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비숍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2 –
안동일 작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떠나 보라는 말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는 몬트리올 에서 필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로를 잘 알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존 캐럴 신부는 벤자민을 향한 평소의 존경심에 더해 그의 인간미에 매료되어 호감이 급상승했다. 사람들이 왜 그를 그리 아끼고 존경하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관심사가 그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치유와 각오의 정적 속에서도 계속 나눈 대화는 독립전쟁에 관한 대화 였다. 과연 이 전쟁이 가당한가. 그리고 이길 수 있는가 그런 얘기들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후일 따져보면 현명한 노인의 예지력이라고 할까 전쟁과 관련해 너무도 절묘한 예언이 여행중 두 군데서 극명하고 구체적으로 나왔다. 바로 사라토가와 트렌턴에서 였다. 존 캐럴 대주교의 회고록에 극적으로 언급 된다.
여행 초반 조지 호수를 빠져나와 허든슨 강을 따라 올비니로 향하려면 사라토가를 지나야 했다. 그곳도 강이 굽어지면서 유장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이때 벤자민 노인은 사라토가(Saratoga), 이곳이 미국 독립 전쟁의 ‘적벽대전’이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 깔린 언급을 했던 것이다.
그 무렵 사라토가는 온천이 발견돼 막 개발이 진행되면서 질병 치유의 효과 때문에 각광을 받는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왕당파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고 개발도 그곳의 땅 주인들인 영국 출신 귀족들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백작 작위를 받은 이곳 영주 윌리엄 더글라스와 당시 이 일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던 필립 스카일러 영국군 장군이 그 중심이었다. 1770년대 초반, 이들은 이곳의 광천수가 유럽의 스파(Spa)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개발을 시작했고 1775년 무렵에는 이미 작은 콜로니얼 주택과 통나무집 형태의 숙박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온천장(Saratoga Springs)은 사라토가 강변(Hudson River)에서 약 12~15km (8~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숲이 우거진 습지 였는데 그 숲속에서 신비로운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 신부로서는 잠시 정박 해 온천에 들러 노인에게 휴식과 치유를 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정상으로나 안전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 저멀리 숲에서 솟아오르는 증기를 바라보며 캐럴이 말했다.
“박사님, 저기 숲 너머 샘솟는 온천의 연기가 보이십니까? 왕당파들이 저곳을 유럽의 궁정 휴양지 처럼 꾸미려 한답니다. 세월이 좋았으면 박사님 모시고 온천욕이라도 한번 하는 건데 아쉽습니다.”
“우리 신부님도 쓸데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군 그래. 이 엄혹한 시국에 온천욕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면서 프랭클린이 지팡이를 짚으며 갑판에서 일어나 강변의 험준한 지형을 살폈다.
“나는 이 유장한 물소리와 저 연기가 우리 대륙군 청년들의 함성이며 그들이 쏜 대포에 영국군 진지가 포화에 허물어지는 모습으로 보인다네.”
“그런가요. 역시 박사님 답습니다.”
“신부님, 보시요, 저 숲숙 샘물이 치유의 물이라지만, 이 강변에 큰 일이 일어 날 것 같소. 지형을 보시오. 만약 북쪽의 영국군이 내륙으로 내려온다면, 바로 이곳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천혜의 덫이 될 것이오.”
마치 1년 뒤의 새러토가 승리를 예견하는 제갈량 같은 프랭클린의 모습 이었다..
실제 1년 여 뒤인 1777년 10월, 이 강변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격돌했고 대륙군이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 대륙군으로서는 개전 후 가장 큰 승리였다. 더욱이 이 새러토가 전투는 몬트리올에서의 패배를 갚아주는 복수전이었다. 몬트리올에서 대거 내려온 존 버고인의 영국 대군을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과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의 대륙군이 유인 포위 작전을 펼쳐 6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영국의 명장이라는 버고인의 항복을 받아 내는 대첩을 거뒀던 것이다. (바로 아래사진, 당시의 항복 모습을 그린 역사화)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열강들은 이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북미 식민지 독립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프랑스에 가 있던 프랭클린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프랑스 인들을 자신있게 대륙군도 승리 할 수 있다며 설득 할 수 있었다.
영국 귀족들이 ‘치유와 휴양’을 위해 공을 들여 꾸민 이 온천장이, 불과 1년 뒤 자신들의 가장 비참한 항복의 땅이 됐던 것이다. 캐나다 사절단과 대륙군이 몬트리올과 퀘백에서 맛본 외교적·군사적 실패의 쓴잔이, 바로 이곳 사라토가 치유의 샘물가 에서 개전이래 최대의 대륙군 승리라는 단잔으로 바뀐 것이다.
5월 말의 신록이 우거진 새러토가 강변을 지나며 , 존 캐럴 신부는 노인을 위한 온천욕의 바람이 성사 될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면서도 노인의 예지력이 실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우리가 쫓겨 내려가지만, 주님의 때가 이르면 이곳의 물줄기가 거꾸로 흘러 승리의 소식을 실어 나를 것을 믿습니다”
이 영적 예감의 기도는 적중 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대첩이 이곳에서 일어 났던 것이다.

이같은 군사적 예언은 보름 쯤 뒤 일행의 고난 행군이 끝나가던 트렌턴의 강가에서 재현 된다. 델라웨어 강의 거친 물살이 부두의 말뚝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수만 명의 발소리 같기도, 혹은 누군가의 절규 같기도 하다며 노인은 잠시 귀를 막았던 것이다.
말 한대로 트랜턴 부두는 델라웨어 강의 ‘폭포선(Fall Line)’이다. 강물이 암반 지대를 지나며 급해지는 구간이라 실제로 물살이 거세고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가 큰 곳이었다.
이때 벤자민이 듣는 물소리는 단순히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곧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강을 건널 젊은 병사들의 환청처럼 들렸던 것이다. 실제 노인의 놀라운 예지력은 그해 76년 12월 크리스 마스,날 연전 연패 하던 워싱턴 장군의 대륙군이 얼어붙은 이강을 건너 영국군 대군을 습격 공격 해 대승를 거두는 결과로 나타 난다. 대단한 일이다. 워싱턴 장군 군대의 첫 승리였고, 집에 돌아 가겠다고 아우성 치던 대륙군 병사들을 붙잡아 둘수 있었던 최후의 묘수가 되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 부터 프랭클린이며 워싱턴, 아담스, 제퍼슨, 등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 들이 가장 크게 신경 쓴 것은 모병이었다. 영국에 맞서는 군대의 모집이 가장 큰 관건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군(Redcoats)에 맞서 농기구를 던지고 총을 든 젊은이들의 대륙군과 민병대 참여는 인류사적 기적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대륙군이 창설 되면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편입 됐다고 생각 하는데 독립 전쟁 당시 *민병대(Militia)와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명확히 구분되는 조직이었으며, 민병대가 모두 대륙군으로 흡수된 것은 아니었다.
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흡수되지 않았을까? 시스템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각 식민지는 하나의 ‘국가’처럼 행동했다. 자기 지역을 지키는 민병대를 중앙 정부(대륙회의)의 통제 아래 완전히 넘겨주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민병대원들은 생업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었기에 짧은 기간 자기 마을 근처만 지키고 싶어 했지, 멀리 타 주로 원정을 가는 대륙군에 입대하는 것을 꺼렸다.
따라서 민병대는 정면승부보다는 게릴라전, 보급로 차단, 지역 내 충성파(Loyalists) 감시 등에 특화되었다. 워싱턴은 민병대의 무질서함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역 방어를 맡아주었기에 대륙군이 주력 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요크타운이나 사라토가 전투 같은 큰 전투 에서는 대륙군이 중앙을 맡고, 양 날개나 후방 지원을 민병대가 맡는 식으로 협력했다. 전쟁 초기 ‘렉싱턴-콩코드 전투’ 등에서 활약한 민병대 중 크게는 연대 단위 집단, 혹은 개인 단위로 대륙군에 정식 입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민병대는 ‘자기 집 앞마당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대륙군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군대’였다.
당시 식민지 법에 따르면, 보통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백인 남성은 민병대에 소속되어야 했다. 국가가 총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머스킷 총과 화약통(Powder horn), 탄환을 구비해서 집에 두고 있어야 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지정된 날(Training Day)에 마을 광장에 모여 제식 훈련과 사격 연습을 했다. (이 날은 마을의 축제 같은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조직이 미닛맨 (Minutemen)이었다. 민병대원 중에서도 젊고 발 빠른 정예 요원들로, “1분(Minute) 안에 출동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초동 대응을 맡았다.
모든 장정이 민병대 대상이긴 했지만, 전쟁이 터졌을 때 모두가 동시에 전장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관리와 학생, 전문직 종사자는 병적에서 빠져 있었고 소집령이 내려졌을 때 가기 싫은 부유한 집 자제는 돈을 주고 대리인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퀘이커교도처럼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총 들기를 거부해 벌금을 내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당시 차별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 있었다.
대륙군이 75년 6월 창설될 초기 징집자들에게 봉급 이외에 ‘현금 보너스(Bounty)’와 ‘종전 후 토지 지급’을 약속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들에게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가치가 있는 매력적이 제안이었다. 민병대 명부에 있는 사람 중, 더 큰 뜻이 있거나 생계가 막막한 이들이 ‘급료’를 받고 정규군인 대륙군에 정식 입대(Enlistment)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개전 초기부터 어그러 졌다. 대륙회의는 돈이 없었다. 종이화폐(Continental Currency)를 찍어냈지만 초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폭락해 “한 푼의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워싱턴과 아담스등이 청년들을 설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이같은 ‘현실’이었다.
농번기에 집을 비우면,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가족이 굶어 죽는다. “조국을 위해 굶어 죽으라”고 말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입술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초기의 복무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겨우 훈련시켜 놓으면 연말에 “집에 가겠다”며 짐을 싸는 병사들을 보며 워싱턴은 “이것은 군대가 아니라 유령들의 모임이다”라며 탄식했다.
1776년 뉴욕 전투에서 패배하고 뉴저지로 퇴각하던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병사들이 밤마다 사라졌다. 워싱턴은 “매일 아침 점호 때마다 부대가 줄어들어 있다”고 기록했다. 제대로 된 방한화 군화가 없었기에 눈 위에 병사들이 흘린 피 발자국을 보고 부대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몰골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거의 ‘사기’에 가까운 설득이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은 그무렵 대륙회의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곤 했다.
“만약 내가 이런 고통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이 직책을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인(대륙회의)들은 뒤에서 말만 많고 보급은 안 해주는데, 현장의 병사들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 사이에서 ‘신의’ 그리고 신에 대한 기도로 신의 뜻을 물으면서 버텼다.
76년 말, 많은 대륙군 병사들이 그해 계약이 만료 되면 밀린 봉급을 받고 집에 가려 했다. 대륙군의 와해가 눈앞에 어른 거리던 그 무렵에 트렌턴의 기적과 같은 승전보가 울렸고 이를 기화로 워싱턴의 눈물어린 호소와 설득에 병사들과 의회(대륙회의)가 함께 움직여 3년 혹은 전쟁 종료 시까지 복무하는 장기 계약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모병은 너무도 지난하고 힘든 일이었다. 76년 겨울을 고비로 모병은 만족 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승 곡선을 그리며 이어 지고 있었고, 프랑스가 참전 하면서 부터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같은 기적의 모병에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이 대단했다. 당시 전역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열에 여덟 아홉 “영국 왕에 대한 저항은 곧 신에 대한 순종”이라고 가르쳤다. 하느님의 역사 하심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성공회 목사들 까지도 절반 이상 독립파로 돌아섰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는 단순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가까웠기에, 식민지의 젊은이들이 신을 의지 하고 전장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트랜턴 부두가로 돌아온다. 델라웨어 강물이 바위와 방파제에 부딪는 소리가 대륙군 청년 병사들의 함성과 같다고 말하는 벤자민이 눈은 게속 유장한 강물을 바라 보면서 옆에 서있는 신부에게 말했다.
“전쟁은 60대 노 정치인들의 탐욕 때문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 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신부님.”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죠, 이 세상 어느나라 치고 전쟁없이 건국된 나라는 없습니다. 성서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가요?
“남의 아들들은 감언이설로 사지로 몰아 대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내 꼴을 비웃는 말 같아서 그러네. 신부님.”
“감언 이설 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트랜턴 강가에 섰을 때 실은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인간적 고뇌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 이었다. 젊은 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라고 요구 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인간적 부끄러움이 그를 한창 엄숩했던 시점이었다.
바로 아들 윌리엄 프랭클린과의 일 때문이었다.
트렌턴으로 오기 전 노인과 신부는 퍼스 엠보이에 총독 관저에 연금돼 있는 총독 윌리엄 프랭클린을 만나고 왔다. 말한대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장남 이다.
필라로 가는 마지막 노선인 바지선 배를 타기 위해선, 트랜튼 부두로 와야 했는데 길목에 버스 엠보이가 있었다. 버스엠보이는 뉴저지 주도의 하나로 총독관저가 있는 곳이었다.
1776년 당시 뉴저지는 아직 동저지(East Jersey)와 서저지(West Jersey)의 전통이 남아 있어 주도가 두 곳이었다. 퍼스 앰보이(Perth Amboy)와 벌링턴(Burlington)이 번갈아 가며 수도 역할을 했다. 두 도시의 중간, 강가에 있는 트렌턴이 뉴저지의 단독 주도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인 1790년이다.
1776년 5월 그날은 그들 부자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날이었다.
아들 윌리엄은 그때 1월부터 이미 뉴저지 애국파 세력에 의해 가금(House Arrest, 연금) 상태였다. 그가 갖혀 있다는 소식은 몬트리올로 떠나기 전 알았지만 올바니에서 본 신문에는 그의 처지가 연금이 아니라 본격 구금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기사가 있었다. 윌리엄은 연금 상태에서도 비밀리에 영국 왕실에 첩보를 보내려다 적발됐다는 것이었다. .
일행이 퍼스 엠보이를 지난 때는 5월 25일이었다. 존 신부가 길가의 퍼스 엠보이 이정표를 보며 “잠깐 들러 아드님을 만나보시지 않으렵니까?” 하고 조심스레 운을 떠 봤지만 ‘그는 내 아들이 아닌지 오래 됐다며 말도 꺼내지 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때 뉴저지는 뉴욕과는 달리 안전상의 문제는 없었다. 어쨌든 독립파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이었기 때문이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덜컹 거리면 달렸고 트랜턴으로 가기전 마지막 유숙지인 우드 브릿지에 도착해 여관에 들었다. 우드브리지는 퍼스 앰보이와는 바로 이웃으로 당시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잇는 길목이자 트랜턴으로 가는 마지막 타운 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 그리고 벤자민의 몸에서 나는 여전한 약재 냄새. 70세 노정객이 통풍으로 부어오른 다리를 올리고 낡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을 때, 밖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무사히 우드브릿지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시오, 대령, 굳이 이렇게 오지 않아도 될텐데…”
문에 들어서 프랭클린에게 거수 경례를 했고 박사가 엉저주춤 일어서 손을 잡아 준 중년의 군복 남자는 이지역 민병대 대장 허드 나다니엘 대령이었다.
이곳에도 자주 강연을 왔던 프랭클린 박사와는 구면 이었다. 타운 입구에서 민병대원을 만났는데 그가 급히 달려가 박사의 우드브릿지 도착을 알린 모양이다.
우드브리지 출신 허드 대령은 독립전쟁 전에는 상인(Merchant)이자 지역 사회의 유력 인사였다. 당시 민병대 간부들은 대개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 상인이나 지주 출신이 많았는데, 나다니엘 허드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전형적인 독립파 ‘시민 군인’이었다. 독립 열기가 고조되자 뉴저지 민병대(Militia)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고, 그 공로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얼마 뒤 대륙군 준장(Brigadier General)의 지위까지 올랐다.
허드는, 실제로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을 체포하고 연금하는 임무를 직접 수행한 인물이다. 이날 만남 얼마 뒤인 1776년 6월 뉴저지 주 의회의 명령을 받은 나다니엘 허드는 무장한 민병대를 이끌고 퍼스 앰보이의 총독 관저로 가 윌리엄을 체포 했고 얼마 뒤에는 커네티컷 감옥에 수감 시킨 주역이 된다.
프랠클린 박사의 건강에 대한 안부 인사가 끝나고 뉴저지 정세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허드는 윌리엄 주지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가 굳이 찾아온 용건이었다.
정식 군복이라기엔 어딘가 투박한, 하지만 정갈하게 닦인 상인 시절의 장화와 그 위에 덧입은 민병대의 푸른 코트. 나다니엘 허드는 이제 장부 대신 머스킷 총을 들고 왕실 총독의 문을 막아서고 왕당파 총독을 압박하고 있는 독립의 선봉군이었다.
“박사님, 저는 우드브리지에서 잡화를 팔던 상인이었지만, 이제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는 군인입니다. 아드님이신 윌리엄 총독 관저 주변은 제 부하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습니다만, 총독 께서는 여전히 런던에서 올 함대만 기다리며 요지부동입니다. 며칠전 만해도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를 소집 한다는 밀서를 몇 안되는 왕당파들에게 반출하려 했습니다. 이건 반역입니다. 이제 저희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마침 의회도 독립파 리더인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박사를 중심으로 새로 결성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뉴저지가 독립 선언에 “가장 늦게 참여한 주”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내부의 강온파 정치적 교체 작업 때문이었다.
1776년 초까지만 해도 뉴저지 의회의 주류는 영국과의 화해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뉴저지는 지리적으로 영국 왕당파의 본거지였던 뉴욕과 혁명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매우 조심스러웠고, 주민들의 의견도 갈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퀘이커교도나 성공회 신자들이 많아 급진적인 독립보다는 영국 체제 내의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가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 독립파 (Patriots)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이 나서 소극적이던 뉴저지 여론을 독립 지지로 돌려세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였던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는 “독립을 위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며 분연히 일어선 뉴저지 독립 운동의 결정적 인물이다. 독립선언서 서명자이기도 하다.
실제 얼마 뒤 프랭클린이 필라에 도착한 직후인 1776년 6월 초, 그를 중심으로 한 강경인 독립파들이 주도해 새로운 ‘뉴저지 지방 의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미온적인 대륙회의 대표들을 해임하고, 존 위더스푼을 포함한 강경 독립파 5명을 필라델피아로 새로 보냈다. 이 새로운 대표단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것이 6월 28일이었고, 이들이 합류하면서 뉴저지는 비로소 독립 선언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이는 며칠 뒤, 몇 주 뒤의 일로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프랭클린 박사를 찾아온 때는 아직 혁명파가 완전히 주정부를 장악하기 전으로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아무리 반역자라 하더라도 독립진영의 좌장 벤자민 플랭클린의 친아들이 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한 최종 처분을 박사와 상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박사님의 아들이지만 더 이상 왕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둘 수는 없다.’는 대령의 말에 70세의 노정객은 이미 아들과 정치적으로 절연한 상태였지만, 친아들을 체포하겠다는 군인 앞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법대로 집행하시오 (Do your duty according to the law) 대령. ”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존 캐럴 신부는 ‘가족의 해체’와 ‘국가의 탄생’이 충돌하는 비극의 최단 거리 목격자가 된 셈이었다.
존 신부는 문득 ‘ 자유를 위해 아비가 아들을 내주어야 하는 이 땅의 운명이 성경 속 아브라함의 시험 만큼이나 가혹하구나” 고 느껴야 했다.
“이것이 진정 천주께서 원하시는 공의로운 나라의 모습인가” 하는 내면의 독백이 솟아 올랐다.
그런데 박사는 단호 했지만 오히려 대령이 유화적으로 마지막 만남을 요청해 왔다.
“박사님, 저희들은 박사님의 열변을 듣고 대륙군에 합류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을 감동시킨 그 열변으로 마지막으로 아드님을 한번만 더 설득해 주십시오. 박사님의 친아드님을 반역자로 체포하기는 저희들도 정말 싫습니다.”
“이사람 참 내 아픈 곳을 너무도 깊이 찌르는 구먼, 글쎄 소용이 없대두… 대령, 나는 몬트리올의 얼어붙은 강가에서 여기 이 천주교 신부님의 등에 업혀 살아 돌아왔다네. 그런데 정작 내 아들은 따뜻한 관저 안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구료. 자네의 총보다 무서운 것이 그 아이의 고집이라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보시고 최후의 설득을 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박사가 옆의 신부를 쳐다 봤다. 신부는 상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