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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8)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 캐럴  3 –

안동일 작 

진심과 진실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
1776년  봄 대륙군에 합류한 캐나다 몬트리올의 민병대원들이 천연두에 걸려 다수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때마침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타나 그들을 병마의 신음에서 구한 찰스 캐럴의 기적 같은 헌신은 주변을 감동 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당사자인 민병대원들이 감동했고 그들의 감동은 몬트리올의 사제와 수녀들에게 전해졌고 캐나다에 함께 간 독립의 좌장 벤자민 프랭클린이 감동했고 또 이 감동은 프랑스 국왕과 총리와 그리고 교계 지도자들 에게도 가감없이 전달 돼 2년 뒤 프랑스의 전격적인 미국 독립전쟁 참전의 밑걸음 으로 이어진다. 이 또한 우연이라고 보기엔 그 전개 과정이며 그 결과가 너무도 극적이며 절묘하다. 파면 팔 수록 찰스 캐럴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때 찰스 캐럴이 루이 고슬랭을 부관역 조력자로 맞아 들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몬트리올 시내에 있는 회색 수녀회(Grey Nuns, Soeurs Grises)를 찾은 일이었다. 천연두와의 싸움에는 그 수녀원의 도움이 너무도 절실 했기 때문이다.
실은 천연두 일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꼭 찾고 싶은 곳이었다. 1770년대 당시 영국령 식민지(메릴랜드, 필라델피아 등)에는 수녀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가톨릭이 불법이거나 억압받던 시기였기에 수녀원 설립은 불가능했기에 수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당시 식민지의 가톨릭 집안 딸들이 수녀가 되려면  유럽(주로 벨기에나 프랑스)으로 건너가 그곳 수녀원에 입회하는 길 밖에 없었다.   미국 최초의 수녀원(가르멜 수녀회)은 독립 전쟁이 끝난 후인 1790년에야 메릴랜드 포트 토바코에 세워진다. 이 또한 찰스 캐럴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에 반해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프랑스령 퀘벡, 몬트리올에는 그 무렵 수녀회가  있었다. 우르술라 수녀회, 노트르담 수녀회, 그리고 회색 수녀회가 이미 자리를 잡고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회색 수녀회는 당시 북미 대륙에서 여성이 주도적으로 사회 복지와 선교를 담당했던 거의 유일한 형태의 조직이었다. 정식 명칭이 몬트리올 회색 수녀회(Grey Nuns of Montreal, Soeurs de la Charité de Montréal)로 명명돼 있는 이 수녀회는 1737년 몬트리올의 여장부 마르그리트 데 유빌(Marguerite d’Youville)에 의해 설립됐다.

설립 부터 당시 기준으로 매우 파격적이었다. 초기에는 정식 수녀회가 아닌 자선 단체로 시작했는데, 몬트리올 사람들의 냉소와 조롱이 이 여성들을 종교적으로 더욱 단결하게 만들었고 ‘봉쇄’되지 않은 수녀원 으로 발전 하게 했다. 당시 대부분의 수녀원은 담장 안에서 기도만 하는 ‘봉쇄 수녀원’이었으나, 회색 수녀회는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 환자, 유기견, 심지어 죄수들 까지 돌봤다.  회색 수녀회의  큰 특징은 ‘삶의 풍파를 겪은 여인들’의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설립자 유빌 부인(Madame d’Youville) 자체가 두 아이를 키운 과부였다. 그녀의 영어식 이름이 마가렛 유빌이다.

일반적인 처녀 수녀들이 ‘순결한 신부’의 이미지라면, 회색 수녀들은 ‘세상의 고통을 아는 어머니’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들은 자식을 잃어보았고, 가난을 겪어보았기에…
지금 들어도 어색한 ‘회색(Grises)’이라는 이름은 원래 “술에 취한(tipsy)”이라는 뜻의 속어로 비난과 조롱이 담겨있는 이름 이었다. 설립자 마르그리트 유빌의 죽은 남편이 밀주 사업을 했던 것을 비웃으려 사람들이 붙인 멸칭이었다. 당시 몬트리올 사람들은 그녀와 동료들을 불어로  ‘술 취한 여자들(Les Grises)’이라고 불렀다.  마르그리트는 이 모욕적인 단어(Grises, ‘회색’이라는 뜻도 있음)를 겸허히 받아들여, 수녀복 색깔을 회색으로 정하고 단체 이름도 ‘회색 수녀회’로 공식화했다. 비난을 영광으로 바꾼 셈이다.

회색 수녀회는 자급자족하는 여성 공동체였다. 정부와  중앙 교단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에 수녀들은 농사, 바느질, 심지어 군대 납품용 의복 제작과 비스킷 제조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수녀원을 운영했다. 그후  몇몇 굵직한 여성 독지가들의 희사와 유산 상속으로 커다란 농장과 저택을 넘겨 받아 운영하게 되면서 유빌 원장과 동료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독립적인 ‘여성 경영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몬트리올 사람들에게 이들은 ‘도시의 어머니’ 같은 존재로 떠 올랐다.  법적으로는 여성의 권리가 제한되었지만, 이 수녀회는 거대한 토지를 관리하고 사업을 운영했기에 지역 상권과 정치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주로 신심 깊은 가문의 딸들이 입회했지만, 전쟁 중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나 갈 곳 없는 여성들이 공동체에 합류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들에게 수녀원은 종교적 귀의처이자, 전쟁 통에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요새였다.
당시 회색 수녀회의 수녀가 되는 길은 엄격하면서도 전략적이었다. 지참금(Dowry) 제도를 택했는데 원칙적으로 입회 시 수녀원의 생활비로 쓰일 일정 금액의 지참금을 내야 했다. 이는 수녀원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회색 수녀회는 서민층 여성들도 대거 받아들였다. 교육을 받은 수녀들은 행정과 교육을 맡고, 기술이 있는 수녀들은 실질적인 노동을 담당하며 공동체를 유지했다.

당시 여성에게 이 수녀원은 결혼 이외에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직 경로이기도 했다. 전쟁 (영불 7년 전쟁) 중에는 헌신적인 간호 인력으로서 군 지휘관들에게도 존경받는 위치로 자리 매김 했다.  1747년부터 유빌 수녀는 경영난에 처한 몬트리올 종합병원(Hôpital Général) 을 맡아 운영했던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치열하던 때에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적군인 영국군 부상병들까지 차별 없이 치료해  찬사를 받았다.
1765년 병원에 큰 불이 났을 때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병원을 세웠다.

이런 남달리 찬란한 역사를 지닌 이들의 ‘몬트리올 총제 병원(Hôpital Général de Montréal.  맨위 사진) 은  1776년 당시 에도  몬트리올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복지 및 의료 기관 이었지만 주교의 엄명 때문에 대륙군 천연두 치료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찰스는 깨끗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고슬랭과 함께 마차를 타고 수녀원으로 향했다.
“사람은 처음 만날 때는 옷차림으로 판단 되고 헤어질 때는 그의 지성으로 기억 되는 법”이라는 부친의 평생 조언에 따른 일이었다. 찰스 옹은 특히 무언가 부탁하러 갈때는 추레한 몰골로 가서는 안되다고 누누히 강조 하곤 했다.
회색 수녀회는 캐럴의 숙소에서 그리 먼곳이 아니었다. 센트루이스 거리를 따라 가면 15 분 쯤 걸리는 거리였다. 예상한 대로 노틀담 성당 처럼 문전 박대를 하지는 않았다.  병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기다리라고 했다.

수녀원의 부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병원의 운영 책임을 지고 있는 마리-안 코테(Marie-Anne Coiteux) 수녀는 매우 강단 있고 실무적인 인물 이었지만 브리앙 주교를 매우 따르는 인물이어서 일이 쉽지 많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수녀회는 가브리엘 멘션이라 불렸던 큰 병원 건물을 앞에 두고 뒷쪽에 예배소과 학교, 주거공간으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공동체의 모습에 가까웠다.
병원 이자 수녀원 입구인 현관에 들어 서면 병원은 왼쪽에서 시작 됐고 수녀원 쪽 공간으로 격자무늬 나무 창살이 달린 작은 접견실이 있었다. 봉쇄 수녀원은 아니었지만, 외부인과 수녀들이 대화하는 공식적인 장소였다. 은은한 약초 향과 갓 구운 빵 냄새가 섞여 났다. 찰스와 고슬랭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현관 앞 공터가 매우 넓은 것을 보고 서로 뒤 고개를 끄덕였었다. 병원 막사를 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

잠시 그곳에 앉아 기다리자 두명의 나이 든 수녀가 나왔다. 안내를 맡은 젊은 수녀가 급히 달려가 메릴랜드의 찰스 캐럴이 왔다고 전한 모양이다. 안내 수녀는 고슬랭과는 아는 사이 인듯 싶었다.
“미국서 누군가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찰스 영주 형제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장을 맡고 있는 테레스 쿠쟁 수녀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병원을 맡고 있는 마리 코테 수녀 입니다. 캐럴 영주님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원장 수녀 뿐 아니라 수녀원 원장까지 함께 나온 것이다. 나쁜 일은 결코 어니다. 두 노 수녀는 진심으로 찰스 캐럴을 반겼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은 몇년 전 세상을 떠난 유빌 원장이 운영난에 허덕이던 병원을 인수할 때도, 찰스가 파리 유학 시절인 1765년 병원에 큰 불이 나 전소된 뒤 다시 재건 해야 했을 때도 아나폴리스 캐럴옹의 손 큰 쾌척은 매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큰 영주님도 안녕 하지지요?”
영주 세뇌르 라는 표현은 너무도 쉽게 전염이 된 모양이다. 당초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텐데 고슬랭이 안내 수녀에게 영주님이 오셨다고 했고, 안내 수녀가 달려가 그렇게 말했기에 두 원장 수녀도 ‘세뇌르’ 라고 호칭했고 급기야 아나폴 캐럴옹은 ‘그랑 세뇌르’가 되었다.
“예, 안녕 하십니다. 다 천주님의 덕 이지요.”
“그래야지요, 아메리카 대륙 천주교의 대들보와 같으신 분인데 성모님의 가피가 있으시겠지요.”
“그나저나 어쩌면 그렇게 아버님하고 모습이 똑 같으십니까? 저기서 오면서 보려니 큰 영주님이 오신 줄 알았습니다. 30년전의 큰 영주님 모습 그대로 이십니다.”
30여년 전에 젊은 시절의 캐럴옹이 몬트리올에 온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노틀담 성당 준공일에 맞춰서 였을 게다. 수녀님 들은 그때를 기억 하는 모양이다. 회색 수녀회 사제 삼총사로 불리웠던 그들이다.  유빌 수녀는 1770년 생(캐럴옹과 동년배), 쿠쟁, 코테 수녀는 모두 1717년 생 동갑이다. 유빌 수녀는 1771년 뇌졸중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고, 그후 남은 두 동지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수녀회와 병원을 지켰다. 유빌 수녀는 후일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된다.

두 수녀의 환대와 지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이날 아침 찰스의 용건은 일사천리로 해결 됐다.
두 수녀도 주교의 명령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찰스가 절묘한 해결책을 제시했기에 오히려 안심하고 마음을 놓는 듯 했다.
찰스는 대륙군과 민병대를 위해서 병원 건물의 병실 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고 마당 저쪽에 병동 막사를 세우는 것을 허락 해 주고 암암리에 약재나 제약 시설 그리고 인력의 편의만 제공해 달라고 했더니 수녀들은 그런 것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 한다고 했다.
찰스는 용건이 쉽게 해결 됐지만 냉큼 병원을 나오기 뭣해 병원과 수녀원을 둘러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병실은 역시 넓었다. 천연두 환자들이 있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곳에도 천연두 환자가 꽤 있었다.  원래 찰스가 도착 하기 전에도 암암리에 군인 천연두 환자를 돌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구석에서 대륙군 군복을 태우고 있었고  젊은 환자들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있으면 입실이 안돼 탈영했던 것이다.

접견실 뒷쪽은 공동 작업실 이었다. 회색 수녀회의 핵심 공간이란다. 수녀들이 모여 군복을 수선하거나, 양초를 만들고, 약초를 말리는 곳이라는데 벽에는 화려한 성상 대신 소박한 나무 십자가와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노동’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대단한 신심들이 아닐 수 없다.

“영주님 메릴랜드에는 우리 같은 여인들이 모여 기도할 집 조차 없다고 들었습니다. 영국 국왕의 법이 참으로 서슬 퍼런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부님들도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시는데, 수녀원이란 건 꿈도 꿀 수 없지요. 그런데 이곳 수녀님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깁고, 장터에서 약초를 파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수녀님들을 ‘술 취한 여인들(Grises)’이라 비웃기도 한다던데요. 어떻게 참으십니까? ”
“처음엔 모욕이었으나 지금은 훈장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건 높은 제단 위의 기도가 아니라, 진흙탕 속으로 뻗는 손길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우리가 술에 취했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에 취한 것일 테지요.”

찰스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천주교와 수녀에 대해 생각 했다.
수녀님들이야 말로 천주교 신앙의 한떨기 꽃이었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봉사와 순명에 바친 삶. 신부님들 처럼 세속의 대우를 받고 권위를 인정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수녀들은 대륙의 이편 저편에서 연꽃 같은 삶과 행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쉬운 마리아님과 천당의 기도 얘기를  들려준 이도 수녀님이었고 실은 며칠뒤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개량 인두법과 천연두 특효약의 비법을 전해준 이도 수녀님 이었다.
성벽 안쪽 공터에 대륙군 병원 막사를 지을 것을 확인 하면서 노수녀님이 한 말이 귓가에 쟁쟁 하다.
“이제 이 성벽 안에서는 국왕의 병사도, 의회의 병사도 없습니다. 오직 고통받는 육신만 있을 뿐이죠. 그것이 우리 회색 수녀들이 가 이곳 몬트리올에서 ‘순명(Obedience)’하는 방식입니다.”

막사는 일사천리로 지어졌고 사방에 흩어져 있던 환자들을 한데 모았다. 막사는 3개가 지어 졌는데   경증, 중증, 그리고 가망없는 환자 셋으로 구분 해 수용했다.
존 캐롤 신부는  가망없는 환자 막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멘자민 프랠클린과 사절단 일행도 입 수건을 하고 현장에 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이 병원 막사를 중심으로 찰스의 본격적인 활약이 이어진다.  6월 초순 필라로 귀국하기 까지 몬트리올에서의 찰 스 캐럴 행적은 이곳 병원 막사에서의 일이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776년 5월 초, 퀘벡과 몬트리올 인근의 미군 병력 2,200 중 약 1100명이 감염된 상태였다. 군대의 거의 절반이 전투 불능 상태였던 셈이다.  당시 천연두의 평균 치사율은 30%에 달했다. 생존하더라도 심각한 흉터(곰보 자국)나 실명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병사들이 헛간에 가득 차 있었고, 귀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올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다”는  증언이 남아 있을 만큼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다.   당시 몬트리올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천연두는 퍼졌다. 다만, 미군 내 상황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비극적이었기에 군사 기록에 가려진 면이 있다.   몬트리올의 프랑스계 주민(Canadiens)들은 미군을 ‘해방군’이 아닌 ‘전염병을 옮기는 침략자’로 보았다. 찰스 캐럴 일행이 몬트리올 포섭에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전염병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었다.
수녀회와 찰스가 운영하던 막사에는 군인뿐 아니라 가난한 민간인 환자들도 수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회색 수녀회 기록에 따르면, 수녀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막사안의 모든 침대와 바닥이 며칠만에 찼고 마땅한 얃재가 없어 너무도 안타까왔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찰스는  막사가 지어지자 자신이 솔선해서 환자들을 날랐다. 피고름이 손에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함께 움직이는 고슬랭이 기겁을 할 정도 였다.

찰스 캐럴의 눈부신 활약은 가장 먼저 ‘개량된 인두법’을 펼친 일로 시작된다.  개량된 인두법 (Suttonian Method)은 1760년대 중반 유럽에서 유행한 방식이다. 기존처럼 깊게 절개하는 것이 아니라, 바늘 끝에 환자의 고름을 살짝 묻혀 피부를 아주 얇게 긁는 방식. 절개 부위가 작아 흉터가 덜 남고 회복이 빨랐다. 찰스는 벨기에 유학 시절 이 최신 기법을 배웠다

“원장 수녀님, 이 병사의 팔을 잡으십시오. 벨기에의 수녀님께 배운 방식입니다. 크게 째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살짝 긁어내어 독(毒)으로 독을 다스릴 뿐입니다.”
찰스 캐럴이 막사 귀퉁이에서  인두법을 시술하는 장면이다. 코테 원장은 경외의 눈으로 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찰스의 인두법은 거의 마법이었다.

루이 고슬랭이 호스피스 천막 문을 들치며 경악해며 소리쳤다.
“영주님,  여기 있으면 위험 합니다. 전염됩니다! 귀한 분이 어찌 이런 곳에…”
캐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금색 통을 열며 답했다.
“필라델피아의 서류 뭉치에는 이들의 고름 냄새가 적혀 있지 않더군. 루이, 내가 이들의 고통을 닦아주지 않는다면, 훗날 내가 선언서에 적을 ‘자유’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할 것이오. , 한번 만이라도 이 약을 이들에게 주고 싶으이 ”    그러면서 정신을 잃고 있는 환자의 얼굴을 거즈로 닦고 가져온 약을 발랐다.

실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고슬랭이 기겁을 했던 날 저녁 찰스는  인두법을 자신이 먼저 자신에게 시술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그렇게 바늘을 찍었고 꼬박 이틀을 열에 시달렸지만 자신이 만든 ‘ 제수이트 마데이라 ‘ 특효약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환자들에게 달려 가 품에 안고 그 약을 먹였다. 그리고는 고슬랭에게도 존 신부 에게도 인두법을 시술했다. 고슬랭과 존은 찰스의 셔츠아래 손목의 핏자욱과 상처를 보면서 서슴없이 팔을 내밀었다.

이런 모습들은  치료를 넘어, 가톨릭 지식인이 식민지의 고통받는 민중(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적으로 연결되는 ‘치유의 연대’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다음으로 그의 활약은 특효약  ‘제수이트 마데이라’를 만들어 낸 일이다.

이 특효약에 가장 필요했던 주요 약재는 제수이트 껍질(Jesuit’s Bark)이라 불렀던  기나나무 껍질(Cinchona Bark ,키니네) 이었다.  키니네는 본래 말라리아(열병) 치료제였지만, 당시 천연두로 인한 고열을 내리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예수회(Jesuit)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약재다.  제수이트 껍질은  말라리아와 각종 고열에 특효약 이었기에 남미 등 오지  전교에 니섰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필수 품목이었고. 각 예수회 지부 마다 이를 보관해 두고 있었다. 몬트리올  구 예수회 지부에도 선교사들이 남미에서 가져온  약재가 있었다.    .

몬트리올의 일반 약국이나 상점에는 키니네가  벌써 떨어졌지만, 캐럴은 잠시 폐교된 몬트리올 예수회 신학교의 깊숙한 약고(藥庫)를 열게 했던 것이다. 그곳 사제들은  예수회 가문의 형제’인 캐럴의 간곡한 청과 거액의 기부금 앞에 결국 비장의 약재를 내어놓았다.

이 제수이트 껍질은 찰스의 비방과 함께 합쳐져  합병증으로 오는 고열을 다스려 생존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캐롤은 병원의 절구와 약탕기를 빌려와 대량으로 특효약을 밤낮없이 생산해 냈다.

예수회 창고에서 가져온 짐  속에는 붉은빛이나 갈색을 띤 딱딱한 키니네 껍질 뭉치가 들어있었다. 아를 한번 약탕기에 넣어 쪄낸 뒤 말려서 아주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절구에 넣고 빻았다. 가루가 고울수록 성분이 잘 우러나며, 당시에는 “비단천을 통과할 정도로 곱게 가루 내라”는 지침이 있었단다.

키니네 성분은 물보다 알코올에 훨씬 잘 녹는다. 벨기에의 수녀님은  브랜디, 혹은 독한 증류주가  사용했지만 찰스는 마데이라 와인을 여기서도 활용했다.

분쇄한 가루를 마데이라에 넣고 잘 섞는다. 성분이 충분히 우러나도록 따뜻한 물에 중탕하거나, 급할 때는 가루째 와인에 타서 환자에게 마시게 했다.  키니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맛이 썼다. 환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꿀이나 설탕, 혹은 오렌지 껍질 같은 향료를 섞어 맛을 중화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찰스는 환자가 열이 오르기 직전에 이 ‘마데이라 약제’를 마시게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열이 내릴 때까지 4시간마다 한 스푼씩” 복용하도록 권장했다.   빻아놓은 가루는 짙은 붉은색이나 황토색을 띠며, 와인에 섞으면 탁한 갈색 액체된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쓴맛과 와인의 달콤한 향이 섞인 독특한 냄새가 병동에 진동했고 병사들은 하나둘 원기를 회복 했다.

찰스는 마데이라 와인 한 잔에 붉은 기나나무 가루를 조심스레 털어 넣었다. 금보다 귀한 가루였다. 그는 떨고 있는 병사의 머리를 받쳐 들고 잔을 입술에 대어 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 이것은 페루의 산맥에서 온 예수회의 선물이라네.  맛은 소태처럼 쓰겠지만, 곧 불길 같은 열을 잠재워 줄 것이네”

“이 가루는 피 속의 ‘나쁜 기운’을 씻어내고 심장을 강하게 만든다네 ”

당시에는 미생물 이론이 없었으므로 이런 식의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환자가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캐럴은 프랑스계 상인들과의 인맥을 동원해 고급 보르도 와인과 설탕, 레몬 그리고 천연 꿀 을 다량 구해왔다.   몬트리올의 약제상들이 대륙군의 종이돈을 거부하며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찰스 캐럴은 밤중에 루이-조제프 고슬랭과 몇몇 민병대를 이끌고 은밀히 움직였다.  캐럴은 프랑스 귀족 가문의 문장을 닮은 ‘아나폴리스 캐럴 가문의 문장’이 찍힌 어음을  내밀었다.  유럽 천주교 인맥을 동원해 프랑스 본국 교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부드러운 협박’과 ‘간절한 호소’가 섞인 지략이었다.

신부들과 영국 상인들인들로 부터  귀한 기나나무며 약재, 꿀 주정강화 와인 등을  손에 넣은 캐럴은  코트와 자켓을 벗어 던지고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직접 약탕기를 돌렸다. 고슬랭과 수녀들이 그의 지시를 주교의 지시보다 훨씬 중하게 여겼음은 물론이다.

천연두 환자들이 내뿜는 악취 때문에 직속 상관인 장교들조차 코를 막고 접근하지 않는 그곳에서 찰스는  자신의 흰 린넨 셔츠를 찢어 환자들의 얼굴에 맺힌 고름을 닦아내고 또 닦에 냈다.

병사들에게 ‘성스러운 치료제’라며 와인에 약재를 타서 마시게 하는 그의 모습은  성인(聖人)처럼 보였다.

루이와 같은 신심 깊은 민병대원들은 그 광경을 보며 “메릴랜드의 영주가 프란시스코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피고름을 온몸으로 덮어 닦아 주고 있다 ” 며 눈물을 흘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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