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
토마스 케퍼슨은 위더스푼의 일관되고 강력한 독립 논리가 그가 속한 장로교단 보다 식민지 주류 종교 였던 성공회 (영국국교회)에 끼친 영향이 더 컸다고 진단하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던 성공회 사제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대륙회의 원목을 맡은 두세 신부를 위시해 많은 성공회 사제들이 확실한 독립파, 애국파로 돌아 섰습니다. 두세 신부는 며칠전 상공회 기도서에서 영국왕의 이름을 지워 버리겠다고 공식 발표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구의 클레이 신부도 저한테 편지를 보내와 자신도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고 했습니다.”
“그래, 나도 나도 그 얘기 들었는데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어. 그들 로서는…”
벤자민 노인의 응수에 이어 찰스 캐럴이 마데이라 와인을 한모금 마시면서 한마디 던졌다.
“성공회 분들, 특히 사제들은 그동안 왕과 하느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느라 몸을 사리기 바쁘더군요. 영국 왕의 그림자 아래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막상 그 그림자가 걷히려 하니 두려운 게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가톨릭은 편한 셈입니다. 늘 핍박받아 왔기에 눈치 보고 망설일 필요가 없는 거죠. 그래서 죽기 살기로 독립 전선에 뛰어 들기로 했습니다.”
“찰스 몽쉐르 답지 않은 비장한 말씀이구료.”
기억 하겠지만 몽쉐르는 불어로 영주라는 뜻인데 몬트리올에서 생겨난 찰스의 별명이었다. 벤자민 노인은 그를 예우 하는 차원에서 그후 그렇게 부르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짐작 하듯이 미국 독립혁명 당시 성공회 사람들 특히 사제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서품을 받을 때 성공회의 수장인 영국 왕에 대한 충성 맹세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제들은 엄청나게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지만 신자들의 경우에는 달랐다. 제퍼슨이나 워싱턴 등 남부 출신 인사들은 거의 모두 성공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그러면서 이신론에 경도 돼 있었다. 성공회 라는 교회가 신도 단속에 그리 극성적이지 않다는 얘기와 통했다.
위더스푼 박사의 설교 발표 이후 애국파로 확실하게 돌아선 성공회 사제들 가운데는 제퍼슨이 적을로 두고 있는 버지니아의 샬러츠 빌의 찰스 클레이신부를 비롯해 여러 명이다. 형식은 내용을 규제 한다고 독립의 아버지를 배출한 대부분의 성공회 교회는 결국은 사제가 애국파로 돌아 섰다. 많은 성공회 사제들이 영국의 전횡과 무단성에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와 통했다.
독립 전쟁 국면에 곳곳에서 성공회를 주축으로 한 왕당파의 준동이 있었다지만 이는 여타 종교 갈등과는 달랐다. 종교적 도그마 보다 개안의 이해 득실이 더 작용 했다. 그 점 다행한 일이다.
“그럼 그래야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이 얼마나 참혹 했는가?”
“그럼에도 로마 시대 이후 유럽의 큰 전쟁들은 모두 종교 때문에 일어 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볼수도 있겠지만 다 전쟁은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죽어 나가는 것은 애꿎은 청년 들이고..거기에 종교까지 개입되면 참으로 참혹해 지기 마련이지 .”
“아무튼 이땅에 종교 갈등이 심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디행한 일입니다.”
제퍼슨이 찰스 형제를 쳐다보며 조금은 계면쩍다는 듯 말했다.
“요즘 이땅 식민 전역의 청년들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종교엔 관심이 없어요.”
“북쪽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여긴 북쪽 사람들 없구먼”
북쪽은 메사츄세스등 뉴잉글랜드를 말했다.
자연스레 대륙회의 인물에 대한 품평에서 식민 각지의 상황 특히 종교 상황에 대한 얘기로 화제가 넘어 갔다.
1776년 당시 북미 13개 식민지의 종교 지형은 지역적, ·출신 성분별로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다. 대륙회의 대표들의 종교적 성향 역시 이 지리적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당시 대륙회의 전체 대표단은 워낙 들쑥날쑥 하고 교체가 많아 정확한 통계를 내릴 수 없었지만 이날 정찬 며칠 뒤에 있게된 정식 서명에 참여한 서명자 56명의 종교적 분포와 교파별 구도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적확하게 알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6명의 교파적 배경을 분류해보면, 교회의 상류층 전통과 인구 구성비가 반영되어 성공회-회중교회-장로교가 전체의 약 85~90% 이상을 차지한다.
성공회 (Anglican/Episcopalian)가 30명 이상 55%를 차지 하는데 토머스 제퍼슨, 조지 와이즈, 조지 워싱턴, 리처드 헨리 리 등. 남부 대표의 압도적 다수가 이에 속했다. 서명자 가운데 회중교회 (Congregationalist)신도는 12 ~ 13명 정도로 23%.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존 핸콕, 로저셔먼 등. 뉴잉글랜드 출신 전원이다.
장로교 (Presbyterian)도 11~12명이 참여 약 20%를 보인다. 존 위더스푼 목사, 벤자민 러시, 리처드 스톡턴, 제임스 윌슨 등. 중부 식민지 중심으로 출신지가 나뉜다.
그리고 가톨릭 (Catholic) 1명이 바로 찰스 캐럴 이었고 기타 퀘이커, 루터교, 침례교가 각 2 ~ 3명씩 4%를 보였는데 존 하트(침례교), 존 모턴(루터교), 스티븐 홉킨스(퀘이커)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치상으로는 성공회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당시 대륙회의의 정치적 담론을 주도한 것은 ‘회중교회-장로교 연대’였다. 회중교회와 장로교는 모두 칼뱅주의(Calvinism)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패할 수 있으므로, 한 국왕이나 권력자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권력분립 사상과 “불의한 군주에 대한 저항권”은 두 교파의 공통된 신앙 원리였다.
이에 반해 남부 출신 성공회 서명자들 토마스 제퍼슨, 찰스 리 등은 교리와 관계없이 영국의 중앙집권적 통치와 세금 부과에 반발하며 개신교적 저항론과 영국의 공화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 남부의 성공회 엘리트층(정치적 세력),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수량적·사상적 강경파), 그리고 존 위더스푼이 이끄는 중부의 장로교(학문적·신학적 이론 제공자)라는 삼각 축이 대륙회의의 거대한 독립 결의를 이끌어낸 종교적 토대였다
대륙회의에서 각주가 대표를 몇명을 보냈건 또 인구와 크기가 어떻든 각주는 주요 사안에 대해 한표의 표결권을 갖는다는 원칙을 정립한 축이 사무엘 아담스 등의 북구 개신교도 들이었고,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 되지 않는 공화제를 채택 한 것도 북부 개신교 측이었다.
“우리 성공회가 극렬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야. 그렇지 않은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특히 요즘 뉴욕 사람들 보면…”
“뉴욕이라면 우리 필라와 같은 중부로 여겨지는 곳 아닌가? 그래도 각기 특성이 달라.”
좌중의 관심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접어들고 처음 있게 되는 양측의 대회전이 예상되는 뉴욕의 상황에 유독 민감하게 쏠링 수 밖에 없었다. 뉴욕얘기는 잠시후에 자세히 나온다.
권역별 주도 교파는 알고 있는대로 북부로 지칭되는 뉴잉글랜드 (MA, CT, NH)가 회중교회 (Congregationalists)였다. 청교도(Puritans)의 후예들이 세운 그곳의 국교 성격의 교파로, 독립 전쟁 승리를 “신이 배후에 계신 거룩한 과업”으로 설교하며 애국파(Patriots)의 핵심 여론을 형성했다.
중부 식민지 (PA, NY, NJ, DE)는 종교적 다원주의 (Pluralism)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이지역에서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이민자 중심으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퀘이커 (Quakers)교도는 초기 펜실베이니아의 주축이었으나, 평화주의(비폭력) 원칙 때문에 독립전쟁 참여에는 소극적이거나 중립을 지켰다. 또 이지역에는 독일계 이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독일·개혁교회 (Lutherans & Reformed)신자들도 꽤 있었는데 독립전선에 합류 했다.
남부 식민지 (VA, MD, NC, SC, GA)는 성공회 (Anglican / Church of England)가 주류였고 일부 주는 아예 다른 교파를 허용 하지 않았다. 버지니아가 그랬다. 소수 종교로는 가톨릭 (Roman Catholics)이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를 중심으로 약 25,000~30,000명 존재 했다. 그밖에 유대교 (Judaism)가 뉴욕의 뉴포트, 찰스턴, 사바나 등 5~6개 주요 항구 도시에 약 2,000명 규모의 회당(Synagogue)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침례교 (Baptists)는 로드아일랜드 및 남부 서부 개척지(Backcountry)에서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급격히 세를 확장 중이었다.
여기서 그 당시 각주의 인구 분포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어려운 소설 재미없는 소설 ‘순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전체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 서라도 알아야 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1776년 7월 당시 13개 식민지의 총인구는 약 250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이 중 약 50만 명은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였으며, 인구 분포는 각 주의 영토 크기와 농업, 상업등 산업 구조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주별 인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부 버지니아 (VA)가 가장 인구가 많아 747,000명으로 추산 기록돼 있다. 중부 펜실베이니아 (PA) 434,000명.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이민자 유입 최다 지역이었다.
뉴잉글랜드의 맹주 매사추세츠(MA)는 378,000명, 나중에 독힙한 메인(Maine) 지역을 포함하는 숫자다. 당시 메사추세스는 뉴해므셔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뉘어 있었다.
남부로 간주되던 메릴랜드(MD)가 245,000명, 노스캐롤라이나 (NC)가 270,000명이었고 다시 뉴잉글랜드의 커네티컷 (CT)이 200,000명 이다.
중부 뉴욕 (NY)은 190,000명,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SC)가 180,000명, 중부 뉴저지 (NJ)는 138,000명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NH)~80,000명, 로드아일랜드(RI)68,000명, 중부 델라웨어 (DE)가 59,000명 이었고 가장 늦게 개척된 남부 조지아 (GA)가 40,000명 선 이었다.
이 소설에서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식민지의 성립 과정은 꽤 자세히 전했지만 나머지 9개 주의 그것은 전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전할 기회가 없기에 이를 요약해 전하려 한다. 순명 독자들의 상식을 넘어선 지성을 위해.
나머지 9개 주 역시 지역적 특성(중부, 뉴잉글랜드, 남부)에 따라 성립 과정과 종교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뉜다.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등 중부 식민지는 네덜란드·스웨덴의 유산이 남아있어 종교적으로는 다양성이 특색으로 나타난다.
뉴욕 (New York)은 잘 알려진 대로 원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세운 상업 거점 ‘뉴암스테르담(뉴네덜란드)’이었다. 1664년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훗날 제임스 2세)이 무력으로 무혈 점령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바꾸었다. 종교 상황은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중심이었으나, 개방적인 무역 도시 특성상 유대교, 가톨릭, 루터교, 퀘이커 등 수많은 종교가 섞여 있었다. 영국 영주 지배 하에서 성공회가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이 다양성과 종교적 관용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다. 1776년 봄, 조지 워싱턴 장군이 대륙군을 이끌고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남하한 것은 영국의 차기 대규모 공격이 뉴욕을 향할 것임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 입니다. 당시 뉴욕은 미국의 독립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뉴저지 (New Jersey)의 성립은 요크 공작이 뉴욕 영토 중 일부를 자신의 동료인 귀족 버클리와 카터렛에게 분할해 주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동뉴저지와 서뉴저지로 나뉘어 운영되다가 1702년 왕령 식민지로 합쳐졌다. 정착민을 대거 유치하기 위해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핵심 유인책으로 제시했다. 덕분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장로교도, 퀘이커교도 등이 다양하게 이주해 살았다.
델라웨어 (Delaware)는 원래 스웨덴 정착민이 세운 ‘뉴스웨덴’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의 설립자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얻기 위해 사들여 관리하다가 1701년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며 독립된 식민지가 되었다. 종교 상황은 스웨덴 루터교회 정착민으로 시작했으나, 윌리엄 펜의 영향으로 퀘이커교도가 많이 들어왔다. 펜실베이니아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다양성의 공간이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은 매사추세츠의 엄격한 청교도주의에 반발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갈라져 나온 주들이다.
로드아일랜드 (Rhode Island)는 매사추세츠의 엄격한 청교도 독재에 반발하다 쫓겨난 로저 윌리엄스가 1636년 세운 식민지다.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한 미 대륙 최초의 지역이다. 침례교(Baptist)의 요람이자, 침례교·퀘이커·유대교도 등 박해받던 모든 종교인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커네티컷 (Connecticut)은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목사였던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가 더 넓은 농경지와 완화된 정치 참여권을 찾아 이주하여 1636년 세웠다. 기본적으로 매사추세츠와 같은 청교도(회중교회) 중심사회였으나, 교회 교인이 아니더라도 투표권을 주는 등 매사추세츠보다는 다소 전향적이고 민주적인 청교도 사회를 만들었다.
뉴햄프셔 (New New Hampshire)늠 어업과 목재업 중심의 정착지로 출발했으며, 오랫동안 매사추세츠의 관할하에 있다가 1679년 영국 왕실에 의해 독립된 식민지로 분리되었다. 매사추세츠의 영향으로 청교도(회중교회)가 주를 이루었으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주한 이들이 많아 매사추세츠만큼 종교적 규율이 엄격하지는 않았다.
.후발 남부 식민지 들은 버지니아처럼 영국 국교회가 지배적이었으나, 현실적인 대농장 경영을 위해 외국의 인구(주로 흑인) 유입을 허용한 지역들이다.
노스캐롤라이나 (North Carolina)는 버지니아에서 밀려난 가난한 농민이나 영주들의 지배를 피해 온 개척자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171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와 공식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영국 국교회가 지정되었으나, 지형상 오지가 많아 교회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퀘이커, 장로교 등 교파에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신앙을 갖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 (South Carolina)는 영국 귀족 영주들이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해에서 흑인 노예 노동력을 들여와 대규모 쌀·인디고 농장을 지으며 가파르게 성장한 부유한 식민지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영국 국교회(Anglican)가 단단히 자리 잡았으나, 노동력과 인구를 끌어모으기 위해 프랑스 개혁교도(위그노), 유대교도 등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조지아 (Georgia)는 1732년 13개 식민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졌다. 제임스 오글소프가 ‘빚을 지고 감옥에 갈 처지의 영국 서민들’에게 새 삶을 주고, 동시에 스페인 영토(플로리다)의 침략을 막는 방어기지로 기획했다. 영국국교도인 오글소프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꿈꿨기에 가톨릭을 제외한 모라비아 교도, 모세 대성당을 세운 유대교 등 다양한 파벌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런데 특기 할 것은 종교인의 숫자가 생각 보다 많지 않았다. 당시 전체 인구 중 공식 교회에 등록된 정식 교인은 약 17% 수준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국교였던 성공회 측의 통계로 보인다. 대각성 운동 정식으로 적을 두지는 않았지만 사회·정치적 관습과 문화 전반은 특정 종교 교파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사설이 길어 졌는데 다시 정찬 테이블로 돌아온다. 갈길이 멀다. 뉴욕의 워싱턴 장군의 사정에 대한 참석자들의 걱정과 해결책 모색, 프랭클린의 조기 도불이 결정되는 그 과정을 살펴 보려면 그렇다.
“그래도 가장 많은 신도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립전선에 뛰어 들기를 주저하는 우리 성공회가 문제이기는 합니다. 이제는 영국의 국교회가 아니라, 미 대륙의 독립된 독자적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맞는 말일세”
그때 정찬 테이블 로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는 갓 구운 빵이 날라져 왔다.
저마다 손을 뻗어 손으로 떼어낸 뒤 스테이크 마데이라 소스에 찍어 입에 넣고는 다시 한 번 경탄의 소리를 냈다.
“정말 잘 구운 빵입니다.” .
미국 식민지 시기, 특히 1776년 무렵의 빵 문화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드럽고 하얀 빵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빵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어떤 곡물로 만들었는가”였다. 여기에는 명확한 계급과 지역의 차이가 있었다.
미국 땅에서 가장 흔한 곡물은 옥수수였다. 밀농사가 잘 안되던 시기였기에, 일반 서민들과 대륙군 병사들은 대부분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먹었다. 조니 케이크라 불렸다.
조니케이크(Johnnycake)는 옥수수가루에 물과 소금을 섞어 반죽한 뒤, 벽난로 앞의 뜨거운 돌판이나 무쇠 프라이팬(Spider Skillet)에 넙적하게 구워낸 빵이다. 거칠고 퍽퍽하며 단단했다.
이본다 더 떡딱한 빵이 파이어 케이크(Firecake)였다. 훗날 밸리포지 겨울에 워싱턴의 대륙군 병사들이 먹게 될 최악의 빵. 이스트도 없이 옥수수가루나 밀가루를 물에 대충 개어 모닥불의 잿더미 속에 그대로 넣어 구운 빵. 겉은 까맣게 타서 재가 씹히고 속은 설익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덩어리였다.
이날 시티터반 정찬에 올라온 빵은 찰스 캐럴의 저택 등 고급 정찬 상에 올라가는 단연 ‘고운 흰 밀가루(White Flour)로 만든 이스트 발효 빵’이었다. 당시 흰 밀가루는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당시에는 상업용 이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밀가루와 물을 공기 중에 노출시켜 키운 ‘자연 발효종(Sourdough 스타터)’을 쓰거나,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들고 남은 효모 짜내기(Barm)를 받아와 빵을 부풀렸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좋은 밀가루 빵은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풍미가 강했다.
당시의 빵은 방부제가 없어 하루만 지나도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그래서 식민지인들은 빵을 손으로 뜯어 고기 육수, 스프, 혹은 마데이라 와인에 푹 적셔(Sop) 부드럽게 만들어 먹는 것이 일상적인 식사 예절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갓 구워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얗고 두툼한 밀가루 빵(Wheat Loaf)을 바구니 가득 담겨져 있었다. 시큼하고 구수한 천연 효모의 향이 코를 찔렀다.
존 캐럴 신부가 그 희고 깨끗한 빵을 손으로 떼어내며 마음에 걸리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뉴욕의 워싱턴 장군과 아이들은 지금 쯤 불 한 줌에 구운 설익은 옥수수 떡(Johnnycake) 한 조각도 없어서 굶고 있겠지요. 우리가 이 하얀 밀가루 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주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시시때때 주님의 뜻을 묻던 캐럴 형제에게 특히 가톨릭 신부인 존 캐럴에게 밀가루 빵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성체(Holy Host)’를 모실 수 있는 유일한 성스러운 재료라는 종교적 의미도 있었다.
모리스가 그 빵을 마데이라 소스에 푹 적셔 입에 넣으며 응수했다.
“신부님, 이 부드러운 밀가루를 군대에 보급하고 싶어도 대륙회의의 금고가 비어 있습니다. 당장 가을이 오면 병사들은 빵 대신 흙을 씹어야 할 판입니다.”
좌중이 멈칫 했고 모리스가 한마디 더 보탰다.
“오늘도 워싱턴 장군으로 부터 보급을 재촉하는 편지가 당도 했습니다. 뉴욕주가 전혀 보급 문제에 협조 하지 않는다는군요.”
“그레? 그사람들 왜그래, 물론 사정이야 있겠지만…”
벤자민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테이블 의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 졌다. 뉴욕의 오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1776년 7월 말, 이 시기 워싱턴은 뉴욕(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영국 해군의 대규모 상륙을 눈앞에 두고 그야말로 절체 절명의 순간에 직면해 있었다.
1776년 3월, 워싱턴의 대륙군은 스턴 포위전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보스턴에서 철수한 영국군(윌리엄 하우 장군 휘하)이 전열을 정비한 뒤, 상업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인 뉴욕을 최우선으로 공격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워싱턴은 영국의 본진이 도착하기 전인 1776년 4월, 뉴욕에 도착하여 맨해튼과 롱아일랜드 일대에 요새를 짓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뉴욕과 허드슨강(Hudson River) 계곡은 북미 대륙을 남북으로 잇는 핵심 통로였다.만약 영국군이 뉴욕과 허드슨강을 점령하면, 혁명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북부) 식민지와 남부 식민지가 완전히 고립되어 분단될 위험이 있었다. 워싱턴은 이를 막아야만 연합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뉴욕은 대서양 무역의 중심 항구이자 거대한 상업 허브였다.
영국 해군이 뉴욕항을 완벽한 해군 기지 및 보급 기지로 삼게 된다면 대륙군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해야 했다. 뉴욕은 필라델피아와 함께 식민지 내에서 정치·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도시였습니다.특히 뉴욕 내부에는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왕당파(Loyalists) 엘리트 세력이 많이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뉴욕을 포기할 경우 이 지역 민심이 완전히 영국 쪽으로 돌아설 위험이 컸다.
하지만 막상 누욕에 와 보니 상황은 절망적 이었다. 당시 대륙군과 독립파의 현실을 그대로 노정허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 앞바다(스태튼 아일랜드)에는 영국의 하우(Howe) 형제가 이끄는 군함 300여 척과 3만 명이 넘는 정예병(헤센 용병 포함)이 집결해 있었다. 반면 워싱턴의 대륙군은 고작 1만 9천 명 남짓이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훈련도 안 된 지역 민병대였다. 특히 화약과 탄약이 태부족 이었다. 병사 1인당 쥐어줄 수 있는 총알이 20발도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대륙회의에 *”영국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절망적인 편지를 보냈다.
총이 없어서 맨손으로 싸워야 할 판이 되자, 워싱턴은 대륙회의에 “총이 없으니 나무 막대 끝에 철촉을 단 ‘창’이라도 수천 개 만들어서 보내달라”고 공식 요청할 정도였 18세기 말의 전쟁에서 창을 쓰겠다는 처절한 고뇌였다.
이질과 천연두가 군대를 덮치고 있었지만 약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둔군에 대한 1차적 보급을 맡은 뉴욕주는 주둔군에 대한 보급에 난색을 표하면서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다.
워싱턴이 뉴욕 의회에 끊임없이 요청하고 탄원했음에도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에는 정치적·군사적 혼란이 얽혀 있었다. 뉴욕은 당시 까지도 13개 식민지 중 가장 강했던 ‘왕당파(Loyalist/Tory)’ 의 세상이었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 비율이 매우 높았다. 뉴욕 상인과 대지주 상당수가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독립 전쟁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했다.
뉴욕 총독 윌리엄 트라이언(William Tryon)은 영국 군함에 탑승한 채 뉴욕의 왕당파 네트워크를 총지휘하며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6월에는 워싱턴의 경호원을 포섭해 워싱턴 암살을 모의한 ‘히키 음모(Hickey Plot)’가 적발되어 담당 경호원이 목매달려 처형되기도 했다.
농민들과 상인들은 대륙회의가 발행한 가치 없는 종이돈(Continental Currency)을 받기를 거부하고, 영국군이 주는 금화나 파운드화를 원했기 때문에 군대 보급품 수발주 자체가 차단되었다.
더욱이 영국 함대가 뉴욕 항을 봉쇄하고 함포 사격 위협을 가하자, 뉴욕 의회는 맨해튼을 버리고 7월 초 북쪽 화이트플레인스로 전격 이주했다. 행정 조직이 도망치듯 이동하는 과정에서 세금 징수, 물자 수송 네트워크, 보급 창고 관리가 모두 마비되었다.
당시 뉴욕의 입법 기구는 ‘제4대 뉴욕 지방의회(Fourth New York Provincial Congress)’였다. 나다니엘 우드헐 (Nathaniel Woodhull)이 의회의 공식 의장이자 민병대 지휘관 이었다. 그는 워싱턴의 보급 요청에 동정적이었으나 행정력 부재로 애를 먹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한 달 뒤인 8월 롱아일랜드 전투 직후 영국군에 체포되어 칼에 맞아 생긴 상처의 감염으로 사망한다.
7월 2일 필라델피아 대륙회의에서 독립 안건이 투표에 붙여졌을 때, 12개 식민지는 찬성했지만 뉴욕 대표단만 유일하게 ‘기권(Abstain)’을 행사했다. “절차적 법적 권한이 없다”는 명분 (Instruction Problem)이었다. 당시 신중파 온건파가 장악하고 있던 ‘제3대 뉴욕 의회’는 자신들이 주민들로부터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을 결정할 정식 대의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상태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제3대 의회를 해산하고, “독립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을 새 의회(제4대 의회)”를 선출하는 주민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결정 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에 가 있던 뉴욕 대표들(존 알솝, 로버트 리빙스턴 등)은 본국(뉴욕) 의회로부터 “아직 새 의회가 구성되지 않았으니 독립 투표권 행사 지침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기권표를 던졌다.
새로 선출된 제4대 뉴욕 의회가 화이트플레인스에 모인 날이 바로 7월 9일이었다. 다행이 애국파가 장악한 새 의회는 개회 첫날 즉시 대륙회의의 독립선언서를 안건으로 올려 만장일치로 승인(비준)했다. 당일 저녁, 워싱턴은 이 소식을 병사들에게 들려주며 뉴욕 시내 시청 광장(Bowling Green)에 모인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했고, 사기가 오른 병사들과 시민들은 국왕 조지 3세의 동상을 끌어내려 납탄(총알)으로 녹여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환희였다. 보급은 그 이후도 제댜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워싱턴 부대는 전방의 영국군 함대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빵 한 조각 팔지 않으려 하고 밤마다 영국군에게 신호를 보내는 뉴욕 시민, 왕당파들의 차가운 시선과 싸워야 했다. 화이트플레인스로 도망친 뉴욕 의회 의원들은 텐트와 총알을 달라는 워싱턴의 서신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기들의 서류 가방과 목숨을 챙기기에 바빴던 것이다.
당시 왕당파들의 준동이 가장 심각하고 적나라 했던 곳이 뉴욕 이었다.
1776년 7월 뉴욕 일대는 단순한 외세(영국군)과의 전쟁터가 아니라, 주민과 이웃끼리 서로를 밀고자이자 적군으로 대했던 ‘가장 잔혹한 내전(Civil War)’의 현장이었다.
뉴욕 일대에서 대륙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왕당파 리더는 윌리엄 트라이언(William Tryon) 뉴욕 총독과, 실제 현장 행동대장이었던 올리버 드 란시(Oliver De Lancey) 장군을 꼽을 수 있다.
뉴욕 시내가 대륙군에게 점령당하자, 트라이언는 맨해튼 앞바다(뉴욕항)에 떠 있던 영국 전함 HMS 듀치스 오브 고든(Duchess of Gordon) 호에 피신해 거점을 차렸다. 선상 총독부에 앉아 뉴욕 각지의 왕당파 비밀 네트워크를 조종했다. 스페인 금화를 뿌려 ㅇㅘㅇ당군 게릴라를 모집하고 대륙군에는 탈영을 조장했고 첩자를 포섭했으며, 앞서 말한 ‘워싱턴 암살 공작(히키 음모)’의 자금과 배후 총지휘를 맡았다.
뉴욕 최대 토착 왕당파 가문의 수장인 올리버 드 란시 (Oliver De Lancey)는 뉴욕 정치·경제 기득권층의 핵심이었는데, 1776년 여름 독립선언 국면에 뉴욕 일대의 무장 왕당파 민병대를 직접 모으고 조직한 인물이다. 그의 가문과 연결된 왕당파 세력은 뉴욕주 전체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대륙군에 가장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공포를 주었다. 훗날 드 란시 왕당파 여단 제1여단장이 된다. 왕당군은 여단규모가 가장 큰 규모였다.
거기다.다른 곳과 달리 뉴욕 서는 . “독립전쟁은 사악한 폭동이다!” 대놓고 설교한 성공회 사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맨해튼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의 부주교 찰스 잉글리스 (Charles Inglis) 신부 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1776년 초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히트를 치자, 이에 맞서 《상식의 검증(True Interest of America Impartially Stated)》이라는 반박문을 출판하고 설교단상에 올라 독립파를 “신과 국왕을 배신한 무법 천지의 폭도들”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1776년 7월 워싱턴 장군이 뉴욕에 진주한 후, 잉글리스 신부에게 “설교 중 영국 국왕 조지 3세를 위한 기도문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잉글리스 신부는 “국왕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고, 총을 찬 대륙군 병사들이 성당에 서 있음에도 국왕을 위한 기도를 강행했다. 9월 영국군이 뉴욕을 재점령할 때까지 대륙군의 협박과 사살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뉴욕에 남아 왕당파들의 스피커 역할을 했다.
그의 수하 사제였던 자카리아 쿠퍼 등 뉴욕주 성공회 사제단 다수 사제들은 교인들에게 “독립선언에 동조하는 것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질 영적 죄악이며 반역”이라고 설교하여 교회를 왕당파 첩보 및 무기 은닉 장소로 제공했다.
영국군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 왕당파 무장 조직과 대륙군의 전투가 그 무렵에도 실제 했는지 궁금 한데 기록에는 완벽히 독자적인 왕당파 민병대 및 비정규군 조직이 존재했고, 이들과의 전투는 매우 잔혹하고 피비린내 났다고 나온다.
1776년 여름 당시의 왕당파 부대로는 드 란시 여단이 유명했디. 이 부대는 뉴욕의 토호 귀족 올리버 드 란시가 1776년 여름부터 자기 재산과 토지 소작인, 왕당파 주민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로, 뉴욕 롱아일랜드와 퀸스 일대를 지배했다.
또 퀸스 레인저스 (Queen’s Rangers)라는 부대가 있었는데 1776년 8월 유명한 백인 개척자 로버트 로저스(Robert Rogers)가 뉴욕과 퀸스 일대의 왕당파 게릴라들을 모아 창설한 비정규 특수 부대다.
이들과의 전투는 정규전보다 더 잔인했던 ‘게릴라전 및 이웃 간의 습격전’이었다. 1776년 7월~8월, 맨해튼 북쪽(웨스트체스터)과 동쪽(롱아일랜드)에서는 대륙군 민병대와 왕당파 민병대가 밤마다 서로의 농장을 습격했다.
왕당파 병력들은 워싱턴 군대에 보급될 소, 돼지, 곡식을 강제로 빼앗아 바다에 떠 있는 영국 함대에 바쳤고, 이를 저지하려는 대륙군 수송대와 소규모 총격전이 매일 벌어졌다. 독립파 교도를 지지하는 주민의 집에 왕당파 무장 대원들이 밤에 난입해 집을 불태우거나 목을 매다는 일(Lynch)이 비일비재했고, 대륙군 역시 왕당파로 의심되는 주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8월 말 대회전인 롱아일랜드 전투(Battle of Long Island) 가 터졌을 때, 이 지역 왕당파들은 영국군에게 대륙군의 허점을 찔러 들어가는 비밀 우회로(자메이카 고개)를 제보하고 직접 안내했다. 이 왕당파 민병대의 안내 때문에 워싱턴의 대륙군은 포위당해 전멸 위기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1776년 7월 뉴욕의 밤은 “누가 적이고 누가 이웃인지 알 수 없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낮에는 워싱턴의 대륙군이 거리를 통솔하지만, 밤이 되면 성공회 사제의 선동을 받은 왕당파 민병대(드 란시의 사병들)가 암암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돌아다니며 첩보를 수집하고, 바다 위 윌리엄 트라이언 총독의 배로 보급품과 비밀 편지를 나르는 암울하고 절박한 스파이전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