 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애썼다. 자신의 출생(혼외자)에 대한 결핍을 완벽한 외모 가꾸기와 귀족적 태도로 보상받으려 했다고도 분석 된다. .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녀 관계는 생각보다 단출하면서도 그 운명은 사뭇 달랐다. 벤자민에게는 공식적으로 2남 1녀가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하여 이름을 남긴 자녀는 윌리엄(장남)과 막내딸 샐리(Sarah “Sally” Franklin) 둘 뿐 이다. 애칭이 ‘프랭키’였던. 차남 프랜시스 (Francis 1732~1736)는 4살 때 천연두로 요절해 벤자민이 평생 가슴에 묻었다. 당시 벤자민은 “아이에게 예방접종(인두법)을 하지 않은 것이 내 평생의 한”이라며 자책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장녀 사라 ‘샐리’ (Sarah Franklin Bache) 1743~1808) 는 벤자민이 가장 아꼈던 딸로, 독립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돕는 등 아버지를 극진히 보필한 효녀로 꼽힌다. 윌리엄과 샐리는 무려 13살 차이가 나는데 윌리엄이 영국 귀족적인 화려함과 권력을 지향했다면, 샐리는 아버지 벤자민의 ‘실용주의’와 ‘애국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프랑스 사절로 가 있을 때 필라델피아에서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을 위해 옷을 짓던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윌리엄은 자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사생아 라는 사실을 알았다는데 벤자민의 부인 데보라를 늘 엄마라고 불렀고 샐리도 그를 친 오빠로 알고 컸다. 집안은 화목한 편이었다.
필라의 명문 유팬을 나온 윌리엄은 아버지의 ‘연 실험’등 과학 실험을 돕는 등 조수 역할을 충실히 했고 벤자민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는 비서로서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1750년대 후반 부터 밴자민은 외교관으로서 런던을 자주 방문 했고 더러는 장기간 머물기도 했는데 그때 마다 윌리엄을 동반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아들로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좌관 역할을 잘 수행하며 영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
윌리엄은 런던에서 명문대에 입학해 법학등 을 공부하며 신사로서의 소양을 갖췄다. 그가 법학을 공부한 학교가 미들 템플 대학(원) (Middle Temple) 이다. 찰스 캐럴과 동문이다. 벤자민은 아들을 여봐란 듯 ‘영국 신사’로 키우고 싶어 했고, 애써 당시 영향력 있는 귀족 정치가였던 뷰트 백작(Earl of Bute) 등과 교류하게 했다.
1762년, 윌리엄은 불과 31세의 젊은 나이에 뉴저지 왕실 주지사(Royal Governor)로 임명된다. 이 파격적인 인사의 이면에는 몇 가지 절묘한 이유와 맞아 떨어진 상황이 있었다.
당시 벤자민은 영국 정부 내에서 매우 존경받는 학자이자 식민지 대리인이었다. 영국 정부는 벤자민의 환심을 사고 그를 영국 편으로 확실히 묶어두기 위한 ‘당근’으로 그의 아들에게 주지사 자리를 내 줬던 것이다. 식민지 전역의 젊은 인재들에게 던지는 긍정 효과도 십분 기대 했을 게다. 벤자민의 친구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던 당시의 정가 최고 실력자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이 혼외자(사생아)라는 사실은 당시 상류 사회에서 이는 큰 약점이었으나, 벤자민의 명성과 정치적 줄대기가 이를 덮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프랭클린 집안의 사생아 전통은 그후 3대에 걸쳐 계속 된다. 윌리엄도 사생아 탬플을 낳았고 탬플도 사생녀 엘렌을 낳았다.
아무튼 당시 벤자민은 아들의 주지사 임명을 당연히 무척 기뻐 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아들이 영국 체제 내에서 성공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사실 빈한한 가정 출신에 무학에 가까운 프랭크린으로서는 기적을 만든 셈 아닌가.
그때 윌리엄의 총독 임명은 영국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 커다란 반향과 화제를 몰고 오게 했고, ‘역시 닥터 프랭클린’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했으며 식민지 사람들은 장원급제한 동리 청년을 축하하듯 저마다 “그럴줄 알았다’ 며 윌리엄을 칭송 했던 일대 사변이었다. 벤자민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을 게다.
“내 아들이 영국 국왕의 대리인 총독이 되었으니, 이제 식민지와 본국 사이를 잇는 훌륭한 가교가 되겠지?”
그런데 벤자민은 아들을 ‘영국 시스템의 핵심’에 앉혀 놓았는데, 정작 본인은 나중에 그 시스템을 부수려는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장 견고한 ‘충성파의 굴레’를 씌워준 사람이 역설적으로 아버지였던 셈이다. 산과 골을 만든 아이러니다.
윌리엄은 진심으로 영국식 입헌 군주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통치 형태라고 믿었다. 특히 한 세기 전의 명예 혁명은 세계사를 바꾼 쾌거 였다고 기염을 토했다.
뉴저지 주지사로 부임한 후, 그는 꽤 유능한 행정가였다. 도로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식민지인들의 신망을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운이 거세지면서, 그는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와 ‘국왕에게 한 맹세를 지킬 것인가’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1764년의 사건은 두 사람의 분열이 시작된 전초전이었고 고랑이 파이기 시작한 사건 이었다.
그때 벤자민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대리인 자격으로 런던을 다시 찾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를 소유하고 있던 펜(Penn) 가문의 특권에 반대하며, 그 식민지를 국왕 직할령으로 바꿔달라고 청원하는 한편 인지세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프랭클린의 요청을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거세게 비난했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나서면 본국(영국) 정부가 식민지의 입장을 이해해 악법을 철폐 할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영국에 왔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믿음 과는 달리 오히려 “건방진 식민지인” 취급을 받으며 큰 모욕을 당해야 했다. 특히 인지세법(Stamp Act) 문제로 영국 정치인들에게 “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식민지인의 대변인”이라며 조롱을 받기도 했다.
벤자민에게 더 큰 문제는 아들 윌리엄의 태도였다. 윌리엄은 당시 뉴저지 총독으로 갓 부임해 뉴저지에 있었다. 벤자민의 기대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수모를 당하고 식민지의 권익이 침해받는 상황이니, 아들인 윌리엄도 자신과 뜻을 같이해 영국 정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아버지를 옹호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겪는 수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직무를 유기하거나 영국 정부에 반기를 드는 어떤 행위도 거부했다. 벤자민은 아들에게 자신을 옹호하고 입장을 설명 해주는 편지라도 영국 요로에 보내라고 요청 했지만 윌리엄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윌리엄은 뉴저지에서 영국 정부의 정책(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등)을 적극 옹호하고 실행 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이해 하는 척 했지만, 공식 입장과 오고가는 문서 에서는 영국 본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겪는 수모를 보며 오히려 “아버지가 너무 급진적이라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언급했고, 자신은 더 더욱 철저히 영국 관료 사회에 편입되려 노력했다.
벤자민은 이를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들을 위해 쌓아온 인맥과 배경이 결국 아들을 영국 편에 서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노여워했다.
그런 반목이 10년 지속 되었고 1774년 칵핏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칵핏(The Cockpit)은 원래 런던 화이트 홀 궁전 내에 있는 방으로, 과거 헨리 8세가 닭싸움(Cockfighting)을 구경하던 장소였다. 18세기에는 영국 국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Privy Council)이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던 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역시 정치적인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 1774년 1월 29일 공포의 1시간 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런던에 상주하고 있던 펜주 대리인 프랭클린이 매사추세츠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의 비밀 편지(식민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를 입수해 폭로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반역 행위로 간주하고 프랭클린을 칵핏으로 소환했다.
35명의 추밀원 의원들과 구경꾼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마치 닭싸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처럼 프랭클린이 망신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년 대 중반 이후 영국내 벤자민의 신망은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려지기 시작 했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적들이 많아지기 시작 했던 것이다.
공격수로 법무상 알렉산더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나섰다. 그는 1시간 동안 프랭클린을 향해 “도둑”, “선동가”,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퍼부었다.
프랭클린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그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당시 그가 입었던 푸른색 벨벳 코트는 훗날 그가 독립 전쟁의 승리를 확정 짓는 조약에 서명할 때 다시 입음으로써 복수를 완성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사건 전까지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영국과 식민지를 화해시키려 했던 온건파였다. 하지만 칵핏에서의 수모를 겪은 후, 그는 영국 제국 내에서 식민지인은 결코 평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칵핏에 영국인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미국인이 되어 걸어 나왔다.” 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이 사건은 그를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모시켰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들 윌리엄 (아래 사진)은 여전히 뉴저지 주지사로서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대중 앞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인격 살인을 당했는데도, 아들 윌리엄은 영국 정부의 편에 서 있었다. 벤자민은 윌리엄이 총독직을 던지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함께 싸워주길 바랐지만, 윌리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칵핏 사건 직후 프랭클린은 명예직에 가까웠던 13개 식민지 통합 우체국장직에서도 해임된다. 영국에서의 모든 사회적 지위가 박탈된 것이다. 펜주 의원직도 펜 가문 총독에 의해 박탈 된 때였다. 반면 아들은 여전히 영국의 왕실 총독으로 남아 있었으니, 두 사람의 길은 이때 사실상 완전히 갈라진 셈이다.
두 사람 사이를 봉합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1775년 8월에 있었다. 벤자민이 영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뉴저지의 사우스 햄프턴에서 부자가 만났다. 독립의 기운이 사방에서 활활 불 붙고 있었고 전쟁은 이미 시작된 때였다.
벤자민은 아들에게 “이제 영국과의 관계는 끝났다. 총독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에 합류하라”고 설득했다.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해 아들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윌리엄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저는 국왕과 교회에 충성을 맹세한 몸이며, 반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고 맞섰다. 그러면서 당시 막 결성된 대륙군은 오합지졸이며 부랑아 들의 집합이라고 폄훼 했다. 세계 최강 영국군이 있는 한 결코 독립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맞섰다. 이 만남은 화해가 아니라 결별이 되었다. 벤자민은 유언장에 윌리엄에 대해 “그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그에게 줄 유산이 없다”고 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캐럴신부의 영향을 받은 벤자민은 후일 유언장을 고쳐 캐나다의 황폐한 땅을 아들에게 물려 주기는 한다.
그런데 윌리엄의 이런 완고한 입장에는 그가 빠져든 영국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성공회, 종교도 크게 한 몫했다.
윌리엄은 편지 마다 특히 초기편지에는 성공회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곤 했다. 어린시절에는 청교도 회중교회 신자였고 중 장년에 이르러서는 이신론자를 자처했던 벤자민이 필라에서 기반을 닦은 뒤 성공회 교회에 출석 했던 이유도 물론 영국 정가를 의식한 속내도 있었겠지만 아들의 적극적인 권유도 한몫 했다고 보인다.
영국 성공회는 (Anglican Church)는 카톨릭의 전통과 개신교의 신학을 동시에 수용하는 ‘개혁된 카톨릭(Reformed Catholic)’이자 중도(Via Media)를 걷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적 전례를 중시하면서도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주요 특장으로 꼽힌다. 성공회는 “교황 없는 천주교”이자 “전례가 있는 개신교”의 형태를 띤, 전통과 개혁이 조화된 보편교회라는 것이다. 내부자들의 긍정적인 주장이다.
윌리엄은 벤자민에 보낸 편지에서 특히 성공회의 3대 근거, 전통, 성서, 이성을 들면서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두되,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신앙을 풍성하게 한다는 얘기였다. 프랭클린 답게 이성에 방점이 찍힌다. .
사도적 계승을 유지 중시하는 보편교회라면서 말씀과 성사의 균형이 이루어 져 있다고 했다. 설교와 성찬례를 동등하게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구원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되, 인간의 협력(책임)을 강조하는 신인 협력설을 따르고 있어 온건한 칼뱅 주의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꽤 조리있는 분석이다.
윌리엄은 성공회가 중도(Via Media) 중용을 지키며, 교리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정직하게 신앙을 고민하고 사유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열린 토론을 지향한다고 자랑했다. 공동체와 사회 변혁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꼭 맞는 믿음이라고 강조 했다. (69년 켄터베리 주교로 부터 성공회 훈장을 받은 직후의 편지)
이렇듯 읠리엄은 성공회에 열렬하게 빠져 들었고 계속 ‘신의 기호’ ‘국왕 폐하의 안녕’을 되뇌었다.
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편지가 오갔다 윌리엄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공경하는 어조를 유지하지만, 행간에는 “아버지는 현실을 모른다”는 오만한 자기 생각과 “나는 이제 국왕을 대리하는 뉴저지의 통치자다”라는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1764년 총독 관저(Perth Amboy)에서 아버지가 런던에서 모욕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윌리엄은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그 순간 부관을 시켜 총독 제복을 가져오라했고 영국왕의 초상화 앞에서 화려한 총독 제복의 단추를 채우며 “나는 아버지처럼 무시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칵핏 사건 때도 대동소이 했다.
이랬던 그는 세월과 상황이 변해 연금 당해 있었고 조만간 체포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장원급제의 영광이 역모의 위험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아버지가 지역 민병대 대장과 막 서로 마음을 연 천주교 젊은 신부의 권유로 마지막으로 찾아 갔던 것이다.
그날 허드 대령이 이른 아침 여관으로 마차를 몰고 와 벤자민과 캐럴은 함께 퍼스 앰보이로 향했다.
퍼스 앰보이 총독 관저는 ‘프로프라이어터리 하우스(Proprietary House)’라 불리우는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왕실 총독 전용 관저’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규모의 육중한 조지아풍(Georgian) 저택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였다
관저에는 적지 않은 대륙군 민병대원들이 꽤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정문 뿐 아니라 현관 그리고 복도며 집무실 앞에 까지 총을 멘 민병대원들이 서 있었다. 윌리엄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관저는 이미 ‘금칠한 감옥’이 되어 있었다.
허드 대령과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벤자민과 존 케럴, 박사와 신부의 출입은 매우 까다로왔을 것이 틀림 없었다.
현관 문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이 오히려 벤자민의 낡은 코트와 대비되어 윌리엄의 ‘고립’을 부각하고 있었다. 캐럴 신부도 로만 칼라를 매고 있었지만 그의 양복도 매우 낡고 더러워져 있었다.
“신부님, 내가 무리해서 아들에게 안겨준 ‘지위’와 ‘명예’가 결국 아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구료.”
벤자민은 화려한 저택 내부와 벽 한면을 거의 채우고 있는 영국왕 초상화를 를 보며 “내가 너를 왕의 종으로 키웠구나”라는 자책 섞인 분노가 서늘하게 깔렸던지 옆의 캐럴 신부에게 나직히 말했다.
윌리엄은 2층 집무실에 있었다. 서재를 겸한 관저내 그의 공간 이었다.
병사 한사람의 안내로 벤자민과 캐럴, 그리고 허드가 방에 들어 섰다. 관저의 집무실도 꽤 넓은 편이었다. 호화로운 마호가니 큰 책상과 여섯개의 의자가 있는 타원형 태이불이 있었고 벽쪽으로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반역자들의 수장께서 내 집에 웬일이십니까?”
번쩍 번쩍 빛나는 총독 제복을 입은 윌리엄은 벤자민 일행이 들어서자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걸어 오기는 했지만 첫 언사는 너무도 무례하고 가시가 돋혀 있었다.
“얼굴은 보기 좋구나 빌리야”
하지만 벤자민은 부드럽게 응대 하며 테이블로 걸어 가 앉았다.
“그럼 제가 뭐 죽을 상을 하고 있어야 됩니까?’
윌리엄도 맞은편에 앉았다. 캐럴과 허드는 아직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상황을 보아 두 부자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가기로 했었다.
“집에 있으면서도 늘 이렇게 차려 입고 있냐?”
“반란의 세력 들에게 대영제국과 국왕 폐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입었습니다.”
“아직도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영국은 이미 우리 부자를 버렸다. “
“아버지를 버렸겠지요.”
“다시 생각해 볼수 없겠니?”
“그런 말씀 하시려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허드 대령이 하도 졸라서 왔다.”
“대령은 무슨 대령 입니까? 부랑자 집단의 두목이지.”
“허허, 조만간 너에 대한 체포가 있게 된다는 구나, 체포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지금도 놈들은 불경하게 저를 감금하고 있습니다.”
“체포 되면 감옥으로 가야 하는데 네가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겠니?”
“두렵지 않습니다. 당장 처형만 시키지 않는다면 저는 감옥에서도 국왕 폐하의 함대를 기다릴 것입니다.”
“망나니 같은 불효자식 . 말이 소용이 없구나”
“마음대로 생각 하십시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