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메릴랜드 400 용사 (1)
안동일 작
미국의 독립 전쟁이 끝난 직후인 1784년 6월, 교황 피오 6세는 궁리 끝에 존 캐럴(John Carroll) 신부를 미국의 첫 가톨릭 수장인 대목구장(Prefect Apostolic, 임시 대리 감목)으로 임명했다. 대목구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서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 감목구(敎皇代理 監牧區), 장(長)의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 감목구장’ 이다. 교황을 대리해 교구의 주교와 같은 권한을 대목구에 행사한다는 뜻이다. 대목구는 쉽게 말해 “아직 정식 교구를 세울 수 없는 선교 지역을 교황을 대신해 다스리는 구역”으로 조선도 18세기 대목구로 지정돼 지난한 노력과 엄청난 희생 끝에 교단을 출범 시켰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교회가 창설된 후 곧 북경교구에 속하게 되었으나 많은 순교자를 내며 확신돼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朝鮮) 대목구로 설정되어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되었고 초대 대목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임명됨과 동시에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그 후 1962년 3월 10일이 돼서야 한국 교회의 13개 대목구가 정식교구로 승격되고 동시에 서울, 광주, 대구는 대교구가 되어 3개의 대주교 관구로 나뉘어져 지금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었다. 엄청나게 지난한 세월이 필요 했던 것이다.
당시 까지 미국 천주교는 런던 대목구 소속이었다. 의문이 들 만한 부분이다. “당시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였고 천주교를 모질게 탄압했는데, 어떻게 영국의 천주교 교구가 미국까지 관할하고 있었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영국에 천주교 조직이 비록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존속해 있었으며, 1784년 전까지 미국 지역을 관할하던 곳은 바로 ‘런던 대목구(Apostolic Vicariate of the London District)’였다.
종교개혁 이후 영국(잉글랜드)에서 천주교는 불법화되었고 기존의 교구 조직은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신자들과 숨어든 신부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교황청은 영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식 교구(Diocese) 대신 대목구(Apostolic Vicariate)라는 임시 선교지 형태의 조직을 만들었다.
1688년 교황청은 잉글랜드 지역을 4개의 대목구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런던 대목구’였다.
런던 대목구장은 외형상 정식 주교가 아니라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영국 내 지하 천주교 신자들을 사목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인 13개 식민지 시절, 미국 땅은 영국의 영토였다. 교황청은 영국의 식민지 세력 확장에 맞춰 “해외의 모든 영국 식민지 내 천주교 신자는 영국의 ‘런던 대목구’가 관할한다”는 규정을 적용했다.
따라서 미국의 메릴랜드나 펜실베이니아 등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과 그곳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도적으로는 영국 런던 대목구장의 지도와 승인을 받아야 했다.
미국이 독립 전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했는데, 천주교 체제는 여전히 ‘영국 런던’의 지휘를 받는 모순이 생긴 것. 당시 미국의 천주교 신부들도 “이제 막 영국과 피 터지게 싸워 독립했는데, 우리 보고 계속 영국 주교의 명령을 받으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영국의 첩자 처럼 보일 수 있다”라며 교황청에 독립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천주교의 상황은 독립 교구가 될만큼 크지 못했다.
미국의 교구 독립은 프랑스가 촉발 한 측면이 크다. 프랑스 교계와 왕실은 독립전쟁 승리의 전리픔의 하나로 미국 천주교를 자신들의 수하로 거두려 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반발과 파리에 있던 프랭클린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계획은 무산 됐다. 그때 프랭클린과 보마르세가 백방으로 뛰었다는 사실은 전 한바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실은 런던 대목구에서도 그무렵 미국을 독립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 했었다. 당시 런던 대목구의 공동 부목구장이었던 찰스 월메슬리(Charles Walmesley) 주교가 깨인 이 였던 것이다. 존 캐럴 신부와 각별한 교분이 있었던 그는 저간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교구가 독립되지 않으면 프랑스 교계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고려가 큰 몫을 했던듯 싶다. 후일 월메슬리 주교는 존 캐럴의 주교 서품식에 주례 집전자로 나선다. 존 캐럴의 주교 서품식은 놀랍게도 영국에서 거행 됐다. 당시 미국과 유럽 천주교 정황을 노정하는 이 일대 사변에 대해서 다음에 자세히 다룬다.
아무튼 여러 갈래에서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1784년 6월 9일, 교황청은 미국 천주교를 런던 대목구 관할에서 공식적으로 분리해 독립 시켰던 것이다. 미국 천주교 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미국 대목구장(Prefect Apostolic) 임명장을 받았을 때 존 캐럴(John Carroll) 신부의 심경은 고무적이거나 영광스럽기보다는, 솔직히 당혹감과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깊은 고뇌에 가까웠다.
1784년 당시 존 캐럴은 마흔아홉(49세)의 나이로, 독립운동 성공의 감격과 많은 회한은 접어두고 에 메릴랜드 로크빌(Rockville)에 있는 어머니의 집 근처에서 조용히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메릴랜드의 시골길을 마차를 타고 다니며 흩어진 가톨릭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주고 고해성사를 건네는 소박한 순회 신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더욱이 캐럴은 강력한 자부심을 지닌 예수회(Jesuit) 출신이었다. 하지만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예수회가 전격 해체되면서, 그는 졸지에 ‘소속 없는 신부’가 되어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부심의 근간이었던 수도회가 공중분해 된 상처를 아직 가슴에 품고 있었던 시기였다. 교황청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황청의 전령이 그에게 미국 천주교의 전권을 맡긴다는 서한을 전했을 때, 캐럴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반가운 마음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후일 여러차례 술회 했다. 캐럴은 직책을 맡기를 몹시 주저했다. 그는 동료 신부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하며, 이 자리가 가져올 행정적 부담과 정치적 풍파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거대하고 엄격한 교황청의 관료주의가 이제 막 자유를 찾은 미국 천주교의 정서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가장 컸다.
문제는 교황청이 준 미국 ‘대목구장’이라는 직책의 한계였다. 당시 교황청은 캐럴에게 신품성사(새로운 신부를 서품하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주교(Bishop)의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저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행정만 관장하는 ‘임시 수장’에 불과했다.
캐럴과 주변 인사들도 이점에 당혹해야 했다. 독립전쟁을 거치며 아메리카 대륙에는 “유럽의 왕이나 군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독립 정신이 뼈저리게 박혀 있었는데, 주교 권한도 없이 로마 포교성성(Propaganda Fide)의 명령만 받아 움직이는 구조는 미국 개신교 주류 사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게 뻔했다.
“거 봐라, 천주교는 결국 로마 교황의 꼭두각시다”
하지만 캐럴 주변의 인사들은 한결 같이 이제 막 싹을 틔운 미국 천주교의 독립이라는 작은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면서 캐럴에게 교황청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종용 했다.
당시 미국의 천주교 사정은 그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가톨릭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약했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 약 400만 명 중 가톨릭 신자는 약 2만 5천 명 안팎으로,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소수였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활동하는 신부는 20~3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은 정식 교구 소속이 아니라, 대부분 예수회 출신의 은퇴하거나 흩어진 신부들이었다.
어두운 밤, 메릴랜드 시골집 서재에서 캐럴 촛불을 켜고 로마에서 온 무거운 봉인 문서를 한번 더 내려다면서 펜을 들었다. 사흘 동안의 관상기도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신앙의 영역과 세속 정치가 얽히는 역사적 조류 앞에서 느끼는 묘한 영감과 각오가 그를 휩싸고 돌았다..
그는 교황청에 보낸 편지에서 완곡하면서고 힘있게 “미국의 천주교는 유럽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미국의 주교는 로마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땅에 있는 사제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헌법을 만들며 민주주의를 실험하던 미국의 시대정신을 천주교회 안에도 도입하려 한 발상이었다. 실제로 교황청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5년 뒤인 1789년 존 캐럴은 미국 사제들의 투표를 거쳐 미국 최초의 정식 주교로 선출된다. 그때 26명의 사제들이 참여 헸는데 24명이 캐럴의 이름을 적었다. 나머지 두표는 캐럴이 적은 필라 본당의 리빙스턴 이었고 한명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캐럴의 관상 기도 속에서는 사라진 예수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파리와 브르셀의 예수회 교회와 동료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고 무엇보다 개신교도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화려한 제복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메릴랜드 400 용사’들의 모습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신부님 이제, 우리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매릴렌드 1연대 2중대를 맡았던 19살의 스트래트 중위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며 캐럴에게 말했다.
“인 노미네 도미니, 차아지”
하며 적진을 향헤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이 이어 펼쳐 졌다.
“파드레,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무기는 돌멩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습다.”
스트래트와 함께 도레히건 메너의 비밀 성당에서 캐럴 로 부터 라틴어 상경을 배웠던 역시 19세의 오브라이언이 역시 피를 흘리면서 캐럴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도 온화했다.
“In te, Domine, speravi…” (주님, 당신만을 믿나이다…)
도허레건 매너의 푸른 들판을 그리워하며 전투 직전 성모 마리아에게 고해기도를 바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랬다. 미국에 대목구가 설치되고 캐럴이 그 수장에 임명 된것은 한마디로 미국 천주교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관상속에 확연 한 모습으로 이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캐럴은 분연히 임시 대목구장의 일에 매진 하기로 했다.
독립전쟁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헌신과 희생은 가톨릭에 대한 미국의 사회적 인식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식민지 시대 내내 ‘잠재적 배신자’나 ‘이단’ 취급을 받던 가톨릭 교도들은 독립전쟁이 터지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피를 흘렸고, 그 정점이 바로 메릴랜드 400용사의 부르클린 전투였다.
1776년 8월 27일, 뉴욕 브루클린(당시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정예 장비를 갖춘 영국군과 독일계 헤센 용병들에게 포위당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영국군이 대륙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워싱턴의 본대는 맨해튼으로 후퇴할 시간을 벌지 못하면 그대로 항복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대륙군의 후방을 지키던 메릴랜드 연대가 스스로 방패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모데카이 기스트 소령과 다니엘 보위 대위가 이끄는 메릴랜드 청년들은 후퇴하는 동료들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들보다 5배가 넘는 영국군 정예부대가 버티고 있는 석조 가옥 요새 (Vechte-Cortelyou)를 향해 역으로 돌격했다. 이들은 수적 열세 속에서도 무려 6번이나 반복해서 치고 빠지기 돌격을 감행하며 영국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결사항쟁으로 메릴랜드 선봉대원 중 256명이 전사했고, 대다수가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었다. 살아서 귀환한 수십 명에 불과했다.

건너 편 높은 고지에서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조지 워싱턴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쳤다. .
“오 하느님, 오늘 내가 얼마나 훌륭한 부하들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요!” (Good God, what brave fellows I must this day lose!)
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워싱턴과 대륙군 본대 9,000여 명은 무사히 이스트강을 건너 맨해튼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 메릴랜드 연대가 버텨주지 못했다면 독립전쟁은 시작하자마자 종결되었을 것이다.
당시 메릴랜드 제1연대를 구성하고 이끌었던 지휘관은 윌리엄 스몰우드 대령과 모데카이 기스트 소령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정작 가장 유명한 ‘브루클린 전투’ 당일 현장 지휘를 맡은 인물은 대령이 아닌 소령이었다.
연대장 윌리엄 스몰우드 (William Smallwood, 1732~1792)는 메릴랜드 찰스 카운티의 부유한 플랜테이션(대농장) 지주 가문 출신.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군사 경험이 있어 1776년 1월, 메릴랜드 제1연대의 지휘관(대령)으로 임명됐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 찰스 캐럴른 몇 번이나 그의 농장을 찾았다.
브루클린 전투가 벌어진 1776년 8월 27일 당일, 스몰우드 대령은 하필 조지 워싱턴 장군의 명령으로 군사재판(Court Martial)에 참석하느라 본대를 비운 상태였다. 뒤늦게 전투 소식을 듣고 전장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부대는 고립된 상태였고, 그는 워싱턴 장군 옆에서 자기 부대원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후일 장군 까지 진급하여 독립 전쟁 전반에서 활약했고, 전쟁 끝난 후에는 메릴랜드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다.
현장 지휘관 모데카이 기스트 (Mordecai Gist, 1743~1792)는 볼티모어의 부유한 상인(Merchant)이자 지주 가문 출신이다. 독립 전쟁 직전 볼티모어 자원 정예병 부대인 ‘독립 카데트(Independent Cadets)’를 스스로 조직할 만큼 열렬한 애국파(Patriot)였다. 1776년 제1연대의 소령(Major)으로 임명되었다.
기스트는 스몰우드 대령이 자리를 비운 탓에, 고작 33세의 나이로 현장 최고 지휘관 임무를 맡았다. 영국의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2,000명 이상의 대군에게 포위당하자, 기스트 소령은 옆 부대의 스털링 장군에게 “우리가 시간을 벌 테니 본대는 탈출하라”며 단 400명의 메릴랜드 병력을 이끌고 8천이 바티고 있는 적의 요새(Old Stone House)를 향해 6차례나 돌격을 감행했다. 저들이 본대를 추격하지 못하게 희생을 감수하며 치고 빠지기를 감행 했던 것이다. 기스트 소령은 단 9명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이후 그 역시 준장으로 진급하며 끝까지 전쟁을 치렀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 둘 것은 아쉽게도 스몰우드와 기스트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다 성공회 신자였다. ‘메릴랜드 400용사 이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이거나 찰스 캐럴의 영지에서만 뽑힌 청장년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후대에 형성된 상징적 전설이다.
메릴랜드 주정부 아카이브(Maryland State Archives)의 고증 프로젝트인 ‘Finding the Maryland 400’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릴랜드 제1연대(First Maryland Regiment)는 메릴랜드 전역(볼티모어, 아나폴리스,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 등)에서 골고루 징집된 부대였다. 성분 역시 부유한 지주 계층의 자제(장교진)부터 소작농, 장인, 아일랜드·독일·스코틀랜드계 이민자(사병진)까지 다양했다. 당시 메릴랜드 내에서도 이미 개신교(성공회, 장로교 등)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병은 개신교도였을 확률이 높다.
아무튼 당시 이들이 보여준 용맹함에 감동한 조지 워싱턴 장군은 이들을 신이 주신 “나의 오래된 정예병(Old Line)”이라 불렀고, 이는 오늘날까지 메릴랜드주의 공식 별명인 *’The Old Line State’ (전선을 끝까지 지켜낸 주 )*로 남아있다.
그런데 당시 워싱턴은 메릴랜드 연대의 구성을 천주교도 청년들로 인식하고 있었고 전쟁 후에도 자신의 인식을 밀고 나갔다. 끝까지 살아남아 워싱턴 주위에 있었던 당시의 연대 지휘관 스몰우드 장군이나 기스트 장군도 워싱턴의 이런 인식을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전설은 더 확산 됐던 것이다.
찰스 캐럴이 부대 창설과 장비 보급에 막대한 사재를 털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사실 이었고 부대의 서사가 워낙 종교적이고 감동적 이기에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사그러들면서 후대 역사학자나 지역 기념사업회에서 “캐럴의 영지 출신 가톨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싸웠다”는 식의 극적인 서사로 각색된 것이다.
그런데 400명 대부분이 천주교 청년이었다는 것은 과장이고 각색 이었지만 다니엘 보위(Daniel Bowie) 대위가 이끌었던 2중대는 도히레건 찰스 영지 출신의 천주교 병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롱아일랜드(부르클린) 전투에서 가장 처절하게 싸우다 전멸에 가깝게 희생된 중대다. 다니엘 보위 대위 본인도 캐럴 가문과 매우 가까운 아나폴리스 출신의 가톨릭 명문가였으며, 그를 따라 입대한 찰스 영지 출신의 젊은 가톨릭 청년 병사들이 많았다. 캐럴의 관상기도에 나타난 스트레트와 오브라이언이 바로 그들 중 하나다. 두 사람은 존 캐럴 로서는 아들 뻘 제자들이었기에 더 각별하게 생각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컬러풀한 세련돤 제복의 청년, 두 사람이 가슴 에서 피를 철철 흘려 깔끔한 제복을 버려 가면서도 환한 얼굴로 ‘주님의 영광’ (안 노미네 인도미니) 을 읇조리는 모습은 존 캐럴의 심장을 파고드는 감동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이 찬란한 순교자들아, 너희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당초 매릴랜드 연대가 워싱턴 휘하의 대륙군에 합류 했을 때 대륙군 병사들은 눈이 휘 둥그래져야 했다. 저들의 차림새와 소지한 무기 때문이었다. 독립전쟁 초기,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제복은커녕 신발도 제대로 없는 ‘누더기 부대’였다. 반면, 맨해튼에 나타난 메릴랜드 연대는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세련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고급 양모로 만든 짙은 청색(Blue) 코트에 선명한 붉은색(Red 또는 Scarlet) 깃과 소맷단을 덧대었고, 안에는 화사한 황갈색(Buff) 조끼와 사슴가죽 바지(Buckskin breeches)를 입었다. 머리에는 각이 딱 잡힌 삼각모(Tricorn hat)를 썼다. 특히 이 부대의 장교들은 영국 정규군 장교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최고급 진홍색 코트를 입고 허리에 붉은 실크 샤시(Sash)를 둘렀다.
다른 주에서 온 가난한 농민 출신 대륙군 병사들은 이들의 자태를 보고 시기 어린 눈으로 “메릴랜드 마카로니(Maryland Macaronis)” 혹은 “댄디(Dandies)”라고 조롱했다. ‘마카로니’는 당대 유럽(특히 영국)에서 ‘이탈리아풍의 최첨단 유행을 쫓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상류층 청년’을 비꼬는 유행어였다. 민요 ‘양키 두들’의 가사 중 “머리에 깃털을 꽂고 마카로니라고 불렀네”에 나오는 바로 그 단어다.
메릴랜드 연대를 이처럼 멋지게 최고 수준으로 무장시킨 원동력이 바로 찰스 캐럴의 막대한 사재 지원이었다. 메릴랜드가 군대를 조직할 때, 찰스 캐럴은 메릴랜드의 가톨릭 유지들은 물론 개신교 상류층 신사(Gentry)들을 솔선으로 추동해 지갑을 열게 했다.
찰스 캐럴은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의 직물상들을 통해 최고급 영국·프랑스산 양모 천을 대량으로 사들여 지역의 재봉사 들과 자원 봉사 부녀자들을 동원해 멋진 군복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제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기였다. 찰스 캐럴은 병사들에게 최고급 머스킷 총과 함께, 당시 대륙군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총검(Bayonet)’을 전원에게 지급했다. 바로 보마르세를 통해 카리브해를 거쳐 들어온 프랑스제 머스킷과 총검이었다.
메릴랜드 연대는 이런 사재 지원 덕분에 총검술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이 총검술 덕분에 그들은 소수 임에도 영국군 정예 보병과 6차례나 끈질긴 백병전을 벌이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찰스 캐럴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이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총검을 쥐여준 이유는 “가톨릭의 청년들이 이 나라의 가장 귀한 주춧돌이 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무언의 시위이자 자부심의 표출이었다.
롱아일랜드의 진흙탕과 빗속에서, 그 화려했던 진홍색과 청색 제복이 영국의 탄환과 베요네트에 찢기고 피로 검붉게 물들어가는 처절한 항전의 순간은 캐럴 로서는 너무도 빨리온 자랑스런 점ㄹ은 피들의 순명의 순간이었지만 그럴수록 워싱턴과 남은 대륙군들의 가슴에는 더 강렬하게 남았다.
비웃음을 사던 ‘마카로니’ 제복이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거친 후, 조지 워싱턴과 미 대륙 전체가 경의를 표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전사의 갑옷’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제복은, 단순한 사치나 과시가 아니라 미국 가톨릭인들이 새 나라에 바친 가장 고결한 성의(聖衣)였던 셈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