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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04)

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회암사의 흥망성쇠>

회암사의 청기와 정전(政殿) 의 건립은 ‘함흥차사’라는 성어를 만들어 낸 태조 이성계와 태종이 된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의 유명한 반목에서 비롯된 일이 었다.
알려져 있는 대로 태조 이성계는 건국 6년이 되던 1398년에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자식들 간의 살륙이 벌어지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 주고 상왕으로 은퇴한다. 은퇴한 이성계는 상왕전 창경궁을 주 거처로 했지만 자식의 피 얼룩이 남아 있는 한양의 궁궐이 싫다며 소요산 자재암과 양주 회암사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소요산 자재암에는 이성계가 좋아하는 백산 스님이 있었다.

회암사는 그때도 웅장했지만 소요산 자재암은 옹색 했기에 아예 절 아래쪽에 작은 규모의 행궁을 짓기도 했다. (실제 이 행궁에 거처 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후 1400년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그 직후 방원이 기어코 왕위에 오르자 더욱 못마땅했는지 아예 함흥으르 들어가 버렸다. 태종은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부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지만 사신들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소식도 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고사가 함흥차사다.
그런데 이 함흥차사와 자재암 행궁에 대해서는 그 연도가 서로 중복돼 모호하기도 하며  와전도 많고 과장도 상당히 게재돼 있다. 이 중간에 끼어드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조사의(趙思義)의 난(亂)이다.

조사의의 난은 1402년 11월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조사의는 이성계의 휘하 가별초의 장수로 1393년(태조 2)에 형조의랑이 되고, 그 뒤 순군(巡軍) 첨절제사를 거쳐 1398년 안변부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태조가 함흥에 칩거하고 있던 1402년 가을 왕세자 방석(芳碩)과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안변을 중심으로 동북면 전 지역이 거점이며 여진족의 참여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조정은 긴장해야 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하려 했으나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古事)에서 차사의 대표격 인물로 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 데 실은 이성계가 아니라 조사의 반군에 의해서 사사된 것이다. 정사에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숨진 이는 나오지 않는다.

반군의 진격이 시작됐고 평안도 덕천 방면에서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면서 안주에 까지 이르렀다. 초기에는 이처럼 반군이 우세했으나 그 후 태종이 각지의 군사를 소집해 직접 참전 까지 하면서 재 공격을 가하자 반군은 무너졌다.
실은 제풀에 무너진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반란이 그렇듯이 내분에 의한 붕괴 였다. 조사의 반군에 포로로 잡힌 김천우라는 사람이 평소 불만이 많던 조사의 휘하 조화(趙和)라는 부장을 꼬득여 다수의 탈영병을 발생시켰고 종국에는 진영에 불을 지르면서 내분을 조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왕께서 2만의 군사로 진격해 맹주에 이르렀고, 또 황주와 봉주 사이로 조영무 장군이며 이숙번 장군등의 군사 4만이 나오고 있는데, 그대들이 그 많은 군사들을 감당할 수가 있겠소이까?”  라고 한 마디 하자 조화를 비롯한 다수 병사들의 군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단다.

이 내분을 틈타 진격해 온 관군은 반군을 쉽게 진압했고 조사의는 안변으로 도망갔다가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음력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같은 달 18일 주살되었다.

그런데 이 조사의의 난에 태조가 얼마나 개입했는가 하는 점이 계속 논란 거리다. 일부 사가들은 이성계가 아예 출전 까지 했다고 쓰고 있고 일부는 출전은 안했지만 함흥에서 이들을 격려 고무 했다고 쓰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직접 출정한 것은 아버지를 설득 할 사람은 자신 밖에 없고 부왕의 신병을 확보 할 사람도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기록에는 안주에서 태종이 태조를 만나 개경(당시 조선은 다시 잠시 개경으로 환도해 있었다) 으로 함께 돌아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는 와전인듯 싶다.

실제 공식 기록인 태종 실록에는 무학대사가 그즈음 (1402년 겨울) 함흥으로 가서 태조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적혀 있다. 이 대목에서 또 논란이 되는 것은 이 조사의의 난 수습이 너무도 졸속으로 또 온건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반란이었는데도 3명 정도만 거열형이 아닌 참수형에 처해졌고 훈방된 이도 많았다. 일부 사가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일으킨 반란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사간들이 왕의 뜻에 따라 애써 축소해 적당히 적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태종으로서는 태상왕을 함흥에 놔두는 것은 화약을 방치하는 일이라 여기게 됐고 어떻게 해서든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동원했던 인물이  무학대사 였는데  이 방안을 원경왕후 민씨씨가 냈던 것이다. 실록에 왕비가 청기와를 회암사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알려진 대로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의 권력 획득과 왕위 계승에 있어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었다.  원경왕후도 신앙의 깊이는 모르겠지만 불교 신자였다. 하긴 달리 이렇다 할 종교가 없는 그 무렵에 한다하는 여성들은 다 불교 신자였다.
어찌보면 조선 전기는 유교적 통치체제 확립을 원하는 유학자 관료들과 불교신앙을 유지하려 했던 왕실여성들의 갈등이 심화된 시기이다. 유학자 신료들과 함께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축소시키는 각종 정책들을 마련하였지만,  왕실 내에서는 여성들의 불교신앙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비빈들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해 왕실의 복을 비는 사찰을 짓고, 경전을 간행했으며 세종대부터 성종대까지 다수의 후궁들이 연달아 승려(비구니)가 되었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이 큰 대비들은 남편과 아들의 안녕을 부처께 빌었고  영향력을 행사해 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세조의 정비 정희 왕후 한씨와 그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역시 청주한씨 인수대비의 독실한 불교 신앙은 유명하다.

그런데 부왕과는 달리 불교에 호혜적이 아니었던 태종 이방원은 불교가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본격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지만 부왕의 불교 우대를 전면으로 철폐하지는 않았다.  불교, 특히 회암사와 관련된  일화가 몇 있다. 재위 중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자 왕찰이었던 회람사의 승려들을 불러 모았단다.

“당신들이 평소에 그리 연마하는 도가 얼마나 효험 있는지 봅시다.  만약 아무 효과도 없으면 불교는 그 날로 조선에서 완전히 박멸이라고 생각들하시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승려들은 정말 내일이 없다는 심정으로 절박히 기도했고, 원경왕후의 병세가 완화되자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주는 걸로 답례를 했단다.

또 태종은 무학대사가 선종했을 때 신료를 보내 조문했고 건립돼 있던 부도탑 앞에 큰 비석을 건립 하도록 돌과 비용의 희사 하기도 했다. 무학스님의 부도는 1405년에 태조 이성계가 공을 들여 미리 건립해 놓았다. 옆에 있는 스승과 사조의 부도탑보다 크고 유려하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태조, 정종, 세종, 세조 등 국왕들의 지원에 힘입어 회암사는 계속 번창했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했다.

승려 3천이 기거할 수 있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던  회암사는 태종 이후에도 역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왕찰로 함경도에 있는 안변의 석왕사(釋王寺)와 함께  특별히 조선 왕실이 보호했던 것이다. 종묘 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이중과제였던 셈이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했다.

“유교 법도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선왕들께서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소.  그대는 선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오?”  하고 물었을 때 , “아니오 선왕들이  진정 잘못하셨소!”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왕실 사찰’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절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그저 타도해야 마땅할 사회 악으로 비춰졌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했고 마침내 연산군 때에 이르러 왕과 신하들의 합작 탄압으로 회암사가 철폐되는 수난을 겪게 됐다.  이때 일어난 화재로 전각의 절반 이상이 훼실 되었다. 그나마 있던 전각들은 중종조에 또 한번 훼철을 당하게 된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명종조 문정왕후가 보우스님을 앞세워 회암사를 중창 재건 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사연은 이미 살펴 본바 있다.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에게 지원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며 중창에 앞장섰던 승려 보우는 언급한 대로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 죽었다.

간신히 중창 해 옛 모습을 거의 찾았던 회암사는 훼철의 난관 앞에 서게 됐던 것이다.  말한대로  16세기 후반 임진란에 불탔다고 하는데 실은 그 이전에 문정왕후 시후에 크게 훼손 됐고 연이어 방화 까지  일어 났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른바 치마불교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16세기에 들어서는 흔적만 남을 정도로 폭망해 있었음은 임진왜란 무렵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화포 제작의 책임기관인 군기시가 선조 28년(1595) 6월 왕에게 올린 기사다.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중략) 불타버린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그을리기는 했지만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다른 절의 큰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회암사가  1595년 이전에 완전히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란기에 으레 있을 법한 화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폐찰된 그 시기가 유난히 되지도 않게 유교를 숭상했던 선조조 이고 보면 임란 전에  극렬 유생들이 회암사에 방화를 하는 등 조직적으로 파괴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왜군 이었다면 힘들게 소 불상들의 목을 잘랐을리 없다.  그 편린이 지금 세 사람 앞에 놓여 있었다.  그 녹색 편린위에 한 광경이 그려졌다.

늦가을, 이제 막 떠오른 천보산의 달빛이 흐린 저녁이었다. 회암사 방장전, 바람에 낙엽이 구르는 소리만 들릴 뿐, 산은 깊었고 말은 적었다.   무학은 보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 두칸 방장전 중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누가 찾아 올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식경쯤 지났을 때 누군가 휘척휘척 방정전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였다. 흰 눈썹 밑 두 눈은 이미 많은 것을 지나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계속)

<맨 위 사진,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 부도비와 부도탑,  아래 사진, 최근 발굴된 회암사 정전의 청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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