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뉴욕 시민참여센터 대표)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은 선거일이었다. 임기를 마치는 줄리아니 시장의 후임을 뽑는 예비선거날이었고, 시의원과 각 카운티 공직자를 뽑는 선거도 함께 열렸다. 그날 한인유권자센터(현 시민참여센터) 전화기에는 투표 방법을 묻는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뉴스 속보가 떴다.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빌딩에 비행기가 부딪혔다는 소식이었다. 몇 분 뒤 두 번째 비행기가 또 다른 빌딩을 들이받았다. 1814년 영국군이 워싱턴을 불태운 뒤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그날의 충격은 세계 질서와 미국 사회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이민자들의 삶의 방식도 뿌리째 흔들렸다.
9·11 전까지 세상은 다른 분위기였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면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로 이 시대를 설명했다. 이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의 표준이 됐고, 남은 것은 나라 간 경제 경쟁뿐이라는 낙관론이었다.
그러나 9·11은 이 흐름을 완전히 뒤집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국가가 아니라 테러 조직이 가장 큰 안보 위협으로 떠올랐고, 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 개입이 정당화됐다. 그 전쟁들에 쏟아부은 국력과 시간은 오늘날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됐고, 그 빈틈을 타고 미중 패권 경쟁을 비롯한 여러 갈등이 새로 생겨났다.
미국 안에서도 변화가 컸다. 테러 직후 만들어진 애국법(패트리어트법)은 영장 없이 통화와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은행 거래를 추적할 수 있게 정부의 권한을 크게 넓혔다. 공항 검색이 까다로워진 것처럼, 일상의 자유를 안보와 맞바꾸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 마음속에는 우리 편, 남의 편을 가르는 경계심이 자리 잡았다. 애국심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무슬림과 중동 출신 이웃을 향한 불신과 차별이 늘어났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 안으로 들어왔고, 대화로 풀어야 할 정치가 상대를 적으로 몰아붙이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지금이다. 25년 전의 안보 불안과 요즘의 정치 갈등이 겹치면서, 미국 사회는 여전히 어수선하다. 이럴 때일수록 미국 내 소수 중의 소수인 우리 한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미국 사회를 잘 살피고, 발 빠르게 움직여야 이 험한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다.
돈을 벌고 자리를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사는 동네와 도시의 정책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그 과정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에 참여하고, 시민참여 활동을 하고, 공직에도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비록 숫자는 적어도 우리의 목소리가 시의회와 주 의회, 연방 의회에 전달될 수 있다.
또한 우리 다음 세대가 정치, 법률, 언론, 행정 분야로 더 많이 진출하도록 커뮤니티가 나서서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그들이 미국 사회의 중심에서 한인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을 때, 우리 커뮤니티도 진짜 힘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다른 민족,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 인권,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키고 목소리를 내는 한인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는 데 우리도 한몫을 할 수 있다.
9·11 이후 25년, 이제 미주 한인사회는 그저 살아남는 이민 생활을 넘어서야 할 때다. 미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당당한 구성원이자, 지역사회를 이끄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거대한 격변의 시대를 이겨내고, 생존을 넘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동찬 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