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 (A Sservant of Jesus Christ)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아무튼 파면 팔 수록 이수정은 대단한 사람이다.
일본 기독 지성인들이 대거 참석한 모임에서 인상적인 대표 기도를 행했던 그날 오후에 이수정은 또 한번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 행동을 한다.
그 날 오후 이수정은 신에이 교회당 인근 공원인 아스카야마(飛鳥山), 수정원(修正院)에서 개최된 대친목 야유회에서 중인환시리에 일필휘지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의 기쁨을 토로하는 신앙고백문을 한문으로 써 내려가 좌중의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신앙인들의 야유회 였기에 먹고 마시는 야유회가 아니라 시회 형식으로 진행 됐던 모양이다. 혹자는 특별 강연을 했다고도 하는데 상황을 종합해 보면 강연은 아니고 휘호를 했다는 것이 맞을 듯 싶다. 아마도 화선지 전지가 여러장 필요 했었을 것이다.
이수정의 신앙고백문은 일본 기독교계 잡지인 <육합잡지> 제34호(1883. 5)와 <칠일잡지> 제8권 22호(1883. 6.1)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당시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복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요한복음을 원용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말해 ‘신인상감(神人相感之理) ‘ 의 깊은 유교적 소양을 드러 냈고 또 개신교와 천주교, 좁게는 감리교와 장로교 간의 논쟁이 되고 있는 이신칭의와 성화 문제 그리고 예정조화설의 문제 까지 짚어 내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세례 받은지 두달 밖에 되지 않은 신자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다. 더욱이 그 시기에.
약 700여자 한자로 써내려간 신앙고백문은 내용상 네 부분, 인사말, 그가 이해한 성경의 핵심인 신인상감의 이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결어를 겸한 불교 비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신인상감지리 (神人相感之理)’에 관한 부분인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이 핵심으로 이 부분은 575자로 되어 있다. 앞으로의 이 소설 전개와도 상관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전문을 우리말 번역본으로 소개 하기로 한다. 이수정 연구에 천착하고 있는 한국 장신대 배요한 교수의 유려한 번역이다.
“삼가 아룁니다. 저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배우고 익힌 것이 부족하여 문명의 개화를 알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귀국에 와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여러분들의 두터운 사랑에 힘입어 세례를 받고 겨우 큰 도(道)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 중략 ….. 제가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 십 사장을 살펴보니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으며,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요지는 명쾌하나 그 깊은 의미는 매우 오묘하여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 설교하신 요지는 믿음을 이루는 관건이 되는 것이므로 배우는 자가 반드시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가르침에 대하여 자세히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줄을 알지만, 저도 이 내용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였고, 이에 예수께서 힘써 깨우쳐주신 바를 더욱 깨달을 수가 있어서, 그 내용을 다만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 무릇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가 감응하는이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러한 단계를 이룰 수 있음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가지고 설명 하시기를, ‘내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 하셨으니 그 이치는 곧바로 이해가 쉬운 것이기에 번거롭게 깊이 천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지금 제가 다시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나 굳이 말씀드리자면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은 친히 그 지극한 가르침을 받아 전승하였으니 이해에 부족함이 없었겠으나,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세(聖世, 예수님 당시)에서 이미 멀어져서, 배우는 자들이 그 의미를 철저히 알지 못하여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할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이어서 신인상감의 이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계속 된다.
“무릇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이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등잔의 심지가 타지 않으면 불빛이 없을 것인데 등잔의 심지(燈炷)는 (위쪽을) 향하고 있으니, 마음이 타오르는 것(心燃)이 믿음이며, 그 마음의 불(心 火)이 곧 하나님의 감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감응은 믿는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것이니, (이것은) 단지 심지만 가지고는 등잔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심지가) 타오르지 않으면 끝내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믿음이 없으면 끝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세례만 받고서 남에게만 의존하여 (신앙을)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에 진실된 믿음이 없다면 (그러한사람은) 성도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령 심지가 끝까지 타오르지 않는다면 버려질 뿐이고, 또한 소금이 그 맛을 잃으 면 발에 밟히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예를 들어 종소리가 종에 있어서 종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방망이로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나게 되어있는 것인데 종과 방망이가 각각 다른 곳에 매달려 있다면 어찌 소리가 날 수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가 타는 등잔은 그 불빛도 크고, 작은 채로 종을 치면 그 소리도 작은 것이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정해져 있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인 것 입니다.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이 삼위일체와 함께 합하여 하나가 됨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무릇 이러한 마음의 경지를 일컬어 하나님의 전(殿) 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러한 믿는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도 또한 거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내 몸 안에 계신다는 것은 곧 나 또한 하나님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이니, 이러한 하나 된 마음이 극진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머리털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게 되어 (그가) 나의 위에나아래, 사방에 (따로) 계시지 않고 내가 움직이든지 가만히 있든지, 말하든지 침묵하든지 간에도 늘 그가 (나와)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는지 하는 여부를 확실하게 알고자 한다면 오직 스스로 자신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필 것이지, 선생에게 물을 것도 없고 하나님께 질문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
“이곳(나 스스로의 믿음을 살필 수 있는 내 마음)이 곧 하나님 과 사람 사이의 감응을 이루는 산 체험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더라도 하늘 위에는 반드시 내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계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성령께서 반드시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반드시 천국에 이른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 고 또한 어두운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 그리 되는 것이지, 진리에 통달하였는가 하는 여부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교의 깨달음과 기독교의 믿음과 비교 하면서 자신의 고백을 끝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이다.
“ …불교의 가르침은 ‘깨닫지 못하면 능히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공중에 사다리를 걸어 놓고 사람들에게 뛰어 오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것을 견주어 보면 그 가르침의 어렵고 쉬움이 아주 다르며 그 허망함과 진실 됨도 곧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은가. 이글이 1883년에 조선인에 의해 쓰여진 글이라는 것이 믿어 지는가.
성경을 주체적으로 이해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고백문은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 하나가 됨, 신인상감지리(神人相感之理)가 핵심이다. 요한복음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구절을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이 신인상감이란 개념은 유학, 특히 성리학의 천인합일사상과 상통 하는 개념 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유교의 핵심 개념. 인간의 본성(性)이 곧 하늘의 명령(天命)이며,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유학에서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이상이자 교육의 목적이기도 하다.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인 성(性)을 천명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의 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동일한 것이며, 또한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생(生)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체적 존재이면서 본질적으로는 전체적 존재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것이다. 도를 닦는 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수양하여 하늘과 하나 되는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오 리치가 바로 이점을 파고 들어 중국 유학자들을 천주학으로 끌어 들였던 것이다. 천제와 천주가 상통함이 있다고했고 조선의 초기 천주학 성조 들도 이를 받아 보유론이라 하여 무리없이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벽 성조가 수표동에서 남인 유학자 들에게 포효 했던 것도 이 대목이다.
물론, 유교와 기독교 자체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유교에서는 자신의 수양적 노력으로 궁극적 인간(聖人, 성인)됨이 가능하다고 믿는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성화의 노력은 필요하나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나만의 주체적인 노력만으로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극복한 그런 궁극적 존재는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수정 또한 그의 고백문에서 불교를 비판하면서 ‘은혜’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창조주 하늘과 피조물 인간과의 합일은 ‘그날’이 돼야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수정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수정이 원용한 효한복음 14장 20절에는 분명히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또 현재에도 이 부분을 크게 지적하는 이는 없는듯 하다.
그 역시 믿음이란 인간의 신앙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감응으로 보고, 그러한 현상을 등(燈)과 심지, 종과 망치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이치(理致)의 통달을 강조하는 불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마음에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 계속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통달하고 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이해한 것이다. “진리를 통달했건 못했건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그 큰 은혜를 나누어 받을 뿐”이라는 그의 고백에서도 이신칭의 신앙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신칭의는 오직 믿음 만을 강조 하지 않고 믿음 이후의 성화를 당연시 하고 있다. 그는 세례 만으로, 성령의 임재 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믿음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천주교의 논리다. 또 개신교로 좁히면 감리교 쪽의 논리다. 이는 예정조화론의 교리상 해석에도 적용되는 사안이다.
천주교는 믿음과 선행 모두 구원에 필요하다고 보는 반면,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만(이신칭의)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개신교는 십자가 대속을 통한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강조하는 반면, 천주교는 구원을 위해 성사 등, 신앙 행위와 선행이 따라야한다고 가르친다.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화를 강조하며, 장로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
아무튼 성령의 감화와 감동,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와 그 범위 , 삼위일체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교통 등 그는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독교 교리에 대한 뚜렷한 식견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에서 체화한 신앙의 지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와 이런 고백문 발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이런 믿음은 어디서 비롯 됐을까. 그랬다. 그는 일본에 건너오기 전에 꽤 깊은 기독교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천주학 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원군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백부를 통해서 였다.
그가 몇년 뒤 천주교와 기독교를 예리하게 비교하여 이 둘의 차이를 설파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전의 고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국에서의 박해와 그로 인한 백부의 죽음은 그에게 천주교의 현실적 한계성을 느낌과 동시에 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될 때는 적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가운데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부분은 다음에 자세히 알아 본다.
1780년대에 권일신이 천주학을 받아 들이며 그랬듯이 백년 뒤인 1880년대 이수정이 기독교 개신교 신앙을 받아 들이면서 가장 크게 신경을 쓴 일은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이를 통해 더 잘 살 수 있는지 였다. 아펜젤러 에게 뿐아니라 그에게 기독교를 전한 쓰다 센이며 루미스 선교사에게 던진 첫 질문은 기독교를 믿으면 나라가 부강해 질 수 있는가 였다.
그가 이런 우국 애민의 정신을 갖게 된 것에는 당연히 그의 성장 과정과 주변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조선의 상황은 변한게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나빠 졌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수정이 개신교를 택했던 1883년 시점에서 보면 천주교는 그 백년 동안 보면 여러차례의 박해가 일어나 무수한 생명이 희생돼야 했다. 수정은 이 숫자를 10만이라고 했다. 그 시절 제대로 된 통계가 있을리 없었기에 그랬던 모양이다.
1791년 직암 권일신이 희생된 신해박해를 필두로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그리고 이수정 자신이 20대 때 생생히 겪어야 했던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1795년 을묘년, 1815년 을해년, 1827년 정해년에도 박해가 있었다. 이 가운데 앞의 신유, 기해, 병오, 병인년의 박해가 희생자 수도 많았고 역사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크기에 4대 박해로 꼽힌다.
천주교도들이 무슨 흉폭한 범죄를 저질렀는가. 아니었다. 오히려 교도들은 선량한 생활을 하는 백성들 이었다. 권일신 성조의 생전 말씀을 금과 옥조 여겨 서로 사랑하고 국볍을 준수 하면서 모범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권일신은 천주학을 믿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 했다.
박해시기 조선 천주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심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생활했다. 이들은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돕는 생활을 했다. 헌신적인 생활 태도는 숨어서 교회를 세워 미사를 드리고, 교리를 배우고,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며,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신자들은 박해를 통해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을 숭고하게 여겼다.
천주교는 양반 신자뿐만 아니라 상민, 천민 그리고 여성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새로운 신앙이었다. 이 평등 사상이야 말로 당시의 엄격한 신분 질서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존재로 형제 자매로 살아가는 흡인력을 동반한 원동력이 었다. 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며 양심법을 실정법보다 우선시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사회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새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은밀한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고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 교리서 집필과 전교 활동을 통해 신앙의 끈을 이어갔으며, 이를 위해 ‘명도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공동체를 지켰다. 서로의 안위를 살피고 믿음을 격려하며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내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들이 원했던 밝은 시기, 환희의 시기는 어떤 것 이었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