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허균의 평등사상과 승유천주 (勝遊天柱)
정산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네들 천주한 책 가운데 ‘게십이장’ 이라는 책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처음 듣는 서책 입니다. 조부님.”
승훈이 답했다.
“우리 만천이가 모르는것도 있네 그려.”
“ 허균 선생이 중국에서 책을 수천여 권 들여왔다는 얘기는 했지, 그 가운데 천주교 책도 있었다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천주학 그 서적이 바로 ‘게 12장’ 이었다고 하는 군. 어우당 유몽인 선생이 한 얘기일세.”
여기서 남인계 실학 선구자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 했다. 바로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이었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하던 시대에 이를 알고 ‘서학(西學)’이라는 말을 처음 붙힌 이가 바로 유몽인 이었다. 이수광(1563~1629) 그리고 허균(1569~1618)선생과 같은 시대 인물이지만 몇해 선배가 된다.
어우당(於于堂) 그는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한 문인이자 외교관이었다.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로 벼슬을 시작한 이래 병조참의, 황해감사, 도승지, ·대사간 등을 지냈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 외교를 맡았고 그 후에도 세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갈 때는 부사로 허균을 대동했다.
당색으로는 북인계 남인에 속하나, 붕당 자체에 회의적이어 서인, 남인, 북인들과 당파를 초월한 사귐을 가졌다. 일찍이 은퇴해 향리에서 저술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1623년 7월, 광해군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현령 류응형(柳應泂)의 무고로 인하여, 역모죄로 아들 류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현 주상이 등국한 그 이듬해 남인들의 주청에 의해 신원 됐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의정(義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산에 따르면 유몽인 선생은 자신의 저술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렇게 기록했단다.
“일본을 비롯한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들이 서교를 믿고 있는데도 유독 조선만이 알지 못하였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십이장(偈十二章)’을 얻어가지고 왔다”
“스승님과 내가 어우야담을 꼼꼼이 살피지 않았겠는가.”
성호 선생도 서학의 전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얘기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게십이장 (偈十二章)은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기도문을 말하는 것 이더군. 12단(十二端) 이라고도 한다는데…”
12단이라면 들은 바 있었다.
후일 직암이 확인해 본 결과 12단은 성호경(聖號經)ㆍ천주경(天主經)ㆍ성모경(聖母經)ㆍ종도신경(宗徒信經)ㆍ삼중경(三重經)ㆍ고죄경(告罪經)ㆍ소회죄경(小悔罪經)ㆍ영광경(榮光經)ㆍ천주십계(天主十誡)ㆍ성교법규사규(聖敎法規四規)ㆍ삼덕송(三德頌)ㆍ봉헌경(奉獻經) 등 천주교의 주요 기도문 들을 일컫는다.
“어우당 선생은 교산 허균이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 특히 게송들을 열심히 외웠다고 적고 있다네 자신이 했다는 얘기는 전혀 않고… ”
정산은 단순한 천주교 서적이 아니라 기도문이었다는 것에 주목 하면서 그는 분명히 서교를 학문적으로만 탐구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때 나마 이를 일상적으로 외우고 신봉했을 것이라고 추측 했다.
“불교에도 심취했고 한때 도가에도 빠졌던 만큼 평소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선생이 천주교의 기도문을 외웠고 문둑 특출한 경험을 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들 이상할게 없는 일 아닌가?”
정산의 설명은 이어졌다.
“그리고 을병 조천록이라고 허균 선생의 저술이 있다네, 거기서도 천주학에 심취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네”
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 은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기록한 사행록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 7년(1615) 9월 6일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향했다가 이듬해 3월 1일에 의주로 귀환해 3월 중 평양에 이르기까지의 행로에 지은 382수의 시들을 모은 기행 시집이다. 명나라에서 접한 다양한 문화와 사상, 특히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4백편 가까운 이 시들에서 허 교산은 유교의 성리학적 체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학문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단다. 특히 천주교와 관련된 서적을 접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여러차례 술회하고 있다고 했다.
조천록의 시 에는 천공(天公)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등장하는데 이는 ‘천주(天主)’를 뜻하는 것이다. 천주라는 단어는 그 직후 미테오 리치가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전에는 여러 문헌에서 ‘천공(天公)’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천공의 평등사상 , 천공의 자비, 천공의 박애등이 계속 나오는데 허교산이 주목한 것은 평등 사상이었다.
진작부터 평등사상을 지닌 허교산이 천주의 평등사상을 만나 고무 되고 감동을 했던 것인지 반대로 천주를 만나 평등사상을 갖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정산은 아무튼 허 교산 선생의 평등사상은 반드시 구현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의 시 중에는 천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인 주자가 아닌 기둥 주자로 돼 있다네.”
“勝遊天柱知難繼 승유천주지난계 ” / 천주의 즐거운 놀이는 잇기 어려울 듯하고 /
“이 구절은 허균이 자신 스스로도 천주교 사상에 대한 탄압이 있을 것을 예견 한 대목으로 받아들여 지는데 어떤가?”
직암과 승훈은 고개를 주억 거려야 했다.
“지봉 이수광 선생도 유설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나.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이 때문에 부박한 데로 흘렀고, 그의 글 때문에 그의 문도가 된 자들이 하늘의 학설을 외쳤는데 실은 서쪽 땅의 학(學)이었다. 그들과는 하늘과 땅을 같이할 수 없고 사람과 견주어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이가 많았다’고 하셨다네 ”
스승 성호도 이를 받아 교산 허균에 대해 이렇게 기록 했다고 정산은 들려 줬다. 자신이 집필을 끝낸 ‘성호사설’ 에 한자도 빠지지 않고 삽입 했단다.
“일찍이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 지도와 게십이장을 구해왔다. 일본의 남쪽으로 여러 달 배를 타고 가면 구라파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도가 있어 기리스도라고 하며 다른 말로 하늘을 섬긴다. 그 들에게 게십이장이 있으니, 불교도 아니요 선교도 아닌 다른 도풍을 세워 마음 쓰고 이를 행하며 하늘에 어긋남이 없게한다. 예수의 형상을 그려 그것을 받들어 섬기고 삼교(유ㆍ불ㆍ선)를 배척하기를 원수같이 한다는데.… ”
직암은 장인이자 스승인 안정복이 순암집(順菴集) 에서 말했던 바를 떠올렸다.
“서양의 책이 선조 말년에 동쪽으로 왔는데, 이름난 벼슬아치나 큰 선비들이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그것을 제자백가의 도교ㆍ불교 따위와 견주어 보면서 서재의 진귀한 것으로 갖추어 두고 있는데, 그것 중에서 취할 것은 상위(象緯, 대수), 구단(句腶, 기하)의 술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고금을 통하여 하늘의 학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중에서 옛적에는 추연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허균이 있었다.”
“허균 선생이야 말로 우리 남인 실학파의 비조 이자 자네들 천주학파의 비조 이기도 하다네. ”
그랬다. 현시점에서 천주학에 관심을 갖는 노론은 없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었다. 왜 그럴까.
실제 후일 노론계 실학파인 박지원도 연암집(燕岩集) 에서 이렇게 말한다.
“게십이장 이 있는데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것을 얻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서교가 동쪽으로 온 것은 아마 허균으로부터 시작되어 주창된 것이다. 지금 서교를 배우는 무리들은 허균의 뒤를 쫓는 무리들이다.”
역시 노론계 실학자인 이덕무는 이런 재밌는 말을 했다. 다른변에서 그토록 영민이들이 천주학은 폄훼 했다.
“허균이 처음 천주교의 책을 얻어가지고 와서 배우고는 말하기를 ‘남녀의 정욕은 곧 천성이요, 윤기의 구분은 성인이 가르친 것이다. 하늘이 성인을 내어 가장 높였으니 내 하늘을 따를 것이요 성인을 따르지는 못하겠다’고 하니, 그 천주를 믿는 조짐이 이에 나타났다.”
잠시 사이가 있었다가 정산의 남인 역사 정리가 시작 됐다.
“그런데 허균 선생을 암암리에 비조로 하는 우리 남인의 역사 만큼 기구한 역사도 없다네, 교산도 어우당도 역모로 처형도니 이후 얼마나 많은 우리 남인 선배들이 희생 됐는지 모른다네, 들어 보시게 ”
광해 , 인조시대를 거치면서 이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한 세력은 서인 계열 이었다. 남인들이 그 세력을 키우고 본격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은 현종대 이후였다. 이들은 두 차례의 복제(服制) 논쟁, 곧 1659년(현종 즉위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 1673년(현종 14) 갑인예송(甲寅禮訟)을 거치며 서인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견해를 제기했으며, 결국 그 연장선 상에서 숙종이 즉위하자 한때 정권을 장악했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늘 소수였다.
”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기해예송이었지.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에 대해 입어야 할 복제에 대해 서인들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3년복을 주장했다는 사실 기억하고 있겠지?”
서인들이 기년복을 주장한 근거는 효종이 자의대비에 대해 차자(次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남인들은 왕에게는 차장자제니 서얼금고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논쟁을 계기로 서인을 압도할 수 있는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한때 정국을 이끌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허적의 아들 허견의 역모 사건으로 권력을 잃었다(庚申換局). 이때 허적·윤휴·이원정·이하진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당파간의 정권 교체, 이른바 환국이 격렬하게 진행되는데, 남인들은 1689년(숙종 15)에 다시 권력을 차지했다가(己巳換局) 1694년 장희빈 사사 등과 함께 서인들에게 권력을 잃어 완전히 실각하게 된다. (甲戌換局).
실각한 남인 처벌 문제로 서인이 다시 분열한다. 강경파가 ‘노론’, 온건파가 ‘소론’으로 나뉜다. 소론은 경종, 노론은 연잉군를 지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영종은 탕평을 추구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긴 했지만, 노론이 더 우세했다. 노론은 사도세자 처리의 정당성 문제로 다시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된다.
정산은 스승 성호의 붕당론으로 도학 정치에 대한 결론을 냈다.
“스승님께서는 이른바 붕당은 결국 쟁투(爭鬪)에서 일어나고 쟁투는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셨네 . 또한 이해가 절실하면 그 당이 뿌리깊고, 이해가 오래 계속되면 그 당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세(勢)가 그렇게 만든다는 말씀이지. 그러면서 도학이 아닌 실학을 바탕으로 쟁투를 해야 한다고 하셨네.”
붕당으로 이어진 도학정치가 상호 견제라는 순기능으로 조선조를 지탱해 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이었다.
“정치에 있어, 정치 하는 조야가 도학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굴복 시키려 하기에는 현실의 물적 토대, 다시 말해 나라의 곳간이며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너무 궁핍하고 빈곤하다는 말씀 이셨다네. ”
현실을 직시한 탁견이다. 냇물이 강을 이루고 다시 바다에서 모이듯 남인의 실학은 성호에게 모이게 됐던 것이다.
“자네들의 천주학이 우리 근기 남인들의 실학을 완성하는 한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내 자네들을 적극 인정하고 돕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네, 성호 스승님의 가르침을 행여라고 잊지 말라는 이야기 일세.”
정산은 두사람의 손을 잡으며 눈믈 까지 글썽이며 두 사람에게 성호의 사상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직암은 그런 정산 이병휴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큰 스승이 되는 성호의 모습을 보았다.
근기 남인 실학의 종주 성호 이익은 넓은 학문을 지닌 지성인 동시에 사람을 아량과 편안함으로 대하는 넉넉한 인품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작고 누추했던 그의 문전에 배움을 청하는 학인(學人)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경기 안산 첨성리는 한 시대가 주목하는 학술문화공간이 되었고, 성호의 집인 성호장(星湖莊)에 딸린 육영재(六楹齋)는 성호학파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직암 권일신은 지금도 장인 안정복의 이익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의 술회를 기억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그때 (1746년) 학문에 대한 목마름으로 성호를 찾은 순암은 성호의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방에 들어가 선생께 절을 올리니, 일어나서 답례하기를 매우 공손히 하셨다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통 사람보다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사람을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우면서도 온화한 그런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네 .”
그때 순암은 젊은 손님을 대하는 성호의 공손한 모습에서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형형한 눈빛을 보았고, 이에 감동하여 학문 인생을 성호에게 믿고 의탁했단다.
제자로 갓 입문한 순암이 받은 저녁상에는 그릇에 다 차지 않은 밥에 새우젓 한 접시와 나박김치가 전부였지만 성호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호는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는 방법을 설명했고, 이때 순암의 가슴에는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피어올랐단다. (계속)