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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8)

 안동일 작

흥남,  크리스 마스의 기적

때때로 바람은 강풍으로 바뀌었고 눈까지 부슬 부슬 내렸다. 흥남에 있는 무선 및 유선통신 부대가 화재로 마비되고 장비의 대부분이 못쓰게 돼서 해안의 부대들 사이 배들 사이의 통신은 더욱 힘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들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 한 대의 지프가 선착장을 빠르게 달려 내려왔다. 한 젊은 육군 대위가 뛰어내려서 브릿지로 달려 올라왔다. 그는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말했다.
“범죄 수사대에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승선했을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무장 경호대와 함께 승선해서 부산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아서 17명의 한국군 헌병과 같이 왔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한국군 헌병들이 함께 승선해서 내리지 않고 항해 내내 동승했던 것으로 여겨 진다.
흥남 철수 때 한미 군당국이 크게 신경 쓰고 민간인 승선 결정이 늦어진 것이 바로 이 때문 이었다. 그런데 다른 배 에서는 이를 둘러싼 소동이 있어 친 공산세력으로 낙인찍힌 꽤 많은 사람들이 승선을 못하거나 일부는 승선을 했더라도 사람들의 추궁과 배척에 바다로 뛰어든 일 까지도 있었다지만 빅토리호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빅토리호가 거의 마지막 배이기도 했고 워낙 많은 사람을 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념의 대결 동족상잔의 비극은 기적의 빅토리아의 호에서는 그 결이 한결 달랐던 것이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12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면서 날씨는 흐렸지만 다행스럽게 정작 바다로 나가자 바다는 고요했다. 그때 피난민의 승선이 계속되는 동안 메러디스 빅토리 호 옆에는 역시 화물선인 노큐바 호가 옆에 정박해 난민들을 실었는데 기록에는 그 배에는 3천여명이 승선 한 것으로 나와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쌍동이 배인 레인 빅토리호도 이때 원산에서 피난민 7천명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는 항해 중이었다.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승선을 돕기 위해서 투광 조명이 사용됐는데, 훗날 선원들은 그 투광조명이 위험한 상황을 더욱 위험스럽게 만들게 하는 것 이었다고 회고했다. 적의 포화 공격에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승선을 준비하는 동안 모든 불을 켰습니다. 우리는 불빛 아래서 일렬로 정렬된 고정 표적이었지만 적의 포탄은 전혀 가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먼 곳에서 아군도 간간히 함포 사격을 했는데 그 아군의 중화기들 중 하나가 실수로 피란민들에게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죠.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어요. 서커스에서 광대가 하는 농담처럼 12명의 거인이 한 대의 소형차에 올라탄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날 라루선장은 승선 전 작업에는 빨간 고무가 붙어있는 면장갑을 끼고 작업에 참여 했었지만 승선이 계속 되는 동안 잠깐 씩의 순시 이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장실에 있었단다.
러니의 증언이다.
“게속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캡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배가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기도를 올리곤 했지요. 하지만 선장님은 남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선장님의 기도를 따라하는 선원들이 많았지요.”
러니는 감리교회에 적을 둔 개신교 신자였다. 사실 선원들만큼 종교적인 사람들도 많지 않다. 대자연 바다에 운명을 맡기기에 종교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라루 선장은 가끔씩 선원들과 담소를 나눌 때면 가톨릭 성인들의 일화며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어서 흥미 있게 듣곤 했지요. 프란시스코 성인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죠.”
그때 피난민 승선 작전을 개시하기 직전에도 라루선장과 천주교를 믿는 선원들은 앗시시 프란시스코 성인의 나병환자 일화를 떠올리며 선장실에 모여 평화의 기도문을 외웠다. 라루 선장의 감화로 천주교 신자가 됐다는 벌리 스미스의 증언이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선장님이 부른 것도 아닌데 출발 직전에 예닐곱명이 자연스레 선장실에 모였습니다. 모두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때 캡틴은 ‘자네들 프란시스코 성인의 얘기 기억하지? 하시더니 그 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모두 뭉클한 감정으로 기도를 따라 했지요.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 부터 우리 배에는 예수님과 성인님들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선원들 모두 한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뭉클한 심정을 가슴에 안고 있었습니다. ”

메러디스 빅토리는 그 몇주전 현해탄에서 큰 풍랑을 만나 갑판위에 메어 두어던 중장비가 바다로 떨어지는 등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했었는데 그때도 러니 선장과 선원들은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벌리는 선장이 누누히 들려 준 나병환자를 껴안고 잤던 프랑치스코 성인을 생각했더니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난민들이 남기고 간 어마어마한 양의 화물칸 오물을 치우는 일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실은 이 오물을 치우고 냄새를 빼느라 메러디스는 눈총을 받아가며 이후 몇달을 LA 항구에 정박 해 있어야 했었단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빅토리아호의 크리스마스 기적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작전을 얘기 할 때면 등장하는 초코렛 캐러맬 캔디 ‘투시 롤’이다.
장진호 전투 중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미 해병대는 후방 보급부대에게 ‘투시 롤’이 떨어져가니 빠른 시일내에 잔뜩 보내라는 긴급 무전을 날렸다.
보급부대는 요청대로 막대한 양의 투시 롤 캐러멜을 구한 뒤 요청대로 항공투하 해 줬다.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보급품 상자를 보고 기뻐하던 해병대원들은 무지막지한 양의 투시 롤 캐러멜들을 보고 경악해야 했다. 왜냐하면 해병대에서 ‘투시 롤’은 생긴게 비슷해서 박격포탄을 뜻하는 은어였고, 박격포탄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통신 도청을 우려해 은어로 보낸 것이었는데, 육군 부대였던 보급부대는 이 은어를 몰라 해병대가 진짜 투시 롤 캐러멜을 원하는 줄 알고, 말 그대로 투시 롤만 잔뜩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애물단지 취급받던 투시 롤은 결과적으로 미 해병대를 구하는 새옹지마가 되었다. 그 이유는 장진호 전투 당시 그곳은 낮에도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5도까지도 내려가는 얼음지옥 이었기 때문. 해병대원들은 별도의 조리가 불필요한 식량, 건조한 형태의 전투식량만 먹을 수 있는 상황 이었는데, 투시롤 같은 부드러운 캐러멜은 얼어도 입 안에 넣으면 입 속의 체온에 의해 천천히 녹여가며 쉽게 먹을 수 있었고 당분이 많아서 혹한 속에서 열량 보충이 절실한 해병들에게 매우 유용한 식품이었다.
게다가 총격으로, 얼어서 금이 가고 파손된 무기가 있다면 투시롤을 입안에서 녹여 땜빵용 접착제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병사들은 투시롤을 적당한 양 입안에 넣고 녹인 뒤 그것을 뱉어 망가진 부품들에 붙이거나 펴 발랐는데 붙여 놓은 투시 롤이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어지간한 접착제 못지 않은 결합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결국 박격포탄 대신 잘못 받은 투시롤이 비상식량 및 무기 수리용품으로 톡톡히 대 활약하여 해병대에겐 전화위복이 된 셈. 그후로는 보급 필수품으로 등장해 오죽하면 해병대 퇴각하는 경로에는 레이션 깡통 대신 투시롤 포장지만 수북히 쌓여 있어 중공군들을 울상 짓게 했다고 한다 . 장진호 참전용사의 인터뷰에는 투시롤 덕분에 목숨을 건져서 고마웠다는 말이 빠지지 않으며, 지금도 미 해병대의 모임에는 투시롤이 반드시 올라온다.
이 투시 롤이 빅토리아 호에 몇 자루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군수품을 하역 할 때 우연히 발견 한 것이었다. 이 투시롤은 양이 많아 크리스 마스 이브였던 24일 저녁 모든 승선자에게 하나 씩 배분됐다. 선원들이 화물칸마다 에 적당량을 던져주면 안에서 누구도 빼놓지 않고 한 두개씩 나눠 먹었던 것이다. 그때의 피난민들은 그 고마움과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회상한다.
흥남 철수선 피난민의 아들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버지니아 장진호 해병 기념비 앞에서 당신 부모님이 직접겪은 이 일화를 밝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해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던졌던 얘기는 유명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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