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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20)

안동일 작 

“탁덕(鐸德) 물색과 신앙의 신비”

정약용과 이총억,  젊은 인재들의 전면 배치

  이총억은 다산 보다 두살이나 어렸다. 다산은 62년생 총억은 64년생이다. 직암의 절친한 벗인 이기양(李基讓ㆍ1744~1802)의 아들인 그는 직암에게는 조카 사위이기도 했다.  장형 녹암의 막내 딸이 그의 부인이었다.  천진암 강학의 막내였던 총억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는 이른바 신심이 투철했는데 아주 초기부터 신비 체험, 성령 체혐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일동은 막내의 일취 월장에 등을 두드려 줬다.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혈족과 인척, 동문으로 얽힌 구성이었다.

젊은 측들만 보더라도  이총억이 녹암 권철신의 친 사위였다면 김원성은 녹암 직암의 누이인 안동 권씨의 사위였고, 아는 대로 상학, 상문은  권일신의 장남과 차남. 정약전은 권철신의 애 제자였고, 이벽은 정약전의 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가까운 사돈이었다.  또 이승훈은 정씨 형제의 친 매형이었고 이가환이 승훈의 외삼촌 이었다.  진산의 윤지충은 권씨 형제 들에게는 외사촌, 정씨 형제들에게는 이종사촌이 됐다. 근기 남인들이 대개 그랬다. 서로 혈연 혼인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

 1779년 당시 참석자의 나이를 보면, 권철신이 당년 44세, 권일신이 38세  이벽이 26세 이승훈이 24세  정약전과 김원성은 22세, 권상학은 19세, 이총억은 16세였다.  

  언급한대로  총억은 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훨씬 전인 81년 쯤에 10 계명가를 한글로 지어 강학 일동에게 선보여  큰 찬사를 받기도 했었다.  

 그가 지은 10 계명가는 한글로 네글자씩 4, 4 조 형식을 띠고 있어 암송하기 좋았다. 당시 강학 일동이 읽은 교덕서 들에는 십계명이라는 말만 자주 나왔지 정확히 10개의 계명으로 명확히 정리 돼 있지 않았다. 어떤 교덕서를 보면 그 계율은 열개가 훨씬 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살인 절도 음행 을 하지말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은 굳이 십계명으로 까지 명문화 해서 중요한 계율로 삼지 않아도 될 일이지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총억의 언문 십계명가는 천주교의 십계명을 우리말로 풀어 차례로 노래하고 있었다. 

  “사람 나자  한편생의 / 무슨 귀신  그리 많노/ 아침 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문외고  /있는 돈  귀한 재물/ 던져 주고 바쳐 주고/ 자고 깨자  하는 언동/ 각기귀신 모셔봐도/ 허망하다 마귀 미신/ 우매한고 사람들아 /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 말고 천주 믿셰.”

 마귀 잡신을 믿지 말고 천주를 믿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일곱 날 중  엿새간은 / 근면 노력  다하고서/ 일곱째 날  고요하게/ 천주공경  다해 보세/ ”   안식일을 설명했고 , “인간 금수  초목 만물 /그 아버지 천주일세/ 부모 효도  알고지면/ 텬쥬공경 알고지고” 라고  부모에 대한 효도를 노래했다.

 기특하게도 난해한 한자 숙어보다는 쉽고 대중적인 표현을 많이 쓰고 있었다.  총억은 일찍 부터 부친 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고 부친의 스스인 이병휴 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고 녹암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 본격적으로 유학을 익혔기에 그 깊이가 꽤 깊었다. 

 이총억의 자는 창명(滄溟)이었다. 일신이 대부가 되어 행한 셰례식에서 그는 눅가(루카, 누가)라는 세례명을 택했었다.   그는 후일 1795년 식년시에 응시해 진사로 뽑혔다. 직암이 세상을 떠난 뒤다. 그의 과거응시는 천주학 공동체의 공식화를 염원했던 직암의 유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신유 박해 때문에  벼슬은 하지 못했다. 그의 동생이 두살 터울의 이방억(李龐億)이다. 방억도 문재가 뛰어 났는데 형의 지도로   어려서 부터 천주학을 믿고 따랐다. 

 실은 두 형제 때문에 순암 안정복 과 천주학 공동체 성원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공서파와 신서파가 갈라지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784년 12월, 순암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 두사람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다. 승훈이 북경에 가 있었던  그 무렵이었다. 이런 편지는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에는 서학에는 참고할 점도 물론 있지만 근본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니 깊이 빠져서는 안될 것이라는 경계의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강도가 사뭇 달랐다.   

 

 “이제 듣자니 공들이 경박한 젊은이들을 위해 서사(西士)의 학문을 창도하는 바 됨을 면치 못한다 하니, 과연 어찌하여 그런 것이오. 들으니 이가환과 정약전, 이승훈과 이벽 등이 서로 약속을 맺고 신학(新學)의 주장을 익혀 공부하며 어지럽게 오간다는 말이 있었소. 또 들으니 문의(文義)에서 온 한글 편지 중에 그 집안의 두 소년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면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고 하더군.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전도유망한 소년들을 어쩌자고…”

순암은 진작부터 사위인 직암을 비롯해  천주학에 쏠린 남인 젊은 층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어오고 있었는데 급기야 그런 편지까지 쓰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까지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근기 남인의 동량감으로 지목 받은 두 소년, 총억, 방억이 서학에 물둘어 그 열기가 대단하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또 시간이 흘렀다. 아는 대로 그사이 승훈이 귀국했고 본격적으로 천주학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 편지가 전해진 일년쯤 뒤인 1785년 가을, 문의현감으로 있던 이기양이 안정복을 불쑥 찾아갔다. 그러니까 직암이 예산에 내려가  존창을 포섭하고 정산 선생을 만나 안목을 넓히고 있던 바로 그무렵이었다. 그때 예산서도 직암은 정산과 장인 순암의 근황과 고집에 대해 많은 걱정을 나눴다. 정산은 평생 도반인 순암을 믾이 걱정하고 있었다.   

 기양의 돌연한 방문은  앞서 소개한 1784년 12월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 이기양이 문의에서 보냈다는 사적인 한글 편지에 대해 안정복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 사단이었다. 

 이기양(李基讓)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1744년(영조 20)에 태어났다.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이다. 한음 이덕형(李德馨)의 7대 손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종한(李宗漢), 어머니는 정현서(鄭玄瑞)의 딸 동래 정씨(東萊 鄭氏)이다. 부인은 허경(許檠)의 딸 양천 허씨(陽川 許氏), 아들이 총억(寵億) 방억(龐億)이다. 

 이기양은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그의 수제자로 꼽히면서 성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다.  1774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778년(정조 2) 영릉참봉(寧陵參奉)으로 벼슬을 시작했고  진산현감(珍山縣監)을 지내고 이후 문의 현령을 역임하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이기양의 서슬이 보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기양은 자신보다 32살이나 연장인 안정복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선생님! 편지 속에 ‘문의언찰(文義諺札)’이란 네 글자는 제 어머님의 편지인데, 그걸 어째서 남에게 계속 말씀하십니까?” 

 기양의 어머니라면 동래 정씨 부인을 말한다. 정씨 부인이 순암의 부인인  창녕(昌寧) 성씨(成氏)에게 언문으로 편지를 보내며 손자들이 서학을 열심히 공부 하고 있다고 자랑을 했던 모양이다.  순암은 그후에도 계속 사람들에게 그  언찰을 거론했던 모양이다.   

 머쓱해진 안정복이 “우리가 남인가? 일가나 한 가진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하자, 이기양이 정색을 하고 쏘아 붙였다.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 언문 편지를 손님이 올 때마다 보여준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안정복이 외부 사람에게 보인 적이 없다고 하자, 이기양이 말허리를 자르며 또 말했다. “어째 이런 법이 있습니까?” 궁지에 몰린 안정복이 대답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노망이 들어 그런 것인데, 어찌 이다지 심하게 말하는가?”

 이기양은 물러서지 않고 매섭게 쏘아 붙였다. “절대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지난 번 저와 직암에게 보낸 편지를 두고 사람들이 모두 재앙을 만들려는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디다.”

  천주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안정복의 행보가 장차 남인 내부에 큰 재앙을 불러들이려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꼭 집어  말한 것이다. 후일 실재가 그랬다. 남인의 공서 신서 분규는 너무도 참혹한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말이 아주 서늘했다. 놀란 안정복이 대답했다.

“ 서학(西學)이 어찌 사군자가 배울만한 것이란 말인가? 내가 크게 염려가 되어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화심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성격이 급해 곧이곧대로 말하다 보니 이런 뜻밖의 일이 생긴 것일세.”

말투에 기세가 급격히 꺾였다. 이기양이 한 번 더 안정복을 몰아세웠다.

“평소 어르신의 꼼꼼하심은 남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씀하셨다니요?”

 말실수가 아니라, 모두 계산된 행보가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안정복은 급히 태도를 바꾸고 사죄의 말을 했다.

“내가 잘못했네, 다시는 그러지 않으이”

​ 이일이 있은 뒤 순암은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아 누웠다고 했다.  ​74세의 안정복이 제자 뻘인 42세의 이기양에게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남인들 사이에 금세 쫙 퍼졌다. 

  양근으로  돌아온  직암도 이기양의 항의 방문으로 장인 어른이 몸져 눞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인을 찾아 노여움을 거두라 읍소를 하기로 했다.   아내 광주 안씨와 장남 상학,  차남 상문과 함께 포천 처가를 모처럼 찾았던 것이다.  보름전의 일이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찾아간 길이었다.  하지만 순암은 너무도 완강했다.

“뭐하러 왔는가? 시위하러 왔는가? 이렇게 떼로 물려 오면 내가 굽힐 줄 아는가?  너희들이야 말로 함께 삿된 길에서 나와 공맹의 본류에 다시 합류해야 할것이야.”

 서학을 그만두겠다고 댜짐하지 않기 전에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사랑문을 닫고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않했다. 장모인 창녕(昌寧) 성씨(成氏)부인이 딸 부부와 외손자들을 안채 안방으로 들이는 것  조차 역정을 내는 기색이었었다.   두고 생각 할 수록 사위의 절친인 기양에게 당한 봉변이 분한 모양이었다. 

각오를 하고 하고 찾아간 참이었기에 사랑 댓돌에 꿇어 앉은 채 역정과 수모를 다 받은 뒤에 사랑 출입을 허락 받았고,  밤을 새다시피 하며 장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에를 들어도 노인의 완강한 고집은 꺽을 수 없었다.

“군자 가 되어서, 실학을 아는 선비가 되어서 이땅 이 백성의 어려운 모습을 이대로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스승님.”

모처럼 스승님 으로 호칭했다.  (계속)

<위 사진  순암 안정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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