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 2 –
안동일 작
1774년 10월 9일 늦은 오후, 필라델피아 성 메리 성당 (Old St. Mary’s Church) 정문 앞 거리를 세 사람의 신사가 걷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방금 끝난 가톨릭 미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성당 문을 나선 참이었다.
키가 큰 한 사람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고, 다부진 체격의 한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의 뒤를 따르는 온화한 풍모의 한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들은 후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이 되는 이, 그리고 미국 천주교 중흥의 주역이 되는 이, 바로 조지 워싱턴, 존 아담스, 그리고 찰스 캐럴, 세 사람이었다
아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휴우… 오후 내내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습니다. 캐럴 선생, 그 모든 것이 라틴어라니. 하느님의 말씀이 일반 백성에게 그 어려운 언어로 가려져서야 되겠습니까? 도대체 이해들을 합니까?”
캐럴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아담스 선생. 하지만 그 덕분에 보스턴에서 오신 선생이나 버지니아에서 오신 대령님이나 메릴랜드에서 온 저나, 모두 같은 기도를 바칠 수 있었지요. 통일성, 그것이 우리 천주교의 강점입니다. 어차피 하늘의 깊은 뜻을 속된 언어로 단순화 한다는게 더 문제 아닐까요? 신앙은 이해 하는게 아니라 믿는 것 아닐까요.”
아담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워싱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직한 목소리로 나섰다.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담스 선생은 귀가 아팠다고 하는데 음악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큰 오르간 소리와 성가대의 화음이 성당의 높은 천장을 채우더군요. 그 웅장함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담스도 워싱턴의 이 말에는 동조했다.
“그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멋졌지요. 하지만 위싱턴 대령님, 제단을 가득 메운 그 촛불과 금장식들, 그리고 사제의 화려한 복장은 너무 세속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까? 검소한 우리네 개신교 예배당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당시 워싱턴에 대한 대륙회의 의원들의 호칭은 대령(커넬)이었다. 이듬해 부터는 당연히 장군(제네럴)이다.
캐럴이 걸음을 빨리해 아담스 바로 옆으로 다가서 그를 보며 말했다.
“아담스 선생, 오늘 보신 의식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신앙의 깊은 뿌리를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미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신성함과 경건함을 표현하는 진지한 방식입니다. ”
잠시 틈을 주었다가 캐럴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다양성 속의 일치(E pluribus unum)가 우리의 모토가 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
워싱턴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캐럴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가 바로 식민지 독립의 길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천주교의 성지 였다는 메릴랜드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그토록 핍박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종교적 관용과 상호 이해가 우리 식민지 연합의 기틀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기에 오늘 미사에 참석 했습니다. 참 그리고 오늘 보니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뜨이더군요, 설교도 좋았고 , 짧아서 더욱 좋았습니다.”
아담스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응답했다.
“ 그래요 우리 개신교회에는 젊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데 이 교회는 그렇지 않더군요, 부럽습니다. 워싱턴 대령님의 말처럼 저도 오늘 설교 만큼은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의무에 대한 그 간결한 강론은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모든 종파가 보편적인 도덕적 가르침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의 긍정적인 반응에 캐럴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도덕률을 따릅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요.”
워싱턴: (하늘을 보며) “오늘 이 경험이 우리 대륙 회의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해져 귀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는 종교의 장벽을 넘어 확장되어야 합니다.”
아담스: (작게 한숨을 쉬며) “앞으로도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겠지만, 오늘 오후가 가톨릭에 대한 저의 편견을 조금은 씻어준 것은 확실합니다.”
두사람 (캐럴에게 얼굴을 돌리며) ” 아무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캐럴 선생.”
어느덧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에 다다랐다.
“두 분. 이제, 터반으로 돌아 가십시다.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메릴랜드식 크랩 요리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저희 아버지 께서 오늘 아침에 싣고 오신겁니다. 거기서 말씀 더 나누도록 하지요. “
“부자 친구를 만난 덕에 연일 호강하고 있습니다. 그려. 아버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죠, 오늘 시간 내 주셔서 두분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미국 천주교회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
그랬다. 그날 10월 9일 일요일 , 건국의 주역, 건국의 아버지 중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워싱턴과 아담스의 천주교 성당 방문은 독립 운동 국면 에서의 기독교 역사 특히 천주교의 역할과 이후 사회적 위상과 관련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대륙회의 시작 국면에서 끝이 좋은 모습이 아니 었다고 하더라도 두셰 신부의 등장과 개막기도 당시 조지 워싱턴, 패트릭 헨리 등 주요 지도자들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국가가 신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다’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역사에 강렬하게 기록돼 있다.
이후 대륙회의는 중요한 결정이나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를 드리고 금식일을 선포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1775년부터 1784년까지 대륙회의는 전황이 어려울 때 마다 총 16차례의 금식 기도일을 정해 선포 했는데 식민 전역의 70퍼센트 이상의 주민이 이를 지키려 애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승전보가 들리면 감사의 날을 선포 해 전국이 기뻐 했다. 이처럼 식민지 최고 기관 대륙회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식민지인들의 단결을 도모했고 이는 발군의 성과와 성취를 올렸던 것이다.
찰스 캐럴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독립에 대한 열망도 물론 있었지만 자신의 종교 가톨릭에 대한 당시 식민지인들의 오해와 질시를 풀어 탄압을 해소 하기 위해 나선 측면이 컸다. 역사학계도 이를 인정한다.
찰스 캐럴이 이 무렵 이를 위해 한 일 가운데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 위에 묘사 한 대륙회의의 실질적 리더 조지 워싱턴과 최고의 이론가인 존 아담스를 천주교 미사에 초대한 일이었다.
덕망의 상징 워싱턴은 그렇다 치더라도 냉철한 이성가를 자처하는 존 아담스가 참석 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종교에 대해 냉소적 이었던 그는 어떻게 해서 천주교 성덩을 찾았고 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위에 묘사한 대로 아담스는 가톨릭 전례의 시각적·청각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도(bewitch), 동시에 개신교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을 보였다.
1774년 10월 9일,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가 필라델피아 에서 참관한 미사에 대한 소회는 당시 존 아담스가 아내 아비가일에게 보낸 편지와 워싱턴의 일기에 개신교도였던 그들이 느낀 가톨릭 전례에 대한 생생한 인상이 기록되어 있다.
찰스 캐럴이 대륙회의 중신인물 가운데 중심인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를 자신의 안방과도 같은 성 메리 성당에 초청을 했고 이를 성사시킨 것은말한 대로 미국 천주교 역사에 있어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사변 이었다. 이 방문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일반의 시선이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단박에 우호적으로 변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비판하고 매도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던 분위기가 멈췄던 것이다. 더욱이 이는 닷새 뒤 매우 괄목할 일로 귀결 된다.
모두 천주의 안배에 따른 찰스 캐럴의 주도 면밀한 준비 때문이었다.
찰스 캐럴이 부친 아니폴리스 캐럴의 강력한 제언에 따라 시티 케빈을 전세 내다시피 해 대륙회의 초기 멤버들에게 매일 저녁 호화롭지는 않지만 실속 있는 만찬을 베풀고 5개 있었던 터반의 객실을 사무엘 아담스, 조지 워싱턴, 존 아담스, 페트릭 헨리, 등에게 사용하게 한 것은 그야 말로 신의 한수였다. 거기다 찰스는 사무엘 아담스등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지도자들에게는 기분 상하지 않는 현명한 안배로 당시 필수품인 양복과 은색 가발을 맞춰 주기도 했다.
당시 대륙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숙식과 품위 유지 문제는 국가적 지원이 아닌 철저히 개인의 역량과 비용으로 해결해야 하는 난제였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북미에서 가장 큰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몰려든 대표들과 관련 인물들을 수용하기에는 숙박 시설이 매우 부족했다.
대표들의 숙소로는 하숙집 (Boarding Houses)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대표들은 시내의 민간 하숙집에 방을 얻어 머물렀다. 보통 거실은 공용으로 쓰고 침실만 따로 쓰는 방식이었는데, 같은 주(State) 출신 대표들끼리 같은 하숙집을 빌려 ‘대표단 숙소’처럼 사용 했다. 필라델피아에 부유한 지인이 있는 이는 그 저택에 초대받아 머물기도 했고 여유가 있는 대표들은 여관 및 선술집 (Inns and Taverns)에 묵었다. 시내의 유명한 여관인 City Tavern이나 Indian Queen 같은 곳이 그곳이다. 이곳들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밤마다 다른 대표들과 식사하며 정치적 협상을 벌이는 ‘로비의 장’이었다.
당시 대표들은 각 주 의회로부터 일당(Per diem)이나 여비를 지급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지급이 늦어지거나 아예 되지않아 제때 돈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더욱이 1기 때는 워낙 회의 기간이 두 달이 채 안되는 50일 남짓 이었기에 돈의 수급이 더 어려웠다.
대부분의 대표는 일단 자신의 돈으로 숙식비를 지불해야 했고 적지 않은 매일 매일의 활동비를 조달해야 했다. 부유한 대표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가난한 문필가나 거리의 연설가 출신인 대표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나중에 2기 회의는 기간도 몇년 씩으로 늘어나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공식화폐 였던 대륙회의 지폐(Continental currency)의 가치가 폭락했고 , 숙박비가 천문학적으로 치솟아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때도 찰스 캐럴은 많은 대표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시시콜콜 기록가 존 애덤스는 아내 애비게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라델피아의 비싼 하숙비와 식비 때문에 다들 주머니가 거덜 났다고 하소연 하며 여러번 송금을 부탁했다.
몇차례 언급한 대로 City Tavern 이야 말로 당시 대륙회의 대표들이 가장 애용하던 ‘비공식 본부’였다. 여기서 그들은 매일 저녁 모여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며 의제에 대해 토론했다. 이곳을 캐럴은 자신의 재력을 동원해 회의 초기 일정기간 동안 자연스레 자신의 사랑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캐럴의 통 큰 씀씀이는 부친 아나폴리스 캐럴 옹의 통찰력과 배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캐럴옹(그는 1702년 생 이기에 당시 72세. 그 시절 로서는 옹이라 불러도 무방 할듯) 은 아들 찰스가 필라로 오기 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 이번 대륙회의가 식민지의 독립도 독립이지만 미국 천주교도들의 앞날을 가늠하는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라면서 아들에게 어떻게 처신하고 누구와 친한 교분을 맺어야 될지 일러 주면서 평생 내밀히 모아 두었던 스페인 은화 두 궤짝을 캐럴의 마차에 실어 주었다. 꼭 필요한 곳에 현명하게 사용하는 요령과 함께 였다. 당시 스페인 은화는 영국의 파운드, 실링을 뛰어 넘는 최고의 가치와 공신력을 인정받는 화폐였다. 시티 터반과 올드 세인트 메리 성당을 베이스 캠프로 삼으라는 아이디어도 캐럴옹으로 부터 나왔다.
10월 9일의 메리 성당 방문은 그 며칠 전 터반 에서의 저녁 식사를 겸한 회의가 끝난 후 담소와 토론 시간에 나온 얘기였다. 찰스는 될 수 있으면 회의 성격의 토론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그날의 주제는 캐럴이 나설 수 밖에 없는 주제였다. 바로 퀘백법 문제 였다. 캐나다 퀘벡 내 프랑스계 주민들의 충성을 유도하고자 영국 의회가 전격 선포한 가톨릭 신앙 자유 보장 법안이었다. 거기에 더해 법안은 퀘벡의 영토를 오하이오 지역까지 포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프랑스계 주민들이 미국 식민지들의 반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퀘백을 반영 투쟁 대열에 합류 시키고자 했던 식민지 지도층의 뒷통수를 매우 쎄게 후려 갈기는 법안 이었던 것이다.
개신교 중심의 남부와 뉴잉글랜드 출신 대표들은 즉각 이를 “가톨릭이라는 사악한 종교를 북미에 퍼뜨리려는 영국의 음모”라며 맹 비난했다. 젊은 토마스 제퍼슨이 터반의 토론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이에 대한 원성을 토로했다. 제퍼슨은 근처에 하숙 집을 정하고 있어 터반에 묵지는 않았지만 저녁 마다 이곳을 찾아와 늦게 까지 선배들을 제치고 토론의 중심에 서곤 했던 이다.
캐럴은 이 논의를 들으며 적잖이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믿는 신앙이 동료들에게 사악한 종교 ‘독재의 도구’로 비난받는 상황 아닌가. 그는 그때 가톨릭에 대한 그들의 편견과 파생된 공포를 잠재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숙명처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숙명 때문에 이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 했다. 마침 그날 터반에는 캐럴옹이 와 있었다. 집안 성당이나 마찬가지였던 메리 성당 미사에 참여 하기 위해서 였다. 대표들과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옆방에 들었지만 캐럴옹은 간담회를 예의 주시했던 모양이다.
좌중이 캐럴의 의중을 묻자 캐럴은 일단 다수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법을 참을 수 없는 법의 하나로 본다고 인정하면서 영국 왕실이야 말로 사악하게 우리를 이간질을 하고 있다고 성토 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로 가톨릭은 사악하고 미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캐럴이 누구인가. 아다시피 그는 예수회의 논리학과 수사학에 통달한 교양 있고 세련된 신사 아닌가. 그는 제퍼슨 등의 비판과 비난에 화를 내기보다, 빙그레 웃으며 와인 한 잔을 건네듯 여유롭게 가톨릭의 교리를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설명했다.
가톨릭은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적이고 화려함으로 사람을 현혹한다는 비난에 대해 캐럴은 여유있는 태로로 초대 교부들의 문헌이나 라틴어 고전을 인용해 저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적 맥락을 설명했다. 좌중은 그의 해박한 지식에 압도당하면서 내심 감탄했다.
캐럴은 특히 개신교도들의 전가의 보도인 ‘교황 숭배(Papists)’나 ‘외세 결탁’ 비난에 대해서 세련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정치적 권리와 신학적 구분을 명확히 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면서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고 천주교의 미사에 한번 참여해 보라고 좌중에게 권했고 결과적으로 덕망의 대명사 워싱턴과 따지기 좋아하는 율사 아담스가 이에 응했던 것이다.
워싱턴과 아담스가 미사를 참관하던 바로 그 무렵은 그 퀘백법으로 인해 식민지 전역에서 반영 감정과 ‘반교황주의(Anti-Popery)’ 정서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No King, No Popery(국왕도 싫고 교황도 싫다)”라는 구호가 거리마다 울려 퍼졌고, 차마 영국 왕의 인형은 태우지 못하고 교황의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까지 곳곳에서 열렸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가 성 메리 성당에 발을 들인 것은, 단순히 미사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종교적 증오를 넘어 단결하겠다”는 엄청난 정치적 선언이었던 것이다. 캐롤 부자의 그간 심모원려가 통했다는 얘기다. 캐럴은 내밀하면서도 효율적인 노력으로 필라 입성 한달여 만에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인물의 성당 방문을 성사 시켰던 것이다. 당초 사무엘 애담스와 토마스 제퍼슨 까지 포함하려 했지만 캐럴옹이 그 두 사람이면 된다고 했기에 캐럴은 그에 따랐다. 제반 상황을 감안하면 독실한 청교도 사무엘과 소문난 데이스트(이신론자) 제퍼슨이 갔다면 오히려 화가 됐을 수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필라에는 두개의 성당이 존속하고 있었다. 성 요셉 성당과 성 메리 성당이었다. 식민지 전역을 통털어 제대로 된 건물과 전통 장식을 갖춘 단 둘 뿐인 성당이었다. 성 메리 성당은 마침 대륙회의가 열리던 카펜터스 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성당은 1763년에 세워졌는데 건립에 캐럴가의 재력이 엄청나게 사용 됐음은 불문가지다. 그 때도 캐럴옹 (당시에는 장년)은 차곡이 쌓았던 스페인 은화 궤짝 여러개를 쾌척 했고 이 때문에 메릴랜드 총독에게 주의 부를 타주로 반출 한다고 밉보이고 트집잡혀 며칠 구금되기도 했었다.
10월 9일은 일요일 이었다. 그날 성 메리 성당의 일요 오후 미사 (Vespers)는 트리덴틴 미사(전통 라틴 미사) 형식으로 진행됐다. 기록가 아담스는 처음 부터 성당 내부의 화려함에 크게 압도되었던 모양이다.이날의 방문은 말한 대로 아담스의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메리 성당은 주변을 의식해 겉은 평범한 벽돌 건물로 세웠지만 내부는 천주교 전통을 따라 꾸미려 애썼단다. 제단 위에는 실물 크기의 십자가 고난상이 있었으며,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이 정교하게 묘사된 대리석 틀의 그림이 있었다고 아담스는 기록했다.
수많은 밀초(Wax Candles)가 불을 밝히고 있었고, 제단 벽화와 금색, 은색의 장식물들이 가득했다. 사제는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화려한 옷을 입었으며, 설교단 또한 벨벳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신자들이 묵주(Beads)를 만지며 성호를 긋고, ‘예수’라는 이름이 들릴 때마다 고개를 숙이거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굽히는(Genuflections) 모습이 아담스에게는 매우 낯설었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아담스는 음악에 대해 서는 “오후 내내(설교 시간 제외) 오르간과 성가대의 찬양이 이어졌으며, 매우 감미롭고 정교했다”고 감탄했다.
미사의 모든 기도문(주의 기도, 성모송 등)은 라틴어로 낭송되었다. 아담스는 언급한 대로 특히 젊은 신자들이 뜻도 모르는 라틴어를 읊조리는 모습에 대해 부러워 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또 아담스에게는 성당 입구에서의 성수 사용, 빈번한 성호 긋기, 제단을 향한 절 등 가톨릭 특유의 의식들이 특이하게 여겨졌던지 자세히 묘사 했다.
그날 사제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의무(정의와 자비에 기초한 영적·세속적 관심)를 주제로 짧고 도덕적인 강론을 했다. 아담스는 이 설교가 매우 훌륭하고 간결했다고 평했다.
당시, 성 메리 성당의 주임 신부(Pastor)는 로버트 몰리뉴 신부였다. 찰스 캐럴(캐럴턴)과는 동갑인 영국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 1771년에 미국에 도착해 필라델피아 성 요셉 성당과 성 메리 성당의 사목을 맡았다.
매우 학식 있고 온화한 인물이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캐럴의 영향으로 매우 애국적인 입장(독립주의)을 견지해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훗날 프랑스 공사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정도로 사교적이었고, 필라델피아 타종교 지식인들과도 깊은 유대 관계를 가져 천주교의 긍정적 확장에 기여했다.
한편 조지 워싱턴은 자신의 일기에 가톨릭 신자들을 제2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화합의 차원에서 참석했다고 간단히 적었지만 이 한마디 언급은 많은 함의를 담고 있었다. 특히 제2시민이라는 표현은 찰스의 ‘위시 풀’필명 제1시민을 염두한 표현이다.
가톨릭 전례의 시각적·청각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도 동시에 이를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이라며 개신교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을 보였던 아담스와 처음부터 종교간 화합을 생각했던 워싱턴은 그날 저녁 캐럴과의 정문의 일침격인 담소에 감화를 받아 며칠 뒤인 10월 14일 미국 종교사, 특히 탄압 받고 천대 받던 천주교 사에 큰 획을 긋는 대단한 선언을 주도 하게 된다. 바로 1차 대륙 회의 가 채택한 ‘권리 선언(Declaration of Rights)’이다.
대륙회의는 10월 14일, 존 아담스의 제안으로 식민지인의 권리를 담은 선언문을 채택한다. “식민지인들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원칙을 문서화 했던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명확히 명시한 최초의 전 식민지적인 선언 이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회의 공식 대표는 아니었지만 막후에서 아담스와 워싱턴에게, 그리고 다른 대표들에게 “우리가 영국에 맞서 단결하려면 종교적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했던 캐럴의 진심이 통했고 그의 아버지 찰스 캐럴의 통큰 심모원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캐럴은 대륙회의 시작부터 “나를 비롯한 가톨릭 교도들의 자금과 유럽(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면 종교적 관용이 필수”라는 논리를 일관되게 폈고 이는 한달 여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 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워싱턴 아담스의 성당 초청은 또 하나의 ‘신의 한수’ 였던 것이다.
세 사람의 천주교 미사를 둘러싼 대담, 예수회가 배출한 최고 미국인 인재가 종교를 떠나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두 사람 앞에서 행한 진솔한 천주교 신앙 강의와 종교 관용에 관한 지론은 메리 성당 앞길에 이어 그날 10월 9일 저녁 시티 터반에서 펼쳐 졌다. 캐럴옹이 공수해 온 불루크랩 요리를 메인 디쉬로 당시 최고 인기였던 주정강화 마데이라 와인을 곁들인 메리랜드식 정찬에서 이뤄 졌는데 이는 닷새 뒤 식민지 전체 보편적 종교의 자유를 담은 대륙회의 선언문으로 명문화 된다. 과연 어떤 장면 이었고 어떤 말들이 오고 갔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