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2 –
안동일 작
부자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자가 이쪽 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속내를 말 못한다 싶어 신부와 대령이 나가 있으려고 일어 서려는데 당번병이 홍차를 내왔다. 신부와 대령의 차도 가져와 그들이 앉아있는 벽쪽 작은 탁자에 올려 놓았기에 두 사람은 눈짓으로 차만 마시고 일어 나기로 했다.
벤자민은 속이 탔던지 우유를 듬뿍 붓더니, 찻잔 바닥을 긁는 스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휘저어 벌컥 들이켰다.
“아버지는 아직도 촌티를 벗지 못하고 차 마실 때 달그락 거리고 벌컥 소리를 내고 마십니까? 젠틀맨 답지 않게..”
“ 아들아 내가 속이타고 목이 타서 좀 빨리 마셨다. 그런데 젠틀맨은 그런 외형에서 가름 되는 것이 아니란다. 그나저나 이 녀석아 오랜만에 만난 애비 한테 그렇게 면박을 주어야 하겠니? 죽다 살아 온 애비한테…”
“그러게 그 험지에는 왜 가셨습니까? 고생만 하셨겠죠, 대영제국의 위세는 아직 건재 합니다. 반란의 조짐은 없었지요? 안 봐도 뻔 합니다. ”
위쪽의 소식을 대충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리의 통풍은 좀 어떠십니까?”
처음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왔다.
“네가 썩이는 속 보다는 덜 아프다.”
“제 속만 하겠습니까?”
“여기 캐럴 신부님께서 돌봐 주시고 좋은 약을 지어 주셔서 많이 낫기는 했다. 어찌 고마운지….”
그말을 듣고 윌리엄 총독이 일어서서 존 신부 쪽을 향해 목례를 보내왔다.
“어느 교구의 누구신지?”
”캐럴 신부는 국교회가 아니라 로만 가톨릭 신부님이시다.”
벤자민이 얼른 대답했다.
“뭐라구요 천주교라고요?”
그의 표정이 단박에 변했다.
“아버지의 대륙회의는 하다 하다 천주교 미신쟁이, 교황의 꼭두각사들 까지 끌어 들이 셨습니까 ? 하긴 애국적이고 충성스런 국교회 사제 중에는 아버지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겠지요”
“허허 자신의 종교가 중하면 남의 종교도 귀한 법이다. “
“아무리 그래도 천주교인 들의 교활한 간계에 놀아 나시면 안됩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로구나.”
이 대화까지 듣고 신부와 대령은 방을 나왔다.
두 부자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예상대로 성과도 전혀 없었다.
허드 대령은 대원들과 나눌 얘기가 있던지 1층으로 내려갔고 존 신부는 복도 한쪽에 있는 쇼퍼에 앉아 묵주 기도를 했다. 7단 쯤 했을 때 붉게 상기된 얼굴로 노인이 방을 나왔고 문을 쾅하고 닫았다. 존 신부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말이 안 통해, 전혀 안 통해”
“신부님 내가 아무래도 아들이 아니라 괴물을 키운 것 같소.”
침통한 표정의 벤자민은 이 말을 끝으로 트랜튼으로 가는 마차 여정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드 대령이 오히려 더 미안해 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노인의 표정을 보고 참는 것 같았다.
캐럴 신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거대한 산이 뿜어낸 광채가 윌리엄에게는 오히려 그늘이 되었고, 그 그늘 속에서 뒤틀린 새로운 권위에 대한 충성심과 비뚜러진 경도가 괴물처럼 자라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관저를 떠날 때 윌리엄은 아버지를 배웅 하지 않았지만 캐럴 신부는 마차에 오르면서 윌리엄이 복도 창가에 서서 이쪽 마차 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으리라. 펄럭이며 마차에 오르는 벤자민의 낡은 외투에는 여전히 몬트리올의 진흙과 약재 냄새가 배어 있어 존 신부의 코를 자극했고 내려다 보고 있는 2층 윌리엄의 총독 제복 단추의 번쩍거림이 눈을 자극했다.
윌리엄은 잠시 마차를 내려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눈길을 바다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라리탄 만 너머에 영국 함대가 오고 있다는 희망을 표현 하는 듯 했다. 벤자민은 그때 마차 창 넘어로 손을 뻗어 따라 나온 청년 민병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두 모습의 대비에 존 신부는 ‘윌리엄은 바다 건너에서 영국 대군이 몰려 온다면 대륙군의 좌장인 자신의 아버지를 어찌 해주길 바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신부는 문득 성경 구절 “어느 집안이나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버텨 내지 못하리라”는 대목(마태오 복음서 12:25) 이 떠올라 간절한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들이 서로 다른 깃발을 들었으나 혈연의 끈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니, 정치의 칼날이 부자의 정을 베지 않게 하소서.”
“벤자민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윌리엄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영적 개안(開眼)을 허락하소서.”
떠나는 마차 안에서 벤자민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눈을 꾹 감고 있을 때, 캐럴 신부가 대신 창밖으로 멀어지는 윌리엄과 그가 갇힌 건물을 향해 조용히 성호(聖號)를 그었다.
허드 대령의 마차는 두사람을 트랜턴 부두 까지 데려다 주고는 돌아 갔다.
부두에는 두 사람을 필리까지 데려 다 줄 이번 여행의 마지막 탈것 샬럽 범선이 준비돼 있었다. 트랜턴 까지 말이 없던 벤자민이 부두의 유장한 강물 소리를 들으면서 침묵을 깨고 대륙군 청년 들의 함성 같다는 표현을 했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 필라로 귀환하는 날 아침에 현명옹이 예지력으로 들은 함성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범선 샬럽(Shallop)을 타고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 마켓 항구(Market Street Wharf)까지 가는 길은 조류와 바람만 잘 맞는다면 하루 안에 충분히 가능했다.
그 시기, 델라웨어 강이나 체사피크 만과 같은 연안 및 강 하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일꾼 배들이 바로 샬럽 이었다. 샬럽은 보통 9~15미터 길이로, 선체가 날렵하고 돛대(Mast)가 하나 또는 두 개 달려 있다. 앞뒤가 뾰족한 대칭형 구조가 많아 강물에서 방향 전환이 용이했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다닐 수 있도록 바닥이 비교적 평평하지만, 바다로도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구조를 가졌다. 바람이 없을 때는 노(Oar)를 저어 갈 수도 있었다. 필라와 트렌튼 같은 거점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 나르거나, 가벼운 화물(밀가루, 술통 등)을 운반하는 ’18세기의 택시이자 소형 트럭’이었다
물때 때문에 오전에 배에 오른 벤자민과 존 캐럴 신부는 갑판 위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오전의 침울함을 벗어난 벤자민이 의외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물어 왔기 때문이다.
지녀 교육, 자식 양육의 고충과 희망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어떻게 나와 있냐는 질문이었다.
아침에 떠올랐던 마태오 복음서 구절을 전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싸우면 망하게 돼 있다는 얘기를 어찌 하는가.
“신명기 6 장에 나오는 구절이 가장 근본적인 구절입니다. 부모의 역할이 단순히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새기는 작업임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지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쩐지 오늘의 박사에게 불리한 구절이기는 하다.
“박사님,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의 마음에 아무리 정성껏 진리를 새겨 넣어도, 결국 그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오직 주님과 그 아이 자신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심는 자는 우리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니까요.”
“에페소서 6장은 효도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약 구절입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의 절제를 강조하는 부분이 박사님의 의 상황과 맞물릴 수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벤자민의 얼굴 위로 강바람 훈풍이 불었고 흰 머리가 보기좋게 날렸다.
“성경은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부모에게도 ‘노엽게 하지 말 것’을 명하셨지요. 아드님과의 갈등은 어쩌면 두 분 모두가 서로에게 품은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 생긴 생채기일지도 모릅니다.”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벤자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인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을 더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가 싶었다.
이사야서를 들려 주는 것으로 신부는 성경 강좌를 끝냈다.
“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세상에 자식을 포기할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설령 그 자식이 아버지를 등지고 왕의 편에 섰다 해도, 박사님 당신의 가슴 속엔 여전히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 긍휼함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형벌이자 축복입니다.”
벤자민은 무슨 뜻에서 인지 이렇게 말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더군요. 자식 놈은 제 갈 길을 가버렸고… 내 자식 농사는 흉년인 모양이오. 정작 제 자식은 어쩌지 못하고서 다른 집 아들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이 늙은이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 지겠지요 신부님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으렵니다.”
예지력으로 들은 대륙군 청년 장병들의 함성이 그를 다시 강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사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존 캐럴 신부가 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박사님, 성서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드님이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여도, 결국 당신이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언젠가는 기억하게 될 겁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지, 입을 보고 자라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가려는 독립의 길이 곧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박사님, 아드님은 지금 자신이 믿는 ‘왕에 대한 순명’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의 법은 그를 반역자라 부르겠지만, 아버지로서 당신이 하신 마지막 설득은 이미 하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아들을 놓아주는 것 또한 박사님이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입니다.”
“지도자의 길은 고독한 법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굴복시키지 못하면서 남의 자식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그 모순이 바로 이 혁명의 가장 아픈 가시겠지요. 하지만 박사님의 정직한 고통이 오히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울림이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샬럽선 갑판 위로 물새가 날아들어 앉았다. 갈매기였다, 강 이지만 하구였기에 그랬다. 노란 주둥이가 유난히 햇빛에 반사 됐다. 존 신부는 아침의 윌리엄 황금단추 반사가 떠올랐다.
‘황금은 인간을 꼭 황페하게 하거늘…’
잠시 윌리엄의 추후 행적에 대해 알아본다. 앞으로는 기회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말한대로 며칠 뒤 그는 애국파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코네티컷의 감옥에서 2년 동안 독방에 갇혀 가혹한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윌리엄이 투옥된 동안 그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대륙회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벤자민은 그때 프랑스에 있었다.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의 체포는 독립 선언 직전 뉴저지가 ‘중도 관망’에서 에서 ‘독립’으로 급격히 선회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뉴저지 지방 의회(Provincial Congress)는 1776년 6월 15일 체포령을 발령한다. 그를 “민중의 자유에 대한 적”으로 선포했다. 6월 17일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이끄는 민병대가 퍼스 엠보이 주지사 관저에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고 6월 21일 에는 벌링턴(Burlington)으로 이송해 지방 의회 에서 심문을 받게 했다. 그때도 그는 의회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맞섰다.
1776년 6월 25일 대륙회의는 윌리엄이 뉴저지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를 코네티컷으로 이송해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선언이 채택되던 날, 윌리엄은 뉴저지를 떠나 코네티컷의 감옥으로 향하는 압송 길에 있었다.
2년여의 혹고한 옥고를 치룬 그는 1778년 대룩군과의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된다. 영국 왕실이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영국군이 점령 중이던 뉴욕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흩어져 있던 왕당파들을 규합해 왕당파 연합 위원회(Board of Associated Loyalists) 를 창설하고 의장직을 맡았다.
이 조직은 영국 정규군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준군사 조직이자 유격대 성격을 띠었다.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등지에서 독립 애국파(Patriot) 거점을 습격하고 물자를 탈취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밤새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의 농장, 철공소 등을 습격했다. 이들은 ‘베이컨의 난민들(Bacon’s Refugees)’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 왕당파 게릴라들은 애국파의 공격에 대해 똑같이 폭력으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보복(Retaliation)’ 원칙을 고수했다. 특히 1782년 애국파 장교 조슈아 허디(Joshua Huddy)를 생포해 교수형에 처한 사건은 큰 논란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영 간 평화 협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윌리엄의 왕당연합은 유격전뿐만 아니라 뉴욕을 중심으로 전역에 비공식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변절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이를 영국측에 전달하는 과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프랭클린은 이러한 강경한 활동으로 인해 독립 후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당파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벤자민이 1785년 영국 근처에서 그를 만났으나, 이는 주로 재산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사무적인 만남이었을 뿐 감정적인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고 사가들은 적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때 1785년 7월, 80세의 고령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8년여간의 프랑스 공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는 길이었다. 이때 영국 해협을 건너는 도중, 아들 윌리엄과의 만남이 성사됐다.
정확한 장소는 영국 남부 해안의 항구 도시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벤자민은 7월 24일부터 27일 까지 약 3일간 체류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윌리엄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고, 두 사람은 ‘스타 인(Star Inn)’이라는 여관에서 만났다.
사가들은 이 만남이 화해의 장이라기보다는, 냉정한 비즈니스적 정리에 가까웠다고 적는다. 윌리엄은 관계 회복을 원했으나, 벤자민의 태도는 차가웠고 주로 윌리엄이 미국에 남겨두고 온 부동산과 개인 자산의 처리 문제, 그리고 윌리엄의 아들이자 벤자민의 손자인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의 장래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벤자민은 끝내 윌리엄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는 7월 27일 배에 올랐고,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 윌리엄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영국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13년 11월 1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윌리엄은 영국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에 의지해 살았으며 1790년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유산 상속에서도 거의 제외 돼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쓸모없는 땅 일부만 상속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기록 된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구 교회(St Pancras Old Church) 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철도 공사 등으로 인해 정확한 묘소의 위치는 유실되었다고 적혀진다.
사가들이야 이처럼 냉정하게 기록 했지만 작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 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애틋하게 안타까와 했고 이면적으로는 은밀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윌리엄은 자신이 ‘ 정말 잘못했구나’ 자신이 ‘역사의 죄인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후회 하고 있었다. 또 두 사람 사이에는 윌리엄의 아들 탬플이 있었다. 그리고 탬플의 딸 앨렌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이다.
템플 프랭클린은 1762년 윌리엄 프랭클린의 사생아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막 뉴저지 총독으로 임명 됐던 때였다. 템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투자 할아버지 편을 들어 파리에 함께 가서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부분은 다시 자세히 다룬다.
벤자민은 겉으로는 냉담했지만, 사실 아들 윌리엄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사우샘프턴 만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미국에 남은 땅과 자산 처리 일부를 맡겼다. 표면적으로는 ‘비즈니스’적 이었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윌리엄이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은근한 배려’였다.
그리고 벤자민은 손자 템플을 영국에 남게 해 윌리엄에게 보내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게 했다. 본인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자존심과 정치적 입장 대신, 자신의 또다른 소중한 분신을 보내 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했던 부정이었던 것이다.
윌리엄은 말년에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닫고 자책했다. 이 사실은 여러곳에서 확인된다. 윌리엄은 영국으로 건너간 후,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영국 정부로부터도 뜨뜻미지근한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번영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지키려 했던 구체제(영국 왕정)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허망함과 회한은 작은것이 아니었다.
나중의 얘기지만 이들 프랭클린 부자와 조손은 3대에 걸친 사생아가 등장해 집안 화해의 뜨끈한 난로로 등장한다. 바로 탬플 프랭클린의 딸인 엘렌 이다. 엘렌 프랭클린은 1798년 템플이 런던 시절 사귀었던 프랑스계 여인 블랑슈와 라파예트(Blanchette de La Fayette)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증조부인 벤자민 사후 였기에 증조부를 보지는 못했다. .
템플이 파리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낼 때, 그의 딸 엘렌은 런던에 있는 할아버지 윌리엄이 키웠고 엘렌은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감을 가졌다. 윌리엄의 아내(엘리자베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그는 영국에서 재혼했지만 말년은 고독했다. 이때 손녀 엘렌이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간호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가문의 끊어질 듯 이어진 혈연의 끈을 보여주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대를 하나씩 건너 뛴 사생아들의 효성과 효도.
실제로 앨렌은 윌리엄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고 윌리엄의 유언장에는 엘렌에게 유산 대부분을 남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그녀가 윌리엄의 말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다.
그날 델라웨어 강을 따라 내려 가면서 윌리엄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노 정객과 젊은 신부는 돛이 펄럭이는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대화를 이어 갔지만 이같은 끝은 몰라도 중간 과정은 너무도 참혹하고 극단적인 대립이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행이 탄 배 옆으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화물 플랫보트 바지선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덩치 큰 플랫보트들이 강 한 가운데를 갈리치는 물길을 내며 내려갔지만 물길은 어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벤자민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 터였다.
벤자민은 이 무렵 부터 14년을 더 살아 1790년도에 84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때 였다면 분기 탱천해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직 하지 않은가.
“살아 보니 인생 별것 없더라, 너무 애쓰고 살지 말아라.”
세상 떠나기 5년 전인 1785년 귀국 길에 영국의 외지고 작은 항구 마을로 아들을 불러 남들이 들을새라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 얘기 아닌가 싶다. 그때는, 10년 전에는, 20년 전에는, 왜 이 이야기를 못 했을까 싶었을 게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보면 그때도 최선의 선택이었고 당시도 최선의 선택 이었다. 델라웨어 강 위에서 존 캐롤 신부가 성서를 인용하며 들려준 하늘의 책에 기록된 설득과 판단 이었고 박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였던 것이다.
거대한 제국, 위대한 제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짊어 져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에 정작 자기 가정의 울타리 무게는 제대로 올려지지 못했거나 하나같이 자식 복이 없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실은 우리의 주인공 예수회 으뜸 종 찰스 캐럴도 이 아이러니에서 비켜가지 못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