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 물색과 신앙의 신비”
정약용과 이총억,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다.
예산에서 올라온 일신과 승훈이 임시 탁덕 물색을 위해 한양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정약용이었다.
두 사람은 정산 이병휴의 권고에 따라 나이 든 기성세대 못지않게 젊은 인재들을 중점적으로 규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천진암 강학 성원, 명례방 성원 가운데 막내 급으로는 정약용과 이총억이 있었다.
그때 정약용은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진작 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귀농이 자네는 천주학을 어떻게 생각 하는가?”
“무슨 말씀인지 숙사, 어떻게 생각 하다니요, 그렇게 물으시니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질문이 요령부득이기는 했다.
“천주헉의 가르침이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묻고 있는 거 라네. 예를 들면 나와 만천은 이 나라와 백성을 살릴 가르침으로 보고 있어 이를 앞장서서 펼칠 탁덕단을 꾸리려 하는데…”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말한 셈이었다. 영민한 약용은 하나를 말하면 두셋을 넉히 알아 듣는 수재였다.
“그런 말씀 이셨군요, 저도 천주학이 수승한 가르침이고 우리의 앞길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의 뜻을 받들어 교종이 다스린다는 서양이 눈부신 과학 발전을 했고 앞선 무명을 자랑하면서 강력한 무력을 지녔다는 것은 인정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삶이 과연 그에 걸맞게 윤택한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가 는 정교 분리라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점에서 더 많은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되는데…불교라는 종교가 국정을 좌지우지 했던 고려조의 예를 보더라도…”
이때 만천이 나섰다.
“귀농이 들어 보게, 서양에서도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 있다고 들었네, 내가 만난 서양의 탁덕님들도 그곳은 불란서며 이태리 그리고 서바나 와 같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고 각 나라는 언어도 다르고 각자의 통치자 왕을 두고 있지만 각나라는 천주교의 교황, 교종을 높이 받들어 천주의 뜻을 실현 하고 있다고 하셨다네. 정치와 종교가 효율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얘기지. 아무튼 천주학은 백성을 살리는 가르침이라네”
“그 나라들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나요?”
“스테파노 신부님하고 필담을 나눠 본 바로는 서민들의 생활도 우리와는 천양 지차인 것 같았네, 매우 잘 살고 있다는 얘기야. 신부님은 어릴 때 부터 저녁이면 좌식 식탁에 주욱 둘러 앉아 부친의 인도로 식사 기도를 하고 포도주와 소고기를 먹었다고 하시더군.”
그 광경이 그려지는 듯 했다.
” 자신의 아버지는 상인이었지만 농사를 짓는 평민 들도 집도 있고 농토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군, 다들 저녁이면 기도를 올리고 정찬을 나눈다고 하셨다네’
“그곳도 아직 평민 귀족의 계급이 있기는 하군요?”
“그런것 같았어, 하인도 있는 것 같더군 하지만 우리처럼 엄격하고 혹독한 것 같지는 읺았네.”
귀농 정약용은 고개를 주억 이더니 골똘한 생각에 잠긴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약관의 그는 백성들의 살림살이 그리고 계급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근기 남인 실학의 대를 이어갈 동량다운 면모였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녹암 직암이 살던 양근의 옆 고을이었다. 아버지 정재원은 약용이 태어나던 그해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했지만다.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 화순 현감, 울산 부사, 진주목사(정3품) 등 외직과 호조좌랑등 내직을 지냈다.
본관은 압해(押海)였다. 전라남도 신안의 섬이지만 나주목에 속해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 아들 약현을 낳았고, 남씨와 사별한 뒤 둘째 부인인 해남 윤씨와의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약용은 4남 2녀 중 네번째 아들이었다.
부친은 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귀농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해남 윤씨)를 여의는 아픔을 겪는다. 4년 뒤 정재원은 5남매 자식들을 위해 동지중추부사 김의택(金宜澤)의 서녀인 스무 살 김씨를 측실로 삼았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말수가 적었지만 영민하고 천성이 부지런해 가족들을 화평케 했다. 가장 정재원이 10여 년간 지방관 생활을 했지만 워낙 청렴해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집에 시집온 서모 김씨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잘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았기에 측실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녀가 낳은 약용의 이복 동생들은 서녀 서자가 되어야 했다. 당시에는 재혼 까지는 용인 됐지만 삼혼은 불가였다. 서모를 맞을 당시 열두 살이었던 다산은 머릿니가 많았고 몸에 부스럼도 잘 났다. 그동안 그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과 불과 여덟 살밖에 차이 나지 않던 서모 김씨는 매일 같이 머리를 빗질 해주고 부스럼 때문에 생긴 고름과 피를 정성껏 닦아주었다. 자주 옷을 빨래하고 꿰매주는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으로 골목대장 귀농의 면을 세워주었다. 후일 다산이 유배가야 했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이었고 다산은 친모에게도 쓰지 않았던 그녀의 모지명을 장문으로 지어 주었다.
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영민했던 그는 네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일곱 살 때 시를 지었으며 열살 때는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
형 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사받았으나 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는 거의 독학을 했다. 외삼촌 이가환과 매형인 이승훈 그리고 사돈인 이벽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했고 유작을 통해서 사숙(私淑)했고 드리고 서학에 관심을 쏟게 됐다.
1776년 결혼하여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한양을 자주 드나들면서 성호의 학문을 더욱 밀도있게 접할 수 있었는데 같은 해 부친이 내직 벼슬을 하여 호조 좌랑이 되어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면서 이가환과 이승훈 그리고 이벽을 더욱 자주 만났다.
이시기 그는 두 형 약전, 약종과 함께 녹암의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 참여 했고 이벽의 열띤 지도로 천주학에 대한 남다른 소양을 지니게 됐던 것이다.
약용은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 한 후 과거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진사시에도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유난히 학문을 좋아하고 성균관을 중시했던 현 주상으로 부터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직암과 승훈은 약용의 이런 점을 고려하고 높이 사 그를 젊은 탁덕으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두사람은 천주교의 공인이 위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했다. 서양의 예를 보더라도 군주가 나서 천주교를 공인해야 실효가 있다는 것이 입증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주상이 유교적 기반이 탄탄한 학식을 지니고 있는 이 라지만 열린 사고의 인물이었기에 제대로 된 천주학의 가르침을 알게 된다면 마음을 활짝 열 것이라는 것이 직암과 승훈 두사람의 바람이었다. 정산도 그랬고 존창도 같은 의견이 이었다. 정산은 처음에는 약용은 빼달라고 했지만 그라면 실학과 천주학을 제대로 융합할수 있는 준재라면서 적극 추천 했다.
두 사람은 이런 모두의 바람을 약용에게 전했다.
“하겠습니다. 임시탁덕이 되겠습니다. . 숙사와 매형을 믿고 하겠습니다. 일단 성균관의 학우들에게 조심스레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성령을 믿고 증거 해야 한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약용은 천주 사상, 야소의 가르침에서 평등 사상과 자비 자애의 가르침은 어떤 것 보다 높이 평가 했지만 처녀 잉태와 사흘 부활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토로해 왔다. 직암과 승훈은 자신들도 처음에는 그랬다고 그를 다독였다.
약용 다음으로 만난 사람이 이총억 이었다. 이총억은 다산 보다 두살이나 어렸다. 다신은 62년생 총억은 64년생이다. 직암의 절친한 벗인 이기양의 아들인 그는 직암에게는 조카 사위이기도 했다. 장형 녹암의 셋째 딸이 그의 부인이었다. 천진암 강학의 막내였던 총억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는 이른바 신심이 투철했는데 신비 체험 성령 체혐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막내였지만 그는 돌격 대장이기도 했다. 명례방 을사 추조사건때도 일신과 함께 추조를 다시 찾아가 성상과 성화를 돌려 달라고 농성을 했을 때도 가장 앞장서서 목청을 높였던 사람이 총억이었다. 강학 성원들은 모두들 그를 친 막내 동생으로 여겨 아꼈고 총억 또한 의견을 내야 할때는 조리있게 그리고 범절있게 내곤 했다.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혈족과 인척, 동문으로 얽힌 구성이었다.
김원성은 철신과 일산 의 누이 안동 권씨의 사위이고, 권상학은 권일신의 장남, 이총억은 이기양의 맏아들이자 권철신의 사위였다. 정약전은 철신의 제자였고, 이벽은 약전의 형 약현의 처남으로 가까운 사돈이었다. 또 이승훈은 정씨 형제들의 친 매형이었고 이가환은 승훈의 외삼촌 이었다. 성호 이익의 외손자인 이윤하는 철신 일신의 매제였다. 1779년 당시 참석자의 나이를 보면, 권철신이 당년 44세, 권일신이 38세 이벽이 26세 이승훈이 24세 정약전과 김원성은 22세, 권상학은 19세, 정약용은 18세, 이총억은 16세였다. 모두들 연부역강의 나이 였던게다.
약용 못지 않게 문재에도 뛰어난 이총억은 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훨씬 전인 81년 쯤에 10계명가를 한글로 지어 강학 일동에게 선보여 이벽으로 부터 큰 찬사를 받기도 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