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운동 3.1 혁명
천도교 3대 교령으로서 손병희는 외부 일반 교육 사업에 힘을 쏟는 한편 이름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교단 내에 봉황각이라는 자체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해 천도교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그들에게는 인내천의 천도교 교리 뿐 아니라 역사의식을 심어주었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 훈련받았던 지도자들이 각 지역에서 3.1거사의 선봉에 섰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 인사 15명은 모두 이곳 출신 이었다. 천도교는 그무렵 3백만 신도를 기록 했었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로 자신들이 먼저 3.1 거사를 기획하고 준비 했다고 주장한다. 후일 공과를 논할 때 중요한 문제 같기도 하지만 따져보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먼저 시작 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때의 분위기와 여건이 제대로 된 조선인 이라면 청원이 되었건 선언이 되었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1918년 가을 ,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이듬해 만국 평화 회의(파리강화 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주의가 대두 되자 가혹한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사회에서는 어떤 기대감이 피어 올랐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꿀을 빨고 있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지식인 종교인이 그랬다.
당시에는 손병희 사단, 천도교 인사로 분류되던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도 그 대목이 나온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새로운 시대가 눈 앞에 펼쳐지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
새로운 시대의 지표는 바로 만국 평화회의 라고도 불렀던 파리강화회의를 말한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부터 1920년 중반 까지 이루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 전체를 뜻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주도로 약 30여 국가의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후 처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협의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국제문제를 풀어나갈 원칙으로 선택된 것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했던 14개조다. 이에 근거하여 1920년까지 패전국과 승전국가 간의 조약협상이 진행됐다. 14개 조항의 주요 내용이 민족자결 주의로 해석됐었다.
이 소식은 조선 지식인들 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독립을 쟁취하는 데 매우 좋은 기회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 실행 방법으로 전방위적인 국권 반환의 청원을 생각 했었다. 조약으로 빼앗긴 국권을 조약으로 되 찾자는 발상이었다.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도 초기에 일본정부,귀족원·중의원·조선총독 등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는 호소문을 보내자는 결정을 했고 실제 만국 평화 회의에는 기타 세력과 연대해 급조한 신한청년단이란 단체 명의로 김규식을 파견 했다. 그때의 비용 3만원도 손병희가 쾌척했다.
손병희는 얼마 후 당시 국내외 상황을 종합해 “청원은 무슨 청원이야 그냥 선언을 해야지.” 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마침 평양의 이승훈을 중심으로 장로교 기독교 인사들이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손병희는 최린을 보내 이승훈을 만나도록 했고 거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1919년 초의 일이다. 그때 감리교 쪽에서도 YMCA 간사로 있는 박희도를 행동 대장으로 해서 경성의전 연희 전문 등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 선언을 준비 하고 있었다. 이들 감리교 측도 곧 합류 했다. 동경 유학생들이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있던 때였다.
자금이 없으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특히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종교 간의 협력을 위해서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 했다. 그 역시 천도교와 손병희의 몫이었다. 거사가 논의 되던 때 기독교 측에서 자금이 필요 하다고 하자 손병희는 두말 않고 최린을 시켜 거금 5천원을 이승훈에게 건냈고 이승훈은 이를 박희도에게 맡겨 집행하게 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천도교측 인사들과 접촉하며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냈던 이승훈의 권위와 지도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훈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여러 차례 결렬될 위기를 극복하고 종교간 연대로 3·1 거사가 추진될 수 있었고 기독교계의 중론이었던 청원이 선언으로 격상됐던 것이다.
준비단계의 막바지에 이른 2월 26일, 한강 인도교 근방에서 기독교 대표자들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박희도와 안세환, 오화영, 이필주, 최성모, 함태영 등 참석자들은 마지막 점검을 하던 중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인 명단과 그 순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질서와 순서를 중시하는 ‘봉건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던 상황에서 천도교와 불교, 기독교 대표자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고 인쇄할 것인지는 예민한 문제였다.
더욱이 기독교 대표자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뉘고 다시 감리교 대표자들은 다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로 나뉘어 종파와 교파, 교단 간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회합 참석자들이 민족대표 33인 순서 문제를 두고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여 ‘어색해 진’ 상황에서 뒤늦게 회합에 참석했던 이승훈은 좌중의 분위기를 이내 파악한 뒤,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하고 일갈했다.

이승훈의 말 한 마디에 꼬였던 문제는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이런 기독교측의 서명 원칙에 천도교와 불교측도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의 민족 대표 명단은 천도교 대표 손병희를 제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을 쓴 후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배열했다.
나이로 보나, 독립운동 전력으로 보나, 3·1운동 준비단계에서 보여준 역할로 보나 이승훈은 다른 어떤 대표들보다 앞머리에 이름을 올려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은 자신이 먼저 양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자칫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종교연합운동으로서 3·1운동의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 한 곳은 천도교 본부 직할 인쇄소인 보성사 였다. 서울 종로에 있던 보성사에서 3만 5천부가 인쇄되어 극비리에 전국으로 배급됐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했던 보성사는 그해 6월 28일 밤 일제가 불을 질러 전소하게 된다.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문 첫 줄에 나라 이름 조선朝鲜이 선조鲜朝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삼엄한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얼마나 긴박하게 인쇄 작업을 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거사가 들통 날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것이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을 만난 것은 손병희였다. 도대체 이완용 같은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손병희는 이완용에게 ‘민족대표’로서의 동참을 요구했고, 구한말 최고의 수재 중의 하나인 이완용은 구렁이 열 마리쯤은 휘감긴 언어로 제의를 거절한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
3.1 운동이 터지자 바로 낯빛을 바꿔 조선인들의 자중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하며 일제의 편을 든 그였지만 그는 끝내 거사 사실을 일본 당국에 알리지는 않았다. 혹시나 일이 성공했을 때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나마 한 조각 남았던 양심 때문이었을까.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 높은 종로서 고등계 형사 신철(신승희)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뭔가 낌새를 챈 듯 천도교 주변을 맴돌던 그가 보성 인쇄소에 별안간 들이닥쳐 인쇄된 기미 독립 선언서를 확보하고 돌아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악질 신철이란 말인가. 인쇄소 책임자 이종일은 즉시 중앙의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다. 최린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를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했다.
. 최린은 마주앉은 신철에게 다짜고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때 신철의 대답은 “조선 사람입니다.”였다. 최린은 5천원이라는 거금을 내밀며 (쌀 한 가마가 40원이었다. 이 액수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자 신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의 누설 여부가 내 입에만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그리고는 신철은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정중하지만 무거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이 또한 이론이 많다) 아무튼 신철의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역시 조선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이완용 신철 두 사람은 일이 이렇게 까지 확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저 선언서 한장 발표하는 것으로 일이 끝날 것이라 믿었던듯 싶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과 고등계 형사 신철까지도 그 입에 자물쇠를 단 가운데 조선 민족은 역사적인 3월 1일을 맞게 된다. 일본 경찰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의요 생명인” 날이요 “한강물이 다시 흐르고 백두산이 높았던 날”, 백정부터 기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서고, 저 멀리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것은 네게 큰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던 그 위대한 날이 밝는다.
누차 강조 하지만 이 거사의 수훈갑은 대화와 타협, 양보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 종교연대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기독교 교역자들이 3·1거사의 모의 단계에 참여했다가 운동방법론에서 청원론과 선언론 사이의 이견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기독교 외에 천도교와 불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연대하는 문제로 운동대열에서 이탈했다.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지닌 교역자들은 목회자의 정치참여와 신조가 다른 종교와의 연대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 고민이 컸던 것이다.
경성과 기호 지역 일대에서 명망이 매우 높았던 감리교 신석구 목사의 경우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이를 극복했고 이름을 청사에 남겼다.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받은 후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상용(相容)키 난(難)한대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는 문제로 “새벽마다 기도하던 중” 2월 27일 새벽에 “사천년(四千年) 전하여 나려오던 강토를 네 대(代)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크나큰 죄 일진대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직각(直刻)에 뜻을 결정한 후” 서명에 참여했다고 후일 법정에서 진술 했다.
신석구에게 3·1운동 참여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적 신념과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석구 외에도 이승훈을 비롯해 유여대, 신홍식, 김창준, 박희도 등 다른 기독교 대표들도 재판과정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하늘의 뜻”, “하나님의 명령” 등으로 설명했다.
신석구 목사의 증언은 이어진다. ‘종교적 신념’으로 독립운동 참가 의사를 밝히자 주변에서 “시기상조다. 일본이 쉽게 독립을 시켜주지 않을 것이다.”며 만류하였을 때 그는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당장 독립을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간다.” 면서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것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독립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만족하다.”고 진술했다.
신석구는 ‘밀알의 정신’(요 12:24)으로 “죽기 위해” 3·1운동에 참여했다. 그런 ‘희생적’ 자세가 민족대표로서 신석구의 권위와 지도력을 높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충청도 출신인 신석구 목사는 자신들 보다 먼저 희생된 개신교 선구자 이수정 선생의 일화와 자신 고향에서 가까운 해미읍성에서의 천주교 신자 들의 숭고한 희생을 이땅에 펼쳐진 밀알의 정신이라고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후일에도 여러차레 강조 했다. 그는 1950년 6.25 동란 와중에 평양 감옥에서 순교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