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 센터 대표)
1990년대 소련 붕괴 직후의 러시아는 참혹했다. 국영 기업의 민영화는 평생의 저축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고, 초강대국 시민의 자존심은 국제 사회의 구걸자로 전락했다.
마피아가 활개치고 평균 수명이 급감하는 절망 속에서 러시아인이 선택한 것은 70년간 금기시됐던 ;정교회 였다. 푸틴은 이 영적 목마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정교회를 국가 통합의 파트너로 삼는 제권일치(Caesaropapism)적 권력구조화로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길을 선포했고, 이는 잃어버린 제국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루스키 미르(Russian World)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놀랍게도 21세기 미국이 이 위험한 경로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과거 트럼프의 책사 스티브 배넌이 푸틴을 세속주의에 맞서 전통 가치를 수호하는 전략가라 치켜세우며 '유대-기독교적 가치에 기반한 미국 재건을 주장했을 때, 많은 이는 이를 극우파의 수사로 치부했다.
그러나 지금 전개되는 상황은 그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닌 정교한 미국판 제권일치의 설계도였음을 증명한다.
역사적으로 제국이 쇠퇴하거나 극심한 격변기에 처할 때, 특정 종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등극하는 것은 흔한 패턴이다. 다문화주의, 세속화, 경제적 불평등으로 기존의 국가 정체성이 흔들릴 때, 대중은 명확하고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지침을 갈구한다.
이때 등장하는 정치 권력은 내부의 타락(리버럴리즘)과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순수한 본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명분을 내세운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대중에게 강력한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정신적 접착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의 발현은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다. 이는 지도자가 법적
정당성만으로 확보하기 힘든 전폭적 지지를 얻기 위해 종교적 신성화를 선택하는 제권일치(Caesaropapism)적 권력 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박해받는 예수와 동급으로 묘사하는 이미지를 공유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지지자들에게 그를 정치인이 아닌 신앙의 수호자로 각인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종교 단체는 국가로부터 법적 특권과 재정 지원을 약속받고, 정치 권력은 종교로부터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는 이 위험한 거래가 현재 미국 정치의 중심에서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미국의 제권 일치화가 지향하는 바가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성 정체성 논의, 가족 해체, 급격한 기술 발전에 대한 공포를 먹고 자란 미국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낙태 금지와 공립학교 내 종교 교육 강요 등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적 강제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어쩌면 1990년대 러시아가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 패권의 약화와 내부적 분열 속에서, 어떤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위대한 미국”을 외치며 미국판 루스키 미르(러시아의 영광)’의 유혹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종교가 정치를 삼키고 정치가 종교를 도구화할 때, 그 끝은 찬란한 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다양성이 거세된 권위주의적 통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21세기 미국 시민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엄중하다. 헌법이 보장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종교라는 허울을 쓴 새로운 신권 정치의 피지배자가 될 것인가이다. 미국이 러시아의 길을 따라갈지, 아니면 다시금 민주주의의 보루로 남을지는 이 미국 정교에 대한 시민들의 판단과 선택을 하는 선거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 (동찬 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