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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5 )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안동일 작

초기의 각지 식민지들은 설립 배경에 따라  지역별로 특히 우세하거나 주도적인 기독교 교파가 명확하게 존재했다. 이는 식민지 건설을 주도한 집단의  종교와 그 설립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먼저 북부인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뉴햄프셔 등 뉴잉글랜드 지역  식민지에는 청교도들이 세운 회중교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곳의 교회 들은 ‘회중 교회주의(Congregationalism)’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각 개별 교회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는데. 교인들이 직접 목사를 선출하고, 재정을 관리하며,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투표를 통해 내렸다. 이는 민주주의의 초기 형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교회가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으며, 교회 교인이 되는 것이 시민권을 행사하는 전제 조건인 경우가 많았다. 정부(마을 회의)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협력했다.  예배 참석은 의무였고, 도덕적 위반(음주, 주일 노동 등)은 교회와 지역 사회의 강력한 제재 대상이었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주했기에 다른 교파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러자 매사추세츠의 종교적 관용 부족에 반발해 침례교 지도자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가 교도들을 이끌고 이주해 로드아일랜드 식민지를 설립했다. 1635년의 일이다.
로저 윌리엄스는 160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중산층 엘리트 출신이었다. 영국의 국교회(성공회)에 염증을 느끼고 청교도 분리주의자가 되어 1631년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했으나,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종교적 획일주의에 반대하며 그곳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635년, 그는 ‘새롭고 위험한 의견’을 설파했다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의 유아세례 반대와 전신 침수 세례 사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추방명령을 받게한 결정적인 연설은 교리보다 민주 자유사상에 대한 피력이었다.
침례교의 독특한 점을 꼽으라면 명칭에서 나타나듯 ‘완전한 물에 잠기는 성인 세례’가 꼽힌다.  다른 교리는  삼위 일체, 부활, 구원 등을 인정 하는등 주요 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며 특히  세례는 성인만이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교에서는 유아 세례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부분이 특히 기존 개신교와 갈등을 빚었다.

추방된 후 그를 따르던 동료들과 어울려 내러갠섯원주민들에게 땅을 구입하여 프로비던스(Providence) 정착지를 건설했다. 정착한 후 즉각 교회부터 건립 했는데 이 프로비던스 침례교회가 아메리카 최초의 침례교회다. (위 사진)
하지만 그는 이곳을 “양심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로 만들고자 했으며, 침례교 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거주자에게 신앙에 관계없이 주민적 평등과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억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원하는 대로 예배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가 개인의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정부가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집행해서는 안 되며, 시민 생활과 개인의 영적 생활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은 훗날 미국 헌법 수정 제1조 작성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의 땅을 단순히 빼앗는 관행을 비판하며, 원주민들과 공정한 거래를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는 내러갠섯 (Narragansett) 족의 언어를 배웠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평화 유지에 기여했다.
로저 윌리엄스는 1683년 사망했지만 이같은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 사상은 그가 사망한 지 한 세기 후에 미국의 건국 이념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산은 로드아일랜드주 브리스톨에 있는 로저 윌리엄스 대학교 등 여러 기념물과 기관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그의 세운 침례교는 미국 개신교 가운데 가장 많은 신도수를 잘랑하는 최대 교단으로 우뚝 서 있다.

새옹지마,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복이 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믿는 이들은 로마서 8장 26절을 금과 옥조로 삼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하느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이나 시련도 결국에는 유익하게 변환된다는 의미다.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모든 상황 속에서 선한 결과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강조된다.

다음 뉴욕,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델라웨어등 중부 식민지는 언급한대로  퀘이커, 루터교, 재세례파를 비롯해 장로교 등 각 종파가 종교적 다양성 및 관용을 특징으로 하여 공존했다.
특히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William Penn)이라는 걸출한 퀘이커 교도가 어렵사리 건설한 식민지였다. 퀘이커 교도들이 중심이었지만 평화주의에 입각해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여, 다양한 유럽 이민자들(독일계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루터교도 등)이 모여들어 종교적으로 가장 다양하고 개방적인 지역이 되었다. 장로교의 노회가 처음 결성된 곳도 이곳이다. 윌리엄 펜이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해서는 잠시후 다시 다루기로 한다. 펜실바니아 정착지가 건설 된 것은 1681년으로 다소 후기에 속한다.

식민 시대 뉴욕은 초기 네덜란드 통치와 이후 영국 통치의 이중적 유산으로 인해 다른 식민지와는 달리 상대적인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 이 특징이었다.
뉴욕은 처음부터 인종적,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인구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신자들 외에도 프랑스 위그노, 루터교도, 퀘이커교도, 침례교도, 장로교도, 그리고 북미 최초의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가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실용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무역 중심지였던 뉴욕은 다양한 집단 간의 협력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격한 종교적 통일성을 강요하기 어려웠다.
1664년 영국이 뉴네덜란드를 점령한 후, 영국 성공회(Anglicanism, Church of England)가 공식적으로 식민지의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개신교 종파와 유대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대하는 선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식민지에서만큼 엄격하게 강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신교 종파에 대한 관용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만큼은 많은 제한이 있었다고 기록 돼 있다.  18세기 중반에는 장로교가 뉴욕에서 가장 큰 교파로 성장하기도 했다

초기 네덜란드 당국의 박해도 널리 회자 되는데  1657년 초기 퀘이커교도들이 뉴네덜란드(이후 뉴욕)에 도착했을 때, 총독 은 그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투옥, 추방했다. 설교하는 여성 퀘이커교도는 당시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간주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자  1657년, 오늘날 퀸스 지역인 플러싱 거주민 31명은  총독 스토이베산트의 퀘이커교도 박해에 반대하는 탄원서인 ‘플러싱 강령(Flushing Remonstrance)’에 서명했다.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권리”를 주장하며 종교적 소수자들을 옹호했고, 이는 미국 역사상 종교 자유를 위한 초기 행동주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부 식민지 버지니아, 메릴랜드, 캐롤라이나, 조지아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 주요 교파였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설립 초기부터 영국 국교회가 공식적인 주(state) 교회가 되어 총독과 행정부는 국교회를 강력하게 지원했으며, 세금으로 교회를 유지했다. 교구는 영국 성공회 주교의 권한 아래 있었으며, 교구민이 아닌 교구 위원회(Vestry)가 교회를 운영하고 재정을 관리했다.
국가 지원: 교구 위원회는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목사 봉급과 교회 유지비를 충당했다. 목사는 주로 영국에서 교육받고 파견되었으며, 때로는 식민지 총독이나 지역 유지에 의해 임명되었다. 회중의 발언권은 뉴잉글랜드에 비해 약했다.
교회는 상류층과 사회 엘리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북부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으나 사회 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가운데 메릴랜드는 매우 독특한 종교적 지형을 보인 곳이다.
이곳은 영국의 귀족 볼티모어 경 조지 칼버트가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정착할 수 있는  식민지 특허를 받아 건설된 곳이다.   1634년, 메릴랜드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세인트 클레멘트 섬에서 첫 가톨릭 미사를 봉헌하며 미국 가톨릭의 역사를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의 영국 영토에서 유일하게 이루어진 가톨릭 미사였다.  초기 이주민 중에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청교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메릴랜드는 1649년 종교적 관용을 명시한 법률을 제정해 영국 식민지들 중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1650년대 이후 메릴랜드는 가톨릭 신자들의 안식처로서의 지위를 잃고, 영국 성공회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법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메릴랜드 천주교 신자들은 끈질기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 남아  미국 가톨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곳 태생의 존 캐럴은 1789년 미국 최초의 가톨릭 주교로 임명되었고   칼버트 가문의 작위 이름을 딴 도시  볼티모어에 있는 볼티모어 대성당(The Baltimore Basilica)은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성당이다. (아래 사진)

조지 칼버트(George Calvert, 1st Baron Baltimore)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식민지 개척자로, 북미에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안식처인 메릴랜드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비전을 제시했던 인물로 그의 두 아들 세실과 로저스와 더불어 미국의 가톨릭 교도들에게 추앙받는 성도다.

조지 칼버트는 1579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제임스 1세 국왕의 신임을 받아 정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으며, 1617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619년에는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에 임명되기도 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경륜을 발휘 했다.
1625년,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반(反)가톨릭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고위 공직을 유지할 수 없었으나, 제임스 1세는 그의 충성심을 인정해 ‘볼티모어 남작(Baron Baltimore)’ 작위를 수여했다.
칼버트는 신대륙에 가톨릭 신자들이 종교적 박해 없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식민지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버지니아 회사에 투자하며  식민지 건설에 관심을 보였으며, 첫 시도로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 ‘아발론주(Province of Avalon)’라는 식민지를 설립을 추진해 선발대를 보내기도 했다.

뉴펀들랜드의 혹독한 기후와 어려움으로 인해 칼버트는 더 남쪽의 온화한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찰스 1세 국왕에게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 근처의 토지를 청원했고, 국왕은 그에게 포토맥강(Potomac River) 북쪽의 넓은 땅을 하사했다.
안타 깝게도 조지 칼버트는 1632년 4월 15일에 사망했는데, 메릴랜드 식민지 특허가 공식적으로 발급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실제 식민지 개척 사업은 그의 아들인 제2대 볼티모어 남작 세실 칼버트(Cecil Calvert)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지 칼버트가 구상한 식민지는 영국 국교도와 가톨릭 신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였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이후 메릴랜드 식민지에서 1649년 제정된 메릴랜드 관용법(Maryland Toleration Act)의 토대가 되었으며, 이는 북미 최초의 종교적 자유를 명시한 법률 중 하나였다.
세실 칼버트(Cecil Calvert, 2대 볼티모어 남작)는 그의 아버지 조지 칼버트의 뒤를 이어 메릴랜드 식민지의 실제적인 설립자이자 초대 영주였다.
아버지 조지 칼버트가 메릴랜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왕실 헌장(Charter)을 받기 직전에 사망하자, 세실 칼버트가 1632년 6월 20일 찰스 1세 국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헌장을 승계받았다. 그는 초기에는 직접 신대륙으로 건너가지 않고 영국에서 식민지 건설을 지휘하며 메릴랜드를 가톨릭 신자들의 안식처이자 종교적 관용의 시험장으로 만들었다.
세실은 1633년 11월, 약 200여 명의 개척민을 태운 두 척의 배, ‘아크(Ark)’와 ‘도브(Dove)’를 메릴랜드로 보냈다. 그는 동생인 레너드 칼버트(Leonard Calvert)를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이끌게 했으며, 자신은 영국에 남아 정치적 지원을 확보했다.

이주민들은 1634년 3월 포토맥강 하구의 세인트 클레멘트 섬에 도착하여 첫 미사를 드린 후,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매입하여 세인트 메리즈 시티(St. Mary’s City)라는 첫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는 북미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영국 영구 정착지였다.
메릴랜드는 주식회사가 아닌, 영주(Proprietor) 개인에게 자치권이 부여된 최초의 성공적인 영국 식민지였다. 이후 도미 한 세실은 거의 독립 국가의 통치자처럼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식민지 주민들은 국왕이 아닌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세실 칼버트는 성공회 국가인 영국에서 박해받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자 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이주민을 가톨릭 신자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 모두에게 토지를 제공하며 이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그는 식민지 의회에 개신교도를 임명하는 등 종교 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649년, 세실은 메릴랜드 의회에서 메릴랜드 관용법(Maryland Toleration Act)이 통과되도록 주도했다. 이 법은 삼위일체를 믿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북미 최초의 법률로, 훗날 미국 헌법의 종교의 자유 조항에 영향을 미쳤다.  영주 세실 칼버트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것을 지시했으며, 초기 정착지인 세인트 메리즈에서는 하나의 예배당 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등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졌다. 세실 칼버트는 메릴랜드의 경제적 번영을 도모하는 동시에,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선구적인 비전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

초기 가톨릭 이주민들은 주로 토지를 소유한 귀족(gentry) 과 평민 계층 출신이었으며, 개신교 이주민들은 대부분 빈곤층이거나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s)이었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경제적 지위가 더 높았다.
하지만 모든 초기 식민지 정착민들이 그랬듯, 가톨릭 신자들도 높은 질병 사망률(말라리아, 장티푸스 등)과 고된 노동, 거친 주거 환경 등 전반적으로 열악한 삶의 조건을 감내해야 했다.
이때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과의 관계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추장과 그의 가족을 개종시키고 원주민 언어로 교리문답을 번역하는 등 선교 활동에 적극 나섰다.

메릴랜드 식민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삶은 처음에는 종교적 박해로부터 벗어난 안식처로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점차 개신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법적, 정치적 제약에 직면했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많은 개신교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가톨릭 신자들은 점차 소수 집단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 내 청교도 혁명(Oliver Cromwell 집권)과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의 영향으로 메릴랜드에서도 개신교도들이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1689년 가톨릭 칼버트 가문의 통치권이 상실되었다.

1704년 ‘가톨릭 성장 방지법'(Act to Prevent the Growth of Popery)과 같은 일련의 차별 법률이 제정되면서 가톨릭 신자들의 권리는 크게 제한되었다.
미사는 개인 가정 예배당에서만 은밀히 거행할 수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투표권이나 공직에 출마할 수 없었으며, 공직에 오르려면 성공회에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교회 운영 학교 설립이 금지되었고, 재산에 대한 이중 세금 부과 등 불이익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가톨릭 공동체는 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끈끈하게 신앙을 이어나갔으며, 예수회 신부들은 순회하며 교인들을 돌보았다.
메릴랜드 초기 가톨릭 신자들의 삶은  정치적 상황 변화와 개신교 인구의 증가로 인해 점차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 독립 혁명 전까지 지속되었다.

독립전쟁 당시 식민지의 가톨릭 교도들은 애국파(Patriots)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전쟁 중에는 프랑스와의 동맹 덕분에 기존의 반가톨릭 정서가 누그러들기도 했다.

가톨릭 교도들은 영국 국교(성공회)를 따르는 영국 국왕에게 자연스러운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가톨릭 교도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 내내 법적, 정치적 제약을 받아왔기 때문에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도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파(Patriots)의 편에 섰다. 특히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의 가톨릭 교도들이 적극적으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볼티모어 가문의 후원으로  메릴랜드의 유력 가문으로 등장한  캐럴(Carroll) 가문의 구성원들은 독립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며 미국 내 가톨릭 교도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찰스 캐럴(Charles Carroll)은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교도였다. 그의 동생 대니얼 캐럴(Daniel Carroll)은 미국 헌법에 서명한 두 명의 가톨릭 교도 중 한 명으로, 메릴랜드 최초의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또 그 집안의 막내 존 캐럴(John Carroll)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독립 후 미국 최초의 가톨릭 주교(후에 대주교)가 되었다.
미국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면서, 독립군 지도자들은 국내 지지를 결집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만연했던 반가톨릭 정서를 애써 완화시켰다.  조지 워싱턴 장군이 병사들에게 교황의 인형을 불태우는 등 반가톨릭 의식이 포함된 영국 기념일(Guy Fawkes’ Day) 행사를 금지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독립 전쟁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보여준 애국심과 희생은 그들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했고 제정된  미국 헌법이 모든 기독교 교파를 포함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가톨릭 교도들이 다른 개신교도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 됐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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