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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66회

 

안동일 작

 

17. 노익장의 지두우 전투

지두우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때는 북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10월이었다. 477년, 거련왕(장수왕) 63년의 일이었다.
길도 험난했지만 7순에 달한 노장군 대창하의 마음이 더 심난하고 어두웠다. 동족을 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흑수 말갈의 베일레(왕)가텐 노티몰은 바로 라운의 아들이었다. 지난 시기 라운에 대한 창하의 백방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라운의 집념이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아진 대창하는 고구려와 말갈 예족 맥족 그리고 숙신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인편을 통해 누누히 전했건만 라운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적대 관계라고 할 수 없었다. 라운은 사라무후에 말갈족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는 했지만 고구려 영역을 침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8년전 라운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 베일레로 등극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노티몰은 자신의 칭호를 암반다에서 베일레로 격상시키면서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 조정이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노티몰이 지난 봄부터 고구려 영역인 목단강 인근 10개 부락을 공격하여 자신의 복속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공격에는 북위도 일정부분 참여를 했고 놀랍게도 백제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정은 대규모 정벌을 결정했다.
그 총사로는 대창하가 임명되었다. 말갈을 치기 위해 말갈을 동원한다는 병부의 논의였다. 난처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내심 나서기 싫다는 마음이 불쑥 일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지위나 영향력, 나이로 보아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병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최소한의 피해로 이번 정벌에서 승리를 거두고 싶어했다.
대창하가 앞서는 것이 그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병부의 설득에 결국 손을 든 대창하는 차라리 결자해지라는 차원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병이라는 각오로 직접 왕에게 고하고 원정길에 나섰다. 침울한 행군이 계속 되었다. 정벌군의 절반 이상이 여진족으로 구성된 숙신군단이었기 때문이다.

장병들 역시 이번 정벌이 동족과 전쟁을 벌이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숙신 군단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군단 1세대라 불리울 수 있는 국내성 출신 병사들이 대부분 나이가 들어 병적에서 빠져 양민이 되었고 그들의 자제들이 들어와 병력을 충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2세대를 평양성 세대라 불렀는데 그들은 놀랄만큼 고구려화 되어 있었고 대부분 여진말을 잘 할 줄 몰랐다.

내부적으로는 고구려 여인과의 혼인도 적잖이 장려되었기에 이른바 자미(혼혈)도 많았다. 행군은 침울했지만 신속하게 계속됐다.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강이 보였다. 목단강이었다. 고구려군은 목단 평야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평양성을 출발한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하루 백리의 고된 강행군을 지속한 결과였다.
“장군, 저 강 너머가 흑수 지역입니다.” 젊은 부장 한사람이 구릉 위에서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아진의 옆에 서서 말했다.
“알고 있네. 내 고향도 저쪽 사르무후 아닌가?”
“장군께서도 고향이란 말을 쓰십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가시가 돋쳐 있는 질의였다.
대창하는 그냥 쓴웃음만 지었을 뿐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저쪽 평지에서 숙영을 하면서 준비를 한 뒤, 내일 새벽에 강을 건넌다. 장병들에게 이르도록.” 아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예, 알았습니다. 장군.” 부장도 씩씩한 대답을 하고 구릉 아래로 내려갔다.

강 넘어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평야라지만 대부분 늪지와 갈대밭으로 돼 있는 초원이었다. 농지로 쓰기에는 적당한 토양이 못됐다. 저 멀리 유목 부락인 듯한 천막촌이 아스라이 보일 뿐 별다른 조짐은 없었다. 분명 흑수군도 고구려의 출병을 알았을 텐데 아무런 대응이 없다는 것은 뭔가 미심쩍었다. 흑수의 본영은 백리쯤이 북쪽으로 들어가 사라산을 뒤로하는 영단이란 곳에 차려져 있었다. 듣기에는 제법 그럴싸한 성곽이 세워져 있었고 도읍이랄 것은 없지만 큰 부락이 형성돼 있다고 했다.

고구려 병영은 분주하기는 했지만 짜임새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저녁을 준비하는 취사병들의 손길은 재빨랐고 도강 준비를 위해 모래주머니를 만드는 공병들의 작업 속도도 그에 못지 않았다.
병장기를 손질하는 갑군(보병)들은 충천한 사기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숙달된 솜씨로 듬직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 고구려 전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강물은 살을 에일만큼 찼지만 깊지는 않았다. 준비된 흙자루를 강물에 던져 쌓은 뒤 널빤지를 올려놓아 부교를 설치하는 데는 차 한잔 먹을 시간이면 충분했고 그 부교를 건너 전군이 도강을 끝냈을 때까지도 동이 터오지 않았다. 문제는 강을 건넜지만 군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뻘과 늪지대로 계속된 툰드라 초원이었기에 그랬다.

척후병이 위쪽에서 사람 두명이 겨우 지날 만한 좁은 잔도를 찾아냈지만 말과 마차가 지나기 위해서는 그 옆쪽으로 부교로 사용했던 널빤지를 이용해서 길을 넓혀야 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이 또한 신속하게 작업이 진행됐다. 공병과 보병들이 한마장 쯤의 길을 널빤지로 만들어 놓으면 그 위로 기마군과 공성차며 포차, 마차가 지나고 그들이 지난 뒷쪽의 널판을 다시 신속하게 앞으로 가져가 길을 만드는 그런 작업이 반복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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