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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9)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진흙탕의 세뇌르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

안동일 작

1776년 5월11일, 세인트로렌스 강가 몬트리올 부두(피어)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필라로 돌아가는 밴자민 프랭클린을 배웅 하기 위해서 였다. 5월 인데도 날이 흐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존 캐럴 신부가 벤자민 프랭클린 노인을 부축하고 서 있었고 찰스 캐럴, 사무엘 체이스, 리빙스턴 대령, 루이 고슬랭 그리고 예수회 조나단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찰스 캐럴이 프랭클린에게 “박사님께서는 필라델피아로 먼저 돌아가 이 비참한 현장을 의회에 보고해 전면 철수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추후 방도를 빨리 마련해야 하며 더 화급하고 중차대한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어 그를 서둘러 피신시기는 것이었다. 사실 프랭클린으로서는 이곳에서 더 할일이 없었다. 그리고 천연두가 없었다 하더라도 길어야 보름 정도 머물겠다고 생각 하고 온 방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서둘러 몬트리올을 떠나는 이면에는 단순한 그의 노환과 천연두 이상의 사절단 전체의 전략적 판단과 공포가 함께 서려 있었다. 가뜩이나 통풍으로 고생 하는 당시 70세의 프랭클린에게 천연두 감염은 곧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몬트리올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사절단이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천연두가 대륙군을 집어삼키기고 있는 것을 보고, 또 그곳의 민심을 읽기 시작 하면서 프랭클린과 캐럴 등은 직감했다. 이곳은 이미 군사적으로나 위생적으로 지옥이 되었음을… 해결책은 피해를 최소화한 전면 철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대륙군 형편에 다른 곳 제쳐 두고 전면적인 대량 지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 독립 운동의 좌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프랭클린이 여기서 혹시나 천연두 때문에 변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 피어오른 독립 혁명의 불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위기가 초래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전언에 의하면 독립선언의 내용과 시기를 놓고 대륙회의 내에서 막바지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어 좌장 벤자민의 역할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천연두와의 싸움에서 둘째 아들을 어릴 때 천연두로 잃어 남다른 식견이 있는 벤자민은 작으나마 도움을 주려 했지만 케럴 등은 노인을 회색 수녀원 마당에 세워진 병동 막사에는 접근도 못하게 했다. 늦은 저녁 멀찌기 서서 보고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두법과 제수이트 치료법이 효과를 보여 이제 이래 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도 차도가 있는 이들이 많이 나타 났다는 점이다. 바늘 끝을 구부려 실시하는 인두법에는 벤자민의 아이디어도 한몫 했다. 공연히 ‘닥터 프랭클린’이 아니었다.

정규 교육이라곤 2년 밖에 받지 못했지만 프랭클린은 대륙에서 가장 박학하고 깊이 있는 이로 통했다. 독학으로 미국 계몽주의 철학의 비조가 됐을 뿐더러  피뢰침을 발명 해  극심했던 벼락의 피해를 막았고 열효율 높은 스토브를 발명 해 혹독한 북동부 식민지의 겨울을 이기게 했으며 다촛점 안경렌즈로 노안의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그의 이런 실제적인 공로를 들어 영국의 옥스포드며 미국의 하바드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로 보답했기에 그는 박사가 틀림없었다. 대륙회의 내에서도 그에 대한 호칭은 ‘닥터 프랭클린’ 이었다. 그는 박사라는 호칭을 계면쩍어 하면서도 은근히 즐겼다.

프랭클린이 돌아가는 길에는 존 캐럴 신부가 동행했다. 캐럴 형제는 프랭클린을 보호하기 위해 이번 귀경길에 자신들의 인맥과 재력을 총 동원했다. 존 캐럴은 자신도 남아 천연두 환자를 돕겠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노인을 보필해야 했고 지난한 눈치 끝에 회색 수녀회 병동에 합류한 몬트리올의 예수회 사제들 마저도 ‘자네가 여기 있으면 나중에 주교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된다’ 면서’ 그를  1차 귀환 대열에 합류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신의 한수가 된다. 이 귀경길에서 존은 벤자민 노인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고 몇 달 뒤 초대 프랑스 대사로 부임할 수 있을 만큼으로 건강을 회복 시켰다.
프랭클린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미국 독립 후 존 캐럴이 미국 최초의 가톨릭 주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추천을 하게된다. 몬트리올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이 ‘우정의 생존 작전’이 미국 종교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을 태운 루이 고슬랭의 신형 개량 바투 배가 세인트로렌스 강가에서 떠날 때, 찰스 캐럴은 강풍에 코트 깃을 세우며 그를 배웅했다. “닥터 프랭클린, 이곳의 지옥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셔서 우리의 독립을 굳건하게 세상에 알려주십시오.”
프랭클린의 마른 손을 잡았던 캐럴의 손에는 이미 병사들을 돌보느라 묻은 약재 냄새와 석회 가루가 배어 있었다.
“여보게 찰스, 부디 몸조심하시게, 공연히 자네를 끌어 들여 이 고생을 하게 만들고 나만 먼저 떠다는 구료, 내가 평생 성당 근처에도 안 가던 늙은이였는데, 자네와 존 신부가 내미는 따뜻한 수프와 헌신적인 간호를 받다 보니… 내 몸의 절반은 이미 가톨릭 신자가 된 것 같네. 나머지 절반은 이 지독한 통풍이 가져갔고 말이야! 크크크.”  몹시  아픈 상태 였지만 벤자민의 목소리에는 아직 찌렁찌렁 힘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 자기 가족의 예배석(Pew)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이신론자(Deist)였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기적이나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였다. 특정 교리에 얽매이는 것을 질색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반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한 말이 역사적으로 참 절묘한 농담인 것이, 실제로 몬트리올 원정 실패 이후 프랭클린의 가톨릭에 대한 태도는 180도 바뀐다. 몬트리올의 그 지옥 같은 추위와 질병 속에서 자신을 극진히 간호하고, 필라델피아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해 준 캐럴 형제의 영향 이었다.
프랭클린은 이 경험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헌신적이고 애국적인 시민”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파리에 대사로 갔을 때, 교황청 사절과 협상하며 “미국 가톨릭의 수장은 반드시 미국인(존 캐럴)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밀어붙여 미국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 했던 것이다.

당초에는 귀경길 묘사를 생략하고 시간을 뛰어 넘어 미국 천주교사의 최대 경사이자 큰 분수령 이었던 교구 설립과 주교 장립의 감격적  광경을 먼저 묘사하려 했는데 이때 , 76년 5월 초순, 베자민과 존 신부의 몬트리올 필라의 여정 또한 많은 의미와 감동을 던져 주는 일이었기에 먼저 전하도록 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하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회심에 가까운 심경의 변화를 겪었을까? 그 매개와 종착점은 프랑스다.
사실 그때 떠나기 전날, 벤자민은 진작 부터 올라오면서도 그랬지만 “작은 문이 닫히면, 더 큰 문을 보라”는 얘기로 프랑스를 직접 공략 하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쳤다.
“찰스, 그리고 존, 퀘벡의 주교가 우리를 외면하는 것은 그가 영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 일세. 하지만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은 다르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은가.”
캐나다라는 ‘작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벤자민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라는 ‘거대한 문’을 열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찰스, 존, 자네들 두 사람이 프랑스에서 배운 것은 신학과 법학 뿐만이 아니었네. 그들의 자존심과 영국에 대한 해묵은 원한을 배우지 않았나? 우리는 기필코 이를 이용해야 하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도 그것이지만 프랑스를 끌어 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 전쟁을 이길 방도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닥터 프랭클린이 기필코 솔본느에 가야 겠는데 자네들도 함께 가려나? “
“ 물론이죠 가야하면 가야 겠죠. 박사님 파리 솔본느 에서도 명예 학위 받으셨지요?”
“얘기만 있었지 정작 받지는 못했네.”
그랬다. 하바드와 옥스포드 뿐 아니라 예일 메리엔 퀸 ,유팬 등 명문교에서 그에게 명예 학위를 주려 애써서 성사 시켰고 파리의 솔본느와 프랑스 왕립학회도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은 67년 런던에 머물던 중 친구인 경 린드(Sir John Pringle)와 함께 약 한 달간 파리를 여행했다. 이때 루이 15세를 만나기도 했고,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과학적 명성을 확인했다. 1769년에 두 번째 방문을 했는데 이때는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만나 교분을 나눴다.
이 두 번의 짧은 방문 덕분에 1776년 그가 ‘미국 전권대사’로 다시 나타났을 때, 프랑스인들은 그를 낯선 이방인이 아닌 “이미 검증된 철학자이자 친구”로 열렬히 환영할 수 있었다.

프랭클린의 불어 실력은 한마디로 ‘독학으로 이룬 실용적인 수준’이었다.  20대 때에 필라에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와 함께 프랑스어를 독학했다. 주로 읽기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프랑스 서적을 탐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정식 대사 부임 당시 그의 말하기 실력은 다소 서툴렀고 발음도 미국인 특유의 억양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서툰 불어를 숨기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소박하고 정직한 미국 농부’ 같은 이미지로 메이킹하는 데 활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불어로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격식 있는 문서나 중요한 편지는 항상 주변의 도움을 받아 문법을 교정했다.
프랭클린이 파리에 가기 전부터 지인이 많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과학적 성취 때문이다.  그의 번개 실험 보고서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Philosophes)은 프랭클린을 ‘계몽주의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여겼다. 덕분에 1776년 부임했을 때, 이미 파리의 사교계와 학술계에는 그를 도울 준비가 된 지지자들이 가득했다.

이같은 파리행을 결정적으로 결심하게 한것이 몬트리올의 고난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구에 회자하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The Autobiography)>에는 몬트리올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프랭클린이 자서전 집필을 1757년(그의 중년 시절)까지만 자세히 기록하고, 그 이후의 혁명기 활동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그가 쓴 서신과 보고서에는 몬트리올에서의 고생이 생생히 담겨 있다. 그는 찰스 캐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지옥 같은 여정에서 당신 형제(존과 찰스)가 보여준 헌신적인 간호가 아니었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한편 기록에 따르면 존 캐럴은 자신의 몬트리올 임무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일찍 깨달았다. 믿었던 캐나다 사제들이 한자리에 같이 앉는 것 조차 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간호하며 동행하는 것을 신이 부여한 자신의 또 다른 사명으로 여겼다.
존이 남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 벤자민이 “존, 자네는 여기 남아서 벽에 대고 설교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이 노인을 살려서 필라델피아로 데려가는 게 천주께 더 큰 봉사를 하는 걸세”라고 설득 했는데 천주께 봉사라는 말에 마음을 궅혔단다.   존 캐롤 대주교(후일)의 회상록에 나온다.

찰스와 체이스를 남겨 두고 배 난간에 오를 때 프랭클린은 통풍과 종창으로 거의 걷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존 신부는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한손은 노인의 겨드랑이에 끼어 옆에서  안듯이 부축해야 했다. 그 꼭 잡은 따스한 손은 여행 일정 내내 노인의 가슴에 훈풍을 불게 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의 귀경길(필라가 당시 수도) 은 당시의 교통 수단과 프랭클린의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매우 고되고도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
몬트리올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타고 내려가 리슐리외 강(Richelieu River) 을 거쳐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   위 사진) → 조지 호수(Lake George) → 허드슨 강(Hudson River) 상류 → 알바니에 도착하는 수로 여행이 앞부분의 일정이었다.  당시 이 수로 체계는 북미의 핵심 전략 요충지였다.

루이 고슬랭 같은 현지 사정에 밝고  고향서부터 바다와 친한 인물이 제공한 ‘첨단 배’ 덕분에, 70세의 병든 프랭클린은 험난한 육로 대신 물길을 이용해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챔플레인 호수에서 허드슨 강으로 넘어가는 구간의 고생을 이 배가 덜어주었다.
이들의 여정은  후반부인 올바니, 나약, 트렌튼, 필라 여정을 합쳐 도합 3주 가까이 소요되었다. 올라 올때 보다는 열흘 이상 단축 시켰다.
일행이 탄 바투선 고슬랭호는 두개의 돛이 달려 있고 선실도 마련돼 있는 중형 어선급으로 개량된 배였다. 평평한 바닥이었지만 이물(배 앞부분)과 선저에 삼각 철판을 장착해 얼음을 부술 수 있었고 속력을 빨리 낼 수 있었다.

호수와 강을 건너며 존 캐럴 신부는 프랭클린의 곁을 지키며 약을 달이고 식사를 챙겼다.  프랭클린은 고통 속에서도 고슬랭이 구해준 배의 효율성을 관찰하며 “역시 과학이 인간의 고통을 줄여주는군”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배들이 움직이는 원리는 오직 세 가지였다. 바람과 물흐름 그리고 인력 이었다. 범선은 돛을 달아 바람의 힘을 이용했고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갈 때는 강의 흐름을 탔다. 바람이 없거나 거슬러 올라갈 때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젓거나(Oars), 얕은 곳에서 긴 장대로 강바닥을 밀어(Polling) 이동했다.

선원 4명과 승객 두명이 탄 고슬랭호는 물살의 출렁임과 노 젓는 소리, 그리고 펄럭이는 돛 소리가 가득한 정적인 공간이 되었다. 배안의 공용어는 불어 였고 그 배의 종교는 단연 천주교 였다.
네명의 노꾼은 모두 고슬랭이 소개한 같은 고향의 프랑스인 민병대원들이었다. 두 사람은 알바니 까지만 동행 했고 두 사람은 육로에서는 마부 노릇을 해 가면서 필라 까지 일정을 함께 했다.
일행은 알바니 까지 고슬랭호를 이용했고 배는 다시 몬트리올로 되돌아 갔다. 알바니에서는 리빙스턴 대령의 안배로 그의 고향 친지들로 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하루를 쉬었다. 거기서 부터는 역시 리빙스턴 가에서 준비한 범선을 타고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 나약 강변 까지 내려 왔다.
뉴욕주는 당시 아직 영국군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뉴욕시와 대서양 연안을 막강한 수륙 양군 병력으로 위협하던 시기라, 이들은 허드슨 강을 따라 조심스레 나약 부근 까지 내려온 뒤 그곳에서 내륙으로 올라 우회로를 이용해 마차로 뉴저지 트랜턴으로 남하했다.
트렌턴부터는 다시 중형 카누형 범선을 이용해 델라웨어 강을 타고 내려가 필라델피아 동쪽 관문 마켓 스트리트 부두를 최종 기착지로 했다.
필라델피아 동쪽을 흐르는 델라웨어 강 하류는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은 더 남쪽이지만, 마켓 스트리트 부두를 포함해 몇몇 피어가 도시의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피어는 델라웨어 강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는 도시의 중심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위 사진)이 1723년, 17세의 나이로 고향 보스턴에서 가출해 뉴욕을 거쳐  처음 필라델피아에 발을 디뎠을 때 도착한 곳도 바로 이 마켓 스트리트 부두였다. 당시 그는 주머니에 빵 세 덩이를 찌른 남루한 모습으로 이 친선의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내렸었다.
53년이 흘러, 이제는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노정치가가 되어 죽음의 문턱 까지 갔다가 살아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다시 이 부두로 돌아오는 장면은  본인 뿐 아니라 옆에서 보는이, 나중에 얘기를 듣는 이 모두에게 감격 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배가 델라웨어 강의 물살을 가르며 마켓 스트리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강물에 비춰 질 때 프랭클린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존 캐럴에게 말했다.
” 신부님,  결국 우리가 돌아왔구려. 50년 전 저 길을 걷던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소?”
존 캐럴 신부의 부축을 받으며 배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부두 근처의 인부 들이며 시민들이 달려와 모자를 벗으며 깍 듯이 인사를 던졌다.
“박사님 이제 돌아 오셨군요. 수고 하셨습니다.”
친근한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존경의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가에 이슬이 맺혀 저 멀리 그가 평생을 보낸 마켓 스트리트의 자신 집 방향을 응시하면서 존 신부의 손을 다시 꼭 잡는  모습은 큰 울림을 던져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이 벤자민이 존 신부를 부르는 호칭이 존에서 신부님으로 바뀐 것에서 시사하듯 천주교 신앙에 대한 그의 심경은 엄청나게 변모했다. 존 신부의 미사와 기도 때문이었다.

존 신부는 일정 내내 매일 새벽 미사를 올렸다. 어떨 때는 고슬랭, 드골과 함께 였고 어떨 때는 혼자서도 미사를 올렸다.  혼자서도 미사를 올릴 수 있는지 궁금한데 교법에는 그렇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법상 미사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당한 이유(여행, 질병, 고립 등)가 있을 때는 사제 혼자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이를 사적 미사(Missa Privata)’라고 부른다.  신심 깊은 사제들은 “비록 눈에 보이는 신자는 없어도, 미사 중에는 천사들과 모든 성인이 함께하며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여행하는 신부들에게는 ‘휴대용 미사 도구 세트’가 필수였다.  18세기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나 여행하는 사제들은 작은 상자에 성배(Cup), 성반(Plate), 작은 미사 경본, 그리고 축성된 ‘제대포(Altar Stone/Cloth)’를 넣어 다녔다.
마땅한 장소가 없다면 숙소의 깨끗한 탁자나, 심지어 야외의 평평한 바위 위에 제대포를 깔고 미사를 올렸다. 북미 대륙을 개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기록을 보면, 카누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아침이면 강가에 내려 거친 돌을 쌓아 제대를 만들고 미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많다.

캐럴(John Carroll) 신부는 이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일행들이 깨기 전이나 이동 준비를 마칠 즈음 숙소 한쪽에서 경건하게 미사를 올렸다.
이른 새벽, 여관방의 낡은 탁자 위에 하얀 리넨 천을 깔고, 손때 묻은 은제 성배를 꺼내는 존 신부의 뒷모습은 플랭클린에게 특별히 경이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창밖으로는 말들의 울음소리와 마부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세속적인 공간이, 나지막한 라틴어 기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거룩한 성소’로 변했다. 자신을 지극히 간호하고 위하는 신부가 이런 사적 미사를 게을리 않는 것을 보고 벤자민의 심정에는 변화가 오기 시작 했음은 틀림 없다.
프랭클린처럼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에게도 누군가의 ‘변함없는 경건함’은 새로운 경험 이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깊은 교분을 맺었던 조지 휫필드 목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휫필드는 벤자민에게 경탄과 놀램을 던져 주었지만 경건함과 진정성은 존 신부를 따라올 수 없었다. 대각성 운동의 불길을 몰고온 휫필드는 이신론자인 벤자민에게 계속 불같은 성령을 던져 주려 했지만 벤자민은 빙긋이 웃기만 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평생 종교적 도그마(교리)에는 회의적이었지만, ‘덕행’과 ‘선행’에는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인물이다.
고된 여행길에서도, 심지어 아픈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피로함 속에서도 이른 새벽 홀로 미사를 올리는 모습은 벤자민에게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지독할 정도의 성실함과 자기 절제’로 비쳐졌다.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저토록 움직이게 하는가?”라는 경외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특별히 종교,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부터 존 신부가 곁에서 나직하게 올리는 기도 소리는 벤자민에게 심리적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신앙을 넘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Agapē)이 그 미사와 기도 속에 녹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존의 사촌 동생인 찰스 캐럴이 몬트리올에서 대륙군 병사 환자 들에게 보였던 아가페도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은 열병으로 뜬눈을 지새우다 새벽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라틴어 소리에 눈을 떳다. 희미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작은 빵과 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은 신부의 뒷모습.
자신을 밤새 간호하느라 퀭해진 눈을 한 신부가 ‘세상의 평화와 이 병든 노인’을 위해 정성을 다해 미사를 올리는 그 뒷모습…
벤자민은 그때 깨달았을지 모른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명 신이 살아 숨 쉬고 있구나.” 벤자민은  “나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스러운 영역”을 인정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가톨릭은 ‘타락한 교황청의 종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존 캐럴 신부를 보며 가톨릭의 사제가 누구보다 애국적이고, 누구보다 헌신적이며, 누구보다 지적일 수 있음을 목격했다. 그런 사제를 진심으로 따르는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고슬렝과 드골 에게서 여실히 보았다.

애국과 헌신 그리고 지성과 인긴미는  두 사람의  여정 가운데 트랜튼 에서  또 한번 빛난다.

트렌턴(Trenton)은 뉴욕 뉴저지를 가로질러 내려와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 다시 배를 타기에 가장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였다.  트렌턴은 델라웨어 강의 ‘폭포선(Fall Line)’이라 불리는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까지는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지며 조수의 영향을 받는 구간이라, 큰 배가 원활하게 다닐 수 있었다.
트렌턴과 델라웨어 강이야 말로  같은 해(1776년) 크리스마스에 조지 워싱턴이 얼음 강을 건너 역사적인 승전보를 울리게 될 바로 그 장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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