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6>
안동일 작
1778년 12월 25일 성탄절은 필라델피아를 위시한 그 일원 가톨릭 신자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초유의 제대로 된 ‘진정한 성탄’이었다. 교회가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공개 성탄 미사를 올렸다.
찰스 캐럴 등 유력 신자들과 각고의 노력으로 가톨릭에 대한 탄압과 오해가 많이 불식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소수 종파였고 게다가 성탄절은 당시 주류인 개신교도들 에게는 미신적인 날에 불과 했다. 하지만 영국군을 몰아내고 대륙회의가 필라로 환도한 뒤 맞이한 첫 성탄, 가톨릭 교회는 여봐란 듯 성대한 미사를 올렸다.
1년 전인 1777년 성탄절만 해도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성당 종소리조차 군정에 억눌려 있었다. 하지만 그해 프랑스와의 동맹 성사 덕분에, 과거 영국령 식민지 시절 천대받던 가톨릭 미사가 이제는 ‘동맹국의 숭고한 국교’ 대우를 받으며 당당하게 수도의 도심 한복판 성 마리아 성당 에서 장엄하게 거행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륙 회의 의사당과 가까운 4번가에 위치한 성 마리아 성당은 프랑스,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 출신 외교관들 이며 대륙회의 인사,가톨릭계 지도자들이 모이던 사실상의 임시 주교좌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제대 앞에는 겨울 솔가지(전나무) 장식 위에 흰 양초가 환하게 켜져 있었고 회중석 앞 자리에는 한껏 잘 차려 입은 프랑스 공사 콘라드 제라르(Conrad Alexandre Gérard), 길버트 라파예트, 찰스 캐럴 등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렸고 십자고상 창과 향통을 든 복사들을 앞 세운 사제들이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는 백색 과 금색(Gold)제의를 입고 입장해 제대로 향했다. 미사의 주례를 맡은 주임신부 몰리뉴와 마리아 성당의 실짛적인 정신적 지주 포너 신부, 그리고 메릴랜드와 필라델피아 일원 명성 사제 존 캐럴 신부가 그들 이었다.
“알렐루야, 일렐루야 ”
In nómine Patris, et Fílii, † et Spíritus Sancti.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킬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주례 사제 몰리뉴 신부는 선포 기도를 통해 동지(冬至)의 가장 긴 밤을 지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빛’ 이 비추기 시작하는 자연의 섭리를 인용하며, 죄와 전란의 절망 속에서도 그리스도라는 ‘새벽 빛’이 떠올랐음을 선언했다.
사제가 제대에서 복음 선포를 마치자, 2층 성가대석 뒤편에 서 있던 복사소년이 길게 드리워진 줄을 당겨 높은 아치 격자창의 빗장을 풀고 활짝 밀어 젖혔다.
맑고 서늘한 외기가 성당 안의 훈훈한 밀랍 향과 부드럽게 섞여 들며, 투명한 겨울 햇살이 긴 광선이 되어 제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로 그 순간, 장엄한 화음이 열린 창을 뚫고 거리로 퍼져 나갔다.
눈부신 정오의 겨울 햇살이 비스듬한 빛기둥이 되어 성당 안의 밀랍 향과 유향 연기를 갈라놓는 바로 그 순간, 터넨버그 오르간의 건반이 육중하게 내려앉으며 온 성당의 목재 들보를 진동시켰다. 터져 나온 선율은 바로크의 거장 헨델의 《메시아》, 그 장엄한 〈할렐루야〉의 서주였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가톨릭의 성역에서 그 익숙하고 거룩한 환희의 화음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열린 창틀을 박차고 나간 오르간의 묵직한 베이스와 화려한 트럼펫 파이프 음향이 청명한 정오의 대기를 가르며 붉은 벽돌길 위로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마침 12월의 낮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이 온화한 날씨였다. 기적처럼 청명하게 갠 하늘에서 쏟아지는 겨울 볕이 필라델피아의 붉은 벽돌길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발걸음을 재촉하던 장로교 상인도, 모자를 깊게 눌러쓴 퀘이커 교도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성당의 높은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칼바람 대신 따스하게 쏟아지는 겨울 볕 아래, 교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도심 전체를 거룩한 진동으로 감싸 안는 ‘소리의 복음’이자 승리의 선언이었다.
세인트 메리 성당의 높은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더 이상 숨죽여 올리던 이방인의 전례가 아니었다. 맑은 정오의 공기를 가르며 도심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당당하고 찬란한 ‘소리의 복음’이었다.
성당 안은 촛불과 제단 위의 푸른 나뭇잎, 그리고 강생(降生)의 신비를 찬미하는 라틴어 성가로 벅차올랐으나, 성당 문밖의 세상은 여전히 완고했다. 보스턴과 뉴잉글랜드에서 온 청교도 의원들에게 12월 25일의 축제란 성경에 없는 로마 교황청의 미신이자 세속의 방탕에 불과했다. 그들은 성탄 당일에도 장부를 넘기거나 평일과 다름없이 펜을 굴리며 이 거룩한 신비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당시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해는 지역과 종파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렸다. 뉴잉글랜드 청교도 지역에서는 “성탄절은 불법이자 이교도의 악습”으로 간주 됐다. 매사추세츠 등 뉴잉글랜드의 청교도(Calvinist)들은 성경에 크리스마스 날짜가 나오지 않고, 로마의 동지 축제(사투르날리아)와 교황청의 관습이 섞인 것이라 여겨 크리스마스를 철저히 배척했다.
보스턴에서는 17세기 후반 성탄절을 쇠는 자에게 5실링의 벌금을 물렸고, 18세기 후반에도 성탄 당일에 학교 수업을 하고 가게 문을 열며 평일처럼 일하는 것이 ‘경건한 신앙’의 상징이었다.
이에 반해 가톨릭과 성공회(영국 국교회) 전통이 강한 메릴랜드나 다문화적인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성탄절을 축일로 쇠기는 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풍경은 수확기 끝 무렵 어른들이 모여 폭음하고, 거친 춤을 추며, 공중에 총포를 쏘아 올리고, 하층민들이 부잣집 문을 두드리며 술과 돈을 요구(Wassailing)하던 거칠고 소란스러운 길거리 카니발에 가까웠다.
가족끼리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주고받는 개념은 없었다. 대신 집주인이 하인이나 소작농에게, 혹은 부유한 귀족이 동네 가난한 이들에게 몇 닢의 동전이나 사탕, 남은 음식을 일종의 ‘시혜(Tip/Charity)’ 차원으로 건네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찬 역시 특별한 성탄 전용 코스 요리가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겨울철 잘 차려먹는 사냥 고기(사슴, 거위, 양고기)와 파이, 자두 푸딩(Plum Pudding), 따뜻한 펀치나 멀드 와인(데운 포도주)을 나누는 수준이었다.
성서에 성탄의 구체적인 날짜가 명시 돼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초기 가톨릭 교회의 주된 축일은 부활절과 주현절(1월 6일)이었다. 12월 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문헌상 공식 확인되는 시점은 4세기 로마 제국이다. 354년 로마에서 편찬된 필로칼루스 연감(Chronography of 354)에 “12월 25일: 그리스도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라는 기록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인 336년 로마 교회에서 이미 12월 25일을 기념하고 있었음을 나타냄다.
당시 로마에서는 동지 무렵인 12월 25일에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탄생 축제가 성행했다. 교회의 교부들은 이교 제전을 단순히 없애는 대신, “말라키 예언서(4:2)가 예언한 참된 정의의 태양이자 세상의 빛(요한 8:12)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라는 신학적 재해석을 덧입혀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성화(聖化)시켰던 것이다.
이 성화(聖化)는 천 오백년 가까운 세월을 관통해 새 생명의 땅 식민지로 체화 되면서 지난 1775년의 팽팽한 전운, 76년 수도가 텅 빈 채 트렌턴의 얼음 강 너머로 들려오던 포성, 그리고 77년 영국 점령군의 군화 아래 신음하던 성탄을 지나… 마침내 1778년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평화와 긍지의 날로 확립되고 있었다
제대에서 라틴어 전례를 마친 사제가 설교대(Pulpit)로 올라갔다. 미사 통상문과 성서 낭독은 라틴어 불가타(Vulgate)로 바쳐졌으나, 사제는 강론(설교) 직전 제대에서 돌아서 회중을 향해 영어(두에-랭스 성경, Douay-Rheims Bible)로 복음 본문을 번역해 읽어준 뒤 영어로 강론을 이어갔다. “태초에 말씀이 계셔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라는 요한 복음 1장이 이날 강론과 성서 봉독의 본문이었다.
신부는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임하신 왕 ,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냄새나는 마구간 구유(Manger)에 오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강조했다. 전쟁과 궁핍, 그리고 신교도 다수 사회에서 멸시와 억압을 받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하느님은 화려한 권력자가 아니라, 고통받고 버림받은 이들의 초라한 영혼 속에 먼저 찾아오신다”는 위로를 전했다.
이날 주례 사제 몰리뉴 신부는 영어 강론을 마친 뒤에 불어로 다시 강론을 요약했다.
몰리뉴 신부의 입에서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하고 고전적인 파리 귀족풍의 프랑스어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고관들과 장군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의 평화와 미·불 동맹의 거룩한 연대를 전하는 사제의 불어 강론은 무한한 자부심과 연대감을 심어 주면서 가슴에 십자성호를 긋게 했다.
제단 앞 귀빈석에는 초대 프랑스 전권공사 제라르를 중심으로, 밸리포지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설계해 낸 대륙군 공병총감 듀포르타유 장군과 청년 장군 라파예트가 프랑스 왕실의 화려한 정복을 갖춰 입고 정좌해 있었다.
콘라드 알렉상드르 제라르(Conrad Alexandre Gérard, 1729~1790)는 초대 주미 프랑스 전권공사, 신생 미합중국이 맞이한 역사상 최초의 외국 주재 대사였다.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정통 외교관으로, 베르사유 궁정의 외무대신 베르젠 백작의 오른팔이었다. 1778년 2월 파리에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조미 동맹조약’에 직접 서명한 당사자였다.
1778년 7월 함대를 타고 필라델피아에 입성해 대륙회의를 상대로 프랑스 왕실의 지원과 외교를 총괄했다. 독실한 가톨릭 귀족으로서, 필라델피아에 머무는 내내 성 마리아 성당의 전용 좌석(Pew)을 배정받아 주일 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했다. 미국의 청교도 정치인들에게 “프랑스 가톨릭 군주국이 결코 야만이 아니며, 가장 세련되고 교양 있는 문명국”임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루이 르베그 드 프레슬 듀포르타유(Louis Lebègue de Presle Duportail, 1743~1802) 장군은 대륙군 공병총감(Chief Engineer)이었다. 밸리포지에서 군대가 얼어 죽지 않고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왕립 공병학교 출신의 천재 공병 장교였던 듀포르타유가 진지와 통나무 막사(Hut)의 배치, 방어 목책을 완벽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이 무척 신뢰한 프랑스 기술 장교로, 훗날 요크타운 포위전에서도 참호 공사를 총지휘해 승리를 견인하게 된다. 귀족 혈통의 정통 가톨릭 신자로서 필라델피아에 머물 때 가톨릭 미사에 빠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듀포르타유는 1777년 6월 초 미국 땅을 밟았다. 라파예트가 국왕의 출국 금지령을 어기고 ‘밀항’한 청년 귀족이었던 반면, 그는 루이 16세와 베르사유 육군성이 벤저민 프랭클린의 간곡한 기술 지원 요청을 받고 공식적으로 선발해 파견한 ‘왕립 공병단 정예 장교 4인방’의 리더였다.
영어와 불어의 강론이 끝나고 마침내 성체성사의 시간이 이르렀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오랜 전례 규율에 따라 평신도에게는 오직 빵의 형상만이 허락되었고, 제대 위에서 빚어진 지성소의 성배는 주례 사제인 몰리뉴 신부와 부제역을 맡은 파머 신부의 몫이었다. 가톨릭 성사에서 일반 신도들에 대한 성배의 허락은 한참후인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이루어 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대리석 제대 난간 앞에 신자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나와 무릎을 꿇었다. 평신도 회장의 직분을 맡은 찰스 캐럴은 하얀 아마포로 짠 영성체포(Houseling Cloth)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난간 곁을 지켰다. 단 한 톨의 거룩한 빵 부스러기도 차가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 드는, 평신도 에게 허락된 가장 영예로운 섬김이었다.
난간 앞으로 다가온 라파예트가 정복을 여미고 무릎을 꿇었다. 성합을 든 파머 노신부의 주름진 손이 청년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스도의 몸”
노사제는 한참을 내려다 보면서 청년신도의 눈을 찾아 맞췄다. 다른 사람들보다 세배 쯤의 시간을 사용했다.
“Corpus Domini nostri Jesu Christi custodiat animam tuam in vitam aeternam.”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대의 영혼을 지키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Amen.”
백발 노사제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와 청년 장군의 젖은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고 형언 할 수 없는 광채이기도 하고 열기 이기도 한 그 무엇이 서렸다. 혀 위에 얹어지는 메마른 밀떡의 감촉 속에서, 라파예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찰스 캐럴이 받쳐 든 성체포 너머로 노사제의 손길을 통해 전해진 것은 단순한 빵이 아니었다. 이역만리 피 흘리는 대륙의 황무지에서 고독하게 타오르던 한 청년의 영혼을 통째로 감싸 안는, 하느님의 거대한 위로와 교감이었다.
그 사이 사이 열린 창 그리 크지 않은 틈을 통해 파이프 오르간의 바로크 성가 음율은 필라델피아 시내를 관통하듯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금 오늘이 얼마 귀한 날인가 되 새길 수 있었다. 지난해 그리고 그 지난해 비해…
1778년 성탄이야말로 필라델피아 가톨릭 공동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온전한 평화와 긍지 속에 맞이한 성탄”이라는 서술은 완벽한 역사적 팩트다.
그전 독립전쟁 국면 몇해동안 성탄 전야는 필라델피아 전체가 공포와 비상계엄, 도망과 결전의 칼바람으로 얼어붙어 천주교도 들과 성공회 신자들은 성탄의 기쁨을 누릴 겨를이 전혀 없었다.
1775년 12월 25일 식민지의 수도 필라델피아는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필라 항구는 영국 군함의 봉쇄 위협에 직면했고, 델라웨어강 하구에는 영국 군함의 진입을 막기 위해 쇠창살을 박은 수중 장애물(Chevaux-de-frise)을 설치하는 등 도시 전체가 요새화되고 있었다. 대륙회의 의원들은 의사당에 모여 군대 창설과 해군 함선 징발, 화약 확보를 두고 밤낮없이 격론을 벌였다.
북쪽 캐나다 침공 작전(몽고메리와 아놀드의 퀘벡 원정)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기였고, 전쟁의 불길이 언제 델라웨어강을 타고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덮칠지 몰라 시민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성 마리아 성당의 종소리 역시 팽팽한 전시 긴장감 속에 짓눌려 있었다.
1776년 성탄절은 필라델피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공포와 패닉의 밤이었다. 뉴욕(롱아일랜드·맨해튼)을 빼앗긴 워싱턴이 뉴저지를 가로질러 델라웨어강 건너편으로 쫓겨왔었다. 영국군 척후대가 필라델피아 턱밑까지 다가오자 대륙회의는 사태를 감당하지 못하고 12월 12일 필라델피아를 버리고 메릴랜드 볼티모어로 피난을 떠났다. 도시의 관공서는 문을 닫았고, 시민 수천 명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상점은 철시하고 약탈의 공포가 시내를 덮쳤다.
도시 전체가 텅 비다시피 했고, 남은 주민들은 언제 영국군이 강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들이닥칠지 몰라 공포에 떨며 문을 걸어 잠갔다. 미사나 예배는커녕 등불조차 제대로 켜지 못한 채 기도를 올리던 ‘암흑의 성탄’이었다.
이듬해 1777년 크리스 마스야 말로 “영국 군정의 압제와 밸리포지의 피눈물”로 점철된 굴욕의 크리스 마스였다. 브랜디와인 전투(9월) 패배 후 영국 윌리엄 하우가 필라델피아를 점령해 군정을 펴던 때였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깃발 아래 가톨릭과 청교도 주민들은 감시와 멸시를 당했고, 도심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밸리포지에서는 워싱턴의 병사들이 맨발로 피눈물을 흘리며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비참했던 지난 3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1778년의 성탄절은 성 마리아 성당 신자들에게 ‘구약의 출애굽’과도 같은 감격이었고 천주교도 아닌 개신교도며 일반인에게도 비할 수 없이 복된 날이었던 것이다.
성탄 미사가 끝나고 향 연기가 잦아든 성 마리아 성당 부속 사제관의 귀빈 식당. 창밖 필라델피아 도심의 찬바람을 막아선 묵직한 커튼 안쪽으로, 식탁에는 장작불에 구워낸 칠면조와 사슴고기, 갓 구운 빵, 그리고 계피와 정향을 넣고 따뜻하게 데워낸 붉은 멀드 와인(Mulled Wine)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상석의 파머 노신부가 나직한 라틴어 식전 기도를 마치자, 잔을 기울이며 모처럼의 온기가 식탁을 채웠다.세명의 신부와 세명의 프랑스인, 그리고 찰스캐럴, 뉴욕 북부 허드슨강 전선의 군대를 지키기 위해 눈 덮인 화이트 플레인스 막사에 머물고 있는 드칼브 남작과 슈토이벤 남작이 빠졌지만 필라델피아에 발을 딛고 있는 미·불 동맹의 핵심 지휘부와 영혼의 조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정찬이 무르익고 뜨겁개 대운 붉은 포도주 향이 번져갈 무렵, 청년 라파예트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지난밤 꿈속에서 본 파리의 아내 아드리안과 세상을 떠난 어린 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정찬의 포도주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잔을 쥔 라파예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마침내 포도주잔을 내려놓고 곁에 앉은 찰스 캐럴을 향해 마른 입술을 열었다.
“캐럴 경… 어젯밤 꿈속에서 아내 아드리안이 나타났습니다. 품에 안긴 어린 딸아이의 얼굴을 보여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더군요. 눈을 뜨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핑게를 만들고는 있지만 이 답답한 전선을 벗어나 파리로 날아가고 싶다는 이기적인 망상이… 하느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래 브랜디와인의 총탄 앞에서도 의연했고 밸리포지의 혹한 속에서도 병사들과 함께 빵을 쪼개던 스물한 살의 청년 장군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늘 죄책감처럼 짓누르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임신한 아내 아드리안을 베르사유에 남겨둔 채 야반도주하듯 밀항했던 기억, 그리고 바다 건너 들려온 큰딸 앙리에트의 때이른 부음(訃音). 교착 상태에 빠진 답답한 전선에서 ‘베르사유로 건너가 국왕을 직접 설득해 정규 육군을 끌고 올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군율을 저버린 탈영병이라는 오명과 국왕의 체포령이라는 굴레 앞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터였다.
“후작, 이기적인 망상만은 아닌듯 싶소.”
라파예트의 눈이 커졌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시점에서 후작이 파리로 가 국면을 타개 하는 방안이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싶소, 물론 어려운 결단 일 것이기는 하지만….”
식탁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프랑스 왕립 공병단을 이끌고 건너와 밸리포지의 참호선을 일구어냈던 냉철한 듀포르타유 장군이 단정한 어조로 먼저 말을 얹었다.
“후작님, 그 귀국은 단순한 가정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신대륙의 전선과 흔들리는 동맹을 위해서라도 후작님께서 직접 베르사유로 건너가시는 편이 여러모로 큰 돌파구가 될 것입니다. 혈기만 앞세운 모험이 아니라, 신대륙의 피와 땀을 직접 목격한 야전 사령관의 증언이 궁정에는 절실합니다. 제가 베르사유 육군성의 중견 실력자들과 군사학교 시절의 동기들에게 후작님의 행보를 전폭적으로 뒷받침할 서한을 미리 적어 올리겠습니다.”
이어 제라르 공사가 잔을 들며 온화한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
“외무대신의 밀서에 따르면, 후작께서 밀항하던 날 내리셨던 국왕 전하의 노기도 이제는 다 풀리셨습니다. 지금 파리는 대륙의 흙먼지를 털고 돌아올 ‘영웅 라파예트’를 맞이할 열망으로 달아오르고 있으니, 어명을 어겼다는 굴레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전우들을 이 전장에 놔두고 젊은 저만 빠져 나가 고향으로 강다는 것은 기사답지 못한 용렬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이 뜻대로 성사 될지도 모르는 판에…”
청년의 떨리는 고백에 식탁의 공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국왕의 노기가 풀렸다는 제라르 공사의 외교적 훈령도, 왕립 사관학교 인맥을 동원해 추천서를 쓰겠다는 듀포르타유 장군의 실무적 확약도 번민하는 청년의 영혼 깊은 곳을 온전히 건져 올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때, 식탁 상석에서 묵묵히 흑색 수단을 여민 채 침묵을 지키던 백발의 독일 노신부 페르디난트 파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속 군주들의 횡포로 예수회가 해산당하는 피눈물을 겪고도, 묵주 하나에 의지해 대륙의 험준한 산악을 누비며 영혼들을 보듬어온 늙은 목자의 깊고 푸른 눈동자가 라파예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노신부는 주머니에서 낡은 영대(Stole)를 꺼내 목에 두른 뒤, 떨구어진 청년의 이마 위에 주름진 오른손을 가만히 얹었다.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제관 식당 안쪽의 공기를 장엄하게 가르는 라틴어 축복 기도에 이어, 노신부의 입에서 독일 억양이 밴 온화하면서도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질베르 형제.”
후작도 장군도 아닌, 하느님의 제단 앞에 선 한 사람의 교우로서 불린 그 이름에 라파예트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더욱이 유럽 대륙의 학부를 거친 노사제의 입에서, 묵직한 라틴어 축복에 이어 흘러나온 말은 지극히 고전적이고 온화한 프랑스어였다.
“Frère Gilbert(질베르 형제)…….”
노사의 불어 축복은 이어졌다.
“바다를 건너온 것은 그대 형제님의 혈기였을지 모르나, 이곳 신대륙의 삭풍 속에서 그대를 지켜 세운 것은 천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지난밤 아내와 아이의 눈물은 그대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그대의 발걸음을 재촉하시는 신령한 부르심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아무래도 질베르 형제를 성모님께서 이번에는 파리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부르심.’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청년 장군의 가슴을 짓누르던 죄책감과 번민의 안개가 일순간에 걷혀 나갔다. 그것은 야망을 품은 망명이 아니라, 상처 입은 가정과 이 고통받는 신대륙의 독립을 위해 성모님의 손길에 이끌려 떠나는 또 한 번의 거룩한 ‘순명(Obedience)’이었다.
라파예트의 눈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식탁 위로 뚝 떨어졌다. 1년 반의 혹독한 전장 생활 동안 라파예트의 영어는 이미 대륙군 병사들을 단숨에 호통치고 워싱턴의 작전 명령을 거침없이 읽어낼 만큼 유창해져 있었다. 그러나 파머 노신부는 투박한 영어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온몸을 팽팽하게 옥죄고 있던 ‘이방인 사령관’의 갑옷이, 귓가를 울리는 고향의 거룩한 모국어 한마디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지난밤 아내와 아이의 눈물은 그대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라파예트는 눈물을 흘리면서 두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찰스 캐럴의 눈빛에 섬광이 스쳤다. 하늘의 뜻이 섰으니, 이제 땅 위의 정략을 완벽하게 매듭지을 차례였다. 캐럴은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워싱턴 사령관의 관저로 말을 달릴 채비는 이미 마음속에서 끝이 나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