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모집의 과정 영광스런 순명의 길 ”
그 무렵 광암은 직암이 보기에도 천주교적 영혼론, 영육 이원론에 집착해 성신(성령)을 강조 하면서 계율 준수와 금욕을 강조 했다. 영은 순수하고 절대적인데 반해 육은 순수하지 않고 저차원이 이어서 육의 욕망에 따르다 보면 영이 타락 하게되고 그렇게 되면 가장 성스러운 영인 천주의 성신을 맞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동도들을 다그 쳤던게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원론이다,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이어 진다.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 했고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천주학의 영혼론은 단적으로 이원론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는 면이 있다. 부활의 논리 때문이다.
영혼이 불멸하며 하느님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천주교의 확고한 논리다. 그런데 육신은 영혼의 활동을 담는 그릇과 같은 부분으로, 영혼과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다. 궁극적으로 영혼은 천주와의 완전한 합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육신으로 들어가 부활하게 된다는 신비한 논리다.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육신과 결합하는 부활을 기다리며, 완전한 영육 합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이원론 이라고 만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주교 영육론은 이원론이면서 일원론 이기도 했다.
영혼은 다시 영과 혼으로 나뉘는데 특히 영이 천주와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혼은 이성, 의지, 감정 등을 포함하며, 인간의 인격과 도덕적 행위를 관장한다. 영과 혼으로 나누었을때 영은 혼 위에 있는 개념이다.
육신은 유한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지만 영혼의 활동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기에 세속의 죽음으로 단순하게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 천주학의 논리다. 이 부분이 의문을 갖게 하면서 많은 논란릏 즐러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경의 탁덕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 승훈은 이날 다시 직암등 죄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연경의 신부님들은 우리 천주학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영혼의 구원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긍국에는 육신의 부활을 목표로 하고, 또 그렇게 되어 있기에 육신을 소홀히 하고 업수히 여기면 결코 안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릇이 깨끗해야 담겨지는 물이 깨끗한 이치 입니다. 구원은 천주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 특히 성사를 통해 육신을 포함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 연경 예수회 스승님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영혼만의 구원이라면 우리가 사는 현세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씀들 이셨죠 ”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관계로 이해한다는 얘기다. 또 현세 에서의 구원을 얘기하는 고도의 철학이기도 했다. 이러니 승훈이 광암에게 불만을 가질만 했다.
이처럼 천주학은 영혼 뿐 아니라 육신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믿는다. 영혼과 육신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영육론은 가톨릭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인간의 존엄성, 삶의 의미, 죽음과 부활 등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영혼은 언제 어떻게 인간의 육신에 들어 오는가,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창세기를 기반으로 한 정통 교리이지만 각 사람의 영혼이 태어날 때 어떤 모습으로 생겨나고 또 생겨난 그 영혼이 처음부터 완전 무결 한지 아니면 계속 변모 는지는 역사적으로 게속 의문시 되어 왔다.
직암등이 통독한 정통 교덕서 들은 교부들의 주장을 종합해 이렇게 결론을 냈다.
. “각 사람의 영혼은 육체에 부여되어 창조된다.”
“사람의 영혼은 성장 하기도 하며 잠재 되어 있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전혀 힘을 발휘 하지 못하고 소멸의 단게에 이르기도 한다. ”
이같은 천주학의 영육론은 성경과 무수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기반해, 최대의 교부 다막 아규나 (多默·阿奎那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고 여겨진다.
최고의 교부 다막 아규나는 아리사덕( 亞里士多德,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등 스콜라 학파의 철학을 기저에 깔고 체계적인 설명을 했다.
즉 영혼은 육체의 체형이며 육체와 함께 인간개성의 실체를 이룬다. 육신과 영혼은 일체를 이루는 공동구성 원리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영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떠나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은 어디까지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이 천사와 다르다. 아규나의 이같은 주장은 교회에 의해 정설로서 받아들여 졌다.
아규나는 인간 혼이 개성을 가진 영체로서 육신의 체형 또는 형상이 된다고 정의했다. 영혼은 죽은 뒤에라도 육신과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과 합하여 완전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영과 혼으로의 구분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중국과 조선의 유자들의 입맛에 쏙 맞게 체계화 한 이가 바로 천주실의의 이마두 (利瑪竇) 성조였다
당연히 내세에 대한 개념이 없는 당시 중국 선비들에게 영원한 생명(常生)과 무한한 복락(無窮之樂)은 낯선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끝없는 소망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그렇다면 애욕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마두 성조는 인간은 혼(魂)과 백(魄)의 결합체로 죽으면 백(魄)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불멸의 존재로 남는다(常在不滅). 고 설명하면서 혼을 규명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세상의 혼(魂)을 3품설(品說)-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에 따라 설명했다. 많은 의문을 해소 하는 탁월한 설명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했던 불가 선종의 오래된 의문 까지도 해소하는 설명이다.
생혼은 초목의 혼이며, 각혼은 동물의 혼으로 죽으면 모두 소멸된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몸이 죽더라도 혼은 죽지 않는다. 게다가 생혼과 각혼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하고 사물의 실상을 자각할 수 있다. 생혼이나 각혼은 몸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게 당연하지만, 생각하고 추리하는 능력은 영혼의 특성이므로 몸이 죽더라도 사라질 수 없다.
그러면 소멸의 운명을 의미하는 ‘몸에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인간은 오감(五感)을 몸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기능은 듣는 것, 보는 것, 맛보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등이다. 이목구비의 작용은 이목구비가 존재할 때에만 작동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대상이 있어도 듣지도, 보지도, 맛보지도, 냄새를 맡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각혼과 같이 몸에 의지해 있으면, 몸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사람은 배고플 때라도 먹는 것이 도의(道義)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먹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몸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멸되지 않고 상재불멸(常在不滅)하는 까닭이라고 빼어닌 설명을 하고 있다.
이마두 성도는 상재불멸의 원칙을 거스르는 현상을 두고 소멸의 원인은 서로 어긋남(常悖)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불, 공기, 물, 흙(火氣水土) 네 원소(四行)로 결합되어 생성소멸의 운명에 놓여 있다. 불과 물(의 기운)은 서로 배치되고, 공기와 흙(의 기운 혹은 성질) 또한 배치된다. 이와 같이 4 원소들은 서로 배치되고 상치하니 필연적으로 서로를 해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네 원소를 가진 사물은 소멸되지 않을 수 없다(故此有四行之物, 無有不泯滅者). 하지만 네 원소가 아닌 성신으로 구성될 때 소멸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주역의 원리를 깊이 원용 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천주실의는 조선 천주인들의 전가의 보도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광암 직암 철암 다산 동섬 등이 그를 성조로 받들며 열광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천주교 교리 논리 가운데 사람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다가서는 것는 것이 영혼 론이었다. 사람에게 있어 육신 이외의 것, 의식 혹은 생각,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약간 다르지만 조선을 풍미한 이기론 과도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는 기가 육신이고 리 가 영혼에 해당한다. 아는데로 이기론(理氣論)은 인간을 포함해 우주와 만물의 생성 및 변화를 ‘이(理)’와 ‘기(氣)’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만물의 존재와 생성의 근본 원리나 법칙을, ‘기’는 유형의 질료나 형체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학파로 나뉘어 그 무수한 논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기를 그릇 기(器)가 아닌 기운 기(氣)자를 쓰고 있어 더욱 오묘한 철학적 사변적 논쟁을 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광암은 성신(聖神, 후일 성령) 을 강조 했다. 영으로 나타나는 천주의 존재, 천주의 성신을 맞이 하고 체험 해야만 진정한 천주인이 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신은 어떻게 인간에게 나타나 인간의 영에게 영향을 주는가.
그날 초동의 모임에서 영혼론을 대강 이나마 다시 추스리게 된것은 인길과 창현이 자신들은 천주의 성신을 수시로 영접 하고 있다 얘기 했기 때문이다.
“자네들 성신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 하시는가? 직암의 그 얘기는 자주 들었네만 신심이 깊다는 자네들은 어떤지 궁금하네.”
동섬이 두 최씨를 번갈아 쳐다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이 그렇다는 얘기는 유일을 통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씀 드리려 했는데 동섬 숙사께서 먼저 물어 오시는 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둘은 성신을 엉접 했습니다.”
“그랬군 어떻게 영접 했는지 궁금하군”
창현의 간증이 이어졌다.
“저희 집에 십자 고상을 처음 모신 날 저녁 이었습니다. 십자 고상을 모슨 기도 방에 들어가 베드로 형님이 주신 로사리오를 들고 사도신조를 외웠습니다. 한참을 난송하다 이 신조가 우리말로 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했는데 그때 저쪽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관천아 관천아 네가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구나 내 잊지 않으마 너의 과거의 허물을 내 다 용서 하도록 하마.’
“놀라기 보다는 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구나 싶으니 너무도 기뻐 눈물이 왈칵 쏟아 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 하시는 구나 싶었습니다. 이분을 위해서는 제 한몸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온몸에서 솓구쳤습니다.”
모두들 귀를 쫑긋 하며 관천을 계속 주시했다.
그런데 천주께서 뜻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신의 말을 따르거라 하셨습니다.”
일신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인가?”
“제가 어떻게 천주님을 두고 거짓을 말 하겠습니까?”
” 허허 참, 나는 천주의 음성을 한번도 들은 적 없는데 부러우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긴 생전의 광맘도 수시로 천주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직암은 기도 중에 환시를 몇번 느꼈을 뿐 음성을 들은 적은 없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