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ykorea
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32)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예정과   인간의지   그리고  권도(權道)

   권도(權道)라는 말이 있다.  일상적인 규범인 상도(常道)를 불규칙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 규범을 뜻하는 유학의 용어다. 그런데 이번에 공부를 하다보니 권일신 이승훈 성조 등이 임시 사제단을 권도 시제단 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칫 가짜라고도 들릴  임시라는 말인 가성직(假聖職) , 보다는 어감도 좋고  함의가 있는 명칭이다. 

권도 신부,  권도 사제, 권도 탁덕 이라…

 권도는 논어에도 나오는 용어인데 멀리는 맹자(孟子)가 가깝게는 율곡 이이(李珥)가 이를 친근하고 쉽게 설명 했다.  

 맹자는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고 하여 예와 권도를 연계시켰다.

 이이는 “때에 따라 중(中)을 얻는 것을 권도라 하고, 일에 대처해 마땅함을 얻는 것이 의(義)이다.”라고 하여 권도와 의를 관련지었다. 

   권도라는 말을 찾아낸 이는 유함검이라고 한다. 그런데 후일 이 권도사제 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찾아내 사단이 일어 나게 한 이도 유함검이다.   

 나의 다분히 권도적인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주권, 예정에 대한 상념은 계속 된다.  이런 류의 사설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도록 한다. 

 어느 성서학자는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고 했다. 또한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놀이터의 시소와도 같다고도 했다. 하나가 높아지면 하나가 낮아지게 되어있고, 또한 하나가 낮아지면 하나가 높아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이 약해진다. 만약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도 동시에 상처를 받게 된다. 천주 하느님은 왜 인간을 만들 때 죄를 거부할 수 있는 강한 의지의 존재로 만들지 못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할 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결정한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에 대해 개인적인 후회와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후회와 죄책감은 자신이 결정한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유의지론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자유의지론의 또 다른 부정적인 측면은 예정론을 믿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데, 그 선택은 고독한 자기 혼자만의 문제이며 아무도 대신 결정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고 놀이터의 시소와도 같은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둘의 영원한 함수관계를 풀 수 있을까?

 예정론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갈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강조하면 하느님의 주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도들 로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없다.

 두 가지 선택 중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다시 그 길로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있다고 얘기 된다.  예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과 논란은 주로 개신교에서 발달했다. 칼빈(칼뱅)이 예정론을 그렇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의 갈등에 대하여 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 웨슬리는 분명 예정론에 대항하는 노력으로 그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존 칼빈보다 200여년 후대의 사람이었고, 그 만큼 현대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칼빈보다는 웨슬리가 이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사고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글을 바로 대조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훌륭한 개신교 전통을 세운 신학자들 모두에게 잘못하는 것이요, 혹시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독선과 오류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내 작은 머리로 이러한 시도를 하려니 머리가 터져 나길 지경이었다. 나는 이를 감히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다분히  권도적이다.  

 예정은 영원 전부터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정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또한 예정은 하느님의 영원이라는 차원에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현재적 시간에 속한 것이 아닐까. 니 시간개념을 대입 하자 눈 앞이 환해 졌다. 

 그렇다.  자유와 예정은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예정은 영원 속에 숨겨진 비밀이기에 현실의 단면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비밀을 전혀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천주가 누구를 택하셨고 누구를 택하지 않으셨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천주의 예정은 영원히 감춰진 비밀문서다.

 전혀 알 수 없는 예정 비밀문서는 우리에게 꿈속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 비밀문서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두통과 근심거리일 뿐이다. 오히려 그에 집착하는 것이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죽을 때까지 밝혀지지 않을 비밀문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지금 현실 속에서 열심히 천주의 뜻을 좆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자기 자신이 예정되어있는지를 고심하며 괴로워하는 자보다는 천주를 믿게 됨을  감격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된 자일 “확률”이 높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로 천주를 영접하는 자만이 하느님이 예정하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정비밀문서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기도하면 된다.

예정비밀문서는 하느님의 예정이요, 하느님의 비밀문서요, 하느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관여하는 것은 월권이다. 결국 예정과 자유의지는 함께 가는 것이고 그 길의 끝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은 하느님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믿음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하시고 실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동시에 하느님은 인격적인 사랑의 하느님이다. 따라서 천주 하느님은 인간의 미래를 예정하셨지만 영원 전부터 영벌을 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실 정도로 그렇게 잔인한 하느님은 아니시다.  그래서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계획과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은 항상 별개의 것이다. 하느님은 인류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하셨지만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계획을 완성해나가신다. 비록 하느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지만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의 전지하고 전능하신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좋으신 하느님이 아닐까.

 예정과 자유의지는 우리 삶에 서로 달리 적용되어질 때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이다. 권도의 철학 시중의 철학이 여기에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 산다.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다. 이처럼 과거에 묶여 사는 신자들에게는 예정론이 특효약이다.

과거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실수나 과오들조차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들이 미래로 향하는 당신의 발목을 붙잡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주권과 작정하심 속에 당신의 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미래를 염려하며 항상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기독교인들조차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산다. 이렇듯 항상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정론이 특효약이다.

기독 신자 들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믿는 사람들이 고 또 믿 어야 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에 당신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향한 하느님의 예정과 작정하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미래를 하느님께 맡기고 나는 편안하게 현실에 안주해도 되는 것아닐까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이 주신 인생은 그렇게 안일한 것이 아니다.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는 신자 들에게는  필요한 특효약이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아무리 미래를 하나님께 내어 맡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매 순간마다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살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의지적인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슬프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처한 현재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당신의 의지적 선택이 당신의 운명을 좌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예정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과거와 미래에 적용하고, 우리의 현재적 순간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로 인한 책임의식을 적용하면 된다. 그리할 때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우리의 삶을 통해 조화로운 관계로 승화되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예정과   인간의지   그리고  권도(權道)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접기로 한다. 권도의 정신에 입각한 이 연재는 권도 사제들의 활약릏 통해 앞으로 날개를 달 것이 틀림없다.

  (계속)

 

 

Related posts

트럼프 “이란 후계자 후보자 모두 사망…공격 성공적”

안지영 기자

오픈AI, 브로드컴과 손잡고 내년 자체 AI 반도체 생산

안지영 기자

<장편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