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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31 )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조선 최초 신학 논쟁의 대 주제  ‘자유의지와  예정’

   조선 천주교 임시 사제단의 첫 집합 회합은  공학 형식으로 열렸다.  86년 겨울  여사울 이존창의 집에서 사흘간 열렸다.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홍낙민 정약전 정약종 유항검 최창현 최인길이 참석했고 윤유일과 이총억 그리고 권상문이 함께했고 이가환과 조동섬이 하루 참석 했다.  

 이때 대두됐던  논쟁의 대 주제가  예정론 이었다.  신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신부라는 명칭대신 목사라는 명칭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를 택하면 어떤가 하는 의견이 대두 됐던 것이다.  그때  초기 성도들은 유럽에서의  개신교의 발흥을 알고 있었다. 예정론이야 말로 개신교를 구축한  칼뱅의 독보적 지론 아닌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결정론이라 하고, 신학적으로 예정론이라고 한다. 이 예정론에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 인간 자유 의지론 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미래는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 인간의 삶은 이미 예정되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에 달렸는가?

 이 부분 까지만 필자가 직접 나서 설명하고 다시 소설의 형태로 돌아가려 한다. 조금 지루 하더라도 참아 주실 것을 앙망하는 바이다.  격론에 가까운 논쟁이  나왔으니 이를 설명하고 묘사해야 하는데 그때의 상황과 신앙 수준,  그때 사용했을  단어로 이를 행하는 것은  도처히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때 개혁파라 불리던 개신교 문제를 꺼낸 이가 유항검 이었고 개혁교단은  배은망덕의 이단이라고 펄쩍 뛰었던 이는 이승훈 이었다.  연경 예수회로 부터 그렇게 배웠던 것이다. 구원 예정론도 유항검이 먼저 꺼냈는데 동섬과 가환이 천주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을 나타낸 커다란 비유 라면서 결론을  이끌어 냈지만 이는 좌중에게 내내 미진한 구석을 남겼을 법 하다.

 필자가 ‘예정 조화설’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고교때 세계사 시간이었다. 그때도 그 단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다.    만약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에 의해 완전히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참으로 비참해지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인간은 단지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여야하는 연극배우에 불과하거나 정해진  프로그램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정설, 예정론은  나의 단 세포적이며 단편적인  반응으로  끝낼 정도의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필연과 우연, 예정과 자유라는 주제는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비켜갈 수 없는 필수적인 논쟁거리였다.   과연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일까?  아니면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렸을까?   정해진 운명이란 본래 없는 것이고, 인간의 미래가 인간 스스로의 불굴의 개척정신과 노력에 의해 좌우된다면,  과연 인간의 삶은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게 되는 것일까?   

  기독교적 운명론은 예정론이다. 예정론은 하느님이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 말하자면 구원을 베풀 자들을 미리 선택했다는  이론이다. 이 예정론은 신자들이 큰  관심을 갖는  교리 중 하나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 중 가장 당혹스럽고 난해한 교리이기도 하다.  신도들에게 있어 예정론은 애매모호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때론 괴상하게도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마르코 16:16)

 기독교의 예정론은  구원에 관한 운명론으로 좁혀진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는 예수를 믿고 싶지 않아도 자기의 뜻과는 달리 예수를 믿게 되고, 반대로 하나님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자기 의지와 달리 믿을 수가 없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은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미리 선택하셨는가?

 기독교 신자는 하느님의 전지전능 하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했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며, 인간 구원을 전개해 나간다.  무한한 능력에 기초한 하느님의 권한은 무제한적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권한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주권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주권은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실 수 있는 권한 까지를  포함한단다.  자신의 주권을 통해서 예수를 믿을 자와 믿지 못할 자를 미리 정하실 수 있고 또 그랬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와 있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예정론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4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16)

 이같은  예정론은 사도 바오로의 서신 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예수를 믿을 사람들을 미리 선택하신다는 선택사상을 명확히 주장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4-5)

 그런데 ‘선택받은 성도들의 입장으로는 기쁘고 감사할 일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니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느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요 편애하시는 분이다.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은 불공평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주권을 내세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주권은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로마서 9장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 인한 선택을 강조한다. 이신칭의와 함께 예정론은 로마서의 백미로 꼽힌다. 그래서 사람들이 로마서 로마서 하는 것이다. 

유명한 구절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21)

이러한 바오로의 선택과 주권사상은  예수가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르코 20:13-15)

실제  이 예정론 사상은 바오로에서 시작돼 위대한 초대교부 어거스틴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칼뱅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일반화 되었던 것이다. 

예정이란 하느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더 나아가 험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나 죄조차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개인적인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 들에게 하느님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믿음은 나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명감까지 생기게 된다.    또한 예정론에서 말하는 선택사상은 하나님이 나를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은총에  감격하게 된다. 아무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며 감사하게 한다.

반면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점

 예정론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안정감’ 과 예수를 믿도록 선택받았다는 ‘자신감’을 주는 반면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문제점도 아울러 갖고 있다.

 만약 인간의 미래가 예정되었다면,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얘기다. 하느님이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권세로 이 세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끌고 계시다면, 인간 개개인의 운명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주체를 갖지 못하고 단지 주어진 각본대로만 움직여야한다면 주체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이 세상은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없는 삭막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만약 세상만사를 하느님이 예정하셨다면, 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예정대로 그리고 각본대로 진행되어진 삶인데, 어찌 하느님은 인간의 실수나 잘못을 그들에게 탓할 수 있겠는가? 예정된 계획이나 각본의 문제가 아닌가?

 만약 이 세상이 하느님에 의해 전적으로 예정되었다면 하느님은 이 세상의 무질서와 악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악이 만연되어 있고, 무질서와 불공평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어디서 이러한 악이 왔을까? 예정론에 의하면 하느님이 세상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인류가 경험하는 자연적인 재앙, 전쟁, 암과 같은 질병들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책임을 져야한다. 

 또한 만약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수를 믿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불공평한 일이다. 결국 하느님은 불공평하며 편애하는 하느님이 된다. 

 특히 칼빈이 말하는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 사상이 문제가 되는데, 그 ‘선택’과 ‘유기’ 중에 유기에 관한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어떻게 하느님이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버리시기로 작정하실 수가 있는가? 선택받은 자들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버림받은 사람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러고도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칼빈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유기’에 관한 문제는 아주 의견이 분분하다.

 그 외에도 예정론이 지닌 모순점은 더 있다. 예정론은 만약 구원받을 자가 정해져 있다면 전도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단다.  전도의 열정이 사라진다고. 전도대상자인 불신자조차도 느긋해진다. 불신자 입장에서는 만약 내가 예수를 믿을 것으로 예정되었다면 언젠가는 믿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예수 믿을 기회를 미루게 되지 않을까.   “기도를 하나 안 하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이끄실 텐데” 라는 생각 속에 기도조차도 소홀히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성경에 기초하고 있어

 예정론이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그러하다.  예수를 영접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진술한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이 회개치 않아서 멸망당할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바오로도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구약성서에 보면 하느님이 제안하시는 구원은 인류를 향한 우주적인 초대임을 알 수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사야 55:1-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

예수님이 제안하시는 구원의 초청에도 아무런 제한이나 제약이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만약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약속의 말씀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는 진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또한 만약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적인 자유가 없다면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우주적인 초대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느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나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면, 하느님의 초청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인간은 구원을 선택할 의지의 자유가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이나 기계로 전락해버린다.

그래서 한때 칼빈의 추종자였던 알미니우스를 중심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기 위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알미니안주의는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으로 이어진다. 

 구원의 초청에 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유의지는 하느님을 도덕적으로 의로우신 분으로 만든다. 자유의지론은 영생 얻을 자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는 불공평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없앨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시는 인격적인 분이 된다. 편애하시지 않는 인격적인 하느님은 그 분 자신의 속성인 아가페적인 사랑과 그 성품이 일치하게 된다. 결국 자유의지론은 가혹하고 무서운 하느님을 인격적인 사랑의 하느님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게 한다. 만약 예수를 믿을 자가 이미 예정되었다면, 불신자들은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느님이 예정하신대로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신자들을  예수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겠는가? 자유와 책임은 언제나 함께 간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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