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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0)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프랭클린  그리고 전장의  워싱턴

안동일 작

벤자민 노사의 워싱턴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언사가 끝나자, 모처럼 제퍼슨이 응수를 하고 나섰다.

“제가 볼 때 워싱턴 커넬(Colonel)이야말로 도덕적 결점이 없는, 참으로 흠결 없는 ‘하이 퀄리티(High Quality)’의 인물입니다.”

총사령관이 된 지금도 버지니아 시절의 습관대로 ‘커넬(대령)’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왔지만, 평소 그의 품성을 향한 제퍼슨의 존경이 가감 없이 묻어난 표현이었다.

1776년 무렵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관계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아끼던 이상적인 ‘선후배 동지’ 관계였다. 훗날 1790년대 초대 행정부 시절 알렉산더 해밀턴을 둘러싸고 벌어질 노선 갈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워싱턴은 1732년생(당시 44세), 제퍼슨은 1743년생(당시 33세)으로 11살 차이의 버지니아 플랜테이션 향리 선후배였다. 제퍼슨에게 워싱턴은 젊은 시절 버지니아 의회(House of Burgesses)와 사교계에서 보아온, 말수는 적지만 행동력이 뛰어난 듬직한 맏형이었다. 제퍼슨은 사석에서 워싱턴을 두고 “성인(聖人)이자 도덕적 결점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라 부를 정도로 그의 인품과 불굴의 의지를 신격화에 가깝게 존경했다. 반대로 말을 아끼는 무인이었던 워싱턴은 후배 제퍼슨의 유려한 문장력과 사상적 깊이를 ‘버지니아의 보배’라며 깊이 아꼈다.

사실 버지니아가 보스턴(뉴잉글랜드)의 고립된 싸움에 주저 없이 발을 들이밀고 제1차 대륙회의(1774년)를 성사시킨 막후에는, 워싱턴의 묵직한 행동력과 제퍼슨의 치밀한 깃펜이 윌리엄스버그의 선술집 ‘랠리 터번(Raleigh Tavern)’에서 절묘하게 맞물린 결정적 비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1773년 12월 보스턴 차 사건 이후, 분노한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는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켰다. 이에 새뮤얼 아담스는 식민지 전체의 연합을 호소하는 서한을 각지에 보냈다.

버지니아 총독 던모어 경이 이에 동조하려는 버지니아 하원을 강제 해산해 버리자, 의원들은 해산 명령 직후 의사당 건너편 ‘랠리 터번의 아폴로 룸’으로 자리를 옮겨 비밀 회합을 열었다. 1774년 5월 하순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서른한 살의 토머스 제퍼슨과 마흔두 살의 조지 워싱턴, 그리고 패트릭 헨리 등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격론 끝에 보스턴 항구가 봉쇄되는 6월 1일을 ‘버지니아 전체의 금식과 기도의 날’로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문장가였던 제퍼슨이 유려하고 힘 있는 결의안을 작성했고, 워싱턴은 묵묵히 자신의 일기에 “보스턴을 위해 하루 종일 금식하고 교회에 갔다”고 적으며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다. 그날 회합에서 여러 사람이 열변을 토했으나, 침묵을 지키던 거구의 워싱턴이 던진 말은 딱 한마디였다.

“합시다.”

남부 최대 식민지 버지니아가 보스턴의 아픔을 ‘자신들의 고통’으로 공언하며 전 식민지 차원의 총회(대륙회의) 소집에 적극 응하게 되는 단초가 마련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실은 그 이전, 1773년 3월 ‘식민지 간 통신위원회(Committees of Correspondence)’의 제도화에도 두 사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새뮤얼 아담스가 매사추세츠 내부 통신망을 먼저 짰다면, 이를 13개 식민지 전체를 잇는 ‘대륙 상설 통신망’으로 확장한 것은 버지니아였다. 제퍼슨은 처남인 다브니 카(Dabney Carr), 패트릭 헨리, 리처드 헨리 리 등과 함께 랠리 터번에서 밤샘 토론 끝에 결의안을 마련해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워싱턴은 영국의 전횡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제퍼슨의 통신망 구축 안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버지니아 대지주(플랜터)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또한 워싱턴은 고향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조지 메이슨과 함께 영국의 과세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영국 상품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는 ‘페어팩스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워싱턴은 “보스턴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 사재로 1천 명의 군사를 모아 자비로 먹이며 진군시킬 용의가 있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새뮤얼 아담스가 불을 지피고 보스턴이 포위되었을 때, 남부의 보수적인 대지주들은 “우리가 왜 저 과격한 보스턴 장사치들의 싸움에 휘말려야 하는가?”라며 머뭇거렸다. 이때 버지니아 귀족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워싱턴의 단호한 행동력과, 제퍼슨의 빈틈없는 법리적·철학적 문장력이 결합하면서 버지니아 전체가 독립 진영의 든든한 맏형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버지니아가 움직이자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 중부 식민지도 뒤따라 움직였고, 마침내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적인 제1차 대륙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대륙회의 대표단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의 진가는 빛났다. 제퍼슨은 대륙회의 지침서로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 요약적 견해(A Summary View)』를 집필해 “국왕은 지배자가 아니라 인민의 공복일 뿐”이라는 파격적인 논리로 훗날 독립선언서의 뼈대를 세웠고, 워싱턴은 군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해 무력 항전의 굳은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렇지. 당신들 두 사람이야말로 버지니아의 든든한 기둥 아닌가? 새뮤얼이 보스턴에서 불을 질렀을 때 버지니아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매사추세츠는 고립되어 각개격파당했을 것이오. 랠리 터번에서 말없이 술잔을 비우던 워싱턴 장군의 묵직한 결의와 제퍼슨 자네의 날카로운 깃펜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13개 주 대륙회의도, 저 명문으로 가득 찬 독립선언서도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게요.”

프랭클린이 테이블 저편에 놓인 독립선언서와 제퍼슨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에서 고생하고 계신 워싱턴 장군께 저 선언서가 조금이라도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언서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털어놓는 제퍼슨의 목소리에는 버지니아 선후배 간의 묵직한 의리와 함께 뉴욕 전선을 향한 애틋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실제로 그 선언서는 전선의 군인들에게 거대한 힘이 되었다. 7월 9일, 뉴욕 전선에 선언서가 도착하자마자 워싱턴은 전 병사를 집결시켜 이를 소리 높여 낭독하게 했다. 피 흘리는 군인들에게 제퍼슨의 문장은 그 어떤 화약보다 강력한 탄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막연히 들고일어선 저항군이나 반란군이 아니라, 당당한 대의와 탄탄한 논리에 의해 결성된 정통 부대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이 처음 만났을 때 나눈 결의대로, 토머스 자네가 버지니아 샬러츠빌의 쾌적한 서재와 필라델피아 하숙방에서 촛불을 켜고 우아한 문장을 다듬는 동안, 자네의 그 거구 선배는 빼어난 행동력으로 뉴욕 스태튼아일랜드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의 대포를 노려보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네 그려.”

프랭클린의 뼈 있는 농담에 제퍼슨이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장군께서 칼로 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면, 제 깃펜 따위는 당장 영국 놈들의 교수대 올가미가 될 뿐입니다.”

말수 적은 제퍼슨으로서는 모처럼 입 밖으로 낸 유려한 수사였다. 대중 앞에서는 말을 아끼던 무인 워싱턴과 의회에서 웅변 대신 침묵을 지키던 천재 문장가 제퍼슨. 두 사람이 윌리엄스버그의 선술집에서 마주 앉아 포도주잔만 기울이며 긴 침묵 속에서 눈빛으로 뜻을 통하곤 했던 그 깊은 신뢰가 시티 터번의 식탁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리스가 잔에 담긴 진한 마데이라 와인을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워싱턴 장군도 이 마데이라 와인을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끼리만 이렇게 앉아 웃고 마시고 있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시나. 우리 모두가 통 속에 들어가 사는 디오게네스(Diogenes)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해야지.”

프랭클린이 짐짓 타박했으나 모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박사님, 이 와인 한 통 값이면 대륙군 병사 열 명에게 장화를 신길 수 있습니다. 지금 뉴욕에서는 대포가 모자라 나무 둥치에 검은 칠을 해 위장해 놓고 있는 판국인데… 워싱턴 장군은 요즘 절대로 이 와인을 목에 넘기지 못할 겁니다. 장군, 미안합니다…”

모리스는 죄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제퍼슨은 입술을 깨물었고, 찰스 캐럴과 존 캐럴 신부 역시 마데이라 잔을 내려놓은 채 깊은 침묵에 잠겼다.

무거운 고뇌가 방 안을 짓누를 때, 프랭클린이 소스 묻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뉴욕이 무너지면 다음은 여기 필라델피아네. 내가 파리로 가겠네. 프랑스의 금고를 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와인은커녕 영국 국왕의 교수대에 목이 걸릴 걸세. 그러니 우리가 프랑스 왕의 주머니를 열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형편이 어렵다 한들 베르사유 궁정에는 이보다 더 비싼 와인이 넘쳐날 테니…”

 

자연스럽게 화제는 바다 건너 프랑스의 내밀한 정세로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는 겉보기만 화려할 뿐 속은 곪아 터져 있었다. 7년 전쟁의 막대한 부채와 베르사유 궁정의 사치로 인해 국고는 바닥나 있었다. 면세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와 귀족 대신 평민(제3신분)에게 과세가 집중되어 사회적 불만이 팽배했다. 경제 개혁과 긴축을 주장하던 재무총감 튀르고(Turgot)가 귀족들의 반발로 1776년 5월 막 실각한 상태였고, 곧 재정을 맡게 될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증세 대신 대규모 해외 차관으로 국가 재정과 전쟁 지원을 틀어막아야 하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는 7년 전쟁 패배로 북미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긴 수모를 갚고 싶어 했다. 특히 외무장관 베르젠 백작(Vergennes)은 영국의 힘을 꺾기 위해 식민지 반란군을 적극 돕고자 했다. 하지만 1774년 즉위한 젊은 국왕 루이 16세는 왕권신수설을 믿는 전제군주로서 공화주의 반란을 공개 지원하는 것에 극심한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파리에 가 있는 딘의 보고 역시 그러했다. 사일러스 딘을 선발해 보낸 것도 벤자민이었고, 당초 예산이 확보되고 준비가 마쳐지면 벤자민도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산 확보는 언감생심이었고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벤자민은 하루라도 빨리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사실은 급히 간다 한들 프랑스 사정을 돌릴 뾰족한 재간은 딱히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775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식민지 사절 역할을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귀국했고, 귀국 바로 다음 날인 6일 펜실베이니아 의회에 의해 제2차 대륙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5월 10일 개원 때부터 매일 의사당에 출석했다.

1775년 11월 대륙회의는 외국(프랑스, 스페인 등)과의 비밀 접촉 및 정보 수집을 위해 5인으로 구성된 ‘비밀통신위원회’를 신설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사실상 이 위원회의 수장이자 좌장으로 활동했다. 진작부터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일이 관건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이들은 이듬해인 76년 3월 2일 프랭클린, 벤자민 해리슨, 존 디킨슨, 로버트 모리스, 존 제이 등 비밀통신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사일러스 딘을 프랑스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공식 비밀 지침서(Instructions to Silas Deane)를 작성해 서명했다.

프랭클린은 런던 시절 구축해 둔 유럽 지인 및 과학계 인맥을 활용해 딘에게 파리 현지 유력자들에게 건넬 비밀 추천장과 암호 체계를 직접 쥐여주었다. 딘은 버뮤다를 거치는 상선으로 위장해 1776년 3월 말 신대륙을 떠나 7월 초 파리에 도착했다.

딘에게 지침을 주고 파리로 떠나보낸 직후 벤자민 프랭클린은 캐럴 형제 등과 함께 캐나다(몬트리올) 원정 외교 사절단으로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몬트리올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다 6월에 필라델피아로 복귀해 독립선언서 위원회에도 참여했고, 통신위원회 일도 다시 관장했다.

대륙회의의 가장 중요한 최상위 위원회 격인 이 위원회의 창설 당시 5인 멤버(벤자민 프랭클린, 존 제이, 존 디킨슨, 벤자민 해리슨, 토머스 존슨)를 보면, 펜실베이니아의 노련한 외교가(프랭클린), 뉴욕의 차가운 법률 엘리트(제이), 펜실베이니아의 신중파 문필가(디킨스), 버지니아의 대지주 호걸(해리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지역 안배와 계파(급진파와 신중 온건파)를 고루 묶어놓은 대륙회의 최고 수뇌부 조직이었기에, 사일러스 딘을 파견하는 결정에도 무게감과 정통성이 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세한 밥 모리스야말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노련한 손길에 이끌려 들어왔다가, 결국 자신의 거대한 상선단과 금융망, 심지어 사재와 개인 신용까지 신생국의 제단에 송두리째 바치게 된 셈이었다.

법률가(존 제이, 존 디킨슨)와 대지주(벤자민 해리슨)가 모여봐야 대서양 너머로 밀사를 띄우고 총포를 밀수입할 현실적인 물류망이 없었다. 펜실베이니아 정가에서 오랜 친분이 있던 벤자민은 “선언서 문장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진짜 피와 화약은 장사치들이 날라야 하네”라며 필라델피아 최대 부호이자 수완가인 모리스의 팔을 끌어당겼다.

1775년 12월 위원회에 보강된 모리스는 “잠깐 조언이나 해주고 빠지겠다”는 심정으로 발을 들였다가, 대륙회의의 모든 비밀 무기 구매 계약, 환어음 발행, 군함 용선 계약의 총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어어 하다가 다 빨렸다”고 한 모리스의 비극적 헌신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후의 일이지만 대륙회의가 발행한 대륙 화폐가 쓰레기 취급을 받자, 프랑스나 네덜란드 상인들은 “로버트 모리스 개인의 서명이 들어간 어음”이 아니면 화약 한 포대도 내주지 않았다. 모리스가 동업자 토머스 윌링과 함께 일군 ‘윌링 앤 모리스 상사’의 상선들이 무기 밀수선으로 대거 전환되어 다수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

“박사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년 겨울 저를 그 비밀통신위원회인지 뭔지에 앉혀놓으신 것부터가 박사님의 계략이었습니다. 잠깐 장부나 봐달라더니, 이제는 제 배(船)에 화약을 싣고 제 지갑을 털어 군대를 먹이게 생겼지 않습니까? 어쩌다 이 늪에 빠져 제 피 같은 돈과 배를 다 털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프랭클린이 껄껄 웃으며 응수했다.

“어허, 밥!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제단에 돈을 바치는 영광을 주었는데 왜 투덜대나? 자네의 금고와 장부가 없으면 조지 워싱턴의 칼도 녹슨 쇠꼬챙이에 불과하다네. 자네의 그 털린 주머니야말로 이 공화국의 가장 든든한 초석일세!”

“물론 자네가 적극 천거한 사일러스 딘 군도 예일에서 법을 공부한 변호사 출신이지만, 코네티컷에서 대서양 무역을 쥐락펴락하던 일급 장사꾼 아닌가? 계산이 빠르고 물류의 길목을 아는 친구지. 펜대만 굴리는 먹물들 백 명보다, 현장에서 화약 통 가격을 후려칠 줄 아는 자네와 딘 같은 인물이 지금 워싱턴과 파리에는 백배 천배 절실한 법일세.”

그때 존 캐럴 신부는 혼자 속으로 ‘주여 저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올려야 했다. 두 사람의 신바람 난 대화를 들으며, 캐럴 신부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깊은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주님, 저들의 정열과 지혜를 가련히 여기소서. 다만, 저들이 이룬 모든 것이 주님의 손끝에서 나온 것임을 잊고 스스로의 힘이라 믿을까 두렵사옵니다.’

하지만 존 캐럴 신부의 간구는 끝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사일러스 딘과 로버트 모리스는 건국 초기 가장 위험하고 지저분한 ‘돈과 무기’의 실무를 도맡았다가, 훗날 옹졸한 정적들(아서 리, 토머스 페인, 존 아담스까지 이들의 편에 선다)의 모함과 의회의 무책임한 외면 속에서 파멸해 간 ‘미국 독립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양들’이기 때문이다.

사일러스 딘은 불어도 서툴고 외교 경험도 없이 단신으로 파리에 건너가, 보마르셰를 설득해 1777년 사라토가 승리의 주역이 된 프랑스 무기(머스킷 3만 정, 화약, 대포 다수)를 실어 보낸 일등공신이다. 또한 라파예트, 드칼브, 폰 슈토이벤 같은 유럽의 핵심 군사 인재들을 계약해 미국으로 보낸 것도 딘의 혜안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의회는 그가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모함을 믿고 소환해 청문회로 망신을 주었고, 쓴 비용조차 정산해 주지 않아 딘은 영국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사후 수십 년 뒤에야 미 의회가 유족에게 배상하며 명예가 회복된다.

‘독립전쟁의 금융가’ 모리스는 텅 빈 국고 대신 자신의 개인 재산과 신용(Morris Notes)으로 군수 물자를 사 대야 했다. 요크타운 전투의 결정적 전비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전쟁 후 연방 정부는 그에 대한 채무를 나 몰라라 했고, 무너진 재정을 수습하려다 토지 투기 실패와 맞물려 채무자 감옥(Prune Street Jail)에 3년 넘게 갇히는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연방헌법 세 개의 중요한 건국 문서에 모두 서명한 단 두 사람 중 한 명인 독립의 일등공신을 당시 가혹한 세태는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다.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워싱턴이 감옥으로 직접 그를 찾아가 위로했을 정도였다.

영혼을 들여다보는 성직자 존 캐럴 신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은 참으로 아까운 영혼들이었을 것이다.

“똑똑하고 정열적이나… 세상의 가장 큰 덕목인 겸손을 알게 하소서.”

사일러스 딘은 뛰어난 외교관이었지만,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명예욕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오만이 결국 그를 망명과 의문의 죽음으로 몰고 갔다. 로버트 모리스는 나라를 구한 대부호였으나, 전쟁 후 거대한 토지 투기 사업에 뛰어들며 자신의 재력과 수완을 과신하려 했다. “내가 세운 나라인데 이 정도 땅쯤이야” 하는 미세한 오만이 결국 채무자 감옥이라는 바닥으로 그를 끌어내린 셈이다. 어쨌든 훗날의 이야기다.

모리스가 좌중의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며 물었다.

“불과 십여 년 전 7년 전쟁 때 워싱턴 장군이나 우리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붉은 군복 곁에서 프랑스의 푸른 군복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품에 안겨 돈과 총을 달라 해야 하니, 베르사유 귀족들이 우리를 비웃지 않겠습니까?”

프랭클린이 냅킨으로 수염을 닦으며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외교란 어제의 적에게 오늘의 잔을 건네며 ‘우리가 쏜 총알은 영국 놈들의 강요였소’라고 능청을 떠는 가면극일세. 프랑스는 우리를 사랑해서 돕는 게 아니야. 7년 전쟁 때 빼앗긴 자존심과 북미 대륙의 빚을 영국 놈들의 피로 되갚아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게지. 그 복수심에 기름을 붓는 것이 내 일일세.”

찰스 캐럴이 프랑스 유학 시절 익힌 귀족 사회의 생리를 떠올리며 팁을 건넸다.

“박사님, 베르사유 궁정의 늙은 관료들은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루이 16세는 체면을 중시하고요. 궁정의 문을 정면으로 두드리기 전에 파리의 지적 살롱들과 과학 아카데미를 먼저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파리의 귀부인들과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박사님을 ‘신대륙의 현자’로 떠받들기 시작하면, 여론에 취약한 베르사유 궁정은 스스로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프랭클린이 무릎을 쳤다.

“화려한 귀족 가발 대신 소박한 모피 모자를 쓰고, 번개를 병에 담은 신대륙의 촌로 행세를 해야겠구먼. 프랑스 귀족들은 뺀질거리는 외교관보다 미지의 숲에서 온 소박한 철학자에게 더 열광하는 법이니까!”

그의 작전은 맞아떨어진다. 국고가 바닥나 가던 프랑스를 불과 1년 남짓 만에 움직여 1778년 2월 ‘미·불 동맹 조약’을 체결케 한 프랭클린의 외교술은 인류 외교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몇 차례나 말하지만 프랑스의 참전 없이 독립전쟁은 수행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랭클린이 파리로 건너가면 어떤 인물과 어떻게 접촉해야 하는지 주요 인물들이 거론됐다. 사일러스 딘을 통해 보고된 인물들이 모리스를 통해 먼저 나왔고 캐럴 형제의 파리 인맥, 그리고 10여 년 전 두 차례 파리 체류 시 맺었던 벤자민 노사의 파리 인텔리 친구들도 언급됐다.

당연히 보마르셰와 외무장관 베르젠이 1번 주자였다.

“사일러스 딘이 존 신부님의 소개로 극작가 보마르셰와 손을 잡고 ‘로드리그 오르탈레스 상사’라는 무역회사를 통해 무기 구입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얘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사일러스 딘도 그 회사에 참여했는가?”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닌데 함께 일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식민지만을 위해 만든 일종의 유령회사입니다.”

유령이란 말이 존 캐럴 신부에게는 유난히 강하게 들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이 내놓은 비밀 자금 200만 리브르에 보마르셰의 100만 리브르가 더해져 있어 이미 화약과 머스킷 소총이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습니다.”

“우리 신부님이 참 큰일 하셨소.”

딘을 보마르셰와 연결시켜 준 주인공이 존 신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노사가 다시 한번 치하했다. 존 신부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위사진)  파리 시내의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 

“하지만 궁정의 심장부를 뚫을 진짜 황금열쇠는 따로 있습니다. 프랑스 최고 문벌인 노아이유(Noailles) 가문입니다. 그 집안의 열아홉 살배기 귀족 사위가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륙군에 참여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밀항하겠다고 난리라더군요.”

모리스의 말에 프랭클린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

“노아이유 공작의 사위라… 완고한 장인은 사위를 잡아 가두려 하겠지만, 그 귀공자가 이 땅에 발을 딛고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려준다면? 프랑스 대귀족 전체가 우리 대의에 인질로 잡히는 셈 아닌가. 내가 파리에 도착하면 그 집안 살롱부터 먼저 찾아가 무용담을 팔아야겠구먼!”

좌중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 젊은 사위의 이름이 뭐라고 했나?”

“질베르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막대한 영지와 권력을 쥔 노아이유 공작의 사위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최측근 인맥을 거느린 이 열혈 청년의 등장은, 프랭클린의 노회한 살롱 외교와 맞물려 베르사유 궁정을 흔들 거대한 복선이었다. 보마르셰가 뒤에서 프랑스를 흔들었다면 라파예트는 앞에서 몸으로 프랑스를 흔든 열혈 청년이다. 그런데 라파예트를 추동한 사람도 보마르셰였고, 그는 이를 존 캐럴과 찰스 캐럴에게 알려오면서 미국에 도착하면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당부한 이도 보마르셰였다. 모리스는 이 일을 찰스를 통해 듣고 있었다.

이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판에서 벤자민과 식민지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결정적인 프랑스 인물들의 이름이 나왔다.

파시(Passy)의 은인 자크 쇼몽, 지성계의 거목 볼테르, 파리 살롱의 여주인들인 브리용 부인과 엘베시우스 부인, 프랑스 최고의 육군 지휘관 로샹보 백작 등의 이름이 그러했다.

자크 쇼몽(원명: 자크-도나티앵 르 레 드 쇼몽 Jacques-Donatien Le Ray de Chaumont)은 프랭클린의 파리 거처 제공자이자 최대 재정 후원자였다. 파리 근교의 부유한 귀족 거상이었던 쇼몽은 파시의 호화로운 오텔 드 발랑탱(Hôtel de Valentinois) 별관을 프랭클린에게 9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했다. 벤자민은 이곳을 미국 대표부 본부로 삼아 프랑스 정·재계 인사들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뿐만 아니라 쇼몽은 사재를 털어 존 폴 존스의 군함(보놈 리샤르호) 무장과 물자 보급을 주도하다 결국 파산에 이를 정도로 헌신했다. 쇼몽을 벤자민에게 처음 연계한 이가 찰스 캐럴이었다. 참, 대륙회의는 벤자민이 파리에 있을 때 한 푼도 경비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의 공관 경비까지 떠넘겼다.

지성계의 거목 볼테르(Voltaire)는 유럽 여론의 물꼬를 튼 계몽주의의 상징이었다. 동맹 조약 체결 직전이었던 1778년 1월,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여든넷의 볼테르와 일흔둘의 프랭클린이 조우했다. 두 거인이 포옹하고 프랑스식으로 양 볼에 입을 맞추자 객석에서는 “솔론과 소포클레스의 포옹”이라며 환호가 터졌다. 이 상징적 만남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 전체를 미국의 편으로 돌려세운 결정타였다.

파리의 프랭클린은 딱딱한 관청이나 출입이 까다로운 궁정 대신 파리의 살롱을 무대로 삼았다. 브리용 부인과 엘베시우스 부인은 파리 여론과 궁정 막후를 움직인 지적 네트워킹의 중심이었다. 브리용 부인은 촉망받는 귀족 음악가였고, 엘베시우스 부인은 철학자 엘베시우스의 미망인이었다. 재기발랄한 브리용 부인과는 체스를 두며 귀족 사회의 내밀한 기류를 읽었고, 엘베시우스 살롱에서는 반(反)궁정 계몽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결집했다. 프랭클린 특유의 촌철살인 유머와 소탈하고 솔직한 매력이 이 살롱들을 통해 궁정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다. 또 이 살롱에서 만난 퇴역 장성 로샹보 백작은 얼마 뒤 프랑스 원정군 총사령관을 맡아 정규군 6천 명을 이끌고 건너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고 조지 워싱턴의 지휘권 아래 철저히 복종하며 요크타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꼭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인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바로 미국 독립과 양부 조지 워싱턴에게 붉은 피를 바친 청년,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이다. 그는 친미파 프랑스 대귀족의 상징이자 미 대륙 최고의 야전 영웅이다.

프랭클린이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 겨우 열아홉이던 라파예트는 조국의 만류를 뿌리고 사재로 배(라 빅투아르호)를 사서 대서양을 건넜다. 그의 미국행은 베르사유의 젊은 귀족들에게 독립전쟁을 ‘자유를 위한 낭만적 성전’으로 인식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훗날 로샹보 백작의 정규군 파병을 이끌어내는 다리가 되었다. 길버트(미국식 발음) 라파예트와 찰스 캐럴,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 풍성하게 전하기로 한다. 알아야 할 이야기가 참 많다.

프랭클린이 이날 시티 터번 식탁에서 “베르사유의 밀실보다 샹젤리제의 살롱과 아카데미의 벗들을 먼저 포섭하겠소”라고 했던 말은 복선을 깔아둔 것처럼, 하늘에서 보내주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은공인들의 등장과 기막히게 맞물리게 되면서 인류사 최고의 외교 기적으로 이어지게 됐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쯤에서 자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벤자민은 아까부터 문쪽 테이블에 서 있던 주인장 존 크래포트에게 살짝 손을 들면서 눈짓을 보냈다. 계산서를 가져오라는 제스처였다.

“오늘 계산은 모리스 의원님이 벌써 하셨습니다. 의원님 장부에 달아 두었습니다.”

“아니, 오늘은 캐럴 형제와 제퍼슨 군을 위해 내가 마련한 자리인데 자네가 그렇게 나서면 어쩌나?”

“아무려면 제 지갑이 박사님 지갑보다는 두껍지 않겠습니까?”

“다 털렸다면서?”

“오늘 마지막 비상금 상자를 열었습니다. 정말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오늘 계산한 만큼의 돈을 전쟁위원회 장부로 옮겨 놓겠습니다.”

모리스는 엄살을 떨면서도 우리끼리만 호사했다고 미안하게 여기는 좌중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었다.

“그래, 자네 장부에 올린다고? 그럼 마데이라 한 병 더 가져다주게, 주인장!”

정찬의 끝자락, 다섯 명이 일제히 마지막 마데이라 잔을 채워 들었다.

“박사님, 칠십 노구의 몸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일은 박사님 생애 가장 위험하고도 위대한 항해가 될 것입니다.”

제퍼슨의 경건한 헌사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잔을 높이 들며 화답했다.

“토머스 자네는 깃펜으로 자유를 선언했고, 밥 자네는 빈 금고를 채우며 군대를 먹이고 있으며, 우리 캐럴 형제분은 유서 깊은 신앙과 법리로 길을 텄네. 이제 이 늙은 인쇄공이 바다 건너가 늙은 여우들의 주머니를 털어 화약을 실어 올 차례 아닌가. 역사가 우리를 단두대에 세우든, 새 나라의 첫 페이지에 올리든… 오늘 밤 시티 터번의 이 빵과 포도주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자, 대서양 너머의 승리를 위하여!”

“치어스!”

다섯 개의 유리잔이 맑게 부딪히는 소리가 로즈 룸의 천장을 울렸다.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식민지의 암담한 현실을 넘어 대서양을 무대로 펼쳐질 거대한 국제정치의 서막이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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