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뉴스분속> 트럼프 ‘원정출산 차단’ 행정명령
민주당 “소송 제기, 트럼프 패소할 것” “출산 목적 방미 구분 어려워”
여전히 연간 2만∼3만 명의 원정출산 이뤄지는 것으로 추산
“원정출산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이 (연간) 수십만 명이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산 관광은 미국 체계에 대한 사기다.”(스티븐 밀러 미국 백악관 부비서실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엊그제 원정출산을 차단하고 출생시민권을 제한하는 행정명령 2건에 서명했다.
앞서 올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은 부모가 불법 체류자라도 미국 땅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에게 시민권을 주는 ‘출생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을 금한 지난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위헌 판결했다. 이에 거듭 불만을 제기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출생시민권에 대한 대법원의 매우 불행한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관련 제도를) 조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행정명령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란 전쟁 장기화, 고유가 등으로 지지율 하락에 직면한 그는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불법 이민에 부정적인 보수 유권자의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백악관은 이번 행정명령이 대법원의 6월 판결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각종 무효 소송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야당 민주당은 관련 소송에서의 승리를 자신했다.
트럼프-밀러 “원정출산 불가”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 백악관에서 두 행정명령의 서명식을 갖고 “사람들이 원정출산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돈으로 미 시민권을 얻으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출산 관광 종식’ 행정명령은 관광, 학생, 취업 등 비(非)이민 비자를 받아 입국한 사람이 미국에서 출산했을 때 이 아기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것이 골자다. 원정출산을 시도한 외국인은 기존 비자가 취소될 수 있고 사안에 따라 입국 거부, 추방, 영구 입국 금지에 처해질 수도 있다. 미국 안팎에서 해당 산모의 입국과 숙박, 병원 이용 등을 알선한 업체와 개인도 제재 대상이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이 행정명령을 두고 “미국 체계의 가장 중대하고 악랄한 남용 중 하나를 끝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관광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고 거짓말을 한 후 미국에서 출산을 하고 자녀의 시민권을 얻는 행위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사기”라고 주장했다.
원정출산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자료는 없다. 다만 보수 성향 싱크탱크 ‘이민연구센터’는 연간 최대 2만6000명이 원정출산으로 태어난다고 추산했다. 미 국립보건통계센터(NCHS)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는 약 360만 명. 전체 출산의 0.72%에 불과한 원정출산을 규제하기 위해 행정명령까지 동원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부호들이 원정 출산을 이용해 자녀의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불만도 줄곧 제기했다. 올 6월 대법원의 위헌 결정 직후 트루스소셜에 해당 판결이 “중국의 승리”라고 비꼰 적도 있다.
그는 같은 날 ‘미 시민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지속적 보호’ 행정명령에서 △미국 내 외교 공관 직원, 면책 특권이 있는 국제기구 직원 등의 출산 △테러단체 혹은 적성국 소속 인사의 출산 △미국 내 대리모 이용 △미국령 사모아에서의 출산 등에 관해서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괌, 사이판 등에서의 출산은 시민권을 보장받는다.

민주당 “소송 제기, 트럼프 패소할 것”
이민자의 출생시민권을 포괄적으로 금지한 지난해 1월 행정명령과 달리 이날 명령은 시민권 부여 불가 대상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좁혀 특정했다. 다만 대법원이 관련 소송에서 한 차례 위헌 판결을 내린 만큼 이 역시 법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6일 성명에서 “이 행정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생시민권 금지 위헌 판결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이 또 패소할 것이란 의미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언론도 비슷한 반응이다.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취업하거나 공부하다가 출산한 사례와 처음부터 출산을 목적으로 미국에 온 사례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특정 외국인을 적성국이나 테러단체 소속으로 지정하는 것 또한 상당한 논란을 야기할 것으로 내다봤다.
2018년 사이판 신생아 1074명 중 과반인 575명이 중국인 관광객 자녀
2018년 사이판을 포함한 미국령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태어난 신생아 1074명 중 과반인 575명이 중국인 관광객 자녀였다. 미 본토와 달리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보니 중국 임신부들의 ‘원정출산’이 몰린 것이다. 이처럼 최근 미국 언론이 다루는 원정출산 기사의 주인공은 대부분 중국인 산모들이다. 수년 전에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1인당 4만∼8만 달러(약 5700만∼1억1400만 원)를 받고 중국인 산모 8000명에게 원정출산 패키지 상품을 판 조직이 적발되기도 했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4조 조문대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국적이나 체류 자격과 관계없이 ‘시민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남북전쟁 직후부터 150년 넘게 이어져 온 원칙을 대통령의 행정명령 하나로 흔들 순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달 6일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자녀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지 않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다시 서명한 것이다. 외국 정부 공무원 및 적성국 국민의 자녀도 시민권 부여 대상에서 제외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에서도 병역 기피 등을 노린 원정출산이 성행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2002년 기사에서 매년 한국인 신생아 5000명이 원정출산으로 미국에서 태어난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하지만 2005년 이중국적자는 병역을 마쳐야만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도록 우리 법이 바뀌면서 원정출산 열풍도 한풀 꺾였다. 2017년 트럼프 취임 후 까다로워진 입국 심사도 출산을 위한 미국행 의지를 위축시켰다.
미국에선 여전히 연간 2만∼3만 명의 원정출산이 이뤄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12월 중국 부유층이 아이 한 명당 최대 20만 달러(약 2억8000만 원)를 내고 미국인 대리모를 통해 자녀를 미국 시민권자로 만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이번 행정명령에는 대리모 자녀도 시민권 제외 대상으로 분류됐다. 다만 새 행정명령 역시 수정헌법 14조와 충돌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출생시민권 폐지를 향한 트럼프의 고집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안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