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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컬럼> 용기와 난폭함의 본질적 차이

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센터 대표)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단순히 계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고자 했던 선구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산화한 역사가 이 달에 유독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 1865년 4월15일 서거했다.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암살당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4월 19일은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민주주의의 함성이 피로 물든 날이며,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대한독립의 의지를 폭탄으로 천명한 날이다.
이들은 모두 용감했으나, 그 용기의 대가는 하나뿐인 목숨이었다.

용감한 자는 자신의 신념과 공동체의 선(善)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여 공동체를 구한다. 반면, 난폭한 자는 개인적 분노나 권력욕에 이끌려 타인과 공동체를 파괴한다.
두 모습은 겉보기에 힘과 저항이라는 형식을 취해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그 동기와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역사 속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수십 년간 투옥되었지만 출옥 후 대통령이 되어서도 보복이 아닌 화해와 법치를 선택했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다. 반면, 아돌프 히틀러나 현대의 폭군들은 자신의 난폭함을 국가를 위한 용기로 위장했다.
그들은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며 인간성과 정의를 짓밟았을 뿐이다. 난폭함은 결코 용기가 될 수 없다.

동서양의 성현들은 일찍이 이 둘의 구분을 엄격히 가르쳤다.   공자는 용감함이 의로움을 따르지 않으면 난폭함(亂)으로 흐른다고 경계했고, 불경에서는 지혜 없는 용맹을 어리석음의 칼이라 불렀고, 예수는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가르쳤다.
성현들의 공통된 가르침은 명확하다. 참된 용기는 사랑, 정의, 그리고 절제라는 토양 위에서만 꽃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 혁명, 전쟁, 그리고 극심한 분열이라는 문명적 대격변기를 지나고 있다. 이런 혼란기에 지도자가 난폭함을 결단력 있는 용기로 포장하여 휘두를 때,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그래서 유권자는 냉철한 눈으로 그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거친 언사와 적대감을 선동하는 힘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진심의 방향을 읽어야 한다. 진정한 용기는 상대를 품는 용기, 협상하는 용기, 절제하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내는 용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일 수 있으나, 성숙한 정치의식을 통해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한인 사회의 현명한 선택은 지역사회와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성숙한 유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 이념이나 종교, 그리고 진영을 절대화하는 교조주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무엇이 실제 미국 사회와 우리 공동체를 위한 실익인지 살펴보는 현실 직시가 필요하다.

분노를 부추기는 난폭한 수사에 휩쓸리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며 진실을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난폭한 지도자가 아닌, 지혜와 정의로 공동체를 지키는 용감한 지도자를 선택할 줄 아는 안목. 그것이야말로 격동의 시대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생존하며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동찬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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