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센터 대표)
유난히도 겨울다운 겨울이었다. 두 차례의 폭설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매서운 추위는 세상을 거대한 빙하 속에 가두어 놓은 듯했다. 그러나 입춘이 지나고 햇살의 기운이 바뀌면, 강해지는 봄의 생명력은 결국 겨울의 잔재를 밀어내기 마련이다. 곧 산과 들은 녹색으로 물들고, 꽃들이 피어나며, 만물이 생기를 되찾아 산으로 들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거대한 공동체(Community)가 존재한다. 산은 나무와 풀,꽃과 짐승들이 어우러지는 터전이 되고, 물은 물고기와 새, 곤충들이 살아가는 근거지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동체가 그 안에 속한 존재들의 정체성(Identity)을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산에 사는 존재 앞에는 산이라는 머릿말이 붙고, 물에 사는 존재 앞에는 물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공동체 없는 정체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생명체는 자신이 뿌리 내린 공동체 안에서 가장 건강하게 성장하고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형성된 공동체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쌓으며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인종, 민족, 국가, 고향에 따른 정체성은 곧 그 개인의 뿌리이자 삶의 지탱하는 언덕이 된다.
지난 일요일은 3월 1일이었다.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107년 전, 일제의 압제에 맞서 독립을 외쳤던 선조들의 역사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공동체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뿌리를 간직한 미주 한인(Korean American)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한국과 미국, 두 공동체의 접점에 놓여 있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차세대들은 종종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부모의 고향을 답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미주 한인 공동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소속감을 갖는 것이다.
자녀들이 정체성의 혼란 없이 당당하게 성장하게 하려면 부모 세대가 구축한 공동체를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야 한다. 한인 단체들이 운영하는 자원봉사, 인턴십,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미주 한인의 역사를 배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밥상머리 교육이다.
함께 식사하며 3.1운동의 정신이 무엇인지, 4.29 LA 폭동의 시련을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리고 우리 가문의 뿌리는 어디인지를 들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미국에 사는 이방인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미주 한인 공동체의 일원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조상들이 3.1절에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를 외친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지켜줄 공동체, 즉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정체성과 존엄 또한 유지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해의 시작에서 우리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공동체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공동체에 뿌리를 둔 정체성이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말이다. 이를 스스로 깨우치고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것, 그것이 3.1절을 맞는 진정한 의미이자 미주 한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동찬 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