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ykorea
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28회)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 성신(聖神) 성령(聖靈)  그리고 보혜사 (保惠師)-

창현에게 나타난 성신이 직접  권일신의 이름을 거론 했다는 창현의 말에 일동은 직암을 다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 일이 그냥 이루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창현에게 그때의 광경을 자세히 설명 하도록 종용했다.  그날 이렇게 물꼬가 터진 일동은 성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담을 나눴고 격의 없는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그들로서는 처음있는 성신(聖神) 토론 이었다. 성신 이야 말로 천주학이 학문이 아닌 종교, 믿음으로서 인간 앞에 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 임에도 당시 유자들은 논리를 뛰어넘은   성령의 존재, 그 문제를 애써 뒤에 놔두고 있었던 듯 싶다.

맥이 끊기는 것 같지만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직접 나서야 겠다.

성신(聖神) 성령(聖靈) 의 문제는 이 소설을 관통하면서 필자에게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였다. 가톨릭을 포함해 기독교 전체에 있어 성령은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문제다. 매우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전부 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무엇을 믿는다 고 표현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것이고 무속 신앙은 그 주체가 되는 장군신이 됐건 동자신이 됐건 그 신을 믿는 다는 얘기다. 그리스 로마인들은 다양한 각신을 믿었다.

천주교와 불교가 빼어난 고등 종교라고 할 때 이들은 그 신을 왜 믿어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하며 그 신의 가르침과 계율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앙을 포함해 무속이나 토템 신앙에는 그런 것이 없다.
결국 예수 강림이나 부활의 논리는 성신이 얼마나 강력하고 인간을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서사라고 할 수 있고 결국은 삼위 일체인 천주와 예수 그리고 개개인에 다양한 모습으로 강림하는 성신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 야 한다는 당위가 남게 되는 것이 종교로서의  기독교 아닌가.

이렇게 따지고 보면 천주 강생이며 부활은 천주의 전지전능성과 인간 사랑을 보여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이다. 그렇다 문제는 성신, 성령 이다.

기독교인들은 사실 성령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성령을 만났다고도 하며 성령을 체험 했다고도 하며 또 성령이 충만 하다고도 말한다. 필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 들인 직암 권일신이며 정약용, 라루선장, 카트라이트 신부 등 주요한 인물들이 들이 모두 성령 체험을 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 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대부분 성령을 체험 했다고 한다. 성령 체험 없이는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 생활이 어렵다고들 한다. 저마다 체험한 정도와 모습은 다르다.  하지만 성령체험이 일천한  필자로서는 이를 어떻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또 성령 체험은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따져 보기에 많은 고민과 생각, 그리고 탐문과 궁리를 해야 했다. 이번에 직암 동섬등의 성령 체험을 묘사 하려다 벽에 막혔고 연재가 늦어 져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공부와 조사를 하면서 직암 동섬 등이 가졌을 성령에 대해 한가닥 실마리를 풀어 낼 수 있었다. 그 경험과 사변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이글을 쓰고 있다. 중요한 문제다.

잘 알고 있는대로 성신 (聖神)은 ‘거룩한 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성령 (聖靈)은 ‘거룩한 영’이라는 뜻으로, 성부와 성자의 영적인 모습 형태 등을 가리킨다.
성신과 성령은 같은 말이다. 모두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부, 성자와 함께 언급되는 제3위격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성신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성령으로 통일하는 추세란다. ‘성신’이라는 표현이 ‘성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는 데도 마치 별개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진 하나마 일단 그 부분 공부를 마친 지금의 내 생각에는 성신이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고 여겨지는데…

아무튼 성령이란 무엇인가? 부끄러운 얘기이기도 하지만 고백 하거니와 필자는 이 경험이 일천하다고 얘기 했지만 실은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령에 대해 일정한 그러면서 심각하기 까지 한  오해를 지니고 있었다.
성령이  어떤 기운이나 불가사의한 에너지, 혹은 힘(force)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불과 같이 뜨거운 무형의 숨길 이 라는 생각이 강했다. 뜨끈 뜬끈 하게 다가오는 불같은 성령,  온 몸을 달아 오르게 하는 그런 에너지를 생각 했던 것이다.
이에는 내 개인적 경험도 작용했다.  어떤 동포사회 중요한 일을 함께 했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절친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젊은 나이에 개신교 장로였는데 작은 개척교회인 그 교회의 이름(별명?)이 ‘불기둥 교회’ 였다.  그 교회 신자들은 기도회 때면 거의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는데 거의 대부분 불같은 성령을 만난다고 했다. 그게 어떤 기분 일까 궁금하기는 했어도 그 기도회에 함께 가보자는 그의 여러번의 권유는 완강하게 뿌리 쳤었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가슴 안에서 불타는 불기둥이라…

그런데 이번 기회에 성령을 자세히 살펴보니 기독교 전반  에서 성령을 하나의 인격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인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사람의 자격이라는 인격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성령은 믿는 이들에게 느낌으로 전해 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야기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 예시를 전해 주며 회개와 각오를  요구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설명하는 신학자, 교역자 들이 모두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성령을 대뜸 어떤 불같은 기운이라고 생각 했을 까.

하긴 최초의 성령으로 생각되는 모세의 블븥은 떨기 나무의 예에서도 성령은 불타는 나무의 형태로 모세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 신약에서 기장 유명하고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난 성령도 불꽃 이었다고 기억 된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 처럼 갑자기 하늘로부터 소리가 생겨났었고 그리고 그소리는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이 갈라지는 것같은 갈라진 혀들이 보여졌고 그리고 그들의 각 개인 위에 임재하였다.’
나는 그 대목들에서 불꽃, 불 에만 집중 했던 모양이다.

성경은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나오는 하나의 “능력”이나 “감화력”, 또는 추상적인 “힘”이나 “기운”이 아니고, 인격적인 존재요, 능력을 소유하고 개성을 가지신 존재라고 누누히 말하고 있다.

연재가 늦어지는 그 사이 성경공부 열심히 해야 했다. 고마운 일이다.
구약인 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명쾌하게 언급했고 신약 코린트서에는 “오직 하느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신 성령을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도 바오로가 썼다는 걸작 로마서는 8장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 했고  15장 30절 에서는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주기를 바라노라.”고 나와 있다.

더욱이 성령은 의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코린트 전서에는 12장에서  1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라고 성령이 인격적인 활동을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묘사가 시적인 요한복음서에는  14장 에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되어있어 성령이 직접 신자들을 가르치고 15장 에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면서 미래의 성령에 대해 설명한다.

성령은 탄식도 하고 근심도 하는 모양이다.  다 우리 인간 때문이다.  로마서에는  “이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고   사도행전에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어 매우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 특히 천주교단에 간섭하고 계신다. .

이처럼 성경 전반에 걸쳐 성령은 인격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속임을 당하시기도 하며 하는 일에 훼방을 당하기도 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는 대목이 있고  마태복음 에는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했으며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성령은 성경을 이해하고 믿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정의 된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기록한 말씀이라는 얘기다.
성령은 말씀인 성경을 통해 역사하며, 성경은 성령의 검과 같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다고 회자 된다.
타락한 이성으로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깨닫고 믿을 수 있다.

창조에 있어서도 피조에 있어서도 성령이 역할을 감당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창조 작업을 지휘하시면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는 천주 하느님의 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특별한 사역자들에게만 성령이 주어졌단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은 거룩한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힘과 능력을 부여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주님 에수께서 이땅에 오신 신약 시대는  예언과 같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축복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교계의 정설이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직후에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족 역시 주님을 믿을 때에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천주 이신  예수님은  믿는 신자들 모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이신칭의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단다. 누누히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고 얘기되지 않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이 해석은 기독교를 창시 했다고 까지 언급 되는 사도 바오로를 위시해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등   정통으로 인정되는 빼어난 교부들이 내린 해석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를 간과 했었다.

성령 세례는 사람이 받으려고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란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세례를 따로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단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도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원과 중생, 그리고 성령 세례는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단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주님을 믿을 때에 저절로 일어나는 사건이란다. 그래서 믿음은 천주의 부름이라 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천국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을 “중생”이라고 한다. 이 중생(重生)은 하나님에 의해 죄인이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의미하며,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이란다.  이러한 일은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며,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성령이야 말로 가정 친근한 우리속의 성신이다.  불기둥으로 휩쓸듯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보혜사가 등장한다. 번역도 너무나 예쁘게 된 보혜사. 은혜를 보장 하는 스승, 은혜를 담보 하는 스승.

보혜사(保惠師)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번역한 단어로 이는 ‘곁에 도움을 주는 사람’,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이 이땅을 떠난 뒤 이땅에 보낸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명확하게 표현 돼 있다.   신도들이 오늘 맞이하고, 만나고  있는 성령이 바로  보혜사다.  이   보혜사론은  성신 성령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동등이셨던 예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여 주시며, 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임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모든 사업을 다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승천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예수께서는 그분 없이 홀로 남겨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한가지 선물을 약속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 대신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함께 계실 보혜사 성령이었던 것이다.

보혜사를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로 번역한다.  그는 우리의 위로자다. 불로서 심판하는 심판자가 아니다.

“육신을 쓰시고 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항상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같이 계실 수가 없으셨고, 또한 이제는 하늘로 다시 돌아가시기 때문에 그들을 직접적으로 돌보거나 가르치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 주심으로써,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약속 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 16:7).

이 약속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약속이다. 성령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믿는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다.

“신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계속)

 

Related posts

검찰청 내년 10월 폐지…정부조직법 국무회의 통과, 내일부터 효력

안동일 기자

애플 에어팟 3 프로, 실시간 통역 기능 구현

안지영 기자

바이든 하차하면 해리스가 대선 후보?…차기 절차는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