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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6)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3>
안동일 작
– 보마르세의 ‘피가로의 결혼’-

작가의 생각으로는 피에르 보마르세 만큼 평가절하 돼 있는 인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전천후의 만능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냥 다재 다능한 재주꾼, 영리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인식해 그를 폄하하곤 한다. 시계공ㆍ발명가, 음악선생, 관리, 첩보원, 투기꾼, 노예상, 무기상, 출판업자, 극작가, 망명객 등 다양한 직업과 인생의 부침을 섭렵, 경험한 독특한 인물이라는 평이 꼭 따른다. 미국내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런데 그는 시계공으로서도 일류 기술자였고 음악선생으로서는 궁중 교사였으며 관리로서도 매우 유능한 수완을 발휘한 이였다. 첩보원 으로서는 프랑스를 위헤 영국과 스페인을 적절하게 요리했고 투기꾼, 노예상 이란 표현은 그를 전적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표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뿐 아니라 스페인과 서인도 제도에 방대한 부동산과 선단을 소유했고 이를 불렸던 부호이기도 했다. 무기상 으로서 그는 역사에 남는 일을 해냈다.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수세에 몰려 있던 미국 독립군 대륙군에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의 다량의 무기를 제공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극작가로서는 더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저 유명한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과 로씨니의 ‘세빌리아(세비아)의 이발사’가 그의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오페라로 만들어 지기 전 희곡으로 읽혔고 연극으로 파리에서 공연 됐는데 귀족 사회의 허위 의식과 부패를 실랄하게 고발하면서도 경쾌함을 잃지 않았던 한 작품이다.  루소와 볼테르의 저작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의 밑바탕이 된 문서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대단하지 않는가?

그는 파리에서 1732년 시계 제조업자인 아버지 앙드레 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여섯 자녀 중 유일한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시계, 특히 개인용 회중시계는 첨단의 정밀 과학 제품이었고 평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고가품이었다. 때문에 보마르세의 가정은 평민 계급이었지만 부유한 편이었고.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 플루트, 하프 등 여러 가지 악기 연주법을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0대 초반 부터 보마르셰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시계에도 큰 관심을 보여 틈틈이 아버지 밑에서 시계 만드는 일을 도왔다.

18세가 되던 1750년, 다른 학셍들보다는 두어살 많은 나이에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르 그랑은 예수회가 세운 명문으로 주로 귀족 상류층 자제들이 다녔지만 개방적인 학풍으로 평민 자제들 가운데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문호를 열었다. 보마르세가 그곳에 진학했던 것은 귀족 상류층 학생들과 교분을 갖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르 그랑을 나온 뒤 그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를 도와 시계 제작에 전념했던 모양이다.  르 그랑에서의 예수회식 교육은 그의 인생관과 문학관에 큰 영향을 끼쳐 일생을 관통하는 지침과 철학이 된다.

1753년 7월, 21살에 보마르셰는 더욱 정확하고 작은 시계 제조법을 발명했다. 바로 시계추의 제어장치다.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아  제어장치 시계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됐다. 그 발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던 국왕의 시계 기술자와 논쟁이 벌어졌지만  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자신의 기술을 인정받게 되면서 보마르셰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루이 15세의 애인 퐁파두르(Pompadour) 부인을 위해 반지에 장착된 시계를 만들어 왕의 눈에 크게 들었고 궁중을 자주 출입 하는 측근이 되었다.  궁정의 고급 정보를 활용, 부동산과 채권에 투자해 돈도 벌었다. 1755년 보마르셰는 연상 의 부유한 귀족 미망인 마들렌(Madeleine Catherine Aubertin)을 만나 그 다음 해에 결혼했고 마들렌 소유의 땅 이름인 ‘Le Bois Marchais’를 따서 자신의 이름을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라는 귀족의 이름으로 바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앞에 귀족을 뜻하는 드 자를 붙혀 부르지는 않았다. 마들렌은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었고 많은 유산이 돌아왔다. 이후에 보마르셰는 궁정에 들어가 루이 15세의 네 딸들에게 하프를 가르치게 되었다.

1759년, 보마르셰는 루이 왕의 최측근 재경 대신이자 부유한 사업가 뒤베르네(Joseph Paris Duverney)를 만났고 그의 지원으로 왕의 비밀 재정 비서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왕실 심장부에 진출했다. 1764년에는 왕과 뒤베르네의 사업을 도와 스페인의 식민지들에 대한 각종 독점 계약과 노예수입권을 취득하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파견된다. 그러나 사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그는 열 달 동안 스페인에 머물며  풍광을 즐기고 공기를 마시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때의 경험이  그가 쓴 <세비야의 이발사> 등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타고난 글쟁이였던 보마르셰는 1765년 3월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 바쁜 와중에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 희곡을 쓰는 일에 골몰 했다. 그의 첫 희곡 <외제니>를 1767년에 발표했고 1770년에는 두 친구(Les Deux amis)를 발표했다. 두 작품은 나름 호평을 받았다.
후견인 뒤베르네가 죽자 뒤베르네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을 벌여 패소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을 다시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비망록(Mémoires)>을 출판해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다.

그 후 보마르셰는 새로 즉위한 루이 16세의 밀사로 유럽을 돌아다녔고,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며 무기를 공급하고, 저작권법 제정에 앞장서고, 볼테르 전집의 간행을 주관하고,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여러 가지 일에 관계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보마르세는 영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돕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게 되고 루이 왕과 외무장관 베르젠을 설득해 1776년 5월, 100만 리브르를 지원 받는다. 보마르셰는 이를 기반으로 가공의  무역 회사인 ‘로드리그 오르탈레즈’를 설립했다. 서류상으로는 스페인의 민간 무역사 였지만, 실상은 프랑스 군기고의 구식 무기를 가져와 미국에 넘기는 국가 차원의 ‘세탁’ 작업이었다.

그는 단순히 자금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선박을 구하고 선원을 모집하며 무기를 검수하는 실제 물류 총책임자였다.  미국 대륙회의가 파리로 보낸 최초의 외교관 사일러스 딘(Silas Deane)이 보마르셰를 만난 것은 1776년 7월이었다. 딘은 벤저민 프랭클린, 존 캐럴 등과 연결된 인맥을 통해 보마르셰를 알게 됐다. 가톨릭 인맥을 활용한 정보망은 예수회 꾸루실료 였던 보마르세와 당시 비밀 협상의 중요한 윤활유였다.

보마르셰는 딘을 만난 후  존캐럴 찰스 캐럴 형제의 당부에 따라 확신을 얻고, 당초 계획했던 소규모 지원을 넘어 대규모 수송 함단을 조직했다. 1777년 초까지 그는 8척의 대형 수송선에 대포 200문, 소총 25,000정, 화약 수만 파운드를 실어 보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인 새러토가 전투(1777년 10월)에서 미군이 사용한 무기의 90%가 보마르셰가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그의 공로는 절대적이었다.

이때 보마르셰는 <피가로의 결혼> 대본을 쓰면서 동시에 무기 목록을 검토했다. 무대 위에서는 귀족을 조롱하고, 현실에서는 그 귀족(국왕)의 돈으로 영국의 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군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일의 이야기지만 보마르셰는 이 사업에 자신의 전 재산과 신용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미국 대륙회의는 이를 ‘프랑스 정부의 무상 원조 였다’고 강변하면서 짐짓 외면했다.  사일러스 딘은 보마르셰의 손을 들어줬지만 , 후에 파견된 아서 리(Arthur Lee) 등이 딘과  보마르셰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대금 지급을 거절했다. 채권의 한 당사자이자 결정권자 였던  프랑스 국왕은 처형되고 없던 상황.
보마르셰는 평생 이 대금을 받기 위해 싸웠고, 결국 그가 죽은 뒤인 1835년에야 미국 정부는 찰스 캐럴 등의 유지에 따라 그의 후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하며 빚을 청산했다. 그것도 당초 청구금액의 10분의 1수준에서…그래서 미국내 그의 평판은 바닥이다.

하지만 그사이 1775년에 보마르셰는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뒀고 1784년에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혁명 전야의 시민 정신에 부합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오히려 투옥되었고 어렵사리 외국으로 도피해  런던, 함부르크, 스위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 시기에 ‘피가로 3부작’을 이루는 희곡 <죄를 저지른 어머니(La Mère coupable)>(1792)를 썼다. 이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보마르셰는 1796년 집정관 시대의  파리로 돌아와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1799년에 사망했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데 그의 희곡 작품이야 말로  지금도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희곡 작품들을 살펴 본다.
피가로(Figaro)야 말로  18세기 말 이후 프랑스 최고의 캐릭터다. 보마르셰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의 주인공 이다. 극중 피가로는 순발력과 재치 넘치는 언변으로 귀족의 부패와 탐욕을 고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 희곡을 원작으로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라 폰테가 각색한 부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본 나폴레옹이 ‘피가로 야 말로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말했을 만큼 피가로는 사람들을 깨웠다. 이 오페라는 지금도 음악인들 사이에는 역사상 최고의 오페라로 꼽힌다. 라트라비아타, 마담 버터플라이를 훨씬 뛰어 넘는다.
프랑스 최고(最古),최대 일간지 ‘르 피가로’지의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최고 명소의 하나였던 카페 ‘르 피가로’ 역시 기억에 새롭다.

그가 작가 초기에 집중했던 것은 사실 ‘드람 부르주아(Drame bourgeois, 시민극)’라는 진지한 장르였다 초기의  작품’외제니’와 ‘두친구’는  평범한 시민들의 도덕적 갈등과 가정 내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보마르세는 ‘외제니’ 서론에서 자신이 디드로의 문학관을 따른다고 적었다.
문학가의 작품에는 그의 인생관이 들어 나기 마련이다.

외제니 ((Eugénie ou la Vertu au diséespoir, 1767)는 보마르세의 첫 희곡으로, 당시 유행하던 ‘눈물을 짜내는 희극(comédie larmoyante)’의 영향을 받았다.
젊고 순진한 여주인공 외제니는 클라랑동 백작과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믿고 그의 아이까지 가진다. 하지만 사실 백작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꾸민 것이었고, 이미 다른 부유한 귀족 여성과 정략결혼을 앞둔 상태였다.
이 사실이 밝혀지며 외제니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위기에 처한다. 외제니는 절망(Vertu au désespoir, 절망에 빠진 미덕)하지만, 결국 백작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녀를 진정한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신분 차이와 남성의 기만 속에서도 여성의 정조와 미덕이 승리한다는 도덕적 메시지를 강조했다.

두 친구 (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 1770)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정과 상업적 신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인 오렐리와 세무 관리인 멜라크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어느 날 오렐리가 갑작스러운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멜라크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자신이 관리하던 공금을 몰래 꺼내어 빌려준다.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면서 멜라크는 큰 고초를 겪게 되지만, 오렐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오해와 위기가 겹치지만, 결국 두 사람의 희생적인 우정이 빛을 발하며 상황이 해결된다.
당시 상인 계급의 정직함과 우정을 찬양하며, 경제적 신용이 곧 인간의 도덕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당시에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현대에는 “너무 교훈적이고 신파적이다”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훗날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가 살아있는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전에 보마르세는 귀족사회 고발장인 ‘비망록’을 써내 필명을 떨쳤다.
1774년 일종의 동업 관계였던 뒤베르네 재무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이 벌어져 그는 패소했다. 그러자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Goëzman)을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희곡식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비망록(Mémoires)>(1774~1775)이었다. 이 출판으로 그는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고 이 비망록을 쓰면서 피가로 3부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여겨 진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오늘날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더 친숙하지만, 두 작품 모두 본래 연극용 희곡으로 쓰였고 당대에 연극으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 들이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1775년 2월 23일, 파리 최고의 극장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졌다. 초기에는 5막짜리 구성으로 초연되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보마르셰가 단 48시간 만에 4막으로 수정하여 다시 올렸고,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프랑스 연극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형식으로 기획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연극 희곡으로 다시 집필한 사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집필이 진행 됐단다.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비야의 이발사는 알마비바 백작이 아름다운 로지나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로지나의 후견인으로 그녀와 결혼하려는 늙은 의사 바르톨로가 방해한다. 길에서 우연히 자신의 하인이었던 이발사 피가로를 마주친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피가로는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로 알마비바 백작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해피 엔딩이지만 귀족 중심 사회를 비판과 풍자하는 이야기다.

피가로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은 9년 뒤인 1784년 4월 27일, 역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막을 올렸다.
전편에 이어 더욱 실랄해진 귀족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수년간 상연 불가 처분을 받았다. 금지가 풀린 뒤 열린 초연 날에는 인파가 너무 몰려 극장 문이 부서지고 사람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로 대흥행을 기록했다. 68회 연속 공연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은 이 연극을 두고 “이미 실행된 혁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가 결혼 후 3년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발사였던 피가로는 혼인을 성사시킨 공로로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준비한다. 한편 로지나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와 결혼하게 될 하녀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백작은 이미 폐지했던 영주의 권리인 초야권(처녀가 시집가게 되면 첫날밤을 영주와 동침)을 은근히 부활시키려 하고, 하녀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작은 실수를 들고 나와 결혼을 요구하는 등 수잔나와 피가로의 결혼에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피가로는 꾀를 내어 백작부인과 수잔나와 함께 공모하여 백작을 궁지에 몰아넣고 수잔나와 결혼에 성공한다.

피가로의 결혼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보마르셰는 작품의 배경을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으로 하는등.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1784년 가까스로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786년 프랑스가 아닌  빈에서 초연되었다.

시리즈 세번째 죄지은 어머니 (La Mère coupable)는 한참 뒤인 1792년 6월 26일, 파리의 테아트르 드 마레(Théâtre du Marais).에서 무대에 올려졌는데 앞선 두 작품이 경쾌한 희극이었다면, 이 3편은 프랑스 혁명기의 암울한 분위기가 반영된 진지한 ‘모랄 드라마(drame moral)’였다.
피가로와 수잔나가 중년이 된 시점을 다루며, 알마비바 백작 부부의 가정사 비극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렸다. 앞선 두 편만큼의 파괴력은 없었지만, 당대 관객들에게 보마르셰의 마지막 드라마로서 꾸준히 공연되었다.

알마비바 백작 부부는 큰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차남 레옹이 있지만 백작의 태도는 냉담다. 사실 레옹은 백작이 긴 출장을 가있는 동안 백작부인이 셰르뱅(Chérubin)과 하룻밤을 보내었을 때 임신한 아이다. 백작부인이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고 셰르뱅에게 말하자 그는 전쟁으로 떠났고 의도적으로 전장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백작부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보냈고, 백작부인은 특별한 상자 안에 그 편지를 보관했다.
백작도 레옹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해 왔지만 부인을 추궁하거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백작에게도 플로레스틴(Florestine)이라는 이름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베기아르스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녀를 백작의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백작부인의 비밀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편 백작 부부의 불화를 지켜보던 피가로는 여기에 모종의 사연과 음모가 있다는 것 알아차리고 수잔나와 함께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플로레스틴과 레옹이 사랑에 빠진다는 막장 요소 였다.  피가로는 이번에도 기기묘묘한 수를 써서 둘이 결혼할 수 있는 길을 튼다. 이과정에서 피가로는 생모를 찾게 된다. ‘죄지은 어머니’에는 얄궂게도 ‘모럴 드라마(Drame Moral)’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의 작품에는 통속 막장 요소가 잔뜩 들어 있다. 영어로는 레디컬 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 하는지 모른다.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이란 말처럼.

보마르셰가 자신의 이 연극들, 특히 앞의 두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벌였던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첩보 영화나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을 둘러싼 일화들은 18세기 프랑스의 검열 제도와 사회적 역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루이 16세는  대본을 직접 읽고 분노하며 상연을 금지했다. 하인(피가로)이 주인(백작)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지략으로 이기는 설정이 왕권과 신분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마르셰는 ‘게릴라식 마케팅’으로 맞섰다.
공연이 금지되자 보마르셰는 파리의 유력한 귀족 부인들의 살롱을 돌아다니며 대본을 낭독했다. “왕이 금지한 금서”라는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귀족들 사이에서 “이 연극을 못 보면 유행에 뒤처진다”는 심리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이 연극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여론에 밀린 루이 16세는 몇 차례의 대본 수정을 조건으로 공연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한대로 3년여의 수정 작업 끝에 상연 허가가 떨어지자 파리 시민들은 환호했다.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파가 몰려 코메디 프랑세즈의 철제 정문이 부서졌다. 당시 극장은 신분에 따라 좌석이 엄격히 나뉘어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공작부인과 요리사가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 극장 안의 온도가 치솟자, 여성 관객들이 일제히 부채질을 하는 바람에 극장안에 부채소리가 요동쳐 극 진행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보마르셰는 단순히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지적 재산권을 위해 싸운 투사이기도 했다. 당시 극단(코메디 프랑세즈)은 작가에게 정당한 수익을 배분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보마르셰는 이에 분개하여 1777년에 ‘극작가 협회(SACD)’를 창립했다. 이는 오늘날 저작권법의 근간이 되는 활동으로, 그는 연극이 성공할수록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도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 연극 대본을 집필하고 수정하고 무대에 올리던 시기가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던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그는 낮에는 루이 16세의 신하로서 비밀 첩보 활동(로드리그 오르탈레즈 공사 운영 등)을 하고, 밤에는 그 국왕이 금지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귀족들을 포섭했고 머리를 싸매 대본을 수정했던 것이다.
연극 속 피가로가 보여주는 기만술과 변장, 기지는 실제 보마르셰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사용하던 수법들과 닮아 있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무대 위 피가로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하며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했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예수회와 천주교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대사들은 단순한 연극 대사가 아니었다. 보마르세가 존 캐럴과 함께  르 그랑을 다니면서 체득한 ‘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교감이 깊게 깔려 있었전 것이다.  당시 보마르세가 평생을 깊은 소속감을 지니고 “꾸루실료”로 참여했던 예수회가 불법단체로 지정 되면서 갈곳을 잏었던 심정이 희곡에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보마르셰의 문학, 특히 ‘피가로’라는 인물에 어떻게 투영되었을까?
예수회 교육의 핵심 지침인 ‘라티오 스투디오룸’ (Ratio Studiorum)은 학생들의 수사학적 능력과 대중 앞에서의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 학교 연극(School Drama)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피가로의 그 유명한 긴 독백(Monologue)들은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청중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회 교육이 강조한 ‘설득의 수사학’과 궤를 같이한다.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관점은 예수회 교육의 특징 중 하나였다. 보마르세가 복잡한 인물 관계와 변장, 반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그가 예수회식 ‘무대 중심 교육’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훌륭한 복선이다.
예수회는 인간의 원죄와 함께 자유의지(Free Will)와 인간의 능력을 통한 신의 영광을 강조했다.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로서 피가로는 신분이라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지능과 노력으로 길을 만들어갔다. “태어나는 수고만 한 귀족”에 대비되는 피가로의 역동성은 “인간의 구원에는 자신의 행동이 많은 부분 책임져야 하는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예수회적 인본주의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회는 엄격한 율법주의보다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최선의 도덕적 선택을 고민하는 ‘결의론(Casuistry)’으로 유명했다. 피가로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발휘하고 작은 선의의 거짓말로 더 큰 정의(사랑의 결실, 약자 보호)를 이루는 모습은 이런 철학적 배경과 맞닿아 있었다.
보마르세의 작품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관찰이 담겨 있다. 이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활동 중의 관상’이라는 예수회적 태도가 문학적으로 승화된 모습이다.
바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과 내면의 탐구였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장면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행을 강조한다.

존 캐럴이 신앙적 성찰을 통해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찾았다면, 보마르셰는 같은 교육의 뿌리에서 ‘인간의 평등과 자유’라는 세속적 결론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보마르셰와 존케럴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창밖을 보면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했고 라틴어 고전 호메로스의 시, 키케로의 수사학 세네카의 비극을 공부하면서 역사에 대해 그리고  권력과 도덕에 대해 또 진정한 신앙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

거기에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던 예수회의 특성상, 선교사 출신이 꽤 있었던 교수진의 수업에는 이국적인 문물과 정보가 넘쳤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보마르세가  대서양 건너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존 캐럴과 피에르 보마르세, 두 인물이 비록 나이와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교육 커리큘럼(고전 문학, 수사학, 변증법)을 거치면서  그들이 ‘자유’라는 가치 아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정신적 유대감이 형성 됐던 것이다.  루이 르 그랑의 공기는 두 사람을 양 측면에서 서서히 변화 시켰지만 종국에는 하나로 굳건해 졌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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