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신앙이란 무엇인가, 동사강목
20년에 걸쳐 쉬었다가는 다시 쓰고 또 쉬었다가는 다시 쓴 동사강목은 지난 가을에야 그 대강이 끝나 새 임금의 열화같은 독촉으로 왕실에 제출 했다.
본문만 18권인 방대한 역사서 동사강목을 순암이 혼자 집필하는 것은 무리였다. 순암의 체력이 이를 견뎌 내지 못했다. 순암은 집필을 시작한지 2년만인 영조 33년 (1757년)에 수권(首卷)의 동사범례(東史凡例)와 부권의 지리고(地理考)가 완성된 상태에서 병을 얻어 집필을 중지하는 등 여러차례 쓰다 말다를 반복해야 했다. 다시 몸을 추스려 집필에 나서 8권인 고려 중기인 인종(仁宗) 시대 까지 집필한 시점인 영종(영조) 35년에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자 자신이 집필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 것을 대비해 동생과 아들, 그리고 정산 이병휴, 녹암 권철신, 그리고 조동섬 등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강목을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이에 따라 나머지 11권 분량의 초고 부분의 완성은 영종 35년 에서 37년 연간에 동료 문인과 제자들에 의해 빠르게 진행 됐었다. 때문에 동사강목은 당시 남인 학자들의 공동작이라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고 남인 유자들의 당시의 경세유표 역사관을 크게 반영하고 있었다.
다행히 순암의 병세는 호전 됐지만 스승 이익의 성호사설을 간추린 성호사설 유편 (1762년)을 완성하는 등의 저술 작업과 세손(世孫, 훗날의 정조)의 교육을 맡게 되어 시강원 서연에 참석하는 등의 관직 생활을 하느라 미처 완성된 초고를 보완할 시간이 없었다. 순암은 1772년에 차출되다 시피 세자 익위사의 관원으로 입시했다.
1774년 무렵에 소문이 자자했던 동사강목의 열람을 거듭 요청하는 세손의 부탁을 받고는 순암은 초고를 꺼내 마무리 작업을 시작해 현 임금 2년 (1778년) 책의 찬술서문(序文)을 지음으로서 책이 완성된다. 초고가 완성된지 18년, 그의 나이 6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후 현임금 5년(1781년)인 지난해 가을 임금의 교서에 따라 대궐로 바쳐졌다.
동섬은 스승의 명에 따라 마지막 윤문, 오탈자 작업을 도맡았어야 했기에 이즈음 더 우리 역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동사강목은 고려 공양왕 까지만 서술하고 있었다. 이땅의 강목체 사서에서 중요한 논란거리는 삼국 시대의 정통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왕실의 공식 역사서라 할 수 있는 동국통감과 이를 보완한 통감제강은 신라를 정통으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는 부기(附記)하였으나 동사강목은 삼국을 무통(無統)으로 보아 신라, 고구려, 백제를 동등하게 저술했다.
“스승님은 찬탈을 아주 경멸했다네, 년전 쓰신 찬술에 이렇게 말씀 하지 않으셨던가. ‘무릇 역사가의 대법(大法)은 정통을 밝히고, 찬탈을 엄하게 하고, 충절을 기리고, 시비를 바로잡고,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하는 것이다. 여러 역사책이 이에 관해 실로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어 하나로 정리했다.’ 이러셨지 않은가”
순암선생은 어떤지 몰라도 사실 동섬은 지금의 왕조 이씨조선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 또한 들어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직암과 둘이 있을때는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이 정녕 잘못된 것이었다고 했고 이 태조의 그후 행각은 찬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들이대고 있었다. 이씨 조선이 강목에 들어 있지 않은것이 다행이었다고 직암은 생각했다.
“그때 중국 중원을 다 쳐들어가지고 한게 아니 었어요.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요동 일부 지방을 차지해 놓고 유리하게 협상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말이죠.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를 공부 하다 보면 아무래도 강역에 많은 관심이 생기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디고 강역과 관련해 무조건 넓은 땅을 차지했던 역사가 바르고 바람직한 역사라고는 하지 않았다, 동섬은 우리역사에서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 한것은 고구려 호태왕(광개토왕) 시절이지만 가정 안정적으로 넓은 영토를 지배 했던 바로 뒤 장수왕 시대가 우리 역사의 가장 화려 했던 시대의 하나라고 했다.
“따져 볼 수록 장수왕 대단한 인물입니다. 98세 까지 살았고 80년을 집권한 그의 치적은 아주 많아요, 특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 한 것은 심모원려가 있었다고 봅니다. 중국의 한문화 라는것이 엄청난 흡인력과 용해력을 지니는데 이를 간파하고 반도로 들어왔다고 보여집니다. 삼한에 집중하면서 질서를 세우면서도 신라와 백제를 정복 하지는 않았죠, 그리고 100세 가까이 장수한 임금이 결혼을 한번 밖에 안 했다는 것 아닙니까. 후궁이 있었다는 얘기가 없어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강성해 졌지요. 그리고 그는 ‘사해 동포론’을 주창했어요, 고구려인은 천손이지만 기타 신라 백제 그리고 여진 거란 하고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지론이었지요. ”
천손과 사해 동포라 의미심장한 얘기였다.
“자네들 우리 백성 천손의 특징, 특질을 뭐라고 생각 하는가? 다시 말하면 하늘이 우리 백성과 치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
”글쎄 뭘까요?”
“물론 쉽게 규정하기에는 어렵고 반론이 여기저기서 나올 수 있겠지만 스승님과 나는 인내와 겸양이라고 결론 지웠다네, 고난을 견뎌내는 참을성과 자신을 너무 내세우지 않고 남을 생각 하는 배려심이 담긴 겸양 말일세”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 단군신화에서도 우리 백성의 어머니는 인내, 참을성의 상징인 곰(웅녀)으로 나오지요. 상문이도 말했듯이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 어둠 속에서 버텨야 하는 삼칠일’이라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랑이의 강력한 힘과 위엄이 아니라, 곰의 인내와 참을성이었고 그것이 우리를 있게 했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우리 백성은 옛부터 남을 생각하고 양보하고 배려 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았어요, 잠깐 말했듯이 삼국시대 전에 마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중국의 사서에 보면 이나라 사람들은 서로 배려하는 양보심이 강해 길을 가다가도 서로 마주치면 서로 양보하는 바람에 통 길을 갈 수가 없었다고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어요. 이 나라는 천신을 숭상 헸는데 단군신화의 천신입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축제를 열어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며칠씩 먹고 마시며 춤추고 놀았다고 하지. 풍년을 기원하고 풍년을 감사하는 그런 잔치 였겠지.”
강강술래와 칭칭나네 같은 노래 춤의 근원 이란다. 동섬의 마한 강의는 계속 됐다.
“소도라고 들어들 봤는가? 솟대라는 긴 장대가 있는 천신의 사당인데 이곳에는 어떤 흉악한 자가 숨어 들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해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는 얘기지, 신관인 천군이 나서 치자인 신지(臣智) ‘읍차(邑借) 등과 절충을 했겠지. 대단하지 않은가. “
“그런데 이 나라는 그러다보니 군사력에 힘을 쏟지 않아 북쪽에서 철기 무기를 들고 내려온 소수의 고구려 세력에 의해 흡수 돼 백제로 바뀌게 됩니다. 하늘이 범에게 수리의 날개까지 주지 않았다는 얘기지요, 아무튼 장수왕 시대도 그렇고 마한도 그렇고 왕과 치자들이 솔선해서 겸양과 인내를 선보이면 백성도 따라하게 되고 나라가 강성해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 고구려가 삼국 통일, 삼한 일통의 주역이 못된 것이 못내 아쉽지요.”
누군가 한마디 던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늘의 안배에는 오차나 실수가 없어요. 결과론적인 얘기라고 치부 할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는 망할만 해서 망한 겁니다. 전황하고 독재하는 포악한 군주, 포악한 위정자가 통치하는 나라는 망하게 돼 있어요. 고구려가 망한 것은 연개소문 때문입니다. 칼을 다섯자루나 차고 다니면서 왕도 제 맘대로 죽이고 갈아치우고 당나라의 침입에 선방했다는 공로는 있지만 그 무렵 고구려는 안으로는 곪아 있었지요. 반면에 신라는 합의제가 잘 운영 되고 있었습니다. 문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인내와 겸양을 아는 사람들 이었습다. 인내와 겸양을 가르친 화랑이란 단체도 그렇고, 그들이야 말로 천손의 노릇을 톡톡히 한 인물들입니다.”
고려와 이조때의 수차레 국난에도 나라가 건사 된 것은 하늘의 도움심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가 잠깐 나왔다.
해가 뉘엇뉘엇 져가고 있었다.
동섬은 그쯤에서 자신 역사강의를 끝내야 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내 결론은 지금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지만 하늘이 내리신 겸양과 인내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미래와 이 백성의 앞날에는 빛이 있다는 얘기 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까?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산지 투성이로 평야가 없는 이 땅에서 적지 않은 백성들이 수백 수천의 외침에도 굴하지 않고 그래도 나라를 꾸리고 건사 하면서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 왔어요. 하늘이 이런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하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한…”
하늘의 가르침이라… 직암은 주섬주섬 돌아갈 차비를 하면서도 대뜸 천주학의 천주의 가르침을 떠올려야 했다. 동섬이 강조하는 인내와 겸양이야 말로 그 가르침이 아닌가. 동섬은 이 땅 백성의 인내와 겸양 그리고 정성의 한 상징으로 고려시대 국난 때 만들었던 팔만 대장경을 예를 들었었다. 한 사람이 파내려면 천년이 걸릴 팔만여개의 경판의 글자가 하나도 다른게 없고 오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때는 불교 경판 이었기에 이 정도 밖에 나라가 건사 되지 않았지만 천주의 가르침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녹음이 우거진 남한강 실개천 변 둑길을 어망을 들고, 솟단지 지게를 지고 휘적 휘적 집으로 돌아가는 다섯 선재들의 뒷 모습에 석양이 비추이고 있는 그 모습은 십여년 뒤의 참혹한 운명과는 너무도 다른 평온 하고 멋진 한폭의 그림이었다. (계속)
* 위사진 , 순암 안정복의 순암집. 순암집은 안정복(安鼎福 1712(숙종38) ~ 1791(정조15))의 문집이다. 천주교의 전래와 천주교 사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포함해 토지, 국방, 향촌의 사회상 등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어, 그의 사상뿐 아니라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