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벨리포지의 봄 <1>
안동일 작
1778년 1월 말의 깊은 밤, 스쿠킬강(Schuylkill River)의 얼어붙은 수면을 핥고 올라온 칼바람이 밸리포지 총사령부의 덧문을 사납게 두드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강어귀에 세워진 아이작 포츠(Isaac Potts)의 2층짜리 석조 가옥은 낮게 웅크린 채 삭풍을 견뎌내고 있었다. 병사들이 거처하는 수천 채의 통나무 막사에서 피어오른 눅눅한 연기가 눈보라와 뒤섞여 돌벽 틈새로 스며들었다. 1층 좁은 집무실의 벽난로 속 참나무 장작은 반쯤 재로 스러져, 방 안에는 냉기를 간신히 밀어낼 정도의 박약한 온기만 맴돌 뿐이었다.
낡은 군용 책상 한구석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중령이 코트 깃을 바짝 세운 채 굳은 잉크병을 입김으로 녹이며 요크(York)의 대륙의회로 보낼 보급 청원 서한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쓰고 있는 똑같은 내용의 청원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맞은편,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젊은 부관 존 로런스(John Laurens) 역시 핏발 선 눈을 비비며 연대별 동상 환자 명부를 넘기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등 뒤, 방 한가운데 놓인 대형 작전 지도 테이블 앞에 조지 워싱턴 장군이 우뚝 서 있었다. 거인의 어깨 위로 드리운 촛불 그림자가 벽면을 짓누르듯 흔들렸다.
그때, 얼어붙은 마당의 눈을 바스러뜨리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멎더니, 문밖 초병의 챌린지 구령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정지! 암구호를 대라!”
“자유(Liberty)! 대륙의회의 찰스 캐럴이다!”
해밀턴이 번개처럼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가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육중한 참나무 덧문이 덜컹 열리며 들어선 인영을 본 순간, 해밀턴의 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눈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쓴 찰스 캐럴이었다.
눈보라에 얼어붙은 두꺼운 모직 망토를 젖히자, 말안장에서 갓 끌어내린 기름 묻은 가죽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든 그의 단단하고 결기 어린 얼굴이 드러났다.
“해밀턴, 로런스. 총을 거두게. 적이 아니네.”
워싱턴이 낮고 굵직한 음성으로 부관들을 물렸다. 불면과 고뇌로 붉게 충혈된 총사령관의 눈에 놀람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캐럴 의원……! 의회 조사단이 무어 홀(Moore Hall)에 여장을 푼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이라 들었소. 날이 밝으면 참모들의 안내를 받아 공식 영접하려 했는데, 어쩌자고 이 눈보라 속에 홀로 말을 몰아 여기까지 오셨단 말이오?”
찰스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젖은 사슴가죽 장갑을 벗어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양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가죽 가방 두 개를 워싱턴의 작전 지도 테이블 한가운데로 올려놓았다.
쿵—
둔중한 쇳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죽 너머로 묵직하게 울리며 나무 테이블을 흔들었다. 해밀턴과 로런스의 시선이 일제히 가방으로 쏠렸다.
“날이 밝으면, 장군…… 날이 밝으면 나는 의회가 보낸 차가운 감찰관의 가면을 쓰고 장군을 마주해야 합니다.”
찰스가 가방의 단단한 황동 버클을 풀고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전에, 동지로서 장군을 뵈어야 했습니다.”
흔들리는 촛불 빛 아래, 빽빽하게 결속된 스페인 8레알 은화(Spanish Milled Dollars)와 묵직한 금화들이 차가운 백색과 황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방 안에 메마른 쇠비린내가 확 풍겼다.
해밀턴이 숨을 들이켰다.
“이건…… 정화(Specie)가 아닙니까?”
“내 아버지와 필라델피아의 로버트 모리스가 사재를 털어 은밀히 마련한 군자금입니다.”
찰스가 테이블을 짚으며 워싱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의회가 찍어낸 종이돈(대륙지폐)은 이제 체스터와 랭커스터 농부들에게 마구간 깔개만도 못한 휴짓조각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농민들은 굶주린 우리 군대를 외면하고, 은화를 쥐여주는 필라델피아의 하우에게 곡식과 가축을 몰래 팔아넘기고 있다지요. 하지만 이 스페인 은화라면 다를 겁니다. 당장 내일 새벽 웨인(Wayne) 장군의 기병들을 풀어 인근 제분소와 곡물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인은 찰스도 잘 아는 이곳 출신의 맹장 민병대장이었다.
워싱턴은 테이블 위의 은화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차가운 은화 한 닢을 집어 들었다.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거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캐럴 의원…… 지금 내 병사들은 짚더미에 동상 걸린 발을 묻고, 썩어가는 가죽 탄약통을 삶아 마시며 버티고 있소. 핏발 선 눈으로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으면서도, 내가 지나가면 누더기를 걸친 채 총을 받쳐 들고 경례를 올리는 아이들이오. 그런데 저 요크의 의원들은…… 게이츠와 콘웨이의 패거리들은 내가 무능하여 군대를 얼어 죽이고 있다며 나를 끌어내리려 사방에 독을 뿌리고 있소.”
워싱턴이 은화를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장군의 깊게 팬 뺨 위로 촛불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때로는 묻고 싶었소. 과연 이 눈밭에서 피를 토하며 꺼져가는 저 어린 영혼들이, 저들이 난로가에서 펜대로 희롱하는 ‘자유’라는 헛된 명분보다 값어치 없는 것인가를 말이오.”
찰스 캐럴이 거침없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워싱턴의 단단하고 거친 어깨를 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메릴랜드 대지주의 눈동자가 장작불보다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장군. 의회의 소인배들은 새러토가의 요행수에 취해 군대를 모리배의 장부처럼 다루려 하지만, 이 열세 개 식민지를 하나로 묶어 세울 수 있는 영혼의 기둥은 오직 조지 워싱턴, 각하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찰스는 품속에서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서한 한 통을 꺼내 은화 더미 위에 얹었다.
“저들이 아무리 음모의 그물을 짠다 한들, 나와 내 사촌 존 캐럴 신부, 필라델피아의 모리스, 그리고 바다 건너 파리에서 프랭클린 박사와 보마르셰가 엮어낸 섭리의 사슬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면, 프로이센에서 온 백전노장 하나가 이 눈밭으로 당도할 것입니다. 보마르셰와 프랭클린이 보증한 폰 슈토이벤(Von Steuben)이라는 사내입니다. 그가 오면 이 헐벗고 굶주린 민병들을 영국 정규군조차 떨게 만들 강철의 군대로 벼려낼 것입니다.”
워싱턴의 메마른 입술 끝이 잘게 떨렸다.
장군은 찰스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혹한의 밸리포지, 고립무원의 절망 속에서 두 거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처럼 얽혀들었다.
“캐럴…… 귀하는 오늘 밤 은화가 아니라, 꺼져가던 아메리카의 심장을 들고 오셨소. 고맙소.”
문틈으로 스며든 칼바람에 촛불이 길게 누웠으나, 방 안을 가득 채운 열기는 더 이상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독립선언 직후의 흥분과 낙관론은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워싱턴이 윌리엄 하우의 영국 정규군에게 연이어 참패하고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빼앗기며 산산조각 났다. 그 후 1년 반 동안 워싱턴과 대륙군이 겪은 궤적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1776년 겨울,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 벌판을 가로질러 델라웨어강 너머로 쫓겨가던 대륙군은 크리스마스 밤 델라웨어강을 건너 트렌턴의 헤센 용병대를 기습하고 프린스턴에서 연승하며 기사회생했다. 이 두 개의 작은 승리는 꺼져가던 혁명의 불씨와 군대를 살려냈지만, 이는 국지적 승리였을 뿐 군대의 체급 차이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1777년 여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 본진은 함대를 이끌고 체사피크만을 거쳐 혁명의 수도 필라델피아로 진격해 왔다. 워싱턴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브랜디와인 전투(1777년 9월 11일)에서 맞붙었으나 측면을 기습당해 대패했고, 의회는 황급히 랭커스터를 거쳐 서쪽 시골 마을 요크(York)로 도망쳤다. 이어 대륙군은 빼앗긴 수도를 탈환하고자 안개 속에서 저먼타운 전투(10월 4일) 기습을 감행했으나 부대 간 오인 사격과 혼선으로 또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해 12월, 영국군은 필라델피아를 점령해 따뜻하고 호화로운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서북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이곳 밸리포지(Valley Forge)에 쐐기를 박듯 주둔지를 정했다. 험준한 마운트 조이(Mount Joy) 언덕과 스쿠킬강을 낀 2천 에이커 규모의 천혜 요새 지형이었다. 영국군이 펜실베이니아 내륙 곡창지대를 약탈하거나 임시 수도인 요크의 대륙의회를 기습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가로막는 감시탑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급선이 붕괴된 상태에서 허기진 맨몸으로 숲을 베어 통나무집을 짓고 들어가야 하면서부터, 역사상 가장 처절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밸리포지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쓰러져갈 때, 워싱턴을 가장 위태롭게 죈 것은 영국군이 아니라 망명 의회가 있던 요크에서 날아온 정치적 배신이었다.
1777년 10월, 워싱턴이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고 저먼타운에서 깨지는 동안, 북부 뉴욕의 새러토가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의 북부 대륙군이 영국 버고인의 대군을 항복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개전 이래 첫 대규모 회전의 승리였다.
수도를 빼앗기고 요크로 피신해 패배감과 분노에 차 있던 일부 의원들의 눈에는 워싱턴이 “돈만 축내고 패배만 거듭하는 무능한 버지니아 지주”로 보였고, 게이츠는 “혁명을 구원할 진짜 영웅”으로 떠올랐다. 새뮤얼 애덤스, 리처드 헨리 리 등 뉴잉글랜드 급진파들이 그 부상의 선봉에 있었다.
이때 아일랜드계 프랑스 용병 장교 토머스 콘웨이(Thomas Conway)의 편지가 등장한다. 프랑스 육군 출신의 준장 콘웨이는 거만하고 노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규군 출신인 자신을 중용하지 않는 워싱턴에게 앙심을 품고 게이츠에게 비밀 편지를 썼다.
“신께서는 이 나라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지만, 무능한 장군(워싱턴)과 나약한 참모진이 그 뜻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나서셔야 합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게이츠는 기고만장해졌고, 의회의 반(反)워싱턴 의원들과 결탁해 워싱턴을 총사령관직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밸리포지 군영의 중론도 자신이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떠벌렸다.
호레이쇼 게이츠가 당시 대륙군 안에서 영국 정규군 장교로서의 복무 경력이 가장 긴 인물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군에 입대해 7년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 당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되었다. 1755년 유명한 ‘모논가힐라 전투(Monongahela)’에서 흉부에 중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식민지 민병대 장교로서 영국군 패잔병을 수습해 철수를 이끈 영웅이 조지 워싱턴이었다.
그런데 영국군 내에서 게이츠의 주특기는 야전 지휘와 전술이 아니라 보급, 문서 처리, 병적 관리 같은 행정 업무였다. 7년 전쟁 후 영국으로 돌아가 평화 시기 소령(Major) 계급까지 올랐으나,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승진 길이 막히자 제대 후 버지니아로 이주해 농장을 샀다. 1772년의 일이다.
그가 굳이 대서양을 건너 버지니아로 이주하고 애국파(독립파) 편에 섰던 이면에는 고결한 자유의 신념보다 영국 본토 계급사회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원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이츠는 어머니가 리즈 공작부인의 가사도우미(하녀장)였고, 아버지는 세관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당시 영국 육군은 귀족 혈통이 지배하던 곳이었고, 돈으로 계급을 사고파는 매관제(Purchase system)가 성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어가며 굴러도 평민 출신인 게이츠는 소령 계급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철저히 차별받았다.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는, 게이츠가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장 매입을 알아봐 주고 길을 터준 이웃이자 오랜 전우가 바로 조지 워싱턴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게이츠는 사석이나 의회 정객들 앞에서 은근히 워싱턴을 ‘경험 없는 버지니아의 젊은 촌뜨기’ 취급하며 선배 노릇을 하려 드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20여 년 전 7년 전쟁 때 게이츠는 이미 영국 정규군 대위급 장교였고 워싱턴은 식민지 민병대 장교에 불과했다는 자의식 때문이었다.
게이츠에게는 자신을 하인의 자식이라 무시하고 출셋길을 가로막았던 영국 귀족들과 육군 지휘부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독립 진영에 투신한 가장 큰 동기였다. 계급이 닫혀 있던 영국과 달리, 혁명의 불길이 번진 아메리카는 정규군 경력을 가진 장교가 턱없이 부족했다. 게이츠에게 식민지 혁명군은 영국에선 꿈도 못 꾸던 ‘총사령관’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인생 최대의 도박판이었다.
게이츠의 눈에 워싱턴은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식민지 촌뜨기 지주’에 불과했다. 그런데 식민지 사람들은 정작 영국 정규군 소령 출신인 자신보다 정규군 계급장 하나 없는 워싱턴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워싱턴이 대륙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아 전권을 휘두르자, 게이츠의 마음속에서는 열등감과 시기심, 그리고 “내가 저 자리의 진짜 주인이어야 한다”는 비뚤어진 보상심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났고 콘웨이가 이를 부채질했던 것이다.
1777년 11월 말, 의회는 군정을 통할하는 전쟁위원회 의장에 게이츠를 앉히고, 워싱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웨이를 소장으로 특진시켜 군 감찰관(Inspector General)으로 임명했다. 감찰관은 총사령관 워싱턴의 지휘를 받지 않고 의회에 직보고하는 자리였다. 워싱턴의 목에 감시자의 칼을 들이댄 격이었다.
심지어 게이츠와 콘웨이는 워싱턴의 오른팔이던 라파예트 후작을 떼어놓기 위해 그에게 워싱턴을 배제한 독자적인 ‘캐나다 침공 작전’ 지휘권을 제안하는 등 노골적인 분열 공작을 폈다. 하지만 라파예트는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워싱턴 곁에 남았다.
게이츠의 부관인 제임스 윌킨슨이 술에 취해 대륙군 스털링 장군의 부관에게 콘웨이의 편지 내용을 떠벌렸고, 이 말이 스털링을 거쳐 워싱턴의 귀에 들어갔다.
워싱턴은 격노해 길게 따지지 않고, 콘웨이에게 단 한 문장의 차가운 메모를 보냈다.
“장군이 게이츠 장군에게 ‘무능한 장군과 나약한 참모진’ 운운하며 보낸 편지의 내용을 내가 입수하였음을 알리오.”
음모가 드러나자 비겁했던 게이츠와 콘웨이는 편지를 도둑맞았느니 조작되었느니 변명하기 바빴고, 이전투구의 추태가 의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이 시점(1778년 1월 말), 의회는 워싱턴을 대놓고 해임하지는 못하고 군대의 실태를 직접 조사하고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위원회(Committee of Conference)’ 조사단을 꾸려 밸리포지로 파견한 것이다. 그 조사단의 핵심 인물이 바로 찰스 캐럴이었다. 찰스는 요크에서 게이츠와 콘웨이, 그리고 의회 정객들이 워싱턴을 코너로 몰아넣는 그 추악한 권력 투쟁을 생생하게 지켜보며 깊이 탄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가 눈보라를 뚫고 워싱턴의 스톤 하우스로 찾아와 건넨 말에는 수많은 함의가 담겨 있었다.
“요크의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펜대나 굴리며 장군을 사지로 모는 작자들을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콘웨이와 게이츠의 천박한 혓바닥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어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로서는 천주님께 간절히 올린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분노의 토로가 아니었다. 수도 필라델피아 함락, 밸리포지 고립, 게이츠·콘웨이의 쿠데타 음모, 대륙지폐 폭락이라는 절체절명의 파국을 온몸으로 막아서려는 현실 정치가이자 재력가이며 신앙인이었던 찰스 캐럴의 출사표였다.
캐럴과 워싱턴 두 사람은 스톤 하우스 2층 워싱턴 침실 앞에 있는 작은 전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잠깐 더 나눴다. 워싱턴이 더운 차라도 한잔 마셔 몸을 녹이고 숙소로 돌아가라고 권하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직속 참모들이라 해도 두 사람만이 나누어야 할 은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콘웨이나 게이츠의 천박한 야심은 견딜 수 있소. 하지만…… 74년 그 여름, 시티 터반에서 함께 잔을 들었던 존 애덤스마저 요크의 의사당에서 나를 카이사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소. 내가 이 눈밭에서 동상 걸린 발을 자르는 아이들을 두고 카이사르의 관을 탐낸단 말이오?”
워싱턴은 애덤스의 변신을 가장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세인트 메리 성당(St. Mary’s Church)의 미사에 함께 참례하고, 시티 터반의 정찬에서 잔을 부딪치며 독립과 자유를 결의하면서 자신에게 대륙군을 맡으라고 등을 떠밀었던 그 존 애덤스가 어쩌다 등 뒤에서 날 선 비판을 쏟아내는 인물이 되었는지 워싱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덤스는 언젠가부터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린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처럼, “승리한 군사령관이 독재자가 되어 공화정을 집어삼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식을 줄 모르자 애덤스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내 아비게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골적으로 이렇게 적었다.
“의회조차 한 사내(워싱턴)를 신격화하고 있소. 나는 워싱턴 장군에 대한 이 천박하고 맹목적인 숭배가 역겹소. 공화국은 특정 영웅 한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는 안 되오.”
애덤스는 워싱턴의 ‘파비우스식 지연 전술(지키며 버티는 후퇴전)’을 무능과 나태, 귀족적 우유부단함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대놓고 음모를 꾸민 콘웨이나 게이츠처럼 비열한 술수를 쓰진 않았지만, 의회 안에서 워싱턴을 깎아내리고 게이츠를 띄우며 콘웨이 파벌에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의 우산을 씌워준 인물이었다.
찰스 캐럴에게도 애덤스의 변심은 뼈아팠다. 메릴랜드의 가톨릭 신자로서 차별받던 자신을 인정해주고 세인트 메리 성당 미사까지 함께 가주었던 그 강직하고 뜨겁던 독립의 기관차 애덤스가, 옹졸한 원칙주의와 정치적 편견에 갇혀 워싱턴의 목을 조르는 칼날이 되어버린 현실.
“애덤스는 책상 위에서 이상적인 로마 공화국을 꿈꾸지만, 현실의 공화국은 관념이 아니라 피와 빵으로 지켜지는 법입니다. 천연두 고름을 살 속에 밀어 넣고 잿더미 빵을 씹으며 장군 곁을 지키는 저 3천 명의 환자들과 맨발의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공화국의 시민입니다. 애덤스의 옹졸한 원칙주의가 이들을 다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군대를 살려내야 합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워싱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에 묵직한 물기가 어렸다.
“아직 의회 내 다수는 장군을 신임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랬다. 찰스 캐럴, 로버트 모리스(밥 모리스), 존 제이 외에도 의회(요크)에서 워싱턴의 목숨줄을 지켜낸 결정적 거물들이 있었다.
당시 대륙회의 의장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헨리 로런스(Henry Laurens)가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존 행콕의 뒤를 이어 의장을 맡고 있던 그는 워싱턴의 핵심 부관인 존 로런스의 친부였다. 아들을 통해 워싱턴의 인품과 덕망을 익히 전해 들은 그는 익명으로 날아온 워싱턴 비방 편지(음모 문서)를 의회에 정식 상정하지 않고 은밀히 워싱턴에게 먼저 보내 대비하게 한 인물로, 의장직의 막강한 권한으로 게이츠 파벌의 의제 상정을 차단한 일등 공신이었다.
매사추세츠의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도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와 같은 매사추세츠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워싱턴을 비난하던 고향 동료들과 달리 냉정하게 군대의 보급 실태를 파악하고 워싱턴의 지휘권을 적극 방어하는 데 나선 인물이었다.
뉴욕의 거버너 모리스(Gouverneur Morris)도 빼놓을 수 없다. 훗날 헌법을 기초하는 천재 정객으로, 찰스 캐럴과 함께 이번 밸리포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직접 파견되어 현장에서 워싱턴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인물이다.
다음 날 아침, 무어 홀에서 말을 타고 총사령부로 오는 짧은 길목에서 찰스와 조사위원들은 보초를 서던 어린 병사가 누더기 모포 한 장을 뒤집어쓴 채 맨발로 짚단 위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다. 막사 굴뚝마다 번지는 냄새는 땔감 타는 냄새가 아니라 오물과 고름, 썩어가는 상처의 악취였다.

1778년 1월 말의 밸리포지는 ‘가난한 군대’ 수준이 아니라,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집단 수용소였다. 천연두(Smallpox)가 부대를 휩쓸어 1만 2천여 명 중 무려 3천~4천 명이 전투 불능 상태였다. 신발이 없어 병사들의 발이 얼어 터졌고, 하얀 눈길 위에는 병사들이 남긴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얼어붙어 있었다. “눈 위에 남겨진 그들의 핏자국을 보라”던 워싱턴의 비통한 기록 그대로였다.
보급선이 끊겨 고기는커녕 소금조차 없었다. 병사들이 먹은 것은 밀가루에 스쿠킬강 흙탕물을 개어 모닥불 재 위에 그대로 구워낸 잿빛의 딱딱한 반죽 덩어리, 이른바 ‘파이어케이크’뿐이었다. 옷이 낡아 문드러져 사타구니와 어깨가 훤히 드러난 병사들은 담요조차 없어 대여섯 명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짚더미에 발을 묻고 밤새 웅크렸고, 아침이 되면 그중 한두 명은 얼어붙은 시체로 실려 나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펜실베이니아 내륙 창고나 다른 주에는 의복과 식량이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차를 끄는 마부들에게 휴짓조각이 된 대륙지폐를 주니 아무도 운송을 맡지 않았고, 토머스 미플린 전 병참감 같은 무책임한 자들이 손을 놓아버린 탓에 “물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무능과 태만 때문에 곡창지대 20마일 밖에서 군대가 굶어 죽어가는” 기막힌 행정 마비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영 내부에서도 워싱턴을 둘러싸고 충성과 시기 질투가 갈렸다.
친(親)워싱턴 결사 옹호파로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소장이 첫자리에 있었다. 워싱턴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로, 며칠 뒤 찰스 캐럴의 강력한 천거로 병참감(Quartermaster General)을 맡아 보급로를 뚫어내는 주역이 된다.
헨리 녹스(Henry Knox) 준장은 보스턴 시절부터 충직함을 증명한 거구의 포병 사령관으로, 군영 내 장교들의 동요를 묵묵히 억누르고 있었다. 앤서니 웨인(Anthony Wayne) 준장은 ‘미치광이 앤서니(Mad Anthony)’라 불릴 정도로 다혈질이었다.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지리를 꿰뚫고 있어, 찰스의 은화를 쥐고 2월 중순 뉴저지 남부까지 기병대를 몰고 가 소 떼 수백 마리를 구매 반 징발 반으로 끌고 올 행동대장이었다.
‘스털링 경(Lord Stirling)’으로 불린 윌리엄 알렉산더 소장은 콘웨이가 게이츠에게 보낸 비밀 편지의 밀담을 술자리에서 처음 포착해 워싱턴에게 알림으로써 음모를 최초로 파헤친 결정적 장군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과 드칼브(De Kalb) 남작은 외국인 의용 장군들이었으나 게이츠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하고 워싱턴 곁을 지킨 충신들이었다.
반면 밸리포지 내 반(反)워싱턴 게이츠 추종 파벌로는 토머스 콘웨이 준장이 꼽혔다. 음모의 진원지로, 요크로 가 의원들을 꾀어 감찰관 자리를 따낸 뒤 밸리포지로 들어오려 했으나, 부하 장교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콘웨이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고 보이콧하자 군영에 제대로 발도 못 붙이고 겉돌다 다시 요크로 도망쳐 있었다.
전임 병참감 토머스 미플린(Thomas Mifflin) 소장은 펜실베이니아 정객 출신 장성으로, 보급 실패의 원흉이면서도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게이츠와 결탁해 워싱턴을 모함했다. 또 존 설리번(John Sullivan) 소장은 노골적인 반역자는 아니었으나 평소 불평불만이 많아 워싱턴의 작전에 사사건건 토를 달며 북부 파벌에 귀를 기울이던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찰스 캐럴과 함께 온 의회 조사단 중 ‘반(反)워싱턴 성향’의 인물로는 너새니얼 포섬(Nathaniel Folsom, 뉴햄프셔)과 프랜시스 다나(Francis Dana, 매사추세츠)가 중심에 서 있었다. 포섬은 북부 뉴잉글랜드 급진파 의원으로, 요크를 떠날 때만 해도 워싱턴의 지휘 실패를 문책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눈을 번뜩이던 인물이었다. 다나는 존 애덤스의 최측근이자 엄격한 매사추세츠 법률가 출신으로, 군대가 민간 정부(의회)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며 워싱턴을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벼르던 이였다.
워싱턴은 스톤 하우스 앞에 나와 조사단을 맞았다. 물론 모두 구면이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일행은 스톤 하우스의 비좁은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밸리포지 캠프의 여단장급 이상 장성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조사단은 이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빙자한 일종의 ‘워싱턴 성토대회’를 열려는 심산이었다.
워싱턴이 “의회의 엄정한 조사를 위해 총사령관인 나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도리겠지요”라며 묵직하게 목례를 건네고 문을 닫고 나갔다.
스톤 하우스 좁은 회의실에는 장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음에도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너새니얼 포섬이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유도신문을 던졌다.
“제장들, 솔직히 털어놓으시오. 수도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고 이 지옥 같은 눈밭에 군대를 처박아둔 사령관의 전략적 무능에 대해, 야전 지휘관으로서 불만이 많을 줄 아오. 북부 새러토가에서 대승을 거둔 게이츠 장군 같은 진짜 백전노장이 이 군대를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요크에서 높은데…….”
이어 프랜시스 다나가 11월 말 의회가 이미 군정을 통괄하는 전쟁위원회 의장에 게이츠를 임명했다고 거들며 그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미 급한 앤서니 웨인 준장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게이츠라고요? 그 타이콘데로가에서 연필대나 굴리며 벌벌 떨던 ‘할머니 게이츠’를 우리 사령관 자리에 앉히겠다고요? 새러토가의 승리는 아널드의 한쪽 다리와 버지니아 총잡이들의 피로 산 것이지, 후방 막사에서 차나 마시던 게이츠의 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잉크 묻은 손가락이 아니라, 눈밭에서 병사들과 함께 짚더미를 베고 자는 조지 워싱턴입니다!”
“옳소!”
“맞는 말이오!”
여기저기서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온건하고 명석한 너새니얼 그린 소장이 쐐기를 박았다.
“위원들께 묻겠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잃은 것이 장군의 탓입니까, 아니면 군화 한 켤레, 탄약 한 통 제때 보내주지 못한 의회의 태만 때문입니까? 만약 워싱턴 장군을 갈아치우겠다면, 내 장군 표식을 당장 이 자리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소!”
“나 역시 마찬가지요!”
거구의 헨리 녹스와 스털링 경마저 싸늘한 침묵 속에 주먹을 쥐고 버티어 서자, 성토장을 만들려던 의원들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극소수였던 반(反)워싱턴 성향의 장성들도 바닥만 내려다볼 뿐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차분히 지켜보던 찰스 캐럴이 서류철을 덮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워싱턴 성토대회를 열려 했던 자리가 순식간에 열렬한 지지와 성원의 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무엇보다 게이츠의 진면목을 겪어본 야전 장군들이 그자는 워싱턴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외치고 있지 않은가. 조사단의 애초 목적은 첫날 첫 회의에서 이미 물거품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료 위원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현장의 목소리는 명백합니다. 병참의 실패를 총사령관의 무능으로 뒤집어씌우려던 요크 일부의 환상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헛소리에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사찰은 끝났으니, 당장 내일부터 이 군대를 어떻게 먹이고 입혀서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지, ‘재건 회의’로 전환합시다.”
“옳습니다! 찰스 캐럴 의원님이야말로 가장 현명하십니다!”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곧 우렁찬 박수 소리가 낡은 석조 건물의 들보를 뒤흔들었다.
이렇게 첫날 첫 회의의 단판으로 밸리포지의 장군들은 워싱턴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을 쏟아내고 게이츠의 허상을 낱낱이 발가벗겨 버렸다. 반(反)워싱턴 조사단의 서슬 퍼런 기세는 단 하루 만에 완전히 꺾여버렸다.
이제 밸리포지는 허망한 정쟁의 늪을 벗어나, 찰스의 은화가 돌고, 무너졌던 군목 제도가 바로 서며 방역의 기틀이 잡히고, 마사 워싱턴 여사의 헌신적인 구호와 슈토이벤 남작의 혹독한 조련으로 이어질 거대한 ‘군대 재건’의 본령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릴 준비를 마쳤다. 혹한의 밸리포지에 비로소 봄의 싹이 트고 있었다.
(위 사진을 본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챘겠지만, 실은 며칠 전 독립군 삼각모자를 쓰고 아내와 함께 밸리포지를 다녀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