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1
안동일 작
그날 시티 터반의 음식은 최상급이었고 마데이라는 달았다. 술이 몇 순배 더 돌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대륙회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물 품평이 계속됐다. 대륙회의 내 완고한 청교도 대표들과 눈치 보던 성공회(영국 국교회) 인사들의 상황을 얘기하려니 그랬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찰스 캐럴에게 대륙회의 내의 복잡한 사정과 분위기를 전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겉으로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듯했지만, 뒷부분에서는 꼭 그의 장점과 해낸 일을 강조했다. 벤자민 노인 특유의 ‘앞에서 까고 뒤에서 채워주는’ 노련한 처세술이 담긴 화법에, 막 대륙회의에 입성한 찰스는 짐짓 맞장구치며 경청했다.
“핸콕 그 친구, 옷에 금박 장식 안 하면 외출도 안 하는 허풍쟁이에 영국 세관원 속여먹던 밀수꾼인 건 맞네. 하지만 말이야… 그 친구가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마시는 이 좋은 포도주도 없었을 테고, 영국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조직도 없었을 걸세. 나이는 젊지만 의장 역할도 꽤 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이었다. 벤자민 노인의 말대로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은 뉴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밀수꾼(당시 기준으로는 ‘자유무역업자’)이자 보스턴 최고의 자산가였다. 그가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의장이 된 데에는 결정적인 배경이 있었으니, 바로 뉴잉글랜드 독립파의 맹주 새뮤얼 아담스와 그의 사촌 동생 존 아담스의 신임이었다.
핸콕은 새뮤얼 아담스가 이끄는 반항 조직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과 영국의 감시를 피하는 ‘통신위원회’의 유력한 자금줄이었다. 그는 돈을 쓸 줄 아는 자산가였기에 신망도 있었다. 영국 해군이 마데이라를 잔뜩 실은 그의 밀수선 ‘리버티호’를 압수했을 때 보스턴 전체가 들끓었고, 결국 이 일은 보스턴 차 사건과 함께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원래 제2차 대륙회의의 의장은 버지니아 출신의 페이튼 랜돌프(Peyton Randolph)였다. 하지만 그가 버지니아 하원의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공석이 생겼다.
당시 대륙회의에는 남부 주(버지니아 등)와 북부 주(매사추세츠 등) 간의 미묘한 지역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대륙회의는 남북 지역 간의 단합과 결속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계산하에 핸콕을 선출했다. 그의 나이(37년생으로 찰스와 동갑)와 정치적 경력이 미미하다는 지적이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의 엄청난 재산과 그에 따른 타협적·온건적 성향은 급격한 혁명을 두려워하던 의회 내 보수파와 온건파들에게도 안정감을 주어 의장으로 추대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핸콕이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것, 박사님도 아십니까?”
모리스가 나섰다.
“듣긴 했는데… 아니야, 남들이 지어내는 말이지. 자신이 무슨 군사적 경험이 있다고 그 자리를 탐내겠나?”
그러나 모리스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구체적이었다.
존 핸콕은 보스턴 민병대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전력을 들어 군사적 역할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정치적 보스인 아담스 형제들에게 넌지시 이를 알리기도 했다.
1775년 6월, 대륙회의에서 총사령관 지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핸콕은 자신이 지명될 것으로 믿고 의장석에 앉아 자신감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존 아담스가 발언권을 얻어 완벽한 인물의 조건을 나열한 뒤 조지 워싱턴을 전격 지명하자, 핸콕의 표정은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굳어졌다. 무기명 거수투표에서 조지 워싱턴이 반대표 없이 총사령관에 선출되면서 핸콕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그는 의장으로서 워싱턴의 임명장에 직접 서명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담스 형제가 뉴잉글랜드 출신의 핸콕 대신 버지니아 출신의 워싱턴을 추천한 것은, 당시 독립 전쟁이 매사추세츠 등 북부만의 전쟁이 아닌 13개 식민지 전체의 연합된 투쟁임을 보여주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그 일로 며칠간 아담스 형제와 말도 안 했다고 하던데요.”
“그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겠지.”
“지금은 옛 관계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워싱턴이 현장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풀었다더군요.”
그 무렵 프랭클린은 영국에 나가 있었기에 당시 대륙회의 내부 사정을 잘 몰랐다.
“아무튼 샘이 존 핸콕을 끌어들인 일이야말로 참 잘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 우마차 같은 인물이 그런 수완과 포용력이 있단 말이야. 결국 대륙회의 의장 자리도 아담스 형제가 나서서 올려준 것 아닌가?”
노인이 말하는 ‘샘’은 새뮤얼 아담스를 뜻했다. 그런데 벤자민은 새뮤얼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신앙만이 참된 진리’라고 믿는 골수 청교도라고 알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교황 화형식(Pope Day)’ 행사가 자유의 아들들이 주도한 이벤트였기 때문인 듯싶었다. 이는 찰스가 직접 겪은 새뮤얼의 모습과는 달랐다.
식사 전에도 프랭클린은 붉은 펜의 무용담을 풀면서 로저 셔먼과 새뮤얼 아담스를 청교도 대표 거물로 지칭하고, 그들의 완고함을 성토했었다. 노인의 이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찰스는 자신과 새뮤얼 아담스와의 일화를 소개하기로 했다.
“박사님, 제가 아는 새뮤얼 아담스 선생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마차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그는 도리어 자신의 글은 우마차 같고 제 글은 체이서(Chaser) 같다며, 저를 ‘가제트의 형제’라 부르고 매우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매우 열린 태도를 보였고요.”
“그래?”
찰스는 새뮤얼 아담스가 초기에 자신이 머물던 이곳 시티 터반의 ‘캐럴 사랑방’을 자주 찾는 단골이었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특히 대륙회의 원목으로 성공회 신부를 임명할 때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주변의 완고한 청교도 의원들이 ‘어떻게 우리를 핍박하던 영국의 국교회(성공회) 목사를 대륙회의 원목으로 세우느냐’며 거칠게 반대했었지요. 그때 새뮤얼 아담스가 나서서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성공회 신부라도 상관없다’고 결론을 내어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랬었지요. 저도 그때 놀랐습니다. 오늘 박사님이 기도하자고 하신 것만큼이나요…”
모리스가 거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찰스가 새뮤얼에게 멋진 턱시도와 마차를 선물했던 이야기까지 꺼냈다. 찰스는 손사래를 치며 아버지 ‘캐럴 옹(翁)’의 노련한 조언에 따라 한 일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오, 찰스… 자네가 그 투박한 우마차에 벌써 비단 시트를 깔아두었었군! 어쩐지 본회의에서 그 완고한 청교도파들이 ‘자연의 신’이라는 문구를 보고도 조용히 넘어가 주더라니. 자네의 막후 체이서 마차가 진작에 길을 닦아놓았던 게야.”
새뮤얼 아담스는 늘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서,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에 참석하러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주변 지인들이 민망해하며 새 옷과 마차를 선물해 주었다는 실제 기록이 있다. 그 막후의 손길이 바로 캐럴 가문의 배려였던 것이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찰스 캐럴이 메릴랜드의 독립 논쟁 당시 ‘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이라는 필명으로 활약했고, 새뮤얼 아담스 역시 보스턴의 언론(Gazette)을 장악했던 대표 논객이었으니, 두 사람이 서로를 “가제트 출신 형제(Gazette Brothers)”라 부르며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역사적 개연성을 품고 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선동적이었던 새뮤얼 아담스의 글을 ‘우마차 소리’에 비유하고, 유럽 최고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돌아온 찰스 캐럴의 정갈하고 품격 있는 문장을 ‘최고급 체이서 마차 소리’로 대비해 주는 이 한마디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단번에 요약해 준다.
제퍼슨이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보탰다.
“이번 본회의에서 완고한 청교도들이 선언서의 ‘자연의 신’ 대목을 빼버리지 않을까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습니다. 회의 당시 몇몇 사람이 ‘자연의 신?’ 하고 의아한 눈치를 보였는데, 그때 새뮤얼 아담스 선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더군요. 그러고는 그 대목이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제퍼슨 선생. 새뮤얼 아담스 선생은 생각보다 속이 깊은 분입니다. 성공회 뒤셰 신부를 초대 원목으로 주저 없이 세울 때도 그랬지만, 교황 화형식에 대해서도 차마 영국 왕을 화형시킬 수 없어 대신 교황을 다루는 것이라며 제게 이해를 구하더군요.”
프랭클린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더 했다.
“오, 찰스 몽셰르! 자네가 미리 아담스의 마음을 넓혀놓지 않았다면, 내 붉은 펜도, 토머스의 초안도 저 완고한 청교도들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을 걸세. 이번 독립선언서의 숨은 공신은 바로 자네야!”

이어 워싱턴에 대한 품평이 이어졌다.
“제복만 밝히는 백만장자 같다고? 글쎄, 그 친구가 버지니아 농장 다 팽개치고 월급도 안 받으면서 군대를 이끌겠다고 나선 장본인이네. 그 훤칠한 풍채 하나만으로도 오합지졸 군인들이 기가 죽어 열을 맞추니, 장군감으로는 그만한 인물이 없지. 평소 자주 입는 제복은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 아니겠는가? 두고 보시게, 사령관을 아주 잘 뽑았으니…”
그 무렵 워싱턴은 사석에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엄청난 재산과 결혼, 그리고 ‘과시욕’이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입소문은 그런 곳으로 쏠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버지니아 최고의 부유한 과부였던 마사(Martha)와 결혼해 벼락부자가 되었고, 대륙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번쩍이는 버지니아 민병대 제복을 풀 장착하고 나타나 몇몇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키가 190cm에 달해 어디서나 눈에 띄었지만, 의외로 말주변이 없고 사석에서는 다소 고집스럽고 둔하다는 평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담스 형제가 남북 안배였다고는 하지만, 존 리나 커크를 제치고 잘 모르는 워싱턴을 추천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해. 두 사람, 원래 친했나?”
워싱턴과 동향인 제퍼슨을 쳐다보며 벤자민이 물었다.
“예, 두 분 매우 절친하게 지내셨습니다. 여기 찰스 경하고 메리 성당에 다녀오고, 이곳에서 마데이라를 상자째 해치우며 정찬을 나눈 다음 부쩍 친해졌지요.”
제퍼슨은 자신이 우연히 합류했던 1775년 5월 시티 터반에서의 ‘4인 정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내들은 진한 술자리를 같이하고 나면 지기가 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날 찰스는 워싱턴을 장군으로 구두 진급시켰고, 워싱턴도 못 이기는 체 “저를 전쟁터로 몰아세우시는군요. 가라면 가야죠” 하지 않았던가.
“와, 역사의 현장마다 우리 찰스 몽셰르의 입김이 서려 있구먼 그래!”
“그 또한 제 아버지께서 조언하신 일입니다.”
“내 한 번도 뵌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었지만, 자네 춘부장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신 어른이야.”
“아버지는 박사님을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예전에 필라델피아 강연에서도 뵌 적이 있다고 하시고, 이번에도 박사님을 아버지처럼 잘 따르고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허허, 찰스 경께서 나에게 보배 같은 아들을 주시는구먼.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지난번 몬트리올 여행 때도 찰스 옹은 아들과 조카에게 노인을 각별히 잘 봉양하라고 당부했었다. 아나폴리스의 찰스 옹은 1702년생이고, 벤자민은 1706년생으로 거의 동년배였다.
세간에는 존 아담스가 뉴잉글랜드 지역(보스턴)에 편중된 독립 전쟁을 ‘미국 전체의 전쟁’으로 확장하고, 식민지 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버지니아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버지니아 출신인 워싱턴을 적극적으로 총사령관에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군사적 경력으로 보면 장군급 인사가 몇 명 있었음에도 영관급에 불과했던 워싱턴이 지목된 데에는, 찰스 가문의 심모원려가 개입해 있었던 것이다.
이어 존 아담스(John Adams)에 대한 뒷담화가 이어졌다. 훗날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아담스는 자타공인 ‘대륙회의의 싸움닭’으로 통했다. 특유의 고답성과 독설로 동료들을 몰아세우곤 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남의 말을 안 듣고, 모든 일에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서 “심술궂은 잔소리꾼”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똑똑하기는 엄청나게 똑똑해서 법리적으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지만, 인간관계는 빵점이라고 소문나 있었다.
“아담스 그 친구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네.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하지만 말이야, 모두가 영국 왕 눈치 보며 벌벌 떨 때, 홀로 총대를 메고 매일 밤낮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를 깨운 건 바로 그 독종이었다네. 그 친구의 그 지독한 고집이 없었다면 우린 아직도 런던에 세금 바치고 있었을 걸세.”
여기서도 찰스가 나서야 했다. 그가 사귀어 본 존 아담스는 막무가내 고집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즉각 인정하고, 겉으로는 도도한 듯하지만 배려심이 깊은 양질의 인물입니다. 생각보다 화도 많이 내지 않고요.”
“그 잔소리꾼도 몽셰르 앞에서는 귀여운 고양이가 되는 모양이구먼. 이 나라와 우리 모두를 위해 집사 노릇 잘해주게나.”
독한 마데이라 술이 한 순배 돌았고, 제퍼슨이 빙긋이 웃으며 프랭클린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 저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모두들 박사의 입을 주시했다. 어떤 독설이 나오려나.
“여보게들, 우리 제퍼슨 군이 회의장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고 비웃지 말게나. 웅변은 개나 소나 다 하지만, 이 친구처럼 사람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문장을 쓰는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이 대륙에 없네. 입은 닫고 있어도, 그가 쥔 깃펜 끝에서 영국의 왕관을 부술 천둥이 치고 있지 않은가?”
토머스 제퍼슨은 대륙회의 기간 동안 회의장에서 육성으로 발언한 적이 거의 없다. 심각한 무대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게다가 남부의 대지주이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쓰고 뒤로는 노예를 거느리는 위선자라는 비판도 사석에서는 단골 메뉴였다.
“떠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못 하지만 자네의 큰 장점일세. 자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든. 단, 교만에 빠지지는 말게나. 겸손이야말로 신이 자네들같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마지막 당부니 말일세. 우리 신부님만 빼고…”
좌중 모두에게 던진 노익장의 간절한 당부였다. 노인은 특히 밥 모리스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대륙회의 보수·온건파 인사들에 대한 품평도 이어졌다.
먼저 벤자민이 유난히 친했던 후원자이자 추종자인 존 디킨슨(John Dickinson)이었다. 그는 ‘대륙회의 최고의 펜, 그러나 마지막까지 깃펜을 꺾은 사내’로 알려진 인물이다.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대지주이자 변호사로, 글을 매우 잘 써서 ‘식민지 농부의 편지’라는 필명으로 영국의 부당한 세금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대륙회의가 독립으로 치닫자, 가장 격렬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인물이기도 했다. 영국 왕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청하는 ‘올리브 가지 청원(Olive Branch Petition)’을 주도하여 존 아담스 등 과격파로부터 “우유부단한 겁쟁이”, “영국 왕의 주구”라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디킨슨 그 친구가 영국 왕에게 보낸 청원서를 보며 아담스는 속이 뒤집어졌겠지만… 사실 디킨슨만큼 법을 잘 알고 재산이 많은 사람 처지에서는 당장 전쟁이 나면 잃을 게 너무 많지 않겠나?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이 대륙이 피바다가 되는 걸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선비라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겠다며 대륙회의를 나가버렸지만, 전쟁이 본격화되면 총을 들고 나갈 뼈속까지 애국자가 맞네.”
이 말은 후일 사실로 증명된다.
다음은 ‘뉴욕 최고 명문의 차가운 도련님’ 존 제이(John Jay)였다.
훗날 미국 최초의 대법원장이 되는 뉴욕 출신의 엘리트. 프랑스 위그노 혈통의 어마어마한 부잣집 가문 출신으로, 대륙회의에서 가장 세련되고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는 청년이었다. 철저한 법치주의자라 군중 폭동(보스턴 차 사건 같은)을 끔찍이 싫어했고, 어떻게든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식민지의 권리를 인정받는 자치 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사석에서는 “차갑고 거만해서 정이 안 간다”는 평이 많았다.
“제이 그 젊은 친구는 얼음물로 세수를 하는지 통 감정을 드러내지 않더군. 뉴욕 부자들의 이권을 지키려고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온건론을 펴는 거지만… 저 친구의 그 차갑고 치밀한 법리적 계산이 없으면, 영국과의 외교 협상에서 우리는 뼈도 못 추릴 걸세. 나라를 세우는 데는 아담스 같은 불덩이도 필요하지만, 제이 같은 얼음송곳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다음은 ‘결국 선을 넘어버린 비운의 보수파 수장’ 조셉 갈로웨이(Joseph Galloway).
그는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의장이자 벤자민 프랭클린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다. 그는 영국 의회와 식민지 의회가 연합하는 ‘갈로웨이 연합안(Plan of Union)’을 제출해 온건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단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후 대륙회의가 완전히 독립(제2차)으로 기울자 “이건 반역이다”라며 영국 편(왕당파)으로 넘어가 버렸고, 훗날 런던으로 망명했다.
벤자민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갈로웨이… 나와 평생을 함께 정치를 했던 똑똑한 친구였지. 영국과 맞서되 제국을 깨뜨리지 말자는 그 친구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네. 하지만 시대의 파도가 너무 빨랐던 게지. 판이 흔들릴 때 끝까지 예전 질서만 고집하다가 결국 조국을 등진 모양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지성일세.”
다음은 뉴저지 프린스턴의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목사였다.
뉴저지 대표이자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었던 존 위더스푼 목사는 장로교단 최고 지도자였지만, 다른 청교도들과 달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공부한 열린 지성이었다. 종교적 도그마보다 합리적 이성과 자유를 중시했기에, 제퍼슨의 종교 자유 사상을 지지해 주는 남부와 중부파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위더스푼 총장이 대륙회의에 가세한 것은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셈일세. 30여 년 전쯤 내가 ‘빅 스피커’ 조지 휫필드 목사와 신나게 어울려 다닐 무렵, 영국 런던에서 신학교 학생이었던 청년 위더스푼을 만났지. 아주 영민하고 바람직한 목사 지망생 청년이었어.”
위더스푼 목사에 대한 품평은 벤자민이 자신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개하느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개신교가 왜, 그리고 어떻게 독립에 기여했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사례이기에 다음 호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위더스푼 목사가 미국 장로교의 초빙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몇 년 전인 1768년의 일이다. 그때 마당발 벤자민 프랭클린은 장로회 인사들에게 그를 적극 추천했었다. 아무튼 몇 년 사이에 이 영국 지성인 학자는 신대륙에서 열렬한 독립지사가 되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